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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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눈빛이 왜 저러지.
약간 촉촉하기도 하고.
약간 원망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시큰둥하기도 하고.
약간 복잡하다.
“아, 약혼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하얀 담배 연기를 그쪽으로 가볍게 뱉어냈다.
“···좀 아쉽다.”
“네??”
이때 조은하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반문했고.
이때 조은하 선배는 대답 없이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눈이 꽤 오겠어.”
“그러게요. 오후쯤 돼서 그친다고 합니다.”
“그래··· 난 다 폈으니까 그만 가자.”
“네.”
“참! 오늘은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넌 뭐할 거야?”
그렇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면 이곳은 교통이 거의 다 끊겨 버린다.
경증 노인 환자들마저 응급실을 찾아올 수 없게 된다.
아마 내일쯤 응급실은 폭발할 것 같지만.
오늘은 확실하게 응급실 내원 환자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대체로 신속하게 제설 작업을 진행하는 서울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냥 공부나 하려고요.”
“공부? 그것도 괜찮지. 들어가자. 좀 추워진 것 같아.”
조은하 선배는 앞장섰고.
나는 바로 보조를 맞추며 다시 응급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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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결국, 응급실에 별다른 일들이 없다 보니, 기존 환자들만 좀 챙기다가.
잠시 후 응급실 의국이나 다름없는 당직실로 들어갔고.
거기 내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임상 논문들을 살펴보던 중.
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내 휴대폰을 들고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사이 상황이 다시 바뀐 듯.
하얀 눈들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바깥의 모습.
그런 눈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통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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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접니다. 검사님.”
지금 내 통화 상대는 바로 김덕규 검사다.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김덕규 검사.
과거, [한성클린] 고태진 대표가 일으킨 교통사고 때문에 유산을 하게 됐던 최문영씨.
그 최문영씨의 남편이 바로 김덕규 검사다.
다행히 최문영씨는 무사히 퇴원했으나, 듣기론 아직까지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최문영씨는 사망 위험성이 무척 높았고.
여러 수술들을 거친 뒤 간신히 살아남을 정도로 무척 위험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최문영씨의 엄마 박숙자씨 역시 아주 심각한 상처를 입고 여러 수술들을 거친 뒤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큰 사고를 겪고 나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현재, 최문영씨는 유독 그 상태가 심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거의 출산 직전 상황에서 사고로 태아를 잃게 되었다.
그런 충격이 워낙 크다 보니.
현재, 심각한 우울증 외에도 환청, 환상, 불면 증세 등에 시달리고 있고.
정신과 약물까지 복용하고 있으나, 그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징벌도 받지 않고 시간만 흐르고 있는 피의자 고태진에 대한 김덕규 검사의 분노는 여전히 불같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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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제가 요즘 집에 들어가는 것도 무섭습니다. 와이프가 너무 가엽기도 하고··· 사실은 제가··· 이러고 있는 제가 너무 한심해서··· 그래서 요즘은 일 끝나면 무조건 소주 한 병 마시고 들어갑니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그는 또 말했다.
“근데 그 새끼! 고태진 그 새끼!! 제가 뼈까지 씹어 먹고 싶은데··· 하!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계속 머릿속이 좀 혼란합니다. 사실, 장모님도 몸이 많이 불편하신데, 와이프 돌보느라 계속 힘드시고··· 정 안 되면, 이 검사 짓 때려치우고 잠시 쉴 생각도 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나 할까··· 그런 생각도 요즘 하고 있습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즉시 위로하다가.
잠시 후, 슬쩍 다른 말들도 꺼내봤다.
“근데··· 고태진이 식물인간 상태인 것과 별개로, 고상중 의원 쪽을 치려고 하셨다면서요?”
“네. 그랬죠. 그랬습니다.”
“근데··· 잘 안 되신 모양이죠?”
“네! 이게 아주 답답한 일인데···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고태진뿐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 고상중 의원한테서 구린 냄새가 나서 말입니다. 근데, 한성화학부터 시작해서 꼬리(고태진)가 여기저기 다 잘려 버리니까, 그게 좀처럼 연결이 안 됩니다. 고태진 회사를 뒤졌던 강지연 검사님도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고태진의 범죄 행위는 확실합니다. 다만, 고태진-고상중으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가 잘려 버린 겁니다.”
“그럼 만약에··· 검사님! 혹시라도 고태진이 의식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면 그땐 어떨까요?”
“그건 제가 지금 이를 갈면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새끼! 의식이 회복되면 무조건 제가 달려가서 족칠 겁니다! 물론, 제가 피해 당사자라서 그런 권한이 없겠지만, 강지연 검사님도 있습니다. 무조건 싹 다 훑어낼 겁니다! 그리고 고상중만큼은 제가 무조건 목을 칠 겁니다. 저도 잘 압니다. 고태진 그 새끼가 그날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운전을 했는지···. 그 새끼는 자기 사건 때문에 다른 사람들한테 큰 피해를 준 겁니다. 우리 아이까지 죽였습니다! 그 새끼가 말입니다! 그 새끼가!”
다시금 크게 분개해 하는 김덕규 검사.
잠시 후, 나는 그를 위로하다가 전화를 끊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참 고민하다가.
문득, 내가 가진 [특전]들을 다시금 확인해 봤다.
