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하 선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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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응급실 조은하입니다. 윤정화 선생님 좀 바꿔주세요! 아뇨. 윤정화 선생님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급한 건이라, 바로 대화해야 합니다. 수술 안 들어가신 거 아니까, 바로 콜해서 연락주시든지··· 네. 그럼, 좀 기다릴게요.”
그러고는 잠시 뒤.
신경외과 치프 윤정화 선생과 다시 통화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저 역시 상황을 확인했고, 저희 김정민 선생이 환자한테 애착을 갖고서 2차 검사까지 진행했습니다. 아뇨! 지금 당장 신경외과 병동으로 환자를 넘기겠습니다!”
그렇듯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조은하 선배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쪽 선생님들부터 빨리 응급실로 내려 보내주세요! 보호자 동의도 받았고요. 선생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아니라고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도대체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죠? 아니, 이젠 사적인 거와 공적인 것도 구분 못 하세요? 네! 맞아요! 제가 후배인 건 맞습니다. 근데 환자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야아!! 너 어디서 욕설이야! 선배면 다야! 그래, 내려와! 여긴 응급실이야! 그래! 내려오라고!!”
그리고 그 순간, 전화기가 갑자기 부서지는 줄 알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전화기를 내려치는 조은하 선배.
그 옆에 서 있던 나는 잠시 머리가 띵해졌다.
사실, 조은하 선배가 한 터프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보통 때는 조용조용하다가, 한순간 폭발하고 마는 조은하 선배.
그리고 그런 성미 때문에 과거, 인턴 점수가 나빠졌고. 결국,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외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성미를 죽이지 못하고 신경외과 치프한테 저렇게 대들고 나면, 앞으로 병원 일이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굴하지 않은 아주 당찬 모습이었다.
“선배님, 저 때문에 괜히···.”
이때 길게 숨을 내쉬며 진정하던 조은하 선배는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윤정화 선생 내려오기로 했으니까 뇌 CT 결과 준비해두고. 그때 넌 무조건 모른 척해. 내가 시켰다고 하고.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네?”
“모른 척해. 김정민 선생은 괜히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어. 원래, 미친년은 미친년이 상대하는 거야.”
그러고는 조은하 선배는 김춘식 환자의 베드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와! 진짜 세다! 조은하 선배!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지르면서도, 한편으론 묘한 느낌이 들었다.
험한 일이 있더라도 항상 먼저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는 흉부외과 김재호 선배.
그 선배와 같은 면모가 저 조은하 선배한테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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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잠시 뒤.
드디어 2차전이 시작되었다.
두 눈에 독기를 품은 윤정화 선생이 레지던트 1년차 민아영 선생과 함께 매서운 겨울바람인 듯 응급실에 들이닥쳤고.
이때, 응급실엔 여러 환자들이 많다 보니, 윤정화 선생과 조은하 선배는 응급실 바로 옆,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곳에선 아주 격렬한 언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다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 그 회의실을 찾았던 응급의학과 과장 박기영 교수와 김상희 교수.
그들 교수들은 소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크게 분개한 박기영 교수.
그는 즉시 신경외과 과장 이진석 교수한테 항의 전화를 넣게 되었다.
보통, 응급의학과는 타 진료과에 항상 부탁하는 입장인 데다가, 현시대 기준으로 보면 ‘돈 먹는 하마’ 진료과로써 병원의 눈치를 가장 많이 보는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응급의학과는 새로운 환자들이 들어오는 통로와도 같은 곳이며 응급의료의 최전선에 있는 그런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신경외과 치프라고 해도, 일개 레지던트 과정이 자기 마음대로 환자 트랜스퍼를 거부할 수 없다.
물론, 인턴을 대상으로 단순히 짜증을 내다가 일이 그렇게 번지게 된 것이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윤정화 선생은 한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소식이 신경외과 한정미 교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이 더 꼬이게 되었다.
현재, 한정미 교수는 차기 신경외과 과장 자리를 놓고서 박희경 교수와 알력이 있는 상태.
그 박희경 교수의 라인에는 윤정화 선생이 들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사안 자체가 그리 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이 더 커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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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복잡하게 흘러갔고.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하는 초겨울의 저녁 7시 무렵.
“김정민 선생!”
“네?”
“나가자. 담배 피지 않을래?”
