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나의 저택 01
<108>
“···죄송합니다.”
잠시 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좀 전에 생각보다 긴 통화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통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려준 치프 장태욱 선배.
그는 잠시 후 이동욱을 만류한 뒤 내 앞으로 다가왔고.
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응급실 밖으로 나갈 순 없다.
아직도 기자들이 들끓고 있기 때문.
할 수 없이 우리는 응급실 옆, 회의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잠깐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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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한다며?”
치프 장태욱 선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나한테 물었다.
흉부외과 김재호 선배와는 다르게,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열혈 의사다운 선배인데.
수많은 환자들이 오가는 응급실에서, 그리고 생사를 다투는 최일선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다 보니,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대하고 또한 맺고 끊어짐이 칼 같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선배였다.
“진짜 약혼하는 거 맞아? 내가 치프로서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잠시 나는 장태욱 선배의 피로에 지친 두 눈을 쳐다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혼 예정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장태욱 선배의 표정이 정말 이상해졌다.
놀란 듯 입이 약간 벌어지고 있었고.
동공이 정신없이 좌우를 오가고 있었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날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그의 입꼬리가 쭉 길어지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야, 축하한다. 김정민. 벌써 니가 그렇게 됐냐?”
한편, 그 말에 나는 바로 어색해져 나도 모르게 이마를 만지며 머리를 긁적였다.
영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럼, 신라그룹 막냇사위가 된 거네?”
“···네. 그게··· 어쨌든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아직은 약혼만······.”
“무슨 소리야! 약혼이란 게 순전히 결혼 전제잖아! 막냇사위 맞잖아?”
나는 다시금 어색하게 웃었다.
“우와, 진짜 대박이다! 흉부외과에서 니가 잘했다는 건 나도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이건 진짜 예상 밖이다.”
어느새 나보다 더 흥분한 상태가 된 장태욱 선배.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김춘식 환자 건도 그렇고, 강한별 그 애도 그렇고···. 확실히 넌 달라. 우아, 그러니까 재벌가 사위가 될 수 있나? 야! 암튼, 다시 한번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또 어색해하며, 민망해하며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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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그래서 말인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네?”
“병원 계속 다닐 거지?”
이때, 나는 잠시 의아해하며 장태욱 선배를 쳐다보다가.
그의 진짜 말뜻을 깨닫고 재빨리 대답했다.
“선배님! 저는 계속 의사할 겁니다!”
“야! 재벌가 막냇사위인데, 다른 일도 할 수 있잖아?”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제 천직입니다.”
“천직? 근데 천직도 바뀔 수 있는 건데. 야, 회사 경영도 괜찮지 않아?”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배운 게··· 환자 치료하는 거밖에 없습니다.”
“근데, 어려운 의대 공부도 했는데, 회사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
“네??”
“우린 하루 몇 시간 빼고 일만 하는데 뭐든 못할 게 없잖아? 때로는 안 자고 며칠도 버티잖아? 그보다 덜한 회사 일이야 차근차근 배우면 되는 거고.”
그렇기야 하지만.
아직은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듯 내가 강한 부정의 의사를 보이자, 장태욱 선배는 아쉬워하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무척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암튼, 너도 참 멋져!”
“아뇨, 제가 뭘요···.”
“야, 민망해할 게 없어. 근데 정민아! 저 밖에 있는 기자들,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할 거냐?”
한편, 병원 바깥에 모여 있는 기자들.
그런 기자들 덕분에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인근 응급실이 이런저런 영향을 받는 게 사실이다.
저번 사제총기 사건 때도 응급실은 큰 소란을 빚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장태욱 선배는 기자들 문제가 얼른 사라지길 원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하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가서 인터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신라그룹 측 반응도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회의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장태욱 선배가 즉시 문을 열어주자, 그곳엔 응급실 최민정 간호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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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흉부외과 박윤후 교수님께서 김정민 선생님을 지금 찾으십니다!”
이때 흠칫 놀라는 표정인 장태욱 선배.
“박윤후 교수님께서?”
“네! 지금 바로 뵙자고 하시는데.”
그 말에 장태욱 선배는 다시 날 쳐다봤다.
사실, 며칠 전 성국대 병원 보직인사 안이 발표되었고.
그 과정에서 차기 병원장 겸 의대 부총장에 박윤후 교수님이 발탁된 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런 병원 보직인사 건은 신문 보도를 통해 대외적으로도 알려졌는데.
그런 차기 병원장이 날 찾는다는 말에 그리고 이것저것 일들까지 겹친 터라, 장태욱 선배는 약간 색다른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그리고 좀 전에 기자들이 다 흩어졌고, 지금은 조용해졌어요.”
그렇듯 이어지는 최민정 간호사의 말에 장태욱 선배는 의아해하며 즉시 되물었다.
“최 간호사님, 그럼 기자들은 다 간 겁니까?”
“네. 그런 것 같은데.”
“······?”
“아, 선생님! 자세한 건 모르겠고···. 아까 손예지 선생이 구경하다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신라그룹 쪽에 뭔가 일이 있다면서···.”