[특전]
[은빛 바늘]
[은빛 성수](2)
[천사의 눈물]
[천사의 노래]
[천사의 날개]
[천사의 광휘]
[거짓 없는 입](3)
[검은 고양이(S)]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은빛 바늘]과 [은빛 성수] 특전에 더 주목했다.
[특전, 은빛 바늘]
[전신 외상을 완벽히 치유할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인 1회]
[특전: 은빛 성수]
[부족한 활력을 100% 충전합니다]
즉, 이런 특전들을 고태진한테 쓰게 된다면 혹시 뭔가 반응이 생길까.
현재, 고태진은 식물인간 상태다.
그래서 뇌의 일부 기능이 정지되어 있는데, 다만 스스로 호흡은 가능한 상태다.
그런데 그 고태진은 현재 성국대 병원에 있지 않다.
성국대 병원에 고태진을 계속 맡기는 게 껄끄러운지 고상중은 신라병원으로 옮겨 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태진과 관련된 진단 자료들은 성국대 병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가 식물인간 상태가 된 이유는 그저 ‘원인불명’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시스템을 통해서 그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
그때, 밝혀지지 않은 침입자가 있었고.
그가 독수를 썼다고 시스템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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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발생]
[<피 흘리는 권좌> 잔혹한 인간(클래스 A) 미션은 최종 실패했습니다]
[침입자가 독수에 성공했습니다···]
그렇듯 시스템은 나에게 그 사실을 전해줬다.
물론, 미션 때문에 감춰져 있던 그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누군가 독수를 써서 고태진의 입을 막은 것.
그런데 이 미션에 나왔던 특전은 바로 [깨끗한 피]인데.
[깨끗한 피]
[혈액을 완벽히 정화시킵니다. 제한 조건: 효력 1분 지속, 1회 사용]
따라서 내가 적절한 시점에 나섰다면 침입자의 독수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시기를 놓쳤다.
그리고 현재, 내겐 [깨끗한 피] 특전도 없다.
다만, 예상컨대.
그 [깨끗한 피] 특전은 식물인간 상태로 변해 버린 고태진에게 절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건데···.
내 생각엔 바로 [은빛 바늘]과 [은빛 성수]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즉, 독에 의해 어딘가 손상을 입었다면, 그 손상을 외상(외력에 의한 신체 손상) 범주로 확대해석할 수도 있을 거고.
그땐 [특전, 은빛 바늘]이 확실히 효력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귀한 특전을 그렇게 쓰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눈물의 기자회견 뒤 다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고상중 의원을 확실하게 낙마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힘은 더 커질 것이고.
여러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즉, 고상중 의원은 한태산 회장의 3남 한윤형과 모종의 연결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의식을 회복한 고태진을 통해 고상중 의원을 낙마시키면 그런 유착 관계도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다.
거기다가 또 다른 효과도 있다.
고상중 의원의 정치 라인에는 손명국 의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손명국 의원이 바로 한태산 회장의 현재 아내인 손미희 여사의 친오빠가 아닌가.
따라서, 일타 3피, 아니 일타 4피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건 대단한 묘수가 될 수가 있고.
그런 걸 생각한다면, 특전 소모가 아쉽긴 해도 모험 삼아 시도할 가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결국··· 내가 신라병원을 한번 찾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언제가 좋을까.
그런 고민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은 다시 흘러갔고.
한편 이날 오후가 되자.
펑펑 쏟아졌던 눈들이 어느덧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물론, 세상은 더없이 하얗게 변한 상태다.
<120>
“···그럼 투자팀이 결성된다고? 잘됐다. 외삼촌께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면 확실히 우리한텐 다행이지. 잘 됐어. 참!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 때 어떻게 할까? 크리스마스이브 때 낮 근무라서 저녁 7시부터 시간이 있어. 그래서 그때 내가 서울로······ 뭐??? 잠깐만!! 직접 오겠다고? 아니, 그렇지만···.”
순간, 나는 잠시 당황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잠깐 보자고 약속을 잡던 중, 갑자기 한유나는 직접 이곳으로 내려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특별한 날에는 남자가 직접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차를 몰고서 서울로 갔다가 데이트를 마친 뒤 밤중에 다시 여길 내려오면 된다. 또한, 혹시 몰라 눈길에 사용할 수 있는 스노우 체인도 이미 준비해 둔 상태다.
그런데 한유나가 직접 여길 오겠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잠시 그 일로 이것저것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게 되었다.
아직 별다른 일이 없는 자신과 달리, 내가 병원 일을 하고 있으니 자신이 움직이는 게 맞다는 그녀의 주장이었다.
또한, 향후 상황과 관련하여 논의할 것들도 많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일견 그녀의 주장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좀 더 긴 시간 동안 대화를 하려면.
그런 방법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경호원들과 함께 움직일 거라고 하니 안심도 되고.
그럼에도 나는 미안한 마음을 전한 뒤, 곧이어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럼 혹시··· 나중에 내가··· 강 회장님을 직접 뵐 수 있을까?”
강만희 회장은 적어도 한유나의 외가 쪽 어른이 아닌가.
약혼 전에 인사를 드리는 게 마땅한 예의다.
그러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고.
내가 연말에 서울 병원으로 복귀하게 되면, 그때 일정을 잡아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는 다른 이야기들도 꺼냈는데.
그 와중에 한태산 회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몸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한태산 회장.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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