조은하 선배는 손짓하며 앞장섰고.
스테이션 한쪽 모니터 앞에 앉아 환자 차팅을 하던 중,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응급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잉! 불어오며 내 얼굴을 때렸다.
으으으.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주 차디찬 바람.
의사 가운 사이로 파고들었고.
헐렁한 수술복 속으로도 스며들고 있다.
“춥지 않으세요?”
“난 괜찮아.”
앞장서서 걷는 조은하 선배.
바람에 의사 가운을 팔락거리며 그녀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면, 이곳 응급실 위치는 그녀의 주된 흡연 장소와 거리가 너무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 밤마다 조은하 선배는 애연가가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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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김춘식 환자, 잘 넘겼지?”
“네. 한 시간 전에 3층 중앙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조은하 선배.
앞서, 윤정화 선배와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이곳저곳 불려 다녔던 조은하 선배.
이후, 컨퍼런스 참석 때문에 잠시 응급실을 벗어났던 그녀는 어느덧 해가 저물자, 다시 응급실에 복귀한 상태다.
“근데 수술은 잘 되겠지?”
“네. 잘 될 겁니다.”
“김정민 선생이 고생 많았는데, 수술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닫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별로 한 게 없습니다. 검사만 다시 한 것뿐인데. 선배님 도움이 컸습니다.”
“내 도움? 나야 뭐, 싸운 것밖에 없는데···. 김정민 선생같이 환자한테 애착을 갖는 게 더 중요하잖아. 그래서 지금은 더 죄송스러워.”
“네?”
“그 환자한테 말이야. 그 베드를 볼 때마다 아침부터 마음이 쭉 안 좋았거든. 그래도 잘 돼서 다행이야. 한정미 교수님께서 결국 집도한다고 하시니까 그나마 잘 된 거지. 참! 그 환자도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네! 의식 불명 상태인데, 그렇게 버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 걸 보면, 참 신기한 것 같아. 응급실에선 그런 사람들이 많거든. 아무리 용을 써도 돌아가실 분도 그냥 사망판정이 나고. 수술 동의서 때문에 저렇듯 방치된 상태에서도 계속 버티신 분들도 계시고. 김춘식 환자는 무조건 살아날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나는 [사신의 낫(A)] 특성이 계속 발동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김춘식 환자의 얼굴에서 사자(死者)의 징후를 전혀 보지 못했다.
누가 봐도 위급한 상황인데, 그럼에도 김춘식 환자는 죽음과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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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쓰레기통 근처, 구석진 곳에 서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다.
그러고는 가볍게 쭉! 담배 연기를 흡입했다가 다시 연기를 뱉어냈다.
그 순간, 하얀 담배 연기는 허공에서 흩어졌고.
겨울바람과 함께 아직 설익지 못한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근데 괜찮을까요?”
“뭐?”
“한정미 교수님이 나선 거요.”
“왜?”
“요즘 NS(신경외과)에 문제가 많다고 하잖아요. 차기 과장 자리 때문에 교수님들 간에 알력도 심하고 또한 다툼도 많아진다고 하고.”
“근데 그게 우리랑 상관없잖아? 아! 아니지. 다음 달에 NS 턴이지?”
“네.”
“그럼 일이 좀 꼬일 수도 있겠다. 근데,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은데. 아까 김춘식 환자 디스커션 때 보니까, 한정미 교수님이 너한테 호감이 많이 있던데?”
노련한 한정미 교수, 그녀는 치프 윤정화 선생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에 즐거운 듯 응급실을 황급히 찾아왔다.
거기다가 아침에 김춘식 환자의 결과를 보고서 수술 거부 의사를 보였던 교수들 중의 한 명이 자신의 경쟁자인 박희경 교수란 걸 알게 되자 더 적극적으로 수술 참여 의사를 드러냈다.
특히, 한정미 교수는 수술의 이점과 위험성에 대해서 꼼꼼하게 따져봤고.
이후, 김춘식 환자를 자기 담당 환자로 받은 뒤 스케쥴 조정까지 하면서 응급 뇌수술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근데, 한정미 교수님과 별개로, 박희경 교수님이나 윤정화 선배님이 절 많이 싫어할 것 같은데요?”
