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7
<124>
잠시 뒤.
모처럼 아버지와 긴 대화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한 고태진과 관련된 일들을 먼저 이야기했고.
특수부 김덕규 검사 라인을 통해 내가 그 일에 관여된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혹시 모를 내 상황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무척 고마워하는 목소리로 이것저것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게 좋겠다. 언제가 좋을까?”
한번 만나자는 아버지의 요청.
그러고 보면, 저번 서정국 회장의 회갑연 때.
그때 아버지의 얼굴을 봤으나.
이후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서정국 회장의 회갑연 때는 그 모임이 중심이 되다 보니, 그땐 부자간의 사소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나자는 요청이었다.
“좋습니다. 서울에 가게 되면, 그때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듯 나는 무척 차분하게 대답했고.
이때, 아버지는 약간 놀란 듯 잠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감정이 끓어 오르는 듯, 허스키하지만 좀 더 거칠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민아, 니가 그렇게 받아주니까, 정말 고맙구나.”
“······.”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꼭 만나자. 꼭 만나서···.”
“네! 반드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그동안··· 꼭 건강하십시오.”
그러자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감정적 변화가 생긴 듯, 잠시 후 좀 더 거칠어진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고맙다. 너는 몸 챙기면서··· 일 하거라. 인턴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하던데···.”
“네. 제 몸은 제가 잘 챙기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제 그만 끊자. 바쁠 텐데.”
그러고는 마침내 10분 남짓 이어지던 통화가 끝났다.
그리고 이때, 나는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먹먹하면서도.
아주 오래된 묵은 체증이 조금씩 풀리는 듯한 그런 느낌.
아주 깊었던 과거의 분노와 증오 역시 사르르 녹으며 사라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이건 회귀 전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즉, 회귀 전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이젠 그런 감정적 치유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 시스템 덕분에 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눈앞의 세상도 변했다.
과거엔 없었던 한유나가 살아 있고.
아버지와의 해묵은 갈등도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있다.
그래!
모든 게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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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나는 다시 응급실로 돌아갔고.
그때부터 다시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며 바쁘게 움직이다가.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휴대폰을 들고서 다시금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특히, 오늘 워낙 큰 사건이 있다 보니 전화할 내용이 많아진 듯, 휴대폰은 또다시 요란하게 진동했고.
곧이어 통화를 하게 된 상대는 바로 강제철 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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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실장님!”
한편, 통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좀 더 힘있게 반응했는데.
그런 내 목소리에 강제철 실장도 무언가 기분이 좋아진 듯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밝아졌다.
“도련님! 소식 들었습니다! 고태진 일에 관여하셨다고요?”
어쩜 그렇게 정보가 밝을까.
하긴, 강지연 검사 라인의 실질적인 최종 수장은 바로 아버지 김윤상 의원이다 보니 강제철 실장이 그 사실들을 모를 수가 없다.
“어쩌다가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특수부 김덕규 검사가 저희 환자였던 분의 남편이었고···.”
그러면서 잠깐 설명을 했고.
전화상으로 강제철 실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도련님! 어쨌든 정말 잘 하셨습니다. 고상중 의원이 저번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바람에 골치가 좀 아팠습니다. 정치 쪽은 특히 죽여야 할 대상을 확실하게 죽이지 못하면, 그 우환이 아주 큽니다. 그자가 뭔가 일들을 벌이기 전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아주 다행입니다.”
“그럼, 이번 일로 고상중 의원을?”
“네! 무조건 떨어뜨릴 겁니다. 현직 의원이라고 해도 구속영장 집행이 가능하도록 의원님께선 당내 의원들을 규합하며 직접 나서실 생각이십니다. 특히, 명분을 다시 잡을 수 있어 확실히 우리한테 유리합니다. 더군다나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땐 주요 언론을 크게 움직여 재기불능 상태로 몰고 갈 생각입니다.”
확실하게 고상중을 잡겠다는 의지.
그 의지가 아주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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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 이건 제 개인적인 질문인데··· 사실,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그는 처음엔 주저주저했는데.
괜찮다며 내가 질문하라고 하자, 그제야 강제철 실장은 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도련님께선 신라그룹에 대해··· 혹시 그룹 자체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그룹 자체?
