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낫 02
<102>
사실, 나는 지금껏 [사신]의 특성과 상관없이 한유나의 생명을 구했고, 한태산 회장의 생명도 구했다.
폐암 말기였던 김성미 환자의 생명 역시 구했으며.
회귀 전과 달리, [대현물산] 최수진의 오빠, 최수호 환자가 테이블 데스 운명을 비껴갈 수 있도록 그의 수술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한성화학 화학폐수 유출 사건과 관련해서, 정찬수 환자, 황성수 환자, 최동만 환자가 계속 투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며.
윤혜선 실장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사안은 다르다.
[사신]과 관련된 [사신의 낫] 특성이 강제적으로 발동되어 있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9살 남자아이 강한별을 구하게 되자, 이제 [사신]의 강력한 개입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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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무슨 일이죠?”
나는 놀라며 후다닥 뛰어갔다.
이때,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선희 간호사.
그녀는 몸을 숙인 채 상대를 살피다가, 내 목소리에 즉각 반응하며 날 쳐다봤다.
“선생님! 최 간호사님이 갑자기 이상해지셨는데, 빨리 좀 보시겠어요?”
그녀의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흉부외과 스크럽 널스 최현미 간호사다.
주로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런 최현미 간호사의 안색이 갑자기 눈에 띄게 변하더니 뚜렷한 청색증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재빨리 최현미 간호사의 상태를 살펴봤다.
맥박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고.
호흡 상태도 정말 이상해지고 있었다.
급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한 정말 알 수 없는 상황.
펜 라이트를 꺼내 최현미 간호사의 동공을 살피면서도.
나는 즉시 유용한 진단 특성인 [베살리우스의 눈(S)] 특성도 발동시켜봤다.
[베살리우스의 눈(S)]
[병변 부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성공 확률 95%, 스캔 깊이 제약 없음]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그 순간, 최현미 간호사의 바로 위쪽으로 희미한 신체 투영체가 형상화되며 나타났는데.
이때, 95% 확률로 문제 부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때 나는 흠칫 놀랐다.
문제의 부위가 정말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심장 등의 흉부 쪽이 아니었고.
바로 머리 쪽이다!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는 뇌속 출혈 양상들.
급성 뇌출혈???
보통, 정상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질 경우, 심장 문제 혹은 뇌 쪽 문제일 가능성이 큰데.
지금은 바로 뇌 쪽 문제가 발생한 거다.
그런데 곧이어 나는 더 아찔해졌다.
시스템의 경고.
즉, 앞으로 44분 뒤, 새로운 죽음이 완료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의 죽음이 44분 뒤에 완성된다는 말
그리고 대상체가 바로 눈앞의 [최현미 간호사]인 것 같았고.
그 때문에 나는 더 아찔해지고 말았다.
갑자기 날아든 죽음의 경고.
그리고 갑자기 현실화되고 있는 죽음의 카운트다운!
[‘사신의 눈’이 저주받은 인간을 주시합니다]
[사망 예정: 최현미]
[남은 시간: 43:36]
그리고 그렇듯 아주 섬뜩한 시스템 알람도 내 귀를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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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재빨리 움직였다.
정말 뇌출혈 같은 뇌 문제가 발생한 거라면, 뇌압 상승에 의한 구토 증세가 유발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건 바로 순식간에 호흡을 막을 수 있으며 환자 상태를 극도로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기도를 확보한 뒤, 입안 구토물 여부를 즉시 확인했다.
그러자 바로 눈에 띄는 이물질의 흔적.
“선생님! 여기 좀 잡아주세요!”
재빨리 한선희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입안 구토물을 서둘러 제거했는데.
그러자 그 호흡이 서서히 돌아왔다.
곧이어 나는 한선희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최현미 간호사를 등에 업었고.
재빨리 중환자실로 들어가 한쪽 베드 위에 그녀를 눕혔다.
그런 뒤,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한선희 간호사를 스테이션으로 보냈고.
그사이 나는 기관 삽관을 즉시 진행했다.
혹시 모를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달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도 응급 뇌 CT 촬영을 위해, 영상실에 즉각 연락을 취했는데.
그리고 바로 그때.
김재호 선배 등이 우르르 중환자실로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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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정민아? 니가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근데 지금 어떻게 된 거야?”
“선배님, 위험합니다! 급성 뇌출혈 같고, 좀 전에 구토 증상이 확인됐습니다. 기도를 막았던 구토물은 제거했는데,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펜 라이트 검사 결과, 현재 코마(coma) 상태 같습니다.”
“코마 상태??”
그 말에 깜짝 놀라는 김재호 선배.
코마 상태라는 건, 이른바 깊은 의식 불명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빛과 소리 등에도 반응하지 않게 된다.
실제, 좀 전에 펜 라이트로 최현미 간호사의 동공 상태를 확인했으나 동공 반응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급성 뇌출혈이 동반된 그런 코마 상태가 되면, 환자의 사망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위험도는 그 이상이다.
앞으로 대략 40분 뒤.
최현미 간호사는 원인 미상의 뇌출혈에 의해 사망하게 될 것이다.
즉, 뇌사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비켜봐! 내가 좀 볼게!”
