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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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뇌진탕 환자 같은데··· 이쪽 베드 좀 보시겠어요?”
“바로 가겠습니다.”
시간을 흘러 어느덧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각.
현재 응급실은 다양한 부류의 환자들이 들어오면서 다시금 바빠지고 있다.
특히, 날씨가 추워진 터라 노령 혹은 소아 폐렴 환자들이 급증하고 있었고.
심근경색, 뇌졸중, 뇌출혈 등의 심뇌혈관계 질환 환자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약혼 기사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요란하게 보도된 뒤.
바쁜 응급실에선 무언가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물론, 평소와 다름없이 다들 행동하며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으나.
내가 무언가 일들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한 번씩 더 쳐다보거나.
혹은 더 집중해서 주목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한 관심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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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환자 지남력(Orientation, 시간, 공간, 상황 등을 바르게 인식하는 능력)은 어때?”
“특별한 문제는 없었고, 별다른 소견도 보이지 않습니다. 측두부 3cm 열상이 있는 거 때문에 환자 가족들도 동의했는데, 뇌 CT 촬영하고 다시 상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오케이! 그건 그렇게 하자. 스케쥴 잡고 진행해 봐!”
“네!”
치프 장태욱 선생으로부터 그렇게 허락을 받은 뒤, 곧바로 뇌 CT 촬영 스케쥴을 잡게 되었는데.
이때, 담당 간호사는 곧장 전화기를 들고서 영상실과 통화하려다가.
갑자기 날 올려다보며 쳐다봤고.
그러면서 그녀는 뜻밖의 관심을 나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근데 점심은 안 드세요?”
“네?”
“점심···.”
아! 점심?
그러고 보니, 이미 점심 시각은 훌쩍 지났다.
그러나 아침부터 이것저것 바빠져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이곳에선 허다한 일이다.
눈치껏 알아서 먹는 게 점심이고.
시기를 놓치면 먹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바쁘고 아주 넓은 성국대 병원 응급실 특성상, 서로가 너도나도 바쁘다 보니.
어느 시점을 넘기게 되면 누가 점심을 못 먹었는지, 그걸 모르게 되는 경우도 많아진다.
그런데도 딱 집어 나한테 그렇게 묻자, 나는 좀 어색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러게요. 배가 좀 고프긴 한데···. 근데 정 간호사님! 제가 점심 안 먹은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나만큼이나 무척 바쁜 응급실 간호사.
구태여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틈이 없을 텐데.
그러자 정보경 간호사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계속 저쪽 라인 베드를 맡으셨죠? 근데도 식사를 안 하신 것 같아서···.”
“그럼 선생님은 식사하셨어요?”
“네! 3시간 전에.”
3시간 전에?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려 한쪽 벽시계를 쳐다봤다.
맙소사, 어느덧 오후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이다.
이 정도 시간이면 점심은 건너뛰고 일찍 저녁을 먹으면 될 정도다.
“어쩔 수 없네요. 좀 이따가 저녁이나 먹으면 되겠죠.”
그러고는 나는 즉시 의료용 카트를 끌면서 다른 베드 쪽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한편,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날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으나.
나는 일부러 계속 모른 척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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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근데 갈수록 더 추워지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저녁 7시 무렵.
응급환자 숫자가 그 시각 조금 줄어들자, 나는 이동욱과 함께 응급실 밖으로 잠시 나왔고.
거기서 신선한 바람을 잠시 쐬게 되었다.
사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한편, 아침에 흩날렸던 그 눈들은 그저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 듯, 주변엔 아침 눈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다만, 해가 저문 뒤, 겨울 특유의 매서운 추위가 어느새 병원 곳곳을 뒤덮고 있었다.
“···야! 우동이나 먹으러 갈래?”
“우동?”
“추우니까 좋잖아?”
한편, 나는 이동욱의 우동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냥 일반 반찬을 포함한 백반을 먹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이동욱은 계속 우동을 먹자고 말했고, 할 수 없이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찬바람을 조금 쐬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그러고는 곧장 본관 지하 1층 식당가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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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기 앉자.”
적당하게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이때, 우동 두 그릇과 만두 등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잠시 뒤, 아주 신속히 우동이 나왔는데···.
“카아! 이거 국물 맛 죽이네.”
순간, 감탄하는 이동욱.
나 역시 뜨거운 우동 국물을 먹다 보니 갑자기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겨울철에 먹는, 이 따뜻한 우동 맛은 뭔가 남다르다.
“봐! 우리가 MSG가 부족하다니까!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서···.”
필수 아미노산?
물론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지만.
어쨌든 MSG의 마력은 대단했다.
이동욱과 나는 정신없이 우동 국물을 입으로 가져가며 한참 우동 맛에 빠져들었다.
사실, MSG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글루타민산에 나트륨(Na)염이 붙은 물질인데.
일종의 아미노산이라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초반, 일본 생화학자 이케다 기투나에는 다시마 국물에서 영감을 얻어 MSG 생산 특허 출원을 하게 되었고, 이후 감칠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로써 MSG는 널리 사용되게 된다.