이때, 담뱃재를 톡톡 쳐서 털어낸 뒤 조은하 선배는 날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걸. 한정미 교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잖아. 아주 정치적인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기회를 포착했는데 가만히 있겠어?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네? 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어쨌든 한정미 교수님 라인에 붙은 거처럼 보이잖아.”
“네? 저는 전혀 아닙니다!”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다들 한동안 한정미 교수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거야. 괜한 시비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을 거고. 특히, 이번 수술이 성공하면 더더욱···.”
“정말 그럴까요?”
“내가 봤을 때, 한정미 교수님은 수술 끝나고 바로 움직일 것 같아. 병원 전체에 소문이 나는 것도 금방이겠지. 위급한 환자를 어찌어찌 미룬 게 문제가 아니라, 환자 진단도 제대로 못 하는 무능한 교수(박희경 교수),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하는 위험한 치프(윤정화 선생), 이렇게 소문이 날 수도 있어.”
맞아. 그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우연히 김춘식 환자의 상태를 알아차렸으나.
결과적으로 신경외과 차기 과장 자리를 노리는 한정미 교수한테 아주 유익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김춘식 환자의 수술도 오히려 쉽게 성사된 것인데. 어쨌든 나는 그 정도 선에서 무척 만족했다.
그리고 잠시 뒤.
조은하 선배는 갑자기 담뱃불을 껐다.
“야,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지금요?”
“아침, 점심 다 못 먹었어. 김 선생도 그렇지?”
그러고 보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녁 먹고 시험공부 한다며? 방지현 선생과 이동욱 선생이 그러던데.”
그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레지던트 필기시험이 있다.
물론, 흉부외과를 지원한 내가 레지던트 선발 과정에서 떨어질 우려는 없으나.
최소한의 공부라도 하고서 필기시험을 치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가 잠시 후 윤혜선 실장도 만나봐야 한다.
“네, 식사하러 가죠.”
나도 얼른 담뱃불을 껐고.
곧바로 조은하 선배와 함께 즉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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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날짜??
<100>
흉부외과 병동 1인실.
노크한 뒤 잠시 기다렸다가 안에서 기척이 들리는 것 같아, 안으로 들어섰다.
“윤 실장님, 접니다.”
그리고 이때, 베드 앞쪽 의자에 앉은 한 중년 남자가 바로 눈에 들어왔고, 그 남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서로 간단히 목인사만 하고서 나는 베드 쪽으로 다가갔다.
“윤 실장님, 어떠세요?”
그러자 윤 실장은 눈을 뜨며, 몇 번 눈을 깜빡였다가 비로소 내 쪽을 쳐다봤다.
“서, 선생···님.”
반색하는 그녀.
사실, 수술 중에 혈관 파열이 일어나는 바람에 무척 힘들었던 수술을 시행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서서히 회복 단계로 접어든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 거동하는 건 무리다.
그런 환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나는 즉시 제지했다.
“괜히 무리하지 마세요. 안정을 취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러자 윤 실장은 다시 편히 누웠고.
그리고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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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선생님!”
“네?”
“아, 사실은 제가 요청한 건데,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은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 우선 간호사 선생님께 긴히 부탁드리게 된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저는 김경준이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윤혜선 실장의 전남편이기도 하죠.”
전남편?
순간,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다가 우선 악수부터 하게 되었다.
“근데 여긴 좀 비좁은데, 혹시 시간 되신다면 커피숍이 어떨까요? 거기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그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윤 실장을 쳐다봤고, 이때 그녀는 다시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빨리 제지한 뒤, 나는 입을 열었다.
“실장님, 그냥 편히 누워 계세요. 그리고 혹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워낙 큰 교통사고였다.
당시, 윤 실장이 타고 있던 렌트카는 너무 심하게 망가져 폐차 처리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외상이 심했던 이유는 사고 당시에 에어백이 전혀 터지지 않은 거였다.
에어백 불량.
다만 각종 파편들만 많이 튀어나와 윤 실장의 흉부를 강타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자칫 사망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한편, 그녀는 수술 이후 정신을 차린 뒤, 경찰관들에게 당시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단기 기억 상실.
다만, 경찰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대형 뺑소니 사고를 겪었다는 것이다.
상대편 차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고 하고.
윤 실장만 119구급대원에 의해 구조된 뒤 성국대 병원 응급실로 즉각 이송된 것이다.
