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의사가 능력을 가짐-84화 (84/145)

광란의 질주 01

<88>

2001년 11월 22일 목요일 아침.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침 회진 시각이 끝난 뒤 바삐 움직이다가 문득 스테이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작은 달력을 쳐다봤다.

현재, 연계 미션이 한참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특성 [은밀한 수술자(S)]의 유효 기간은 내일 자정까지.

그러나 여전히 변화가 없었고.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지지만, 호기심도 자연 커지게 된다.

특히, 윤 실장의 움직임에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미션 유효 기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참, 이럴 게 아니라 한번 확인해 볼까?

잠시 후, 나는 시간을 내서 윤 실장이 알려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한참 신호음이 가더니 뒤늦게 윤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선생님, 죄송합니다. 전화를 늦게 받았네요. 말씀하세요.”

“아, 혹시 병원이신가요? 소음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바깥입니다.”

바깥?

“일이 좀 있어 잠시 나왔습니다. 잠시만요.”

그러고는 ‘서울 성국대 병원으로 가 주세요’라는 말이 들렸다.

택시를 탄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지금 택시 타고서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병원에서 잠시 뵙는 건 어떨까요? 잠깐 드릴 말씀도 있긴 한데.”

“선생님, 시간은 되세요?”

“어디서 출발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30분 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30분 후에 다시 수술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시구나. 근데 어떡하죠? 지금 인천에서 출발하는 건데.”

인천?

나는 의아해했다.

아침 일찍 인천으로 갔단 말인가.

그런데 거기서 택시를 탔다는 건, 30분 이내에 병원에 도착할 수가 없다.

“그러시다면, 혹시 오후 4시쯤 어떨까요? 수술 끝나고 정리하면, 그때 시간이 좀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근데 어떡하죠?”

또 무슨 일일까.

“병원에 들러 아가씨 좀 뵙고 점심 무렵 일이 있어 또 나가 봐야 합니다. 거긴 미팅이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럼 실장님, 언제 오십니까?”

“거기서 미팅을 마친 뒤, 다시 오후 약속과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그걸 다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면, 아마··· 밤 9시쯤은 될 것 같습니다.”

밤 9시?

대체 왜 저렇게 바쁘지.

그러나 내가 윤 실장의 일에 뭔가 간섭할 수도 없다.

다만, 연계 미션의 유효 기간이 점점 다가오는 터라 조바심은 더 커지게 되었다. 하필, 이런 날, 윤 실장의 스케쥴이 무척 복잡해 보인다. 즉, 윤 실장과 관련된 변수가 생각보다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특성 유효 기간이 단지 오늘까지가 아니다. 내일도 남아 있다.

할 수 없이 나는 잠시 후 약간의 주의를 주기로 결정했다.

“윤 실장님, 혹시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잠시 조용했다가 윤 실장은 되물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다름이 아니라, 2002호실에 괴한이 침범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니까,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분간 주변 상황을 잘 살피면서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밝은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걱정까지 해 주시고! 알겠습니다! 주의해서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도착하는 대로 연락 드릴게요.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전화는 끊어졌다.

#

하, 어떡하지?

윤 실장이 갑자기 바빠지고 있다.

시스템 미션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점점 더 급격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근데 문제는 나한테도 있다.

수술 스케쥴이 있다 보니 서로의 스케쥴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이 없다.

어떤 식으로 위험이 나타날지 어떤 식으로 문제가 생겨날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

그렇다고 수술을 내팽개치고 윤 실장을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 봤다.

시스템 미션.

이건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들을 항상 예고하고 있다.

분명 윤 실장에겐 뭔가 사건이 생길 것이다.

어떤 식의 사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필연적일 것이다.

특히, 하나를 보게 되면 열을 알게 된다고, [사신의 낫] 특성만 살펴봐도 그런 예측이 가능하다.

[사신의 낫(B)]

[예고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을 회피하는 순간 새로운 죽음의 저주가 주어집니다]

[사신의 낫(A)]

[예고된 죽음을 피하고 싶습니까? 아직 당신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는 순간 새로운 죽음의 저주와 싸워야 합니다]

그렇듯 시스템 미션 역시 세상과 고리처럼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발버둥 치며 또 막으려고 해 봤자, 결국 일어날 일일 테고.

더군다나 인턴 일들이 바쁜 내 입장에선 그런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윤 실장에게 내 비밀(?)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문제가 터져야 해결책이 나오게 될 것이다.

우선은 기다리는 수밖에.

다만, 어떤 문제가 생기든 반드시 윤 실장을 구할 것이다.

#

그로부터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는데.

어느덧 오후 4시 무렵.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흉부외과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한낮 스테이션의 모습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인데.

한편, 내가 나타나자 치프 김재호 선배가 즉시 나한테 손짓했다.

“야, 정민아.”

“네?”

내가 즉시 다가가자 김재호 선배는 이때 뜻밖의 말을 꺼냈다.

#

“수술은 잘 끝났지? 야! 지금 스케쥴 표 보니까 지금 빈 시간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저녁에 출장 좀 다녀와야겠다.”

“네? 어떤 출장 말씀입니까?”

“대구병원인데, 심장공여자가 나올 거라고 코디네이터한테서 연락받았어. 시간 맞춰 구득팀(적출팀) 꾸려서 들어가야 돼.”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지금 연계 미션 때문에 계속 그쪽에 신경이 쓰이는데.

난데없이 뜻밖의 일이 생긴 것이다. 하긴, 병원 일이란 게 항상 그렇긴 하지만···.

“그럼 대구 병원에?”

