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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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학번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95학번이고··· 조은하 선배는 93학번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나이가 많긴 많네요. 저는 80학번입니다.”
확실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참고로 저는 한국대 의대 나왔습니다.”
순간, 나는 약간 놀랐다.
“좋은 학교 나오셨군요. 근데 어떻게 여긴···?”
“뭐··· 어찌어찌하다 보니··· 하하! 근데 선생님들은 성국대 의대 나오셨죠?”
“네.”
“성국대 의대도 아주 좋은 학교죠. 근데, 이게 참! 인생이란 게··· 의사라고 해서 다가 아니더군요. 간단히 말해서, 저는 이것저것 인생이 좀 꼬였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옛날에 인턴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병원을 나갔는데, 그때부터 꼬인 겁니다. 군의관 때까진 괜찮았는데··· 그래도 뭐 제가 의사니까 뭐든 잘될 줄 알았죠. 근데 IMF 때문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네?”
나는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아무리 IMF가 아주 위험한 경제 위기라도 해도, 의사 직업과 IMF의 상관성은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을 좀 크게 하면 잘 될 것 같아 무리하게 대출도 받고, 이것저것 돈도 끌어오고, 그렇게 해서 크게 병원을 운영했는데··· 그때 봉직의 의사들도 여러 명 받았습니다. 근데 IMF 터지고 나서 불경기가 오니까 병원 매출도 딱! 떨어지고, 이전에 빌렸던 돈을 갚으라고 채권자들도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이게 뭐가 되겠어요? 거기다가 의료사고까지 결국 터지고··· 빚더미만 남기고 끝났습니다. 에휴! 뭐 지난 이야기인데 더 말해선 뭣 하겠습니까? 참!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시골병원이라고 해서 저 같은 놈만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긴 아주 괜찮으신 의사 선생님들도 많고, 나름 학벌도 경력도 좋으신 분들도 꽤 있습니다.”
이때,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조은하 선배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고.
나만 계속 김한석 선생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한석 선생은 조은하 선배한테 말을 걸었다.
“근데··· 조 선생님께선 무척 조용하신 분 같네요?”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제가 좀 피곤해서···.”
“아아! 그렇죠. 하긴, 서울에서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참! 거긴 응급실이 아직도 많이 바쁘죠? 혹시 어제도 밤샘하셨어요?”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제가 좀 있다가, 숙소를 바로 알려드릴 테니까, 오늘 밤은 그냥 푹 쉬시고··· 내일 아침 7시까지 응급실로 나오시면 됩니다. 그땐 턴이 바뀝니다.”
그 말에 조은하 선배는 즉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여긴 2교대인가요?”
“네! 칼같이 아침 7시, 저녁 7시 기준으로 턴이 바뀝니다. 다만, 매번 인수인계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좀 일찍 나와주시면 더 좋습니다.”
“그럼 저희 교대는?”
“우선, 며칠간 낮 근무하시다가, 나중에 나이트 근무로 바뀌게 될 겁니다. 자세한 건 내일 장 과장님께서 알려드릴 겁니다. 장 과장님은 응급실 과장님이신데, 장종욱 선생님입니다. 참! 그분은 응급의학과 전문의입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은하 선배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두 분 선생님께서?”
“네! 맞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현재 응급실을 맡고 있습니다. 다른 지방 도시도 그렇겠지만, 여긴 특히 응급실 의사 구하기가 더 어려워 어쩔 수 없죠.”
그리고 바로 그때.
다방 아가씨가 커피 등을 갖고서 나타났다.
그녀는 이때도 날 유심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윙크하더니, 슬쩍 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조은하 선배의 표정은 무척 일그러졌고.
반면, 김한석 선생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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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몇 살이야?”
잠시 후, 그 아가씨는 웃으며 나한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탄식하며.
겉으로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지금 대화 중이라서.”
그러자 그녀는 눈을 확 찡그렸다.
“치! 오빠 너무 딱딱하다.”
“······.”
“재미도 없고···.”
“······.”
“혹시 이런 데 처음?”
당연히 처음이지.
이런 다방 같은 곳은.
그러자 김한석 선생은 즉시 나섰다.
“야! 미정아! 그만해! 그만! 그리고 괜히 엄한 데 기웃거리지 말고 그만 일어서! 이분들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계신 분들이야. 야! 됐으니까 어서 가 봐!”
“알았어. 알았다고! 대신, 매출 좀 올려줘. 쌍화차 한 잔 더···.”
“어유, 알았어. 그건 니가 마셔. 내가 나중에 계산할게.”
“진짜지? 고마워, 오빠.”
그러고는 그 아가씨는 주방으로 다시 돌아갔고.
아가씨 때문에 잠시 중단됐던 대화가 다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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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서··· 이 병원에 잠시 지내다 보면, 그래도 서울 병원 쪽보단 확실하게 시간이 남을 겁니다. 바쁠 땐 엄청 바쁘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바쁜 것도 아닙니다. 주로 경증 노인 환자들이 많으니까 그걸 잘 알고 적절하게 대응만 하면 별다를 것도 없고. 근데 문제는··· 요 주변에 큰 고속도로가 있는데 그쪽에서 교통사고가 터지게 되면 그땐 좀 끔찍합니다.”