김재호 선배는 즉시 앞으로 나오며 최현미 간호사의 상태를 이것저것 살피기 시작했다.
물러선 나는 이때 이마를 만지며 인상을 팍 썼다.
아무리 [사신의 저주]가 내려졌다고 해도.
하필 최현미 간호사한테 ‘죽음의 저주’가 내려진 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불특정 대상한테 그 저주가 도래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다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희미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시스템]과 [사신]은 그냥 무작위적으로 전능의 힘을 쓰는 게 아니다.
무언가 조건이 있어야 하고.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그 힘이 작동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지만, 최현미 간호사의 상황은 이게 단순히 급조된 게 아니었다.
회귀 전의 과거, 내가 인턴이었을 때.
12월 응급의학과 턴과 1월 신경외과 턴까지 마친 뒤 다시 흉부외과로 돌아왔을 때.
그때 스크럽 널스 한 분이 과로사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회귀 전, 당시의 나는 특별하게 두각을 드러낸 게 아니었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는 것만 해도 무척 힘든 시기였는데.
그래서 10월, 11월 흉부외과 턴 때도 실제 수술 참여도는 회귀 이후의 이 시점보다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와의 관련성이 적은 ‘최현미 간호사’의 죽음은 어느새 내 기억 속에서 잠시 사라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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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어떡하지.
결국, 시기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강한별의 소생 때문에 ‘최현미 간호사의 죽음’은 이제 그 시기가 더 앞당겨진 것 같았다.
“야, 빨리 가자! 빨리 움직이죠!”
잠시 후, 이동식 베드에 누운 최현미 간호사는 채혈이 끝나자마자 즉각 영상실로 이동되었다.
이때 나도 같이 뛰면서 따라갔는데.
이동식 베드를 밀면서도 머릿속은 내내 복잡했다.
왜냐하면, 점점 더 죽음과 가까워지는 시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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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눈’이 저주받은 인간을 주목합니다]
[사망 예정: 최현미]
[남은 시간: 35:57]
그렇듯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문득 회의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응급 뇌 CT 검사라고 해도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CT 검사가 끝난 뒤 영상이 판독되고 검사 결과가 나올 때쯤이면.
최현미 간호사는 어느새 뇌사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시간을 그냥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후, 영상실에 도착한 뒤 잠시 대기하면서.
나는 계속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황급히 나는 [전용 특성]을 발동시켰다.
바로 [일대일 교환(S)] 특성!
내 생명력을 조금 나눠 주는 것이다.
그걸 바탕으로, 생사를 다툴 시간을 조금이라도 획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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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 특성, 일대일 교환(S)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즉시 들려오는 또 다른 시스템 알람!
[경고!! 특수 상황 발생!!]
뭐? 특수 상황?
그리고 곧이어 내 시도에 반발하듯 무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일대일 교환(S) 특성이 즉시 무력화되었습니다!]
[사신의 저주, 죽음의 낫!]
[새로운 죽음이 완료되는 시간은 임의로 변경될 수 없습니다!]
[특성 발동 시점부터 44분 뒤! 저주를 받은 대상은 사망합니다!]
그렇듯 요란한 시스템 알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실패한 거다.
미치겠네.
정말 간단한 시도였는데.
그게 단숨에 무력화된 거다.
그러고 보면, 특성 등급은 각 특성의 능력 범위만을 나타낼 뿐.
먼저 발동된 특성을 노리며 충돌할 땐 어떤 식의 우세함도 없다는 의미였다.
특히, 44분이라는 제약!
그건 [죽음의 낫] 특성의 고유 특성 같은 느낌이 들었고.
좀처럼 훼손할 수 없는 그런 고유성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일까.
물론, [특성 발동 취소]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신의 낫]에서 [죽음의 낫]으로 변경되면서, ‘강제적 특성 발동’이 연계되다 보니, 이번 연계 미션(3)이 끝날 때까지 내 마음대로 이 특성 발동을 취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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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진짜 미치겠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그래서 계속 고민하던 중.
나는 혹시나 싶어, 특전 하나를 시범적으로 발동시켜 봤다.
[특전: 은빛 성수]
[최현미 환자의 부족한 활력을 100% 충전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문제가 나타났다.
[경고!! 경고!! 특수 상황 발생!!]
[은빛 성수의 적용이 무력화됩니다!]
결국, 이것 역시 이 상황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특전들 역시 이런 상황에선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나는 적절한 유효 [특전]을 찾기 위해 현재 내가 보유한 [특전] 현황을 즉각 확인해 봤다.
[특전]
[은빛 바늘]
[은빛 성수](2)
[천사의 눈물]
[천사의 깃털]
[천사의 노래] (일시 특전)
그런데 이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상태창엔 [은빛 성수](3)이 [은빛 성수](2)로 바뀌어 있다.
즉, 일반적인 [전용 특성]들과 달리, 이런 1회용 특전들은 사용 효력과 상관없이 사용 즉시 그 기능이 소멸된다는 의미다.
에이씨!
나는 이마를 잡았다.
졸지에 효과도 보지 못하고 귀중한 [은빛 성수] 한 병을 날려버린 거다.
그럼에도 깨달은 점도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것!
