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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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재빨리 물이 담긴 물컵을 가져왔다.
이때, 나는 한태산 회장의 몸을 좀 받쳐줬고.
한편, 그는 두 손으로 물컵을 받은 뒤,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눕던 그는 바로 짜증을 내며 외쳤다.
이번엔 목소리가 좀 더 커졌고.
더 거칠어졌다.
“···저번에 넣은 자금은 다 소진했어!”
“······??”
“여보! 회사가 많이 위험하단 말이야. 왜 자꾸 내 말을 안 들어? 말했잖아! 그룹은 당신과 내 거라고! 당신과 내가 만드는 그룹이라니까! 지분도 많이 넘겨줬고. 근데 왜 자꾸 모른 척해? 여보! 이 그룹은 나중에 우리 유나한테 넘길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자금 좀 많이 가져와! 내가 누군지 알잖아? 내가 바로 한태산이야. 한태산! 내가 한 말은 내가 무조건 지키는 놈이라고···.”
그렇듯 짜증과 부탁의 말들이 계속 오가다가.
어느 순간, 그의 혼탁한 동공 움직임이 점점 더 이상해졌는데.
갑자기 동공이 한쪽으로 휙 돌아가더니, 그때부턴 좀 더 해괴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로 날 쳐다보면서 말이다.
“···개새끼들! 다 잡아들여! 이 새끼들은 정신이 없는 놈들이야! 주인 말도 못 알아듣고··· 죽이진 말고 살려둬··· 최 부장! 바보 같은 짓거리, 그만하라고! 중정에 끌려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잖아? 줄건 다 주라고!! 우리도 살아야지··· 나도 무섭다고! 개새끼들! 어머니! 으으으··· 어머니! 대체 왜 그러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순사 새끼들이··· 흐으으··· 흐으으··· 안 그러면 죽어··· 다 죽어··· 다 죽는다고···.”
문제는 그의 말들이 갈수록 두서가 없었고.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섞이다 보니.
도대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침울해진 한유나.
그녀는 아주 슬픈 눈으로 한태산 회장을 쳐다봤고.
자신의 두 손으로 아버지 한태산 회장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한태산 회장은 정상을 되찾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침 무렵에 가장 상태가 좋다고 하는 한태산 회장.
그런데도 상태가 저 정도 수준이었다.
무척 좋지 못하다.
그리고 저 상황은 더 빠르게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일들에 관해서 물어볼까.
왜냐하면, 저런 광기 외에도 계단식으로 급락하는 증상 악화는 결국 한태산 회장의 과거 기억들마저 모조리 집어삼키고 그 기억들을 크게 훼손하게 될 것이다.
문득, 나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내가 그렇게 질문을 해도 될까.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다.
우선, CCTV는?
없다.
그러나 어딘가에 도청 장치가 있을 가능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나는 더 중요한 부분도 바로 인지했다.
좀 전에 한태산 회장은 한유나에게 그룹을 물려주겠다는 말을 했다. 마치 오래전 약속을 다시 언급하는 말투로써.
그런데 한태산 회장의 그런 말 자체가 이런 시기엔 무척 위험할 발언이 아닌가. 한윤기 부사장한테 후계를 넘기려고 하는 바로 이 시점에 말이다.
만약 한윤기, 한윤수, 한윤형 형제들이 그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면, 무조건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한태산 회장의 발언에 뭔가 제동을 걸려고 할 수도 있다. 일종의 약물 투여 같은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무척 중요한 순간이란 말이다.
나중엔 이런 기회조차 얻기 힘들지도 모르는, 그런 중요한 순간.
그래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슬며시 한유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한유나는 한태산 회장의 손을 놓은 뒤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이때,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회장님한테 직접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좀 줘.”
그러자 한유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한태산 회장의 상태가 저런데, 대화는 불가능할 거라는 표정이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현재 이 공간은 CCTV 녹화가 되지 않고 있다
물론, 어딘가에 도청 장치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으나 그래도 상관없다.
대체 내가 뭘 질문한 건지, 무슨 의도인지, 누군가 듣는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한유나의 어머니와 관련된 질문들을 하게 된다면, 바로 누군가가 알아차릴 것이고.
오히려 한유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은 훗날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더군다나 지금 한유나의 표정도 무척 좋지 못하다.
한태산 회장에 대한 그녀의 염려와 걱정은 대단했고.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더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어 나는 구태여 그런 질문들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잠시 뒤, 나는 한유나의 양해를 얻은 뒤.
내 어머니와 동생이 죽게 된 사건과 관련하여, 드디어 한태산 회장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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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거짓 없는 입].
[대상자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특전]과 발동과 동시에, 나는 한태산 회장의 눈을 바라보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첫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9년 전 회장님을 크게 도와주신 분이 누구시죠? 그때··· 결국 저희 아버지께서 나름 도움을 드린 게 아닙니까?”
9년 전, 한태산 회장을 크게 도운 사람.
당시, 한태산 회장은 아버지의 공격을 받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발생한 교통사고 건으로 한태산 회장은 단숨에 기사회생하며 실형 선고를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
결국, 9년 전, 한태산 회장의 은인은 그 일과 관련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했던 아버지가 아니라···.
