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욕심이 생겼다 03
<118>
2001년 12월 15일 토요일.
응급실에서 오전 일과를 마치자마자 나는 바로 숙소에서 짐들을 챙겼다.
원래는 조은하 선배와 함께 밖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을 좀 비비다가.
시골병원으로 함께 내려가는 수순이었는데.
그러나 저번에 있었던 약혼 발표 때문에 이 약속이 좀 틀어지게 되었다.
즉, 조은하 선배의 양해를 받은 뒤, 나는 한유나에게 연락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잠시 뒤.
한유나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비로소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나도 그랬지만, 한유나도 그 생각을 하는 듯.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척 진지해졌다.
사실, 이 시기는 아주 중요한 격변기라고 할 수 있다.
곧 신라그룹의 총수가 바뀌게 되는 그런 격변기.
그리고 그런 혼란 속에서 많은 것들이 교체될 수 있고.
정말 좋은 기회들이 갑자기 찾아들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 중요한 시기를 절대 허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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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어. 곧 도착할 것 같아.”
잠시 후, 내가 운전하는 국산 승용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한유나는 호기심을 보이며 앞쪽을 계속 쳐다봤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자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어느덧 오후 2시 55분이 다 된 상태다.
약속 시각으로 삼은 오후 3시를 앞두고서.
거의 시각에 딱 맞춰 우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한편, 그 주차장은 자갈들이 깔려있고 주변엔 수풀이 무성하다.
그런 주차장에 주차한 뒤, 우리는 나란히 차에서 내렸고.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한적한 카페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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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깁니다!”
한쪽 구석진 소파.
그쪽에 앉아 있던 김경준.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손짓했다.
그러고는 그는 다가왔고.
가볍게 인사부터 나눴다.
그런 뒤,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가서 우리는 앉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자리 배치가 참 묘하게 되었다.
나는 한유나와 나란히 앉게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김경준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특히, 내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 한유나가 앉아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그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정신을 집중한 뒤, 나는 김경준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주요 대화 내용은 바로 신라그룹 지분 문제 외에도 새로운 투자금 확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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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분확보에 쓸 수 있는 돈은 저한테 100억 원 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자금을 좀 끌어모은다면··· 대략 500억 원까지 가능합니다.”
김경준은 자신의 움직일 수 있는 자금 규모를 그 정도 수준으로 말했고.
곧이어 한유나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자금 규모에 대해 가감 없이 설명했다.
“저는 예금 350억 원 정도가 있고···.”
와! 역시 대단한 부자다!
단순 부자가 아니었다.
저게 바로 재벌가의 수준.
엄청난 지분 가치를 빼고도 저 정도의 예금이 있다니, 역시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현재 관계가 단절된 상태지만··· 외삼촌한테서 필요 자금을 빌릴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연락하면 외삼촌은 분명히 절 도와주실 겁니다. 어릴 적, 무척 귀여워해 주셨는데···. 그분은 돌아가신 엄마와도 사이가 무척 좋았고···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럼··· 최소 850억 원이 확보된 거네요! 신라그룹 시총 전체와 비교한다면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못하는 돈이지만··· 그래도 아가씨 외삼촌께 도움을 청한다면, 상당한 플러스 알파는 되겠군요.”
“그리고 또 있어요. 어제 전화 드린 대로··· 저희 오빠가 돕겠다고···.”
그러면서 한유나는 날 가만히 쳐다봤다.
아까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우리는 좀 더 친근해진 것 같고.
그때, 내가 계속해서 호칭 문제를 화제 삼자, 그때 그녀는 약간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더 편안하게 ‘오빠’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갔다.
저희 오빠???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엔 미소가 스윽! 피어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나는 얼른 미소를 떨쳐냈고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특히 제 생각에는 그런 자금을 바탕으로 신라그룹 지분확보에 즉각 나서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것보단 좀 더 투자금 규모를 키우는 게··· 우리한테 더 승산이 커질 것 같습니다.”