그렇다면 이제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현재 내가 보유한 [천사의 눈물] 특전은 24시간 기억을 삭제하는 특성이다.
또한, [천사의 깃털] 특전은 사신의 강림을 1회 취소할 수 있는 특성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특전 [천사의 노래]는?
[천사의 노래]
[강림한 사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거래 물품 혹은 대상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그렇듯 이 특전은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클래스 S)]에서 비롯된 일시적 특전인데.
문제는 지금 이걸 쓰게 되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고.
한편으론 동등한 위치라고 하지만, 사신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건 역시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신의 눈’이 저주받은 인간과 당신을 주시합니다]
[사망 예정: 최현미]
[남은 시간: 10:13]
[‘사신’이 죽음의 미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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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선택지
<103>
[죽음의 낫(A)]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가 불특정 대상에게 도래합니다. 경고! 경고! 새로운 죽음이 완료되는 시간은 앞으로 44분 뒤! 특성 사용자는 사망 대상자를 임의로 지정하며 바꿀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변경 가능]
뇌 CT 촬영이 끝난 뒤 판독을 기다리는 동안, 그때부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사망 예정: 최현미]
[남은 시간: 04:44]
그때 문득 나는 [죽음의 낫] 특성에 대해서도 다시금 주목해 봤다.
어쨌든 그 특성을 통한 기회도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죽음의 낫] 특성이 제시하는 사망 대상자를 임의로 바꾸는 것.
그런데 이것 역시 무척 어려운 일이다.
도대체 누굴 사망 대상자로 바꾼단 말인가.
누구는 나 때문에 죽어야 하고.
누구는 나 때문에 살게 되고.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걸 결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하는 순간, ‘죽음의 저주’를 내린 사신과 나는 결국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리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다 보니, 이 선택지는 의사인 나에게 있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그런 선택지인 셈이다.
그래, 할 수 없다!
잠깐 머릿속을 정리한 뒤, 나는 곧바로 [특전] 하나를 발동시켰다.
바로 [천사의 노래]!
[강림한 사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거래 물품 혹은 대상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사용하시겠습니까?]
이때, 잠시 머뭇거렸으나.
네!
드디어 내가 승인하는 순간, 내 주변에선 뚜렷한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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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사신의 강림이 시작됩니다!]
[사신 강림 원칙에 따라 시간은 즉시 정지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섬뜩한 기운들.
그런데 이번엔 이전 강림 때와는 뭔가 확실히 달랐다.
난데없이 세상이 회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채색이 되듯, 병원 복도가 회색으로 변해 갔고.
또르르 굴러가던 이동식 베드의 바퀴들은 이때 멈춰섰다.
최현미 간호사가 누워있는 그 이동식 베드.
그 베드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추게 되었고.
다른 간호사들과 김재호 선배도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 버렸다.
그 순간, 스산한 냉기가 사방에서 몰아쳤는데.
그 빙하 같은 냉기에 내 전신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특히, 초월적 존재가 가까워질수록 온몸은 더 오싹해지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한편, 나는 재빨리 이동식 베드로부터 물러섰다.
저번 사신 강림 때, 사신과 접촉했던 간호사들은 알 수 없는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생기를 빼앗기게 되었고. 지금 상황에선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나는 재빨리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없는 복도 끝, 벽면의 조그만 창문 앞에 서서 이제 나는 정면을 쳐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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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경고! 사신과의 거리, 500m, 350m, 92m, 46m, 15m···]
그렇듯 사신 강림이 현실화되면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은 더 확대되었고.
그 긴장감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공포심으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실, 이미 두 번이나 대면했다.
그래서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그러나 초월적 존재가 가진 힘과 파급력은 인간의 몸으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나 보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고.
긴장감은 극대화되었다.
그 순간, 나는 오롯이 치열한 현실감을 유지하고자, 문득 뒤쪽 창문을 쳐다봤다.
여기와는 다른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그 현실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짙은 어둠이 깔린 병원 바깥 주차장과 그 너머 아파트 단지의 모습.
적어도 이 시간이면 야외 주차장에는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있을 테고.
높이 치솟은 저 너머의 아파트 단지에선 바둑판과 같은 실내 빛들이 요란하게 빛나야 한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창밖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온통 회색으로 변해 버린 창밖의 모습.
회색의 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앙상한 나무와 폐허의 잔재가 창밖으로 펼쳐져 있다.
모든 것들이 밀려 나가고 그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회색 폐허의 흔적들.
하늘과 땅도 온통 그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생명의 상실.
생명의 실종.
허무와 질식이 가득한 그런 공간.
마치 시야가 빨려 들어가듯, 그 광경으로부터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다가.
한편, 난데없이 들려오는 괴성에 나는 회색의 흡입감을 떨쳐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복도 천장에서부터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형상화되기 시작하는 사신의 모습.
특히, 사신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검은 천들은 세상에 도래하며, 섬뜩한 기운을 쏘아내며 팔락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강렬한 기파들.
그 기파들은 회오리치며 마치 칼날같이 내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한편, 공간 제약 때문에 사신은 이번에도 축소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3m 높이의 사신의 위용.
