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질주 02
<89>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 뒤.
“그럼 다음 회의는 사흘 뒤에 진행하도록 하죠. 특히, 오늘 토의 중에 나온 안건들에 대해선 최 교수님께서 일괄적으로 정리 좀 해주시고. 서 교수님께서도 추후 논의가 될 부분들만 따로 검토해 주십시오. 다음 회의 땐 자유 토의에서 벗어나 각 현안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까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인턴 대표로 나와, 인턴, 레지던트의 수련 환경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신 김정민 선생한테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자, 자, 그럼 여기서 정리하고, 20분 뒤 1층에서 뵙도록 하지요.”
한 시간 남짓 이어지던 예비 보직자 회의. 그 회의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이때, 주요 안건으로 나온 것은 교수, 간호사, 레지던트, 인턴 등, 병원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다.
직원화장실, 직원샤워실, 직원휴게실, 숙소 등, 병원 종사자들과 관련된 각 시설에 대한 확충 및 개선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외에도 야간수술 및 응급수술 관련 특별 수당 책정 및 인센티브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나왔으나 타 병원과의 형평성 때문에 쉽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또한, 노후화된 각종 진단 및 치료 기기들을 서둘러 폐기하고 최신 기기로 교체하는 작업에 대한 의견들도 여러 갈래로 흘러나왔다.
그렇듯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년 1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박윤후 신임 부총장과 그의 새로운 집행부가 기존 집행부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회귀 전에 내가 겪었던 박윤후 교수의 병원장 재임 중에는 병원의 모습이 별반 바뀌지 않고 별다를 게 없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회의가 말뿐인 잔치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은근히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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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잠깐만!”
한편, 회의가 끝난 뒤, 주요 보직자들이 인사를 하고서 그곳을 나갔는데. 나 역시 함께 나가려고 할 때, 박윤후 교수님은 날 황급히 불렀다.
내가 멈칫하며 다가서자, 박윤후 교수님의 옆에 서 있던 서철성 교수님이 나한테 반대편 소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김 선생, 저기 좀 잠깐 앉지.”
그러고는 서철성 교수님이 문 쪽으로 가서 사무실 문을 꼭 닫고 돌아왔다.
아, 이런!
내가 닫았어야 했는데.
교수실 문이 그렇게 닫혔고.
박윤후 교수, 서철성 교수, 나.
이렇듯 세 사람은 그곳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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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우리 서 교수가 이제 힘이 대단해. 내년 1월부터 진료부원장을 맡기로 했거든.”
그 순간, 나는 회귀 전 기억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벌떡 일어났고 머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교수님!”
그러자 어색한 미소를 흘리는 서철성 교수님.
“하하, 하하하! 앞으로 수술도 하겠지만, 그리 많이 수술에 들어가진 못할 거야. 더 중요한 일을 우리 서 교수가 해 줘야 해서 말이야.”
그러면서 회의 때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러니까 이번 진료부원장은 아주 파워가 좋지. 향후 암센터, 혈관센터, 심장센터, 외상센터 등, 신규 주요 센터들에 대한 미래 비전과 인적 구성을 소신 있게 짤 수 있고, 센터 보직자 선임 추천권도 주어질 거야.”
그러니까 서철성 교수님이 원하는 대로 센터 구성이 가능하게 됐고, 향후 센터 비전 설정에도 서 교수님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법인 이사회 추인 과정이 뒤따르겠으나 그럼에도 상당한 파워를 갖게 됐다는 말이다.
“근데, 내가 왜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혹시 아나?”
그러면서 박윤후 교수는 날 빤히 쳐다봤고, 나는 그저 의아해져 마주 쳐다봤다.
그런 내 모습에 박윤후 교수는 피식 웃다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 자네 부친께서 자네한테 뭔가 따로 말을 전하지 않았나 본데?”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갑자기 아버지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하며 즉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박윤후 교수님이 아버지를 언급하는 걸까.