“투자금 규모를 키운다? 물론, 좋은 말씀입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래서 윤 실장도 신라증권 백상엽 부사장한테 도움을 청한 것들이 좀 있습니다. 즉, 백 부사장을 이용한다면···.”
그런데 이때, 나는 갑자기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그의 말을 중간에 잘라냈다.
“죄송한데··· 백상엽 부사장의 포지션이 좀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아시는군요.”
“네. 유나한테서 들었습니다.”
나는 한유나를 쳐다봤고. 한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가 봐도, 백상엽 부사장은 좀 박쥐 같은 인간입니다. 선생님도 아시고, 아가씨도 아시니까 말씀드리지만, 은혜를 입었으나 중요한 순간에 그자는 외면했습니다. 결국, 한윤기 부사장, 한윤수 부사장, 한윤형 전무, 이런 자들이 혹시라도 달콤한 조건을 제시하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윤 실장과 달리, 백상엽 부사장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입니다.”
한편, 그런 김경준의 말에 나는 동의하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는 즉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 생각도 김 전무님과 비슷할 것 같군요. 사실, 병원 내에도 별의별 인간들이 많습니다. 믿을 수 있는 인간, 조심해야 할 인간,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인간···. 다시 말해서, 우리한테 신라증권 백상엽 부사장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은 그냥 후순위로 미루는 게 맞지 않을까요? 윤 실장님께서 혼자서 뭔가 준비할 때와 지금은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김경준을 ‘김 전무’로 호칭했는데.
한유나가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도 있겠고.
내가 그런 호칭을 따라서 한다면, 김경준한테 나의 존재감을 좀 더 세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 호칭하게 되었다.
한편, 김경준은 피식 웃었다.
“네!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저도 가세했고, 든든한 김정민 선생님도 여기 계시고, 그리고 김윤상 의원님은 이 자리에 안 계시지만, 큰 후광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선생님! 이건 다른 부분인데··· 제가 좀 궁금한 게···.”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김경준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께서 투자 방법에 대해··· 저한테 뭔가 조언해 주실 수 있다면서요?”
그 방면의 전문가인 김경준.
그는 그 사실에 대해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나는 슬쩍 한유나를 쳐다봤고.
한유나도 그런 내 반응에 반응하며 날 쳐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고개를 내밀며 내 귀에 대고 뭔가를 이야기했다.
“오빠, 아직 그 이야기는 안 했어···.”
아주 작은 목소리.
그런데 그 와중에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내 귀로 전해지는데.
그게 따뜻하기도 했고.
은근히 간지럽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무척 자극적인 느낌도 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게 되었다.
갑자기 두근거리는 내 마음을 억지로라도 자제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고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면서.
저번에 한유나한테 이야기했던.
그 증시 불황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김경준의 반응은 아주 직설적이다.
현재 증시 기준으로 보면, 지금은 주가 상승기!
그런데 내가 주가 하락을 이야기하고 있어, 그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특히, 그쪽 방면의 전문가인 김경준. 그래서 그는 내 예측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게 쉽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래 사건들을 일일이 그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행스러운 점은 나에게 아주 확실한 담보가 있다는 거다. 바로 아버지의 존재다. 내가 곤란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대화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이런 예측치들은 미국 쪽 자료에서 나온 것들도 꽤 있고, 상당히 고급 정보들입니다. 아버지께선 주한 미국 대사와도 친분이 두텁습니다. 물론, 저도 우연히 듣게 된 거라 절대 출처를 밝힐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출처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확실한 곳입니다···.”
아버지가 가진 정보 접근의 우위성 때문에 결국 김경준은 그 전체를 부정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좋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정보들을 기반으로 해서 몇 가지 투자를 진행한다고 하면, 결국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별도의 투자팀이 우리한테 필요합니다. 이런 일들은 그냥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백상엽 부사장이 큰 대안이 될 수도 있으나, 그를 끌어들이는 건 무리겠고···. 혹시 아가씨! 외삼촌께 부탁을 드리면, 그쪽 방면에 입이 꽤 무거운 전문가들을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한유나의 외삼촌을 활용하자는 것인데.