그 존재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죽음은 다시금 내 앞에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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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그리고 잠시 뒤.
내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아주 불길한 목소리들.
물론, 사신의 언어를 내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와중에, 검은 로브 속의 사신은 저번처럼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는데.
그 어둠 속, 수천, 수만, 수십만 개에 이르는 수많은 동공들이 날 노려보면서.
계속 무언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때, 초월적 존재와의 접촉으로 인해, 이상 증상들이 내 몸에서 일어났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들.
다다닥! 다다닥!
쉴 새 없이 이가 부딪히며 떨리고 있었고.
두 다리도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한편, 잠시 뒤.
시스템은 정제된 언어로써 사신의 의도를 내게 전달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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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당신의 영혼에 관심이 큽니다!]
[사람은 언제나 죽는 법입니다. 죽음을 벗어나는 법? 죽음과 손을 잡고, 죽음의 의사가 되세요!]
[당신의 격이 한층 더 높아질 겁니다]
그런데 이 제안은 저번에도 했던 제안이다.
물론, 내가 이 제안을 수락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신의 제안이 즉각 거부되었습니다!]
[경고! 사신의 시야가 30km 반경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들.
[···???????? ????··· ????······]
그리고 이런 소리들은 또다시 시스템을 통해 정제되었다.
[네가 가장 존경하는 자··· 그자에게 ‘죽음의 저주’가 내려질 것이다! 피하고 싶은가?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도 모르게 이가 부러지라 악물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으나.
사신은 내 지인까지 노리겠다는 그런 위협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 회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신의 저 위협에 내가 함부로 굴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강한별을 통해 ‘죽음의 저주’를 회피한 적도 있지 않은가.
즉, ‘죽음의 저주’는 완벽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고.
그런 뒤, 나는 드디어 이번 소환의 목적을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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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와 동등한 위치에서··· 거, 거래를 하겠다. 최, 최현미 간호사, 그, 그녀를 구, 구하고 싶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지.
입이 덜덜 떨리다 보니 내 목소리도 좀 이상해졌다.
그럼에도 내 의사는 분명히 전해진 것 같다.
사신의 손에 들려 있는 시퍼런 낫.
그게 난데없이 높이 치솟아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시퍼런 날은 금방이라도 내 목을 베어버릴 듯, 무척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사신은 또다시 섬뜩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목소리들은 시스템을 통해 정제되었고.
그 정제된 목소리들이 시스템을 통해 내 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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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을 말하라. 인간의 가치와 동등한 제물이 아니면··· 거래는 불가하다···]
그래,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초월적 존재, 사신과의 거래다.
아무리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한다고 해도, 이번 목적은 오로지 최현미 간호사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절대 동등한 위치가 될 수가 없다.
다만, 특전 [천사의 노래]의 장점은 이번 거래의 물품 혹은 대상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
즉, 사신이 마음대로 거래 대상을 지정할 수가 없다.
선택지는 나한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거, 거래 대상! 혹은··· 물, 물품을 제시하라. 내, 내가 선택하겠다.”
그러자 이때 음산한 웃음소리가 또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러면서 사신은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잠시 후, 시스템은 사신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왔다.
[···죽어야 했으나 죽지 않은 자들 중의 한 명···]
[···스스로 사신의 추종자가 되는 것···]
[···플레이어의 생명력 10년···]
[···특성 세 가지의 영원한 소멸! 단, 소멸 특성을 선택할 권한은 사신에게···]
[···지옥 여행 6일···]
그렇듯 총 다섯 가지의 선택지가 날아들었고.
그리고 이때, 나는 아주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제안들이었고.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제안들이었다.
가장 먼저, ‘죽어야 했으나 죽지 않은 자들’, 이건 내가 회귀 이후에 생명을 구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더더욱 거부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다.
그리고 다음 순번인 사신의 추종자가 되는 것, 그것 역시 절대 내키지 않았고.
결국, 남은 것은 [생명력 10년], [전용 특성 세 개 소멸], [지옥 여행 6일].
이 세 가지 선택지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세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한 개를 골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냥 차라리 식물인간 상태인 고태진 한성클린 대표를 [죽음의 낫] 특성 대상자로 지정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잠시 그런 생각도 해 봤으나.
역시 그것도 결국 내키지 않았다.
임의로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사한다는 건, 결국 또 다른 인과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즉, 단순히 이번 일을 회피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계속 고민을 이어나갔다.
[생명력 10년], [전용 특성 세 개 소멸], [지옥 여행 6일].
한편, 그 선택지들의 경중을 놓고 다시 봤을 때.
결국, 사신의 입맛대로 진행될 [전용 특성] 파괴는 아무리 봐도 내게 큰 손해일 것 같았다.
특히, [전용 특성]들이 가진 대단한 위력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내 [생명력 10년].
사신이 내 생명력을 빼앗아가겠다는 말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런 일들이 몇 번 더 있다 보면.
결국, 내 생명력이 다 털리게 될 것이고.
내 [전용 특성]들까지 다 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불길함과 위화감이 갑자기 생겨나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나는 남은 선택지 하나를 놓고서, 계속 생각을 거듭했다.
즉, 결국 남은 건, [지옥 여행 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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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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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여행 6일]??
