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약혼 발표 02
<107>
2002년 1월 26일 토요일 오후 5시.
그렇듯 약혼날짜와 시간까지 합의가 됐다고 한다.
물론, 이 스케쥴 확정은 김윤상 의원과 한태산 회장이 오찬을 같이하면서 전격적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런 뒤, 마치 쐐기를 박듯 한쪽에서 이 사실을 언론에 흘린 것이다.
“···도련님, 원래 예상 날짜는 5월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혼날짜가 빨라진 건, 순전히 한태산 회장의 뜻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혹시, 건강 문제 때문에···?”
“네. 맞습니다. 도련님. 한태산 회장이 심장 수술을 하긴 했으나 혹시 몰라 그 위기감이 아주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한 포석을 서둘러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포석?
바로 그룹 후계자 문제다.
“그럼··· 한유나씨의 지분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된 겁니까?”
“우선, 한태산 회장은 한유나씨가 그룹 경영에 참여하는 걸 절대 원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후, 형제간의 다툼, 남매간의 다툼, 자매간의 다툼 등이 벌어지는 걸 절대 원치 않고 있습니다.”
하긴, 자신의 사후, 자식 세대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면, 누군가는 승리하겠지만 누군가는 그 싸움에서 패배한 뒤 비참하게 도태될 것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후계자에 대한 확실한 정리를 할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정이 쉽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
이미 야망을 갖게 된 한태산 회장의 자식들!
특히, 2남 한윤수와 3남 한윤형은 한태산 회장이 만들어나갈 후계 구도에 대해 그 심리적 반발감이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즉, 장남 한윤기가 신라그룹 총수 자리에 오르는 걸 그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을 테고, 또한 가만히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는 미래의 한윤수와 한윤형의 모습은 지극히 공격적이지 않았나.
실제, 그들은 장남 한윤기 회장을 상대로 형제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법정 공방까지 이어지는 아주 치열한 지분 싸움이 이때 일어나게 되고.
신라그룹이 두 토막이 나는 선에서 결국 최종 승자가 결정되게 된다.
바로 장남 한윤기 회장!
그는 간신히 수성에 성공한 뒤, 신라그룹 총수 자리를 유지하며 형식적으로 최종 승자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추가적인 사항이 있다.
만약 내가 신라그룹과 계속 무관했다면, 전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사항이지만.
지금은 내 입지가 달라지고 있으므로.
그 추가적인 사항이 향후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오히려 더 중요한 사항이 될 수도 있다.
즉, 그 형제의 난에서 또 다른 승자가 있다는 것.
당시, 아주 지독했던 형제간의 지분 분쟁은 결국 몇 개의 주요 계열사가 신라그룹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이때, 그 나머지 전부를 가져간 이가 바로··· 2남 한윤수였다.
그는 3남 한윤형과 연합 라인을 형성하며 장남 한윤기 회장에 대응했다가, 마침내 그 새로운 그룹의 총수가 되는데.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뒤.
한윤형 부회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면서 그 나머지 부분들을 완벽하게 독식하게 된다.
그 때문에 모체인 신라그룹으로부터 새로운 그룹을 창출해낸 2남 한윤수 회장!
어쩌면 그가 그 치열했던 형제의 난에서 진짜 최종 승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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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실장님! 한유나씨의 지분은 어떻게 정리되는 겁니까?”
사실상, 한유나의 지분은 이런 신라그룹 후계 구도에 있어, 지속적이면서도 잠재적인 위협 요소가 될 수 있을 정도다.
비록 아버지의 힘 때문에 한태산 회장이 한유나의 지분을 더는 노리지 못하게 됐다고 해도, 한태산 회장은 한유나로 인해 신라그룹에 어떤 위험한 상황이 생기는 걸 절대 원치 않을 것이다.
결국, 한유나의 지분을 억지로 빼앗진 못하겠지만.
어떡하든 무언가 제동 장치를 걸어두려고 할 것이다.
“도련님. 뭐, 도련님께서도 곧 아시게 될 테니까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한유나씨의 지분과 관련하여 그 의결권. 바로 그 의결권에 대한 제약, 그리고 매매 권한 등에 몇 가지 제약이 걸리게 됐습니다.”
“제약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제약을 말하는 겁니까?”
“쉽게 설명해 드린다면, 의결권 쪽으론··· 앞으로 장남 한윤기 부사장에 대해선 어떠한 적대적인 의결을 할 수 없다는 제약입니다. 다시 말해, 장남 한윤기 부사장한테 무조건 우호적인 위치에 있는 그런 지분이 되는 셈입니다. 또한, 앞으로 향후 5년간 그 지분을 절대 매각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입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건 또 없습니까?”
“그리고 5년 뒤···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도 몇 개의 조건이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 지분의 매각시, 우선적 협상권이 장남 한윤기 부사장한테 주어졌습니다. 또한, 매각 주체가 절대 한윤수 부사장 혹은 한윤형 전무가 될 수 없다는 조건도 달렸습니다.”
결국, 이것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태산 회장은 장남 한윤기 부사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바로 장남 한윤기 부사장이 신라그룹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장남 한윤기 부사장이 그룹 총수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 혹시··· 또 다른 건 없습니까?”
