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낫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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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제부턴 시험공부를 좀 해야 하나.
내일 치러지게 되는 레지던트 필기시험.
이 시각, 인턴들은 아무리 하루가 바쁘다고 해도 이 시험에 나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물론, 레지던트 각 전공 경쟁률에 따라 부담감 정도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큰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흉부외과 경쟁률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험 전날인 터라 시험 과목들에 대해 최소한의 공부를 진행할 겸 의국에 도착했고.
그곳엔 치열한 경쟁 상태인 이동욱이 그야말로 열공 상태로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지원한 피부과는 경쟁률이 나름 높아, 필기시험 결과가 당락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방지현은 느긋한 모습으로 각 과목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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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었어?”
“어. 좀 전에.”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그러면서 날 빤히 쳐다보는 방지현.
“왜??”
“뇌출혈 환자, 니가 살린 거나 다름없다며?”
“김춘식 환자?”
열공하는 이동욱 때문에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던 중, 방지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즉시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보호자 문제 때문이지, 내가 별로 한 일은 없어.”
“없긴? 나도 이야기 다 들었어. 누가 들으면 진짜 한 일이 없는 줄 알겠다. 수간호사 선생님이 아까 (너 없을 때) 칭찬하면서 난리던데.”
그 말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게 단순히 칭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어쨌든 그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었다.
결국, 김춘식 환자는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현재 수술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너, 시험 과목이 뭔지는 알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방지현을 쳐다본 뒤 이내 미간을 조금 오므렸다.
그러자 바로 한숨을 내쉬는 방지현.
그녀는 즉시 이것저것 노트와 책들을 나한테 넘겼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영어, 이렇게 총 5과목. 총 55점.”
“그럼 시험 과목 중에 정신과 과목은 없어?”
“없어.”
사실, 이런 시험에 정신의학과 과목이 선택 과목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2002년도 레지던트 필기시험엔 그게 빠져 있었다. 그냥 영어 5점만 포함된 것이다.
그럼 그때 그 시험의 난이도는 어땠더라.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쉽게도 그게 기억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에도 그 시험의 중요성은 덜했기 때문에 대충 공부하고 대충 시험을 치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건, 그 시험의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거다.
주로 평이한 문제 위주로 나왔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레지던트 필기시험이 의사국시나 전문의 시험과 같을 수가 없다.
레지던트 과정 진입을 위한 단순한 목적성 시험일 뿐, 그 시험 결과에 따라 무언가 자격증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국대 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 지원자는 단 2명!
방지현과 나는 무조건 합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방지현도 사심 없이 필기 노트와 책들을 나한테 넘겨줬고.
반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이동욱은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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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넌 공부 다 했어?”
“대충.”
“좋겠다. 혹시 예상 문제, 족보는 어딨어?”
“거기 봐. 노트 사이에 끼어 놨어.”
“오케이. 고마워.”
그러고는 바로 시작된 공부.
근데 봐야 할 게 왜 이렇게 많을까.
너무 익숙한 내용들도 있지만, 조금 신경 써서 공부해야 할 것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률이 치열한 전공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최소 몇 주 전부터 시간을 내서 빡세게 공부를 해야 한다.
반면, 경쟁률 자체가 의미가 없는 전공에 지원했을 땐, 이런 공부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다.
대충 겉핥기만 하고서 시험을 치르더라도 의사 국시를 통과한 전력이 있다 보니, 55점 만점에 대충 30점가량을 딸 수가 있다.
거기서 더 잘해 봤자 특별히 득될 일도 없고.
그래서 나는 각 요약 내용과 족보 문제들을 대충 훑어본 뒤 그로부터 한 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따분해하며 기지개를 켜는 방지현. 그런 방지현과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고.
내가 즉시 손짓하자, 방지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우리는 열공에 빠진 이동욱을 남겨두고서 조용히 의국 밖으로 나갔다.
<101>
“와, 진짜 춥다.”
어둠이 더 짙게 내린 세상. 찬바람은 쉴 새 없이 불어오고 있다.
병원 앞에 조성된 작은 정원.
그곳 벤치에 앉아 잠깐 음료수를 마시는데, 추위 때문에 저절로 어깨가 좁혀진다.
잠바를 입었음에도 겨울 추위는 확실히 송곳 같은 예리함이 있다.
“많이 추워? 그럼, 내 잠바라도 줄까?”
그러자 바로 눈을 흘기며 날 쳐다보는 방지현.
“니가 이동욱이냐?”
그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이동욱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무조건 방지현한테 자신의 잠바를 벗어 넘겨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동욱이 아니었고, 방지현은 이미 자신의 잠바를 가운 위에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근데 동욱이, 진짜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삽시간에 온기가 사라져 버린 자판기 커피.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방지현은 이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피부과 경쟁률이 너무 세잖아? 쉽지 않을 것 같아. 동욱이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방지현도 걱정이 되나 보다.