신라그룹 쪽에 뭔가 일이 있다?
설마, 신라그룹 측에서 이번 약혼 발표를 공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자세한 내막을 여기선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장태욱 선배와의 대화를 마친 뒤 그 회의실에서 나왔고.
이제 박윤후 교수님을 만나기 위해 즉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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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똑.
잠시 후, 노크를 하고서 문을 열자, 데스크 모니터를 한참 쳐다보고 있던 박윤후 교수님은 바로 돋보기안경을 내려놓고서 날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표정이 즉시 바뀌더니 바로 일어섰고.
그는 한쪽 소파 쪽을 손짓했다.
“어서 들어오게. 김 선생!”
잠시 후, 나는 길쭉한 소파 한쪽에 앉았는데.
박윤후 교수님은 가장 안쪽 상석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바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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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들었네.”
그렇듯 박윤후 교수는 그 말부터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이라는 말 자체가 무척 의미심장한데.
알 수 없는 미소까지 보이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소식 말이야. 이래저래 알게 된 친한 기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한테서 자네 이야기를 먼저 들었네. 그리고 좀 전에 서철성 교수한테 연락해서 확인도 받았고. 그래! 자네, 약혼한다며?”
와, 벌써 아시는구나.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교수님.”
“혹시··· 저번에 VIP실 병동에 있던, 그 환자 맞지?”
“네. 맞습니다. 2002호실에 있던 한유나씨.”
“자네가 그때 수술도 참여했었지?”
“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환하게 웃는 박윤후 교수.
“하하, 하하하.”
그렇듯 한참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됐어! 결국, 자네가 와이프될 사람을 수술한 거니까 더할 나위가 없군.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VIP실 병동에 문제 터졌을 때, 자네가 나서서 구한 사람도···.”
“네. 맞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군! 아마 전생이란 게 있다면, 자네 전생에 그만큼 인연이 대단했던 모양이야.”
그럴까?
물론, 나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정말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근데 이게··· 아직 완전히 발표된 게 아니라서···.”
“발표가 문젠가? 당사자들이 더 중요하지.”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그 말에 바로 뜨끔해졌다.
박윤후 교수님은 아마도 이 시대 정략결혼 방식에 대해서 잘 모를 것이다.
당사자들의 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합의와 가문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그런 데다가 문제는 내가 제대로 한유나와 만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 한유나와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주머니에선 요란하게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박윤후 교수님의 앞이라 되도록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박윤후 교수님은 이제 공식적인 차기 병원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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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른 게 아니라··· 자네, 오프 같은 시간도 좀 필요하지?”
“네?”
이때, 나는 약간 눈이 커졌다.
인턴에게 ‘오프’는 사치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주 꿀 같은 것이다. 형식적인 ‘오프’가 아닌 진짜 ‘오프’일 경우에 말이다.
“좀 전에··· 응급의학과 과장하고 통화했네.”
“······?”
“혹시 필요하다면, 오늘 저녁에 ‘오프’ 시간을 갖도록 하게. 마침 ‘용감한 시민상’ 수상까지 했는데. 잘됐네. 그리고 그 상에 관해선, 공식적으로 병원에서 언론 보도를 할 거네. 병원 홍보 목적도 있고 해서···.”
“그럼 교수님! 저는, 지금부터···?”
“그래. 그렇게 하게. 응급실에 들러 잠깐 이야기만 하고. 그러고 나서 외출하면 될 거네.”
그러면서 인자하게 웃는 박윤후 교수.
이때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각부터 나는 하룻밤 ‘오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낙하산 ‘오프’.
갑작스러운 ‘오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박윤후 교수님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어 이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참! 그리고 하나만 더.”
“네! 말씀하십시오. 교수님.”
“자네 당분간··· 신라병원으로 갈 생각은 말게.”
“네?”
“신라그룹 막냇사위가 되면, 나중에···.”
이때,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바로 대꾸했다.
“교수님! 제 모교는 성국대입니다! 무조건 레지던트 과정은 여기서 마칠 겁니다!”
그러자 다시 묻는 박윤후 교수.
“그럼 레지던트 과정 끝나고, 그땐 떠날 생각인가?”
“아, 아뇨. 그건 그때 봐서···.”
그러자 피식 웃는 박윤후 교수.
“아무튼, 자세한 건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리고 이건 조언인데, 웬만해서는 기자들과 엮이지 않는 게 좋네. 기자들이 이것저것 알아내는 재주가 꽤 대단하거든. 김 선생! 그럼 바쁠 텐데, 어서 가보게.”
그래서 나는 즉시 일어섰고.
90도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나온 뒤.
응급실에 들러, 치프 장태욱 선배와 잠시 이야기했다.
그런 뒤, 나는 즉시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략 한 시간가량 한유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신라그룹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뒤, 정장 차림을 하고서 나는 병원 앞으로 다시 나왔다.
이때 막 도착한 검정 중형 벤츠를 발견하자 그 차량에 즉시 탑승했고.
이제 한유나와의 약속 장소.
즉, 그녀가 최근에 이사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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