“말을 빙빙 돌릴 필요는 없으니까 바로 말하겠네. 현임 부총장도 그렇고, 나도 전해 들었지만, 자네 부친이 김윤상 의원인 건,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네.”
그러고는 박윤후 교수는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나는 얼굴이 좀 가려웠다.
예전에 최수호 환자 때문에 생긴 인연. 그 인연 때문에 대현물산 최상호 사장 가족들과 식사를 하게 됐고, 당시 박윤후 교수는 내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그때, 나는 얼버무렸고 제대로 말하지 않았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 보니 좀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자네가 워낙 뛰어나서 궁금함이 많았는데 아버지를 똑 닮은 모양이네. 4선 국회의원 김윤상 의원! 어쨌든 대단하신 분이지.”
“근데 교수님, 저는 정치 쪽은 잘 모릅니다. 정치 쪽과는 완전히 무관해서.”
이때 나는 가감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박윤후 교수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저번에 김 의원께서 우리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때 현임 부총장을 뵙고 갔네. 그건 자네도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재계 20위권 상문그룹 서정국 회장의 회갑연, 그곳에 날 데려가려고 하던 아버지는 그런 생쇼(?)를 벌인 거였다.
다만, 그때 병원 주요 보직자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박윤후 교수는 간단히 설명했다.
“자네 부친께서 그때 우리 병원에 큰 제안을 했네.”
큰 제안?
“원래 신규 센터 설립안에는 외상센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네. 우리 병원 응급실 체제에서도 어느 정도 외상 환자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구태여 외상센터까진 생각하지 않았네. 그런데 김 의원께서 외상센터와 관련하여 다양한 국가 예산 지원을 받아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때문에 새로운 신규 센터 설립안에 외상센터까지 들어가게 된 거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제안을 그가 했기 때문이다.
외상센터라니?
하필 외상센터를?
불현듯 이상한 느낌도 생겨났다.
“참! 법인 이사님들과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하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다 들었네. 근데, 특히 자네 모친과 동생이··· 꽤 오래전에···.”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뜻밖의 사람들이 박윤후 교수의 입에서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경악했고.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좀 전에 떠올랐던 그 이상했던 느낌, 그게 바로 이거였던 것이다.
외상센터와 나의 가족.
뿌득!
나도 모르게 이를 질끈 악물었다.
만약 내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불타는 듯한 내 눈동자를 박윤후 교수는 보게 됐을 것이다.
“아아, 잠깐, 잠깐만! 이게 그냥 쉽게 말할 게 아니었군. 미안하네. 좋지 못한 일인데···. 흠, 외상센터에 대해 말하려고 하다 보니까 괜한 이야기를 꺼냈어.”
다행히 박윤후 교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단번에 내 마음을 눈치채고서 그는 그렇게 말했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외상센터의 설립 목적은 확실하네.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본분을 지키며, 수많은 외상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 결국, 의료 최일선에 서는 거네. 그런 점에서··· 지금 자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근데 그 외상센터에 자네 부친께서 개인 자격으로 10억 원의 발전 기금을 내겠다고 했네. 절대 적은 돈이 아니지. 그래서 서 교수와도 논의를 많이 했네만, 자네가 지금처럼만 계속해준다면 앞으로 그 외상센터를 자네한테 맡기고 싶네.”
“네?”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며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여긴 사기업이 아니다.
재단이 따로 있는 데다가, 이곳은 교육부의 각종 감사도 신경 써야 하는 그런 학교이자 비영리 병원이다.
그런데도 주요 센터를 나한테 맡긴다고?
이건 그 자체로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그러자 박윤후 교수는 좀 더 설명을 보탰다.