그러나 떨어져도 이동욱은 갈 데가 있다.
회귀 전과 똑같이, 후기 전형을 통해 일반외과(GS)에 지원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도와줄 것도 없다.
당시의 레지던트 필기시험 문제가 전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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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 시골 간다며?”
그리고 잠시 뒤.
갑자기 화제를 바꾸는 방지현.
이때 나는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방지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짧게 탄성을 질렀다.
“혹시 파견 근무 말하는 거지?”
그러자 방지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조은하 선배가 이야기했던 그 지방 파견 근무 건.
인턴 한 명, 레지던트 한 명, 총 2명이 시골병원으로 파견 가는 일인데.
대략 12월 15일 정도에 출발하는 것으로 결정난 상태다.
그리고 그 시골병원에서 2주가량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응급실 턴도 끝나게 될 것이다.
“근데 조은하 선배도 간다던데? 너도 알아?”
그 순간, 나는 흠칫하며 방지현을 쳐다봤다.
“진짜? 조은하 선배가? 대체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까 너 바쁠 때, 스테이션 간호사 선생님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하시던데.”
그 말에 나는 살짝 미간을 오므렸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때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회귀 전에도 조은하 선배가 거기 갔던가.
아닌데···.
내 머릿속엔 2001년 연말 응급실 기억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그때 정신없이 환자를 돌보던 조은하 선배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회귀 전엔 대체 누가 갔을까. 다시금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지.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기억을 되감아 볼 수도 있다.
특히, 내가 기억하는 당시 연말에는 사건·사고 건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 때문에 2001년 연말 응급실은 무척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내가 누구랑 같이 일을 했었지?
그렇듯 방향을 달리하며 생각하자, 이런저런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질렀다.
맞아! 김보영 선배였어!
그때, 응급실 레지던트 1년차 김보영 선생이 이동욱과 함께 시골병원으로 파견갔었다.
그렇다면 이번 파견은 파견팀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합류한 것도 있는데.
거기다가 조은하 선배가 갑자기 파견 팀에 끼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다시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쨌든 이번 일 자체가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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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느덧 밤 10시가 될 무렵 흉부외과 스테이션에서 갑자기 연락이 날아왔다.
“선생님! 한별이 ICU(중환자실)에 잘 들어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수술을 하게 됐던 강한별은 일반외과(GS) 수술까지 무사히 마쳤고, 드디어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수술 자체가 흉부외과, 일반외과 등의 협의 수술이었으나, 그럼에도 병동은 흉부외과로 결정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응급실 일을 잠시 멈춘 뒤, 서둘러 흉부외과로 올라가게 되었다.
어느덧 수술이 완료된 상태라면, 강한별의 얼굴 쪽에 드리어져 있던 그 사자(死者)의 징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8층으로 올라갔고.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잠깐 들러 나이트 근무 중인 간호사들과 이야기들을 조금 나눈 뒤, 즉시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온갖 기계들을 달고 있는, 9살 남자아이 강한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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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일반외과 수술도 잘 됐다고 했어요”
잠시 후, 내가 강한별의 머리맡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중환자실 한선희 간호사가 어느새 다가와 그런 말을 건넸다.
이때 나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다시 강한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와! 이럴 수가!
이건 진짜 신기한 일이다.
아지랑이처럼 아이의 얼굴에서 피어올랐던 그 시커먼 기운, 사자(死者)의 징후.
그런데 그 징후가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한 선결 조건들.
그리고 그 조건들의 충족.
그런데 그 조건 자체가 상실되면서 사자(死者)의 징후 역시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선 그것 외에는 마땅한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렬한 희열이 내 전신을 휘감았는데.
사자(死者)의 징후까지 나타난 사람, 그런 사람을 내가 살린 것이다.
물론, 나 혼자만의 노력이 들어간 게 아니다.
서철성 교수님도 도왔고, 마취·통증과 김광일 교수님도 도왔다.
또한, 일반외과 의사들까지 합세해서 한별이를 수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주 기이한 일이 난데없이 발생했다.
갑자기 한별이의 위쪽, 허공에서 시커먼 기운들이 뭉실뭉실 피어 오르더니 그 기운들이 회오리치며 솟구쳤고, 그 순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시스템 알람이 갑자기 들려왔다.
[경고! 플레이어의 적극적인 개입에 따라 ‘예고된 죽음’이 완전히 회피되었습니다. 개별 조건 충족에 따라 <사신의 낫> 특성은 일시적으로 <죽음의 낫> 특성으로 변경됩니다!]
[죽음의 낫(A)]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가 불특정 대상에게 도래합니다. 경고! 경고! 새로운 죽음이 완료되는 시간은 앞으로 44분 뒤! 특성 사용자는 사망 대상자를 임의로 지정하며 바꿀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변경 가능]
그리고 그 순간, 중환자실 외측 복도 쪽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특성 변경과 관련된 시스템 설명에도 놀랐지만.
이때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재빨리 중환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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