특히, 그 사고 지점은 성국대 병원 근처였다고 하는데. 성국대 병원으로 복귀하던 와중에 대형 뺑소니 사고를 당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보통, 차량 대 차량의 반파 사고일 경우, 윤 실장의 차량이 폐차될 정도로 망가졌다면 반대편 차량 역시 큰 손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건 초기, 경찰들은 주변 일대의 차량 정비소들을 돌아다니며 뺑소니 차량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그게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다양한 위치의 CCTV 영상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용의차량 하나를 특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대형 화물트럭이다.
특히, 전후 상황을 봤을 때, 그 트럭 한 대가 그쪽을 지나갔다고 하고.
통과 이후, CCTV에 찍힌 트럭은 헤드라이트 하나가 망가진 걸 제외하곤 별다른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은 사고 현장에서 회수하게 된 헤드라이트 조각을 바탕으로 화물트럭의 행선지를 추적했으나 다시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용의차량으로 추정되는 그 트럭.
그리고 그 트럭의 차주를 체포했으나.
그 트럭의 차주는 서울에 간 적이 없다며 강력하게 부정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찰의 확인 결과, 동일 시각 다른 위치에서 그 트럭이 운행되는 게 도로 CCTV 영상에 찍혀 있었고. 정면 헤드라이트에 대한 수리 기록도 확인했으나 어떤 수리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시대 기준으로, 띄엄띄엄 존재하는 CCTV 때문에 진짜 용의차량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살인미수 건인지 아니면 단순 뺑소니 건인지, 그걸 특정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잠시 뒤.
나는 그 남자와 함께 본관 지하 1층으로 내려갔고.
그 시각, 한적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히 커피 등을 시킨 뒤 그때부터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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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그럼 윤 실장님과의 관계가···?”
“네! 이혼했으나 지금도 무척 가까운 사이입니다. 피치 못하게 사정이 있어서 합의 이혼을 했던 거고. 그래서 때가 되면 다시 재혼할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위장 이혼을 했다는 말일까.
다시 재혼할 생각까지 있는 걸 보면.
어쨌든 나는 좀 더 호기심을 갖고서 김경준이라는 남자를 쳐다봤다.
머리 여기저기에 새치가 가득한 남자.
미간 사이는 넓은 편이고, 눈동자도 아주 선명하다.
다만, 한동안 고생을 했는지 얼굴 피부 상태가 좋지 못한 편이다.
“그리고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과거, 손명국 회장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원래는 신라그룹 재무팀에 있다가 손명국 회장한테 넘어갔고, 그래서 그곳 자금 관리를 맡았습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손명국 국회의원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손명국 국회의원?
그 순간, 나는 잠시 미간을 오므렸다가 이내 속으로 간단히 탄성을 질렀다.
신라그룹 손미희 여사의 친오빠.
바로 손명국 의원이다.
강제철 실장이 보내준 신라그룹 관련 기밀문서엔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었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라 현재 기억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신라그룹 손미희 여사와도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다는 말인데.
그래서 점점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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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렇듯 드디어 진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은 제가··· 우리 윤 실장과 함께 선생님을 함께 뵐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상황이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죠. 현재 저는 한유나 아가씨와 관련된 일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부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을 하고 싶어 선생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제안?
어떤 제안?
김경준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한유나 아가씨께서 가지고 계신 지분은 아직 신라그룹 전체를 압도할 만한 그런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쪽 방면에 일들을 많이 해 봤고, 그 때문에 제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도움이라? 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분 매입을 위해선 보통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확실한 전략 없이는 경영권을 위한 지분확보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장내 매수를 진행하든 아니면 장외 거래를 진행하더라도 그것 역시 마찬가집니다. 혹시 아십니까? 한유나 아가씨께선 신라그룹 전체를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그런 마음이 있으십니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아주 약해 보이던 한유나.
그런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까진 나한테 하지 않아, 나는 아직 거기까진 모르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느낌이 좀 이상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낯선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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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근데, 저번 아가씨 사건도 그랬지만, 이번 사건까지 포함해서 저는 정말 화가 납니다! 손명국 의원 때문에 저는 옥살이까지 했는데. 우리 윤 실장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걸 지시했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게 정말 분통 터집니다!”
그러면서 김경준은 분노를 토해냈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또 이어나갔다.
