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파손된 기억 파편 04
<113>
“······여보. 너무 빨리 달리는 거 아냐?”
“왜 자꾸 그래? 겨우 시속 100km야.”
“아깐 더 빨랐잖아? 좀 천천히··· 정민아!”
이때, 날 부르는 목소리.
나는 멍해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흑백 영상과 컬러 영상의 중간쯤 되는,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느낌이지만.
눈앞의 모든 것들이 현실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마치 3D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런 느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게 생동하고 있었고.
내 팔과 다리, 내 모든 감각들도 살아 있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마치 정형화된 공간 속, 그 속에서 내가 갇힌 듯한 느낌.
한편,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뒷좌석의 모습.
바로 내 뒤에 앉아 있던, 그 오래전 어머니의 모습.
지금 이 공간 속에선 어머니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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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아, 이거 좀 받아. 아빠도 좀 주고.”
과일이었다.
플라스틱 용기 안에 들어있는, 그러나 정말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는 과일 조각들.
나는 잠시 그 과일 용기를 들고 있었다.
“여보! 자꾸 왜 그렇게 빨라져?”
다시금 들려오는 어머니의 걱정 섞인 목소리.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여보!”
“걱정할 거 없다니까! 그게······ 아까 뒤에 좀 이상한 것들이 있어서.”
“뒤에?”
순간, 어리둥절해하며 차량 뒤쪽 유리창을 통해 후방을 쳐다보는 어머니
나 역시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며 그쪽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컴컴한 국도.
후방엔 차량도 없다.
“아니, 있었어. 조금 전에. 내가 좀 속도를 내서···.”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속도 좀 낮춰! 계속 눈도 오는데···.”
현재 하얀 눈송이가 어둠 속에서 흩날리고 있다. 그렇다고 저 눈송이는 쌓일 정도로 우수수 쏟아지는 게 아니다.
아주 작은 먼지 같은 눈송이들. 그 눈송이가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었고 우리가 지나가는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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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아앙!!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경적 소리!
“에이씨! 저 새끼들!”
순간, 요란한 경적 소리를 냈던 아버지.
그는 인상을 팍 쓰며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끼어드는 거야?”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쳐다봤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우리 차량.
그리고 우리 차량 앞에는 새로 국도에 진입한 두 대의 차량이 보였다.
문제는 이 두 대의 차량이 진입 이후에도 속도를 높이지 않고 대략 시속 60km 선에서 계속 달리다 보니, 빠르게 달리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개새끼들! 왜 앞을 막고 그래! 여보! 내가 앞지를 테니까···.”
그러고는 바로 액셀을 밟는 아버지.
순간, 차량이 가속되며 앞으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왕복 2차로 국도.
주행 방향이 각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간 뒤 반대편 차선을 달려, 두 대의 차량을 곧장 앞지를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조수석 창문 위 손잡이를 꽉 잡았고.
어머니는 불안한 듯 외쳤다.
어둠이 짙게 내린 국도.
사실, 주변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상태다.
오로지 앞선 차량의 불빛만 보고서 달리거나.
그게 아니면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존해서 그저 달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의 도로였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 차량은 반대차선을 아주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익! 소리가 나며.
아버지는 잡고 있던 핸들을 황급히 우측으로 꺾었다.
빠아아앙!!
이때, 들려오는 요란한 경적 소리!
반대차선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트럭.
놀란 아버지는 즉시 추월을 포기하고서 재빨리 원래 차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리 차량의 속도 때문에 앞선 차량의 후미와 그대로 부딪힐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나타난 앞 차량의 후미.
그 아찔한 순간!
끼이이익! 하며 급브레이크가 다시 밟아졌고.
아슬아슬하게 앞선 차량과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크게 놀란 어머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짜증을 냈다.
“하! 미치겠네! 갑자기 왜 튀어나와?”
그렇게 아버지는 혀를 차면서 좌측 사이드미러 쪽을 쳐다보다가.
다시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쳐다봤다.
“이게, 오늘은 운전이 좀 힘드네. 이제부턴 천천히 갈 테니까 걱정 마!”
“여보! 밤길이잖아. 좀 조심해서···.”
“자, 잠깐만!”
이때, 아버지는 갑자기 제지를 하더니, 운전석 바로 옆에 둔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사실, 이 시대 휴대폰은 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안테나가 달려있는 휴대폰. 그 작으면서 단순한 액정 화면 아래에 여러 개의 숫자 버튼들이 달려 있는데.
아버지는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즉시 받으며 통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대 이런 곳에서 전화를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통화음이 좋지 못할 테고.
자신의 목소리가 상대편에게도 잘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선배님! 제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신라그룹 건은 절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조건 책임지고 길들여 놓겠습니다! 한태산 회장은 제가 확실히 제어할 수 있다니까요! 그게 아닙니다! 선배님! 네, 네, 그러니까··· 그럼 그렇게 하시죠. 제 의사는 확실히··· 확실합니다!”