나는 아직 그녀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김경준은 대략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유나 역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제가··· 최대한 빨리 연락해 보도록 할게요.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무조건 팀을 구성하겠습니다.”
그렇듯 한유나는 무척 적극적이었다.
그 눈빛도 점점 더 강렬해졌고.
사실,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 눈동자에 가득했던 수심은 이제 빛나는 눈동자로 대체되었다.
하긴, 그녀에겐 탄탄한 배후 세력이 생겼다.
그 포악했던 한태산 회장도 어찌하지 못했던 아버지 김윤상 의원.
그런 아버지가 그녀의 뒤에 도사리고 있어 그녀는 든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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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외삼촌은 어떤 분이야?”
잠시 후, 우리는 카페에서 나왔고.
그녀는 내 차에 탔다.
그러고는 우리 둘만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나는 고개를 돌려 잠시 좌측을 쳐다봤는데.
창밖.
그곳 주차장에는 여러 대의 SUV가 주차되어 있다. 바로 그녀의 경호원들 차량이다. 그리고 그중의 한 대는 강제철 실장이 날 위해 보내준 경호 차량이다.
그리고 곧이어 한유나는 내 질문에 대답했다.
“···좀 날카롭긴 한데, 욕심도 많으시고···. 그래도 무척 따뜻하고 좋으신 분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나한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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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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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투자펀드] 강만희 회장.
한유나의 하나밖에 없는 외삼촌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이름 글자를 따서 만든 [MH투자펀드]의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각종 기업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이자 수익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지만.
주요 업종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주로 부동산 투자와 개발 쪽인데, 특히 부동산 개발 시행사 일들도 종종 한다고 한다.
속칭, 사채업자라고 하면 고금리의 이자 수법을 통해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사채업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러나 강만희 회장은 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대 자금을 만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명동 사채 시장의 큰손들.
세창물산 김 회장, ‘현금왕’ 단사천, ‘백할머니’ 백희엽, ‘광화문 곰’ 고성일씨 등과 함께, 과거 한유나의 외조부 역시 대단한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런 외조부가 오래 생존했다면,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라고 한유나는 말했다. 자존심이 무척 셌던 외조부. 그는 그런 결혼을 굴욕으로 생각하고서 절대 반대했을 거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대의 그 사람은 막대한 기업어음들을 움직이며 기업들을 한 손에 쥐락펴락했던 당대 거인이었다고 한다.
그런 외조부한테 그때의 신라그룹은 그저 가소로운 존재였던 것.
그런데 그런 막대한 부를 창출했던 외조부는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장남인 강만희 회장이 가업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강만희 회장의 능력은 선대에 미치지 못했고.
전화 한 통으로 수천억 원을 굴렸던, 지하 경제의 터줏대감 위치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강만희 회장은 다시 실패를 거듭했는데.
당시 위태로웠던 신라그룹 몇 개 계열사들을 대상으로 기업어음들을 밀어 넣으며 회사들을 집어삼키려고 했으나.
한태산 회장의 적극적인 응수로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한태산 회장은 강만희 회장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다고 한다.
더는 그를 처남으로서 예우하는 게 아니라 적대 세력으로 보게 되었다는 의미.
한편, 나는 그런 한유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슬며시 내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평범하지 않아. 다들···.
역시 한유나의 외가 쪽도 아주 대단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한태산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재혼을 선택했으나.
끝까지 한유나의 어머니를 무척 두려워했던 게 분명했다.
결국, 자신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한태산 회장은 여러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한태산 회장은 신라그룹을 지켜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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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후 5시쯤 되자, 나는 한유나와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때, 한유나는 경호 차량을 타고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나는 곧장 내 차를 운전해서 시골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작은 시골 도시 ‘태흥시’에 있는 작은 종합병원.