물론, MSG에 대한 나쁜 이야기들이 국내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오히려 MSG로 간을 하게 되면 소금 사용량을 크게 줄일 수가 있어, 맛도 좋고 부분적으로 건강에 이로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휴우! 국물만 엄청 먹었네. 근데 여기도 라면 파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
한편,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동욱은 즉시 동의했다.
“컵라면은 좀 질리긴 하지.”
하긴, 누군가가 끓여주는 라면.
그런 메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곳 병원 지하 1층 식당가에는 그런 메뉴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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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정민아.”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우동을 거의 다 먹은 상태인 이동욱.
이때, 녀석은 주저하는 듯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실은, 내가 어제··· 지현이랑 좀 이야기했는데···.”
“뭐? 무슨 이야기?”
“너희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며?”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말 안 했어?”
물론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다.
그래서 그 자세한 이야기들을 말할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미안.”
그러자 날 빤히 쳐다보던 이동욱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많이 유명하신 것 같던데. 4선 국회의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이해가 안 돼.”
무슨 생각? 무슨 이해?
나는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너! 한유나씨랑 데이트한 적도 없잖아?”
그 순간, 나는 바로 움찔했다.
“한유나씨 병실에 몇 번 찾아갔다고 해도··· 그리고 또 뭐가 있어?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약혼 발표가 났냐고?”
그 말에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하긴 병원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바쁜 인턴이 언제 연애할 시간이나 있겠는가.
그러니 녀석의 의아함은 당연한 거다.
“그리고··· 한유나씨 최초 응급처치도 호텔에서 니가 했다며? 그래서 말인데··· 그때 그 호텔엔 우연히 간 게 아니지?”
“어?”
“이미 사귀고 있었어?”
이때 내가 더 어색한 표정을 짓자, 이동욱은 긴가민가한 눈빛을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진짜 사귀고 있었다면 별 게 아닌데···. 사실, 우리가 더 잘 알잖아. 우리가 너한테 항상 붙어 있어서···.”
그렇긴 하다.
그래서 이동욱은 마치 탐정이라도 되는 듯 예리한 눈빛을 보이며 날 쳐다보다가.
잠시 후, 뜻밖의 말을 던졌다.
“그래서 지현이가 그러던데··· 첫 응급처치 건도 그렇고, VIP실 병동에서 괴한을 막은 것도 그렇고. 너무 드라마틱하대.”
드라마틱하다?
“정말 드라마틱하잖아! 혹시··· 진짜 그거 때문에 약혼한 거냐? 드라마에서 나오는 운명적 사랑? 마치 그런 거?”
그 순간, 나는 이동욱의 말에 피식 웃다가, 한편으로는 이내 진지해졌다.
사실, 이번 약혼은 이동욱이 미처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몇 가지 배경들이 깔려 있다.
가문 대 가문의 정략적인 합의.
장남 한윤기 부사장의 후계 구도 확립.
한유나의 어쩔 수 없는 생존 선택.
그리고 오묘한(?) 우리 두 사람의 감정.
한편, 그뿐만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시스템 히든 미션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히든 미션(운명적 만남)]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해도 언제나 엇갈릴 수 있습니다.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사건들은 이 운명을 난도질합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이 만남은 운명이었단 말인가.
회귀 전에는 비록 불발되었으나···.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척 날 당혹스럽게 만든 것도 있다.
바로 히든 미션 달성을 통해 얻게 된, 기이한 [특전]!
바로 그 [특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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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경고! 이 파편을 재생하게 되면, 영원히 그 기억은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게 됩니다···(중략)···파편이 재생될 경우, 당신은 사고 당시의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전] 때문에 사실상 내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두 사람.
그리고 그때의 일들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퇴색되고 있는 상태인데.
그런데도 그 사건이 다시금 수면 위로 치솟았다.
한편, 놀라운 점은 그 사건과 관련된 [기억 파편] 특전이 [히든 미션, 운명적 만남]에서 도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 그리고 과거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 이런 것들은 결국 이런 사건들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듯 의심은 증폭되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계속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사고 당시, 그 충격이 너무 크다 보니 내 머릿속의 기억들은 조각나며 흩어졌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사고 당시 아버지의 행동들. 그것들마저 그때 조각나며 흩어졌었다.
그러나 이번 특전을 통해 그 기억들이 부활된다면.
머릿속에 남아 있던 불확실성과 모호함 등은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건 전말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위험요소도 있다.
특전을 통해 회복된 기억들.
그건 영원히 내 머릿속에 남게 된다고 한다.
아버지의 악행???
혹시라도 그게 더 선명해진다면, 그건 두고두고 내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특성 발동을 거부할 수가 없었고.
어느덧 밤이 깊어져 새벽 3시의 한적한 시각이 되자.
나는 의국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은 뒤, 드디어 [특전: 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을 발동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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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그 순간!
내 의식은 과거의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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