“그래. 시간 맞춰서 내려가야 돼. 너도 잘 알지? 박예나! 그 애 부모님이 지금껏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너도 잘 알잖아. 혈액형이나 이것저것 다 맞아서 운 좋게 순번이 됐어. 심장 사이즈도 비슷하고.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이곳저곳 병동을 돌다 보면 이런저런 환자들을 다 만나게 되는데, 무척 안타까운 환자들도 그때 만나게 된다.

그 중의 박예나도 그런 환자다.

현재 9살인 여자아이.

초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원인불명의 급성심근염 진단을 받았다.

이후 확장형 심근증 진단까지 추가로 받았다.

이런 확장형 심근증은 심장 근육을 이루는 세포와 조직에 특이한 변형이 생기는 것인데, 심장 조직이 점점 얇아지면서 심장 크기가 갈수록 커지게 된다. 이때, 심장 근육 탄력이 크게 상실되면서 심부전증을 동반한 심장 기능 저하 문제가 발생되며 환자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의학에서 이런 비가역적인 질환에 대한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원인불명이 원인이기 때문에 합당한 처치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상황이 악화되면, 공여자로부터 심장을 받아 그 심장을 이식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래서 현재 바드(ventricular assistant device, VAD)를 달고 있는 박예나 역시 그런 상황이었다.

오로지 심장 이식만을 기다리는 그런 절박한 상황.

“그럼 구득(적출) 팀은 언제 내려가려는 겁니까?”

“공여자가 뇌사 상태인데 아직 인공호흡기를 안 떼고 있어. 공여자 생일이 하필 오늘이라서 오늘까지 인공호흡기 유지하다가 자정 지나서 떼기로 했대. 그 전에 내려가서 혹시 모르니까 구득팀은 대기하고 있으면 돼.”

“그럼 공여자 나이가?”

“그래. 비슷한 나이야.”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콧등이 찡해지며 움찔하고 말았다.

어떤 아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상태가 된 거고.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의 심장을 받아 소생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닉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현재, 바드를 달고 두 달 넘게 버티고 있는 박예나. 그 아이한텐 소생할 기회가 주어져 무척 기뻐해야 할 상황이지만, 다른 아이의 부모는 아마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런 상황이었다.

“저녁 7시쯤 출발한다니까 대기하고 있어. 시간 나면 저녁은 알아서 챙겨 먹고.”

“근데, 누구누구 갑니까?”

“펠로우 양종규 선생하고 너, 이렇게 두 사람. 이번엔 체외순환사(perfusionist) 간호사 선생님과 코디네이터 선생님도 그 차량으로 같이 출발할 거야.”

그러니까 김재호 선배는 이번 구득팀(적출팀)에서 빠진다는 말이다. 하긴, 김재호 선배는 야간수술 일정이 잡혀 있다.

“네! 알겠습니다.”

“뭐 저번에 해 봤으니까 잘 알지? 양종규 선생이 적출할 때 어시만 잘 하면 되니까, 크게 문제없을 거야.”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참! 너 좀 있다가 컨퍼런스 들어가야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컨퍼런스 끝나면, 박윤후 교수님한테 바로 가 봐.”

“네? 박윤후 교수님은 왜요?”

“오후 5시 30분! 꼭 기억해. 박 교수님, 그때 교수실에 계실 거라고 하니까.”

“무슨 일이죠?”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연락만 받았어.”

그러고는 김재호 선배는 등을 돌려 스테이션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흉부외과 수간호사 김정옥 선생과 뭔가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잠깐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는 얼른 움직였다.

컨퍼런스 참석, 박윤후 교수님 호출, 대구 병원 출장.

그렇듯 일들이 갑자기 많아지고 있었다.

#

그로부터 시간은 또 빠르게 지나갔고.

컨퍼런스 참석을 마친 나는 호출 시각에 맞춰 박윤후 교수님의 사무실 앞에 서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즉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나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칠 뻔했다.

박윤후 교수님의 사무실에 서철성 교수님 외에도 여러 교수님들이 와 있었고.

그 바람에 나는 당황한 것이다.

“교수님,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나가려고 하자, 박윤후 교수는 날 제지했다.

“이봐, 김 선생. 그냥 들어와.”

“네?”

나는 당황하며 오히려 반문했다.

내가 저기 들어가서 앉을 수 있는 자리인가.

나이 드신 교수님들이 저렇게 많이 앉아 있는데.

그런데 이때, 서철성 교수님이 나한테 손짓했다.

어서 들어와 한쪽 자리에 앉으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이곳 교수실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다.

긴 소파가 양쪽으로 놓여 있고.

사무용 데스크는 좀 더 안쪽, 창가 쪽으로 들어가 있다.

이곳 공간을 좀 더 넓게 쓸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딱 봐도 여러 사람들과 회의하기가 무척 좋아진 모습이다.

어쨌든 나는 가장 바깥쪽 소파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렇듯 내가 자리에 앉자, 중앙 상석에 앉아 있던 박윤후 교수님은 좌우를 한번 쭉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새로운 보직 인사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12월 초순경에 있을 겁니다. 그 전까지 예비격 성격이라, 비록 조촐한 자리지만 이곳에서 주로 회의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 오늘 여기,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분들은 앞으로 저와 함께 향후 4년간 성국대 병원을 이끌어나갈 주요 보직자 교수님들입니다. 자세한 소개를 하기 전, 오늘은 특별히 인턴 대표 격인 김정민 선생도 여기에 모셨습니다. 인턴, 레지던트의 권익 향상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 있겠죠. 또한, 오늘은 첫 회의니까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대략 한 시간 정도만 회의하고, 바로 저녁 드시러 가시지요. 참, 김정민 선생! 저녁 식사는 가능한가?”

서철성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의 시선이 이때 나한테 집중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녁 7시에 다른 스케쥴이 있어 식사가 힘듭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박윤후 교수.

그때부터 그는 예비 보직자 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