도대체 이게 뭘까.
단어 그대로 지옥을 여행한다는 의미 같은데.
그리고 그 기간은 6일 정도 걸린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확정하듯 사신에게 그걸 물어보자, 사신은 [지옥 여행, 기간은 6일] 이렇듯 확정하듯 내게 대답해줬다.
그런데 도대체 이 선택지가 어떻게 [생명력 10년], [전용 특성 세 개], [사신의 추종자].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목숨 하나]와 동급인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사신이 나에게 노리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현재, 그 목적 또한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지, 지옥 여행을 한다면, 무슨 목적이 있나?”
그러자 사신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시스템이 목소리 전송에 관여했다.
[···불가! 인과에 의해 공개될 수 없다···]
즉, 알려줄 수 없다고?
인과에 의해 지금은 공개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런데 그럼에도 이건 확실하다.
나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
반면, 사신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존재.
그러니까 서로가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극단의 위치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도 사신은 날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다.
이른바, 6일간의 지옥 여행, 바로 그 인과를 빌려서라도 말이다.
다만, 현재 나로선 어쩔 수 없는 게···.
그 선택지가 현재로선 가장 손해가 없다는 것이다.
지옥 여행 기간은 단 6일에 불과하니까.
휴! 어떡하지.
뭐든 골라야 하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외면할 수도 없다.
물론, 최현미 간호사는 몇 달 내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그걸 그냥 받아들이고.
그녀의 때 이른 죽음도 이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의사라는 게 자기 잇속만 챙긴다면,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자신의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환자들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결국, 그건 내 사명감과 내 정체성, 내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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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잠시 뒤.
나는 눈을 감고서 깊은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눈을 뜨며.
내 결정을 통보하기 전, 몇 가지 질문들을 사신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럼··· 죽음의 저주가 사라지면 최현미 간호사··· 얼마나 더 살 수 있지?”
곧이어 사신은 대답했고, 그 목소리가 시스템을 통해 나에게 들려왔다.
[···인과에 의해 앞당겨진 죽음, 그것이 소멸한다면··· 새로운 인과에 의해 생명은 이어진다··· 최대 60년···]
최대 60년?
그렇다면 이번 ‘죽음의 저주’가 사라진다면, 최현미 간호사는 회귀 전과 달리 아주 긴 시간을 생존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온갖 변수들이 훗날 그녀를 다시금 괴롭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 다시 묻겠다. 천사의 노래··· 이건 딱 한 번··· 딱 한 번의 거래만 가능한가?”
그러자 사방에서 소름을 돋게 하는 웃음소리들이 들리더니.
곧이어 사신의 목소리가 시스템을 통해 나에게 들려왔다.
[···다른 거래를 원하는가? 인과에서 벗어난 거래는 강제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거래는 오로지 당사자가 결정한다···]
그러니까 [천사의 노래] 특전 때문에, 최현미 간호사의 생사와 관련해서는 무조건 사신과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신은 무조건 거래에 응해야 한다. 이건 강제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면, 이때 사신은 그 제안 내용을 듣고서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의미다. 거래를 할지 말지를 말이다. 즉, 비강제적인 거래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다른 거래부터 제안해 보기로 결정했다.
“나, 나한테 [천사의 깃털]이 있다. 이, 이걸 주겠다. 나는 [천사의 노래]를 받고 싶다.”
그러니까 사신의 강림을 1회 취소할 수 있는 권한, [천사의 깃털]을 사신에게 넘기되, 향후 사신과 거래할 수 있는 권한인 [천사의 노래]를 받겠다는 제안이다.
그러자 바로 그때, 사신은 자신의 머리를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수천, 수만, 수십만 개에 이르는 수많은 동공들이 날 노려보기 시작했고.
이때, 그 동공 색깔들이 갑자기 잿더미 같은 회색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괴한 웃음소리들이 난무하더니, 사신은 또 무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스템은 사신의 목소리들을 나에게 전해줬다.
[···너는 욕심이 많구나···]
[···나는 그 ‘은빛 바늘’도 갖고 싶다···]
[···절대 내놓지 않을 생각인가?···]
[···그 의지가···]
그리고 잠시 뒤.
사신의 동공들이 다시금 새카맣게 변했고.
이때, 시스템 알람이 갑자기 들려왔다.
[천사의 깃털이 회수되었습니다]
[천사의 노래가 부여됩니다]
[경험치 +500]
갑자기 그렇듯 거래 성사를 알리는 시스템 알람들이 들려온 것이다.
그러면서 경험치도 획득되었다.
결국, 사신은 내가 제안한, 별개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특전 [천사의 노래]를 다시금 확보하게 되었다.
[특전: 천사의 노래!]
[강림한 사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거래 물품 혹은 대상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그렇게 [천사의 노래]를 확보한 직후, 나는 즉시 최현미 간호사의 목숨값으로 [지옥 여행 6일]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시스템 알람이 또 들려왔다.
[사신의 저주, 지옥 여행 6일이 선택되었습니다]
[해당 페널티는 향후 6개월 이내에 반드시 집행되어야 합니다. 6개월 경과시 강제 집행됩니다]
[사신이 당신을 흥미롭게 쳐다봅니다]
[경험치 +500]
[사신은 즉시 강제 귀환됩니다!]