그러고는 통화를 마치는 아버지.
그런 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으며 바로 화를 냈다.
“에이씨! 개새끼들! 언제는 잡으라고 하더니! 다 잡아놨더니 목줄을 놔 주라고?? 개새끼들!! 아직도 날 몰라? 내가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는다고! 야, 정민아!”
“네?”
순간, 나도 모르게 즉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도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사내는 모름지기 큰 뜻을 품으면 절대 흔들려선 안 돼! 한 번 마음 먹은 건···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게 사내다. 그래야 사람들이 널 무서워하고 너한테 함부로 하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특히, 너는 우리 집안 장남이 아니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 벤츠를 타더라도 네가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알고, 똑바로 나가야 돼! 나는 이런저런 개새끼들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지만, 너는 절대 그러지 마!”
“······.”
“근데, 저 개새끼들! 왜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라는 거야? 절대 그럴 수 없지! 절대···.”
잠시 후, 아버지는 다시 휴대폰을 손에 잡았다.
“여보. 운전 중인데···.”
이때, 어머니가 걱정하며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즉시 대답했다.
“천천히 가고 있잖아! 조심할 테니까 걱정 마. 지금 급하게 전화할 데가 있어.”
그러고는 이것저것 숫자 버튼을 누르더니, 잠시 후 어렵사리 통화가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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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접니다. 좀 전에 안기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 맞습니다. 그 작업을 그만두라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이 최고의 기회입니다! 저 역시 잘 압니다. 물론, 제가 고작 이제 겨우 2선(국회의원)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커버 칠 수 있습니다. 아! 청와대 수석까지 달아주신다면야,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네! 네! 저는 그렇게 알고··· 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아버지.
이때, 뭔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다시 전화기를 잡았다.
“여보!”
뒤에서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아버지는 이번에도 괜찮다고 했다.
앞쪽 두 대의 차량들 때문에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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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네! 접니다. 그게··· 다시 또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그 제안은 도저히 불가합니다. 제가 칼을 뽑았습니다. 그 칼에 피가 묻지 않으면 절대 끝날 수 없는 일입니다. 네. 네. 그렇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아버지는 전화를 끊었다.
이때,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척 굳은 표정.
무척 심각한 표정.
나는 무언가 그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내 입은 현재 꾹 닫혀 있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내 입이 열리지 않았고.
나는 이때 다시 한번 뒷좌석의 어머니와 동생 정우를 쳐다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쇳덩어리 속에 내 영혼이 갇혀 버린 듯한 느낌.
그 답답함이 계속 이어지다가.
잠시 후, 나도 모르게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좀 전의 기억들은 내가 봤고 내가 들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사고 충격으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기억들.
그런 기억 조각들이 그렇듯 또렷하게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다음의 일들.
즉, 지금부터 이어지는 기억들은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들인데.
바로 끔찍한 사고 장면이었다.
실제, 그로부터 5분 정도 지났을 때.
드디어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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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아앙!!
요란한 경적 소리.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사실, 내가 눈을 뜨고 싶어서 뜬 게 아니라, 내 몸이 알아서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금 뒷좌석을 쳐다보고 싶었으나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머리.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모습, 동생의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그 생생한 모습들을 다시금 보고 싶었으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몸과 머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빠아앙!!
그때, 다시금 들려오는 요란한 경적 소리!
앞서 달리는 두 대의 차량이 난데없이 서행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에이씨! 개새끼들!”
욕설을 하던 아버지가 순간 핸들을 좌측으로 틀었다.
그는 즉시 반대차선으로 넘어갔고.
그때부터 액셀을 아주 세게 밟기 시작했다.
다시금 추월을 시도하려는 것.
이때, 나는 즉각 말리고 싶어 고함을 질렀으나.
내 입은 꾹 닫혀 있다.
그저 내 눈앞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모든 것들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 하얀 눈송이들이 아주 천천히 흩날리는 그 광경.
아주 질식할 것만 같은 그 미증유의 미세한 시간들.
그러다가 갑자기 맹렬한 속도를 내며 하얀 눈송이들이 좌우로 흩어졌고.
빠아앙! 하는 경적 소리를 연달아 내며 아버지는 아주 무섭게 가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가속하자, 앞선 두 대의 차량들도 난데없이 가속을 시작했다.
그 결과, 그로부터 10초가 빠르게 지났으나 추월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곧이어 좌측으로 심하게 휘어지는 곡선도로가 나타났다.
“아이씨, 개새끼들! 왜 저래?”
놀란 아버지는 그 전에 추월을 마치려고 더욱더 속도를 냈다.
그런데 그때, 요란하게 들려오는 휴대폰의 전화벨 소리!
흠칫하며 아버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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