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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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는 총 세 종류였다.
먼저, 강제철 실장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던, 한유나의 지분과 관련된 의결권 제약 관련 서류였고.
그 서류 끝엔 한유나의 사인과 인감도장이 찍혀 있었다. 법무법인의 공증까지 받은 상태다.
그리고 두 번째 서류는 한유나와 아버지가 맺은 계약서였다.
그곳엔 뜻밖의 내용들이 적혀 있는데.
오로지 한유나의 의무 사항만 적혀 있었다.
즉, 그녀가 가진 지분의 10%를 5년 뒤에 나에게 증여한다는 내용.
그리고 한유나가 가진 지분에 대한 의결권의 50%를 향후 20년간 내가 갖는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 끝에도 한유나의 사인과 인감도장이 동일하게 찍혀 있었고.
법무법인 공증까지 완벽하게 완료된 상태다.
나는 두 번째 그 서류를 보다가 놀라며 한유나를 쳐다봤고.
한유나는 아무 말 없이 내가 그 서류들을 모두 다 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서류도 꺼냈고.
조심스럽게 확인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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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씨! 이건···?”
그런데 세 번째 서류는 더 놀랍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지며, 탄성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한유나는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민씨. 절 두 번이나 구해주셨는데, 저도 답을 드려야죠.”
답?
이게 답이라고???
“정민씨에 대해 아직 모르는데 더 많지만··· 마음이 무척 따뜻한 분이라는 것··· 그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 한유나의 두 눈엔 짙은 우수가 깃들기 시작했다.
상문그룹 서정국 회장의 회갑연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때 나타났던 그 우울감과 창백함의 모습.
그런 모습이 다시금 한유나의 얼굴에서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마우신 정민씨한테··· 제가 못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많이 고민했고 무척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못된 짓???
고민???
죄책감???
이때, 나는 잠시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뭔가 질문을 하려다가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 한유나는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적어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여러 질문들을 애써 삼킨 뒤, 나는 그녀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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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실장님께선··· 정민씨와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게 되었는데.
이때, 한유나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신라그룹의 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했어요. 어느 날, 엄마는 수술받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세상 누구도 그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를 수술했던 집도의··· 그 사람 어떻게 됐는 줄 아세요? ···신라병원 현직 병원장입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한유나의 모친은 신라병원에서 수술받다가 갑자기 사망했고.
당시, 수술 집도의는 사망 책임이 있음에도 더 승승장구했다.
현직 신라병원 병원장까지 된 건데, 이건 누군가(?)의 비호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편, 강제철 실장이 보내준 기밀서류에는 그런 내용들도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윤상 의원님은··· 그렇게 거대한 신라그룹에 큰 타격을 줬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어느새 거대 계파를 이끌고 계신, 대단한 힘을 가지신···. 그래서 저는 정민씨한테··· 너무 죄송합니다. 제 생명까지 구해주셨는데···.”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정략적 배우자로서 날 선택했다는 것이다.
강제철 실장도 이미 말했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번 약혼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인 셈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또 다른 이야기도 꺼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고는 그녀는 날 궁금하게 만들 요량인지 한참 말이 없었고.
할 수 없이 나는 질문을 던졌다.
“유나씨,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녀는 말없이 날 빤히 쳐다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 느낌이 좀 이상했어요. 정민씨를 처음 봤을 때···.”
“네?”
“그때, 정민씨가 계속 절 쳐다보셔서··· 저도 정민씨를 쳐다봤는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어요. 기분이 너무 이상해져서···.”
기분이 너무 이상해지다?
도대체 그건 무슨 말이지.
“그리고 또 정민씨를 봤어요.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가 희미해지던···.”
아마도 저건 응급처치 때를 이야기하나 보다.
그러면서 한유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정민씨는 처음에 어땠어요?”
그렇듯 한유나는 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표정이 조금 변하며 흠칫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 나는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히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한유나가 저렇듯 말하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설마 그게 아닌 다른 이유가 따로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회귀 전의 나는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그 회갑연에 갈 수도 없었다.
회귀 전에는 한유나와 만날 인연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비운의 공주(?) 한유나의 이야기.
이건 사람들이 신라그룹의 비정함을 은근히 조롱할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미래의 단골 이야깃거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그녀는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있다.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다.
비운의 공주(?)가 아니라, 아주 생생한 모습으로써.
그리고 바로 그때.
갑자기 묘한 느낌들이 온몸으로 확산되는 듯싶더니.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고개를 숙여 그 세 번째 서류를 다시금 쳐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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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꼭 결혼해요]
그런 글자가 적혀 있는 노란 포스트잇.
그게 붙여져 있는 혼인신고서.
그리고 그 혼인신고서 안에는 한유나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내 이름도 거기에 쓰여 있었다.