[축하드립니다! 긴급 특전이 부여됩니다]
[특전! 천사의 날개]
[지옥의 마귀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24시간 유효]
[특전! 천사의 광휘]
[죽음의 저주를 완벽하게 소멸시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그렇듯 연속적으로 들려오던 시스템 알람은 그렇게 끝났고.
사신이 사라지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탈진감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이내 재빨리 이동식 베드 쪽으로 뛰어갔다.
<104>
최현미 간호사의 수술은 그로부터 2시간 뒤, 시작되었다.
이때, 신경외과(NS) 한정미 교수는 긴급 콜을 받고서 병원으로 달려왔는데.
그로 인해 긴급 야간응급 수술은 그렇게 시작되게 되었다.
한편, 현직 중견급 간호사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진 데다가 응급수술대 위에 오르다 보니.
퇴근했던 김완기 흉부외과 과장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왔고.
이것저것 확인한 뒤, 최현미 간호사의 놀란 가족들을 위로하며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뇌수술은 그 과정상 수술시간이 대체로 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수술실 통로 대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밤샘할 생각인 것 같았는데.
잠시 머물 수 있는 회의실 한 곳과 잠시 잠을 잘 수 있는 환자용 침대 몇 개를 따로 빌려놨으나.
가족들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흉부외과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번갈아 가며 3층 수술실로 내려가, 그녀의 가족들을 챙겼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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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오전 내내 응급실에서 내원 환자들을 돌보다가.
일찍 점심을 먹고는, 방지현, 이동욱, 나는 즉시 움직였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레지던트 필기시험,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다.
내과(15점), 외과(15점), 산부인과(10점), 소아과(10점), 영어(5점). 총 55점 만점.
총 110분에 걸쳐서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시험 고사장, 각자의 자리에 앉아 필기시험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게 되었고···.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는 늦은 오후 무렵.
방지현, 이동욱과 나는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응급실 진료에 합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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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근데 동욱이 표정이 좀 심각하지 않아?”
응급실 내원 환자들의 차팅을 진행하고 있던 중, 의료용 카트를 끌고 다가온 방지현이 그렇게 말을 걸자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베드.
거기 커튼은 걷혀져 있고.
이동욱은 어느 할머니 환자를 돌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녀석의 표정이 아무리 봐도 잔뜩 굳어있다.
저게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 할머니 환자는 약간의 폐렴 증세 때문에 내원한, 아직까지는 경증 환자다.
즉, 할머니의 문제가 아니라면, 혹시 오후에 봤던 레지던트 필기시험 때문일까.
사실, 그 시험을 보고 난 뒤, 이동욱은 계속 입을 꾹 닫고 있는 중이다.
방지현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어 조금 답답한 모양인데.
물론, 나는 그 속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사실, 이번 필기시험은 적절한 난이도였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나는 시험을 치른 것 같았고.
특히, 이것저것 경험들이 누적된 탓인지 몰라도, 단 한 문제도 놓치지 않고 나는 다 풀어낸 것 같았다.
반면, 공부도 많이 했던 이동욱.
그럼에도 녀석의 표정은 확실히 심상치 않다.
결국, 잠시 뒤.
이동욱은 여기저기 병동 쪽으로 전화를 돌리더니, 이내 그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하! 저거 어떡하나.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으나.
그럼에도 잠깐 위로해 주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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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동욱!”
“···왜?”
시큰둥하게 날 쳐다보는 녀석.
“나가자.”
그러자 미간을 찌푸리는 녀석.
“어딜? 어딜 나가자고?”
“일요일이잖아. 먼저, 저녁 먹고 오자. 좀 전에 장태욱 선배님도 오케이 하셨어.”
그러자 의료용 카트를 한쪽으로 치운 뒤, 이동욱이 다가왔다.
“지현이는?”
“저기 봐. 좀 전에 들어온 저 학생! 소독 중이잖아.”
그러자 유심히 쳐다보는 이동욱.
환자는 요리학원에 다닌다는 대학생인데, 식도에 손이 베여 황급히 응급실을 찾은 거였다.
그래서 방지현은 몇 가지 검사 뒤, 환부 소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고.
또한, 봉합을 위해 성형외과 병동에 콜을 보낸 상태였다.
“그럼···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
하지만, 인턴 세 명이 한 번에 빠져도 괜찮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걸 확인받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마침 스테이션 근처에 서서, 응급실 수간호사와 이야기 중인 치프 장태욱 선배의 모습이 보였고.
나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스테이션 이시영 간호사가 갑자기 나한테 손짓했다.
“선생님! 흉부외과에서 전화 왔어요!”
흉부외과?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얼른 다가가 그 전화부터 받았다.
그리고 잠시 뒤.
흉부외과 스테이션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좀 전, 최현미 간호사의 뇌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이다.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진행된 어마어마한 대수술.
그럼에도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는 것이다.
다만, 수술 이후 예후 관리가 아주 중요한데.
현재 상황에선 이런저런 합병증들이 발생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최현미 간호사, 그녀는 소생한 것이다.