“결국, 그 정도 선에 최종 합의가 됐습니다. 물론, 추가적인 조건도 있었는데··· 나머진 모두 의원님께서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혹시 그 외의··· 다른 건 없습니까?”
“아, 이건 별개의 일인데··· 향후 장남 한윤기 부사장의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이건 한태산 회장이 의원님께 직접 부탁한 일입니다.”
“그럼, 그건 부탁입니까? 아니면···?”
“도련님!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단순히 부탁한 것뿐입니다.”
와!
역시 대단하다.
아버지가 한태산 회장과 만나, 그런 합의까지 이끌어 내다니.
한편으론 아쉬운 점들도 있으나.
그럼에도 이것저것 따져보면,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합의였다.
한유나는 결국 자신의 지분을 지켜낼 수 있었고.
그룹 내 자신의 입지도 순식간에 탄탄해진 것이다.
특히, 한유나는 장남 한윤기 부사장의 우호세력이 되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한윤기 부사장은 어쩔 수 없이 당분간 한유나를 보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중간에 끼어있는 아버지 김윤상 의원의 역할 때문이다.
그렇듯 한유나 외에도.
장남 한윤기 부사장은 이번 협상으로써 큰 이익을 챙기게 된 것인데.
반면, 2남 한윤수와 3남 한윤형, 그들은 졸지에 입지가 위태롭게 된 상황이다.
왜냐하면, 장남 한윤기 부사장을 옹립(?)하게 될 한유나의 신라전자 지분, 그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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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대단하시네요. 한유나-한윤기, 이렇게 묶어버리면서 그룹 전체를 안정화시켰으니까 말입니다.”
“도련님! 그걸 바로 아시는군요! 그래서 한태산 회장도 이 합의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내딸의 미래까지 지켜낼 수 있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모든 걸··· 끝까지 조정해내신 건 바로 의원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여러모로 너무 아쉽습니다.”
“네?”
“도련님께서 의대가 아니라··· 차라리 법대 혹은 정치외교 등을 전공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됐다면 의원님의 지성까지 물려받으신 도련님께서··· 훗날 의원님의 지역구 역시 물려받으시고···.”
“하! 저기,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하시죠!”
“흠흠.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럼 실장님! 앞으로 제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우선··· 제 생각엔······ 아, 그게 순리겠죠. 한유나씨한테 서둘러 연락을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긴 연락 같은 건 해야겠지.
어쨌든 부모들 선에서 협상이 끝난 건데.
그러다 보니 어쨌든 우리는 좀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회귀 전, 결혼 때도 이런 식의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 보니, 이건 참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사실상, 정략결혼, 아니 정략 약혼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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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한유나씨도 이 협상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아마, 지금쯤 알게 됐을 겁니다. 지분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후 아주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제가 정말 약혼하는 겁니까?”
역시나 기분이 이상하다.
비록 내가 약혼을 한다고 하지만.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생경한 기분.
바로 그런 기분만 가득하다.
“도련님. 혹시 몰라 제가···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
“한태산 회장이 도련님을 사윗감으로 생각한 이유는··· 바로 도련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한유나씨이기 때문입니다.”
“네?”
“시작은 바로··· 즉, 한유나씨가 시작한 일입니다.”
한유나가 시작했다?
순간,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대충 머릿속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
하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신라그룹 회장이 일개 의사인 내 말을 들을 줄 리는 없지 않은가.
“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그러자 순간,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도련님께서 모르신다면 대체 누가 그걸 알겠습니까!”
“···음···.”
“아,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조금 더 덧붙이겠습니다. 저번 회동 때··· 한태산 회장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들이 좀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그렇듯 내가 신중하게 묻자, 강제철 실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도련님의 모습. 그 모습을 한유나씨가 얼핏 봤다고 합니다. 그때 잠깐이었지만··· 아주 형용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충격과 감동?
나는 잠시 그 말들을 속으로 되뇌어 봤다.
하긴, 당시 외톨박이 신세나 다름없었던 한유나.
그녀의 상황에선 어쩌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도련님이라면,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고 했습니다.”
날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하!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또한, 다시는 그런 일 없이··· 꼭 살고 싶고, 또 살아남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선 도련님이 꼭 필요하다고··· 한태산 회장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꼭 살고 싶다?
또한, 살아남고 싶다?
하긴, 한유나는 두 번의 생사의 위기가 있었다.
특히, 두 번째 맞이한 생사의 위기는 킬러가 그녀를 노렸던 바로 그 순간이 아닌가.
물론, 그런 위기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살아남았고.
나는 그녀를 두 번이나 구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강제철 실장이 보내준 신라그룹 기밀 서류들 때문에 대략적인 상황을 아는 나는 그 덕분에 그녀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태산 회장도 딸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 보니, 먼저 의원님께 연락을 취했던 겁니다.”
그렇듯 그간의 사정들이 강제철 실장의 입을 통해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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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실장님. 근데, 통화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서···.”
잠시 후, 강제철 실장은 즉시 내 말에 동의했다.
“네. 도련님. 이만 끊도록 하죠. 그리고 하나만 더··· 노파심에서 말씀드린다면, 앞으로 한태산 회장을 특히 조심하십시오. 도련님에 대해서 더 주목할 것이고, 도련님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어쨌든 도련님 뒤에는 의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아마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고는 강제철 실장은 긴 통화를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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