“혹시, 작년 한 해 뺑소니 사건 건수가 몇 건인지 아십니까? 무려 2만 2천 건이 넘습니다. 근데, 답답하게도 작년 검거율은 대략 81%밖에 되지 못합니다. 나머지 19%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갈수록 뺑소니 검거율은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2001년 이 시대는 꼭 그렇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찰이 정말 무능합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대구에서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납니다. 화근을 서둘러 처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면, 대구 사고 현장에서 검거된 4명의 건달들은 지금까지 묵비권을 행사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사가 전혀 진행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들의 다른 전력을 통해 관련 폭력 조직을 지목했고, 그 조직원들을 즉각 체포하려고 했으나, 나머지 조직원들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증발한 상태다.
그 때문에 수사 진행이 현재 더뎌진 상태이고, 그들의 배후에 대체 누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강제철 실장은 따로 뭔가를 조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씀입니까?”
“선생님! 그래서 저도 이제 적극적으로 돕겠지만, 선생님께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나.
인턴이기 때문에 바쁜 것도 있지만, 내가 그럴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근데 죄송한데, 저는 기업과 관련해서 문외한입니다. 저는 그저 인턴이자 의사입니다. 또한, 한유나씨와 아직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그 순간, 남자는 갑자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선 이미···.”
그러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며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
“설마, 혹시 그 일을··· 모르십니까?”
“네?”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설명했다.
“저번 주, 퇴원하신 한태산 회장님께선 김윤상 의원님과 며칠 전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셨습니다. 그때, 두 분의 약혼 날짜를 조율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뭐?
약혼 날짜?
도대체 이게 뭐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진행됐다고?
그런데 저 말이 ‘참’이라면, 그것도 놀랍지만.
한편으로 내가 모르는 일들을 어떻게 저 남자가 저렇듯 세세하게 알고 있는지 그게 더 의아했다.
그래서 나는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사실, 저는 아직 들은 게 없습니다. 근데 당사자인 제가 모르는 일들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 그건 신라그룹 쪽에 아직 제 인맥이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편으론 미간을 찌푸렸다.
제3자인 그가 이런 것까지 소상하게 알 정도라면, 한태산 회장의 자식들은 그 전부터 많은 것들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저번 대구 사건이 생겼을까.
하긴, 한유나를 죽이려고 킬러까지 보낸 사람도 있다. 그런 자라면 또다시 그런 짓들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지금껏 워낙 뒤처리들을 잘해 여러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드러난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의 한유나는 다른 병원에서 사망했다. 다만, 지금껏 일어난 각 사건을 그때 시점으로 대입해 보면, 어쩌면 미지의 킬러가 그때도 무언가 개입했을 소지가 있다.
완벽한 범죄는 영원히 묻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말이다. 특히, 은밀한 재벌가의 일이라서 더는 누구도 실체에 접근하지도 못할 테니까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상황 돌아가는 것도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우선은 그렇게 대답했고.
더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간단히 인사한 뒤, 커피숍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그 즉시 응급실 의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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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짜 내가 한유나와 약혼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게 점점 더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무척 이상하기만 하다.
내가 한유나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만난 것도 아니다.
고작 병원에서 몇 번 대화만 나눴을 뿐.
그런 상황임에도 약혼을 해도 되는 것일까.
문득, 회귀 전의 암담했던 결혼 생활도 떠올랐다.
그땐 처가에 내 모든 걸 맡겼다가 결국 나는 빈털터리가 됐다.
물론, 모든 게 지금은 달라졌다고 해도, 그럼에도 미래의 ‘처가’ 쪽은 과거만큼이나 심상치가 않다.
한태산 회장도 그렇지만, 그의 자식들, 그리고 손미희 여사까지.
늑대들이 득세하고 있는 곳이 바로 신라그룹이 아닌가.
나는 결국 ‘평범함’과는 영 거리가 있는 것일까.
한편으론 이런저런 고민들도 생겨났다.
그때 한태산 회장이 나에게 했던 말들.
향후 일 년 이내에 한유나가 가진 신라전자 지분 절반을 자신한테 넘기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디까지 움직여야 하고, 대체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나.
물론, 그때 나는 한태산 회장과 뭔가 약속을 한 게 없지만, 그가 뱉은 말의 무게는 확실히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잠시 후, 나는 응급실 의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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