그렇듯 나는 누군가의 혼동을 위해 다소 애매한 질문을 했고.
그 때문에 누구도 그때의 교통사고와 연계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한태산 회장은 무언가 신비로운 힘에 휩싸인 듯 눈빛이 살아나더니 날 빤히 쳐다보며 즉시 입을 열었다.
“최덕렬.”
최덕렬??
순간, 나는 쿵! 하며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나중에 아버지를 통해 교차 확인하면 될 터. 특히, 그런 수뇌급의 정체가 확인되면, 당시의 현장 요원들도 차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회장님! 근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그저 아버지께서··· 그때 조금 모질게 하셨지만,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바로 그때, 한유나가 바로 나섰다.
괜찮다며 날 제지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상황에선 누가 봐도 한유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아버지와 한태산 회장의 묵은 원한을 풀어보려는, 나의 작은 노력.
왜냐하면, 횡설수설하는 노인네가 정말 중요한 이름을 이야기할 거라곤 누구도 믿지 않을 테니까.
실제, 한태산 회장은 곧장 눈빛이 변하더니 그때부터 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해 둔 두 번째 질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태산 회장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듯했고.
[특전] 작용으로 인해 그는 진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혹시 몰라 준비한 다른 질문까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결국, 나는 ‘최덕렬’이라는 이름을 한태산 회장의 입을 통해 얻게 되었다.
<122>
“···그럼, 1226호실이 맞습니다?”
“네. 고태진 환자는 1226호에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보존적 치료 중이라는 소견도 확인됐습니다.”
확실히 편하다.
신라병원은 신라그룹에서 파생된 병원.
그룹 비서실 김상영 부장한테 신라병원에 입원 중인 ‘고태진’의 행방에 대해 알아달라고 하자, 고태진이 머물고 있는 입원실 외에도 몇 가지 정보를 그는 가져왔다.
사실, 병원에선 함부로 환자의 정보를 누설할 수 없으나 그룹 비서실에서 움직이다 보니 바로 병원 원무팀에서 그 정보를 준 것이다.
“근데··· 아, 아닙니다.”
한편, 김상영 부장은 내가 왜 ‘고태진’의 행방을 찾는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감히 그런 질문 같은 걸 던질 수가 없다.
나는 한유나와 약혼 예정인 상태.
그런 나에게 그런 질문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긴, 궁금하겠지.
내가 고상중 의원의 아들인 고태진의 행방에 관해서 묻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나는 고태진의 입원실 위치 정도는 알아낼 수가 있다.
이곳 신라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는 의대 동기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고, 그들을 통한다면 비공식적으로 그런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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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1226호에 들렀다가 가자.”
“누군데? 그분?”
한유나는 의아해하며 날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성국대 병원에서 수술받았던 사람인데, 식물인간이 됐어.”
“식물인간?”
순간, 놀란 듯 눈이 약간 커지는 그녀.
“좀 안타까운 게 있어서··· 신라병원에 온 김에 한번 가서 얼굴이나 보려고. 병원을 여기 옮겼다고 해서.”
“아.”
한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말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하자 우리는 바로 내렸다.
이때, 나는 병동 전체 모습을 쭉 훑어본 뒤, 곧장 1226호실로 향했다.
현재 고태진이 입원해 있는 병실은 1인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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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호? 1224호? 1225호? 그리고···.
한편, 그렇듯 각 호실을 확인하며 걷다가.
마침내 우리는 1226호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 앞에 서서, 잠시 환자 이름을 가만히 쳐다봤고.
한유나는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줬다.
그러고는 나는 문고리를 잡은 뒤 슬쩍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특별한 제지 없이 문이 열리고 있었고.
이때, 단출한 내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특히, 한쪽, 간이침대 쪽에 누워있는 간병인의 모습도 보였다.
펑퍼짐한 치마를 입고 있는 어느 중년 여자.
그런데 그 간병인은 지금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그 간병인의 코 고는 소리가 무척 요란했다.
한편, 침대에 누워있는 고태진.
화상으로 인해 얼굴이 흉측해진 그는 그나마 이전보다 상태가 더 좋아진 듯, 한 번씩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그게 단순히 반사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쩌면 의식적 행동인지는 여기선 알 수가 없다.
다만, 팔다리의 움직임은 모두 정지된 상태.
나는 그런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바로 한유나에게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즉시 1226호에서 나왔고.
이때, 나는 슬쩍 통로 좌우 천장 쪽을 둘러보며 CCTV 위치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CCTV 한 대의 방향이 1226호 통로 쪽을 향하고 있다.
그래!
오히려 저건 잘 됐다!
저런 게 있으면 내 알리바이가 더 확실해질 테니까.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한편, 나는 바로 지척에 위치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고.
한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이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호하던 경호원들이 그 즉시 그녀한테 다가갔고.
그런 모습들을 곁눈질하며 확인한 뒤, 나는 화장실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가.
그 즉시 [특전]을 발동시켰다.
[특전: 검은 고양이(S)]
[어두운 곳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서도 10분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1회 사용]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그런 특성 발동과 동시에 내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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