“본래, 외상센터는 일반외과 분야, 즉 간담췌외과 등, 각종 외상 치료 분야에 집중되겠지만, 우리 흉부외과 역시 이쪽과 관련성이 아주 크네. 그래서 자네가 향후 꾸준하게 병원 일을 한다면, 앞으로 5년 뒤 혹은 6년 뒤 자네가 교수직을 잡을 때 내가 최대한 도와주겠네. 이후, 외상센터 일을 좀 맡다가 때에 따라선 센터장까지 겸임하면 될 것 같고. 아!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현임 부총장도 그렇고 나 역시 같은 의견이네. 어떡하든 자네한테 뭐든 베네핏을 주고 싶어. 그건 서 교수도 동의하지?”
갑자기 화살이 자신한테 날아오자, 서철성 교수는 슬쩍 날 쳐다본 뒤 즉시 대답했다.
“저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김정민 군이라면, 무조건 잡아 앉히는 게 맞습니다. 그걸 못한다면 그게 바로 출혈입니다.”
서철성 교수의 그 단호한 말에 박윤후 교수님은 이내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고.
박윤후 교수는 다시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가? 그래서 자네는 그 외상센터에 대해 관심은 있나?”
“그게··· 교수님! 근데 저는 아직···(인턴인데요).”
이때, 나는 ‘인턴인데요’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했다.
그러자 박윤후 교수는 슬쩍 손을 저었다.
“참! 너무 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좀 더 미래의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 외상센터 설립 과정에서 흉부외과 부분을 좀 더 많이 넣을 생각이네. 그리고 그 설계안을 바탕으로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간의 교차 파견 근무 같은 것도 가능하게 할 생각이네. 뭐, 전공 간 파견 근무가 불법도 아니니까.”
점점 더 구체화되는 외상센터 설립안.
그러고 보면, 훗날 흉부외과 출신 의사들이 외상센터 센터장을 맡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는가.
왜냐하면, 외상 환자들 중에는 흉부 쪽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환자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흉부외과는 정말 다양한 전문 센터 분야(폐암, 혈관, 심장 등)에 붙일 수 있는 정말 매력적인 전공이다.
다만, 문제는 흉부외과 의사 자체가 그냥 무조건 고달프다는 것이다. 개인 생활을 좀처럼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바빠서 말이다.
“자, 그럼!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이제 일어서지. 당장 결론낼 일도 아닌데. 참! 김정민 선생! 이것도 처음 들었는데,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며?”
그 순간, 나는 다시 흠칫하며 박윤후 교수를 쳐다봤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신임 부총장이 되더니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아지신 모습이다.
사실, 내 가슴 쪽에는 아직도 개흉술 흔적이 남아 있다. 아주 심각했던 심장 수술의 흔적. 과거, 나는 어레스트 상황에서 살아났던 것이다.
그런데 징병 신체검사 당시, 그런 내 모습은 시선을 끌었고. 당시에 앓고 있던 몇 가지 질병과 합쳐지면서, 결국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
“···흠, 어쨌든 김 선생한테 우리 기대가 크니까 우리 병원을 위해 앞으로 많이 노력해주게.”
잠시 후, 대화를 모두 마친 나는 박윤후 교수님과 서철성 교수님께 인사했고.
그러고는 그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났다.
왜냐하면, 어느덧 저녁 7시가 가까워졌기 때문.
구득(적출)팀이 저녁 7시에 출발하기로 한 터라 나는 그 전에 신속히 저녁을 먹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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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로부터 10분 뒤.
나는 후다닥 뛰어서 본관 1층을 가로질러 갔다.
잠바를 입고, 이것저것 대충 들었고.
또한, 입에는 큼직한 빵 하나를 그냥 구겨 넣은 상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직원 전용 식당으로 가서 식사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흉부외과 탕비실 냉장고에 있던 공용 빵 한 개를 한 번에 입에 넣은 것이다.
그러고는 나는 정신없이 뛰어, 병원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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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오네.”
펠로우 양종규 선생.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 발견하고는 바로 손을 흔들었고.
이때, 나는 좀 더 빨리 그쪽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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