다만, 한유나는 이미 사인을 한 상태지만.
내 이름 칸에는 아직 사인이 안 된 상태다.
한편, 나는 그 혼인신고서를 계속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뜻밖의 시스템 알람이 우리 두 사이의 작은 침묵을 깨듯 내 귀에 무척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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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감춰져 있던 히든 미션···]
[히든 미션이 성공적으로 달성되었습니다!!]
[히든 미션(운명적 만남)!!]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해도 언제나 엇갈릴 수 있습니다.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사건들은 이 운명을 난도질합니다···]
[그렇게 끊어져 버린 줄은 이제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걸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때, 새로운 세상은 아주 새카맣게 타 버린 줄마저 다시 이어주게 됩니다···]
[히든 미션 달성에 따라··· 업적 보상이 주어집니다···]
[특별 업적 보상······]
그러고는 보상 내역이 차례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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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경고! 이 파편을 재생하게 되면, 영원히 그 기억은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그 기억을 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파편이 재생될 경우, 당신은 사고 당시의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전: 거짓 없는 입](3)
[거짓 없는 입: 대상자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특전: 검은 고양이(S)]
[검은 고양이(S): 어두운 곳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서도 10분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그렇듯 다양한 특전들이 즉각 부여되었고.
이때, 나는 [특전: 거짓 없는 입]이 총 3개나 부여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특전: 거짓 없는 입](3),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때 날 무척 긴장하게 만든 것은···.
바로 [특전: 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이었다.
<110>
“···그럼 다음에 또 만나죠.”
저택 현관 앞.
한유나, 강소정, 김유리는 배웅을 나왔다.
“형-부! 그럼 데이트는 언제 하세요?”
이때, 김유리는 다시 발랄하게 물었고.
이전과 달리 나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유나씨한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려고요. 다만, 제가 시간이 없어서 12월 15일이나 가능할 것 같아요. 시골병원에 파견근무 갈 건이 있는데··· 그때 시간이 좀 생길 것 같고. 유나씨! 혹시 그때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그러자 한유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네··· 그럴게요. 정민씨.”
“근데 유나씨! 뉴욕은 언제 가세요?”
한유나는 잠시 중단했던 공부를 재개할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미국 시스템에 맞춰 내년 9월부터 공부를 시작할 생각인데, 그러나 그 전에 뉴욕 여행 등을 먼저 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이런저런 일들이 생겼고, 그래서 그 일정이 현재 늦춰진 상태다.
“···크리스마스이브 전에 갔다가, 연말에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런데 이때, 갑자기 김유리가 다시 나섰다.
“유나 언니! 꼭 안 가도 되잖아? 크리스마스는 형부랑 보내야지! 형부가 바쁘면, 언니가 병원에 찾아가면 되잖아?”
“···어?”
순간, 무척 당황한 표정인 한유나.
“그리고 왜 그렇게 자꾸 ‘씨’를 붙여? 형부가 더 나이가 많은데. 그냥 오빠라고 하면 안 돼?”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날 ‘형부’로 칭하고 있는 김유리. 그 정도로 외향적인 성격이 엄청난데. 반면, 한유나는 무척 나한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때, 강소정마저 그렇게 하라고 눈짓했고.
그 모습이 무척 재밌어 보여 나는 한유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이 때문에 큰 부담감을 느낀 듯.
한유나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언니! 좀 크게 말해!”
순간, 김유리는 다시 외쳤고.
이때 한유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입가에 작은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그녀는 입을 열었다.
“오···빠.”
그리고 그 순간.
한유나의 두 볼.
마치 홍시처럼 빨갛게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약간 몽롱해지고 말았다.
수줍은 그녀의 모습.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매혹의 강’에 풍덩 빠져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 볼을 문득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억지로 그 욕구를 참았고.
잠시 후, 나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말 편안하게 하자. 유나야.”
그러자 곧이어 좌우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
“언니! 이제 좀 커플 같지?”
“그러게. 약혼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뻣뻣했는지 몰라.”
“근데 은근히··· 두 사람 귀엽지 않아?”
“어?”
“나도 중매결혼이나 할까?”
“이 바보야! 구식이 좋아? 첫날밤에 뽀뽀는 하겠어?”
“···???? 언니!! 형부도 있잖아!”
그렇듯 김유리와 강소정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나는 슬쩍 쳐다본 뒤, 나도 모르게 한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한유나는 눈이 약간 커지며 움찔하더니, 조심조심 자신의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래. 다음에 보자.”
한유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는 곧이어 검정 벤츠 뒷좌석에 탔고.
뒷좌석 창문을 내린 뒤 한참 손을 흔들다 보니.
어느새 차량은 그 저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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