그곳 응급실에서 파견 의사로서 의사 생활이 또 시작되는데.
올 연말까지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면, 응급실 턴은 모두 끝나게 된다.
그로부터 나는 한참을 달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질 때.
마침내 그 작은 도시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도심을 가로질러 더 달린 끝에 마침내 그 병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주 좁은 주차장 한 곳에 내 차를 주차했고.
그러고는 나는 즉시 응급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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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조은하 선배다.
두꺼운 외투 차림인 단발머리의 조은하 선배.
바깥 날씨가 너무 추운 탓인지.
여전히 두 손을 외투에 넣은 모습인 그녀는 응급실 간호사들과 인사 중이다가, 나한테 손짓했다.
“인사하세요. 여긴 김정민 선생님. 저희 병원 인턴 수련 중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수간호사 김숙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곱슬머리에 안경을 낀, 40대 초반 나이로 보이는 수간호사.
그녀는 키가 무척 작았지만, 무척 다부져 보였다.
그런 그녀는 웃으며 다른 간호사들도 소개해줬다.
“여긴 박미옥 간호사··· 여긴 이진희 간호사.”
“네! 안녕하세요!”
나는 즉시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30대 초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간호사들.
그녀들도 웃으며 나한테 인사했다.
“참! 당직 선생님이 저쪽 사무실에 계신데, 그쪽으로 가시겠어요?”
그러면서 수간호사는 응급실 한쪽 옆에 위치한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바로 그 사무실은 응급실 전용 당직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그 크기가 작은 편이다.
대략 6평 남짓한 공간.
무척 낡아 보이는 책상들이 놓여 있고 아주 오래된 듯한 컴퓨터들도 세팅되어 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접혀 있는 간이침대도 보였다.
한편,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남자.
그 남자한테 다가간 수간호사는 어깨를 톡톡 쳤고.
그러자 그는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들었다.
대략 40대 초반 정도 나이로 보이는 사람.
인상은 무척 강해 보였다.
눈썹이 숯덩이같이 짙었고.
입 아래쪽 턱 주변에는 짙은 수염이 가득했다.
짧은 머리 스타일. 그리고 그 강한 눈빛만큼이나 아주 건장한 보이는 남자다.
“선생님! 성국대 병원에서 선생님들이 오셨어요!”
그러자 찌푸려 있던 그 인상이 비로소 풀리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
현재, 바깥 추위가 상당한 편인데, 그는 반팔 수술복 차림이었다.
“아아! 반갑습니다. 김한석입니다.”
갑자기 표정이 환해진 그는 우리와 바로 악수하며 무척 반가워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서로에 대한 소개를 마친 뒤, 조은하 선배는 이때 부탁의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저희가 부족한 게 많은데, 많이 도와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김한석 선생은 이내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도울 게 뭐 있겠습니까? 선생님! 아까 레지던트 과정이라고 하셨죠?”
“네. 레지던트 2년차입니다.”
“그럼 뭐! 저보다 더 잘 하겠네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사실, 응급실 야간 타임은 저 혼자서 맡고 있는데, 이게 진짜 미치는 일이거든요. 지금 상황은 아주 괜찮은데, 이게 자정쯤 되면 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요즘은 날씨 때문에 주취자들이 아주 심하게 와요. 이게 치를 떠는 일이거든요.”
“네?”
“하하!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응급실이란 게 여기나 저기나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네.”
“그리고 우리 병원은 작은 도시에 있지만, 이 근방 지역을 다 아우르고 있거든요. 나름 큰 병원이다 보니, 119구급차는 무조건 여기로 들어옵니다. 한번 환자가 몰리게 되면 그땐 그냥 미치는데··· 다행히 두 분이 오셨으니까 한동안 응급실 사정이 좀 나아지겠네요. 참, 편안하게 하세요. 참고로 저는 일반의입니다. 그러니까 두 분도 환자 진료나 처방 같은 건 그냥 알아서 내시면 됩니다. 자! 자! 여기 좁은데 밖으로 나가시죠. 김 간호사님! 혹시 환자 오면, 요 앞 다방에 있을 테니까 거기로 호출해주세요.”