고속도로?
교통사고?
“더군다나 여기저기에서 TA 환자들이 우리 병원으로 이송되어오는데 그것도 좀 문제죠. 일반 질환 환자들이야 각 진료과에 바로 넘기면 끝나는 일이고, 이런 건 정말 별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소아 환자들도 그렇게 많지 않고··· 간혹 임신부가 오기도 하지만, 이것도 크게 신경 쓸 게 아니죠···.”
그렇듯 그는 이것저것 병원 상황에 대해 설명했고.
우리는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다소 강한 인상이지만, 생각보다 김한석 선생은 아주 친절했는데.
다만, 유난히 말이 많은 게 좀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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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그 다방에서 나왔고, 즉시 숙소로 향했다.
현재 숙소는 별관 4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녀 개별실로 나뉘어져 있고.
각 실에 침대 2개와 책상 2개가 세팅되어 있었다.
다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의사들이 이런 숙소를 잘 이용하지 않아 현재 1인 1실이 가능한 상태였다.
“그럼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남자 숙소로 같이 따라 들어온 김한석 선생.
그는 나한테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봤고.
나는 바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휴게실은 저쪽에 있는데···.”
그때부터 다시 김한석 선생은 TMI인 듯 계속 설명했고.
나는 그런 설명들을 듣다 보니 좀 더 빠르게 이 병원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럼 쉬세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마침내 김한석 선생은 밖으로 나갔고.
그때부터 나는 차량 트렁크에서 가져온 내 짐들을 차례로 풀어냈다.
한참 그 짐들을 정리한 뒤, 나는 비로소 앞쪽 의자에 앉게 되었고.
이때 노트를 꺼내, 김한석 선생한테서 들었던 것들을 대충 요약해뒀다.
그러고 보면, 성국대 병원과 달리, 이곳은 근무 시간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서, 매일 같이 최대 12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때, 잠을 푹 잘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병원 일 외에도 또 다른 일들을 하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특히, 한유나와 관련된 일들.
아버지와 관련된 일 등등.
남은 시간 동안 그런 일들을 이것저것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고민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를테면, 김덕규 검사나 강지연 검사한테 연락을 취하고 이런저런 사유로 그들을 만나볼 시간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렇듯 깊은 고민을 하는 사이,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119>
2001년 12월 19일 수요일.
올해,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는 예측들이 솔솔 나오는 가운데.
이날, 작은 시골 도시 ‘태흥시’는 미리 하얀 눈이 수북하게 내렸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리는지 작은 도시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고.
이곳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런 소도시 쪽은 제설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다 보니 내원 환자들 숫자가 갑자기 확 감소해 버렸다.
다들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꽁꽁 집에 숨어 버린 것 같았고.
또한, 웬만한 응급상황이 아니고선 운전할 생각도 없는 듯.
도로 위의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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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나가자.”
무척 무료해진 조은하 선배는 갑자기 나한테 손짓했고.
응급실 스테이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현재,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도 갑자기 줄어들어 정말 모처럼 응급실 베드의 7할가량이 텅텅 비게 된 상황이었다.
그렇듯 별다른 할 일들이 없게 되었고.
특별히 바쁠 것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잠시 뒤.
우리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이 병원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공터가 있는데.
본관과 별관 사이에 그 공간이 가려져 있다 보니 일반 환자들은 이곳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고.
그래서 주로 흡연하는 직원, 의사, 간호사들이 찾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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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드락. 뽀드락.
잠시 후.
눈 밟는 소리가 아주 기가 막히게 들려왔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건물 뒤쪽을 돌아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지금 이 시각,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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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그냥 줘.”
잠시 후, 내가 담뱃불을 붙여주려고 하자, 조은하 선배는 그냥 라이터만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라이터를 넘겨 주자, 조은하 선배는 알아서 담배에 불을 붙였고 그 라이터를 내게 돌려줬다. 이때, 나는 라이터를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담배 안 펴?”
“네. 끊었습니다.”
그러자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담배를 쭉 빨았다가.
잠시 후 하얀 담배 연기를 토해냈다.
“춥진 않지?”
“네.”
사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그렇게 춥지가 않다.
특히, 새벽부터 폭설이 내린 뒤, 어느덧 오전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하늘엔 하얀 눈송이들이 여전히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찬 바람이 뜸해져 춥다는 느낌은 한결 덜해진 상황이었다.
“진짜 많이 오네. 이런 눈들··· 본 적 있어?”
그러면서 조은하 선배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봤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눈이 온다더라. 부산 쪽에도 많이 올 거라고 하고···.”
“네? 부산에도요?”
나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역대급 눈이 내리는 시기가 곧 다가오고 있다.
특히,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한유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결국, 한유나가 뉴욕 방문 스케쥴을 늦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크리스마스에 맞춰, 우리는 또 데이트를 할 수도 있다.
그렇듯 그런 생각에 잠시 몰두하던 중, 조은하 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결국··· 약혼하는 거지?”
그러면서 조은하 선배는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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