물론, [지옥 여행 6일]이라는 위험천만한 선택지를 고른 대가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몇 가지 얻은 것들이 있다.
특전 [천사의 날개]와 특전 [천사의 광휘].
특히, [천사의 광휘]는 1회 한정이지만, ‘죽음의 저주’를 소멸시킬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특전이다.
그 때문에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클래스 S)을 완수하는 게 오히려 쉬워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아버지(김윤상 의원)가 짊어지고 있는 ‘죽음의 숙명’을 극복하는 게 이번 미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특전을 시스템이 부여할 정도라면, 결국 지옥 여행 자체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치프 장태욱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 뒤.
방지현도 데리고서 본관 지하 1층 교직원 전용 식당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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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시민상
<105>
“야, 먼저 먹자.”
어묵 무국에 쫄면야채무침, 계란후라이, 참치두부조림, 콩나무 무침 등의 반찬을 배식받은 뒤, 식판을 먼저 탁자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식사는 진행되었다.
이렇게 식사하는 와중에 갑자기 콜이 날아들 수도 있어, 다들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것이다.
그로부터 잠시 뒤.
가장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손목시계를 꺼내 쳐다봤다.
이때, 이동욱은 밥맛이 없는 듯 대충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내가 묻자, 이동욱은 날 쳐다보다가 쓴 미소를 지었다.
“시험 때문이지?”
다시금 내가 상황에 대해 묻자, 결국 이동욱은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아직 실기시험이랑 면접 전형도 남았잖아.”
그러나 이동욱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걸 보면, 정말 시험을 못 본 모양이다.
“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에이-씨!”
잠시 후, 투박하게 흘러나오는 녀석의 목소리.
그런데 바로 그때, 약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방지현.
그녀가 이동욱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위로의 말들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위로.
인턴 점수 등도 합산해야 하고.
그렇듯 아직 변수가 있다는, 위로 겸 조언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도대체 저게 무슨 일이지.
방지현이 이동욱의 일에 저렇듯 신경을 써 줬던가.
즉, 나로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때문일까.
이동욱 역시 방지현의 변화에 좀 놀란 듯 표정이 이상해졌고.
잠시 멍하니 방지현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방지현은 계속해서 이동욱을 위로했고.
그러자 이동욱의 표정은 점점 더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녀석은 어느 순간부턴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사실, 언제나 이동욱은 먼저 나서서 방지현의 일들을 도왔고.
마치 방지현의 스토커 같기도 하면서도 때로는 몸종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래서 방지현은 언제나 이동욱에게 냉랭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대화 모습이 갑자기 바뀌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변화는 방지현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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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아, 그럼 산부인과는 결국 어떻게 됐어?”
“뭐?”
“산부인과 레지던트 지원자! 산부인과 경쟁률?”
한편, 방지현은 갑자기 그렇게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순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보니 신경을 쓰지 않게 된 산부인과 레지던트 경쟁률.
그런데 방지현은 갑자기 그 경쟁률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음,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거기도 미달이야. 대략 한 명 지원했던가.”
“한 명? 그럼 TO가 남았네.”
그렇긴 한데.
그게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일까.
당연히 이동욱은 일반외과(GS)로 가게 될 텐데.
그런데 이때 뜻밖의 변화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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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아! 그럼 후기 지원 때, 산부인과에 넣으면 되겠다.”
그렇게 방지현은 이동욱에게 말했고.
한편, 두 눈이 약간 커지던 이동욱은 어느 순간 점차 침착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동욱과 달리, 나는 점점 더 당황하게 되었다.
이동욱에게 그토록 만류했던 산부인과 전공.
왜냐하면, 산부인과 쪽은 아무리 전문의라고 해도 (남자 의사이기 때문에) 향후 로컬 쪽으로 나가는 것조차 무척 힘들어지게 된다.
출생률이 갈수록 떨어지게 되는 미래 사회. 필요한 의사 숫자가 줄어드니 당연히 산부인과 여자 의사 쪽으로 환자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각종 수술을 포함하는 대학병원은 예외겠지만 말이다.
“야! 산부인과가 좋긴 한데, 저번에도 말했잖아. 앞으로 출생률이 많이 줄어들 거고···.”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중간에 멍해지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저번 논란 때도 방지현이 즉각 내 말에 반격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정민! 넌 좀 그만해!! 야, 이동욱! 저 말 절대 듣지 마! 우리 같이 그냥 열심히 해서, 대학병원에 계속 남아 있자! 산부인과는 메이저니까, 수술도 많은 편이고. 대학병원에 있으면 환자 끊길 일도 없잖아? CS(흉부외과) 수술 참여하면서 많이 봤잖아? 수술도 할 만하다는 것. 그렇지? 너도 그렇게 느꼈지?”
그러자 이동욱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사실, 나도 원래부터 산부인과엔 관심이 있었어. 수술 적성이 안 맞긴 해도, 해야 한다면 그 일은 할 수 있어.”
한때, 산부인과 전공 선택을 놓고서 한참 고민하던 이동욱.
그런데 그때 했던 그 고민들이 절대 허튼 고민들이 아니었나 보다.