그러자 수간호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건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확인받을 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 드릴게요.”
“그래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혹시 어려운 게 있으면 바로 달려갈 테니까 연락만 주세요. 자! 자! 두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무척 건장한 체격인 김한석은 수술복 위에 두툼한 패딩을 입더니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병원 바로 옆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그곳 3층에는 ‘상록수 다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2001년인 이 시대에 아직 다방이란 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 다방에 들어갔을 때.
그 이름만큼이나 내부 풍경은 마치 영화 속 1980년대로 돌아간 듯한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소박하면서도 낡았고.
그나마 요란한 뽕짝가락 대신에 최신 가요들이 요란하게 들리고 있는데.
김한석 선생은 한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거기로 걸어갔다.
“이쪽에 앉죠.”
“네.”
그렇게 소파에 앉은 우리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김한석 선생은 한쪽을 쳐다보며 요란하게 외쳤다.
“이모님!! 이모님!!”
그러자 이때, 다방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문이 열리더니, 중년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 여자의 옷차림 자체는 무척 화려하다.
오색 컬러의 옷들을 입은 그 중년 여자는 우리 쪽을 쳐다보더니 웃으며 즉시 입을 열었다.
“왔어? 오늘은 환자가 잘 안 오나 봐?”
“아이, 왜 그러세요? 그럴 때도 있어야 저도 살죠.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잠깐만··· 야! 미정아! 미정아!”
주방 쪽을 다시 쳐다보며 고함을 지르자, 그 주방에서 젊은 아가씨 한 명이 바로 걸어 나왔다.
마치 영화 속에서 본 것 같은, 그런 모습들이 지금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무척 짧은 치마에 화장이 짙은 아가씨.
그 여자는 우리 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메뉴판 하나를 들고서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오빠, 왔어?”
“야아! 근데 너는 뭐하는데, 손님이 왔는데도 얼굴을 안 보여?”
“치! 짜증 났어? 좀 잤어! 내가 요즘 마음이 좀 아프잖아.”
“어이구! 또 어디 백수한테 돈 떼였어?”
“쉿! 사장님 듣잖아.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랑은 완전히 헤어졌다고!”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만하고 이제 좀 비켜. 여기 중요하신 선생님들이 좀 오셔 가지고···.”
그러자 김한석 선생의 옆에 앉아 있던 그 아가씨는 먼저 조은하 선배를 쳐다본 뒤, 곧이어 날 쳐다봤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날 쳐다보며 갑자기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빠, 너무 젊다. 몇 살이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김한석 선생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넌 알 것 없어! 빨리 주문이나 받아!! 아, 선생님들, 어떤 거 드시겠어요?”
그러고는 김한석 선생은 이런저런 설명들을 덧붙였다.
“여긴 커피가 아주 달달하면서도 아주 좋습니다. 다방 커피 들어보셨죠? 뭐, 그게 아니면, 쌍화차 같은 것도 드실래요? 쌍화차에 노른자도 띄워주는데··· 아주 옛날식이죠. 옛날에 저도 의대 다닐 때, 어쩌다가 다방에서 그런 걸 먹은 적이 있는데, 이런 곳이 아직도 있더라고요. 여기 처음 왔을 때 좀 많이 당혹스러웠는데··· 사실, 이쪽이 문화 발달이 좀 더딥니다. 그래도 있다 보면 금방 적응이 될 겁니다. 참! 어떤 거 드시겠어요?”
약간 표정이 굳어진 조은하 선배,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커피를 시켰고.
나도 따라서 커피를 시켰다.
반면, 김한석 선생은 쌍화차를 주문했다.
잠시 후, 다방 아가씨는 주방 쪽으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우리는 병원과 관련된 대화 외에도 이런저런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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