방지현이 갑자기 저런 말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전공 선택을 저렇듯 함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산부인과 전공’ 문제가 다시금 튀어나오자, 이동욱은 또다시 큰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과거, 회귀 전의 이동욱은 ‘일반외과’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그걸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때의 녀석은 그 전공에 특별하게 적응을 잘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문의 자격은 얻었고, 이후 녀석은 지방의 어느 종합병원에 취업했다.
그러다가 방지현의 사후,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던 녀석은 어느 순간 소식들이 완전히 끊기게 된다.
그런 그가 지금 OB-GY(산부인과) 전공 선택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선택이 괜찮을까.
나는 묵묵히 이동욱을 쳐다보다가 곧이어 방지현도 쳐다봤다.
근데 지금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마치 ‘산부인과’ 선택을 극도로(?) 싫어하는 빌런(?)이 나타났기 때문에, 저들 두 사람 사이에 다시금 공통분모가 생긴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고.
그래서 저들은 더 열심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섣불리 간섭할 수가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내가 지금껏 봤던 수많은 모습들 중에서.
가장 여친다운, 가장 남친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사이가 꼭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현재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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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로부터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는데···.
2001년 12월 7일 금요일.
성국대 병원 레지던트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이틀 전, 면접 및 실기시험을 치렀고.
이후, 합격자 발표까지 쭉 이어진 것이다.
당연히 흉부외과 레지던트 합격자는 방지현과 나였다.
그러나 이동욱은 결국 피부과에서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후기 지원!
그런데 이동욱은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서도 나름 마음을 정리한 것 같았다.
그래서 크게 실망한 표정도 아니었다.
반면, 그의 지원 상황은 회귀 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렸는데.
일반외과(GS) 지원이 아닌, 녀석은 산부인과(OB-GY) 지원으로 마음을 확고히 한 것이다.
중간에 나는 몇 번 밥을 같이 먹으면서, 계속해서 조언해 봤지만.
이동욱은 뭔가 확신을 가진 듯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야, 그만하자. 내가 일반외과 가서 뭐하게? 거긴 분위기도 안 좋은데. OB-GY(산부인과)로 결정했어. 그만하자.”
그렇듯 이동욱은 더는 고민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회귀 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사건이다.
물론, 이런 결정 과정에서 내가 영향을 미친 것도 무시할 수가 없다.
나 때문에 방지현이 흔들렸고.
그 과정에서 ‘산부인과’ 이슈가 튀어나오지 않았나.
결국, 이동욱은 ‘피부과’ 지원에서 탈락했으나.
그때 형성된 이슈가 결국 이동욱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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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게 나비효과인가.
이런 걸 보면, 인간의 운명이란 절대 정해진 길로만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수많은 사건들.
그 사건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타의의 영향을 받든, 아니면 자의에 의해 결정하든, 인간은 그 순간순간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고 또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스크럽 널스 최현미 간호사를 노렸던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저주’를 떨쳐냈을 때.
사신은 그녀의 수명을 최대 60년이라고 말했다.
사신은 최종 수명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 그저 최대치만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또 다른 조건 충족이 발생하게 되면, 그 중간에 또 다른 치명적인 ‘죽음의 숙명’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의 낙인’이 다시 찍히게 된다면, 그걸 떨쳐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다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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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근데 어떻게 될까.
방지현과 이동욱.
과연 이 두 사람의 일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지만, 또한 좀처럼 종잡을 수도 없다.
특히, 산부인과 전공을 선택하려는 이동욱의 인생에 대해선, 이젠 뭐든 특별히 조언할 수도 없게 되었다.
완전히 바뀌게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사이에도 변화가 생길까.
확실히 변수가 생겼으니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현시점에선 절대 알 수 없는 일!
이른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듯한 그런 느낌이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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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고···.
2001년 12월 10일 월요일 새벽.
서울 하늘에 초겨울의 낭만과도 같은 새하얀 눈들이 낙엽처럼 흩날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초겨울이다 보니, 바닥으로 내려온 눈들은 촘촘히 쌓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녹아 사라져 버리는 눈들.
그저 기분 좋게 내리는 듯한 그저 그런 느낌이었다.
한편, 새벽부터 시작해서 정오까지 응급실 환자들을 챙기며 수시로 각 병동에 노티를 넣다 보니, 그사이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어느덧 늦은 오후 무렵, 나는 잠시 응급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택시를 타고서 인근 경찰서에 도착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 사제총기 사건 범인 검거와 관련해서, ‘용감한 시민상’ 수상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철성 교수님과 함께 나는 그 표창을 받기 위해, 시간에 맞춰 경찰서에 도착했는데.
그런데 잠시 뒤.
그 경찰서 입구 쪽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십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애써 모른 척하며, 곧장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 날 빤히 쳐다보더니.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혹시··· 성국대 병원 김정민 선생님? 맞으시죠?”
순간, 내가 움찔하며 쳐다보자, 그 기자는 직감적으로 내가 그 당사자인 것을 알아차린 듯 바로 웃으며 외쳤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일전에 연락드린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저는 K일보 김치훈 기잡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많은 카메라들이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갑자기 요란한 플래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기자들은 우르르 내 쪽으로 따라붙으며, 고함까지 지르며 온갖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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