그룹에 대한 관심?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강제철 실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한태산 회장의 신라그룹! 한윤기, 한윤수, 한윤형의 신라그룹! 하지만 한유나씨의 신라그룹도 이젠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네??”
“도련님! 의원님께선 직관력과 통찰력이 아주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거기다가 한태산 회장과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의원님께선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의원님은 한유나씨가···.”
그러면서 강제철 실장은 더 뜻밖의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유나가 주도하는 신라그룹에 대해 관심이 있냐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이때, 나는 잠시 생각했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특히, 강제철 실장의 저 질문을 절대 가볍게 여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제철 실장과 아버지는 일심동체나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또한 강제철 실장은 아버지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분이다.
“그럼 저희를 돕겠다는 말씀입니까?”
한편, 나는 슬쩍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그러자 바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뿐만이 아닙니다. 의원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도련님과 한유나씨의 일들을 돕게 되실 겁니다.”
아버지께서 이 일에 관여하겠다고?
이 일에 직접 나서겠다고?
그러고 보면, 내가 직접 원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한유나의 일에 갑자기 나섰고.
한태산 회장과 협상을 벌인 뒤, 결국 약혼을 성사시켰다.
그렇다면 혹시 아버지한테 또 다른 목적이 있었나?
문득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그 의심을 깊이깊이 가슴에 묻어 두고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감정으로 변색시켰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터라 나는 그 의심 부분을 즉시 강제철 실장한테 물어봤다.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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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께선 한유나씨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시고··· 또한 도련님에 대한 아픈 감정들이 무척 깊으십니다. 도련님께 뭐든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고 싶어 하시지만, 지금껏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원님께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잘 보살피지 못한, 그 지난 과오에 대해 후회하시면서···.”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최대한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참회와 보상,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러면서 강제철 실장은 계속 설명들을 이어나갔지만, 나는 잠시 중단시켰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직접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할 이야기들이다.
“실장님!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돕겠다는 말씀입니까?”
한편, 내가 실질적인 도움 내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자, 강제철 실장은 다시 목소리가 밝아졌고, 좀 더 상세하게 내용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강제철 실장은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한 듯 여러 가지 계획들에 대해 나한테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신중하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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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밤은 점점 깊어졌고.
바깥 기온은 어느덧 영하 10도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할 요량인지 맹추위를 머금은 바람은 쉴 새 없이 불어오며 응급실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특히,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그 시각, 이곳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이 하나둘 많아지더니 어느 순간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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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씨! 경찰 불러! 시팔!! 경찰 부르라고!!”
“우에엑. 크에에엑! 우우우욱!”
“시발, 누가 토하고 나빠졌어? 개새끼들! 존나 병신 같네. 야! 이 시불아! 야! 야! 막걸리 가져오라고! 이 시불아.”
“형씨! 당신 뭔데, 우리 집에 와서 지랄이야? 가라고 가! 시발!”
“떼키! 떼키! 인마! 너 안 꺼져? 이 시발놈아···.”
“변소 어디야? 변소!! 여기서 누면 되나?”
“선생님! 그러시면 안 돼요! 지퍼 올리세요! 빨리! 빨리요!”
“니미 시발! 야! 김 대리! 술 가져와! 이 새끼가 미쳤나! 야! 김 대리!!”
“선생님!! 채혈 중입니다.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시발! 놔!! 놔라고!! 아프잖아! 개쌍년아!”
“선생님!! 욕하지 마시고···.”
“이 쌍년이!”
“선생님!!”
“딸꾹. 딸꾹. 우엑, 우으으으에에엑.”
“아으, 진짜, 여기 좀 닦아 봐.”
이렇게 난리일 수가 없다.
한두 명 들어올 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취자 환자들 대다수는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많았다. 누군가와 싸우다가 얼굴이 찢어진 사람도 있었고, 팔이 부러진 사람, 손가락이 골절된 사람도 있었다. 또는, 뇌진탕 증세를 호소하며 쉴 새 없이 토하며 사방에 토사액 악취를 심하게 풍기기도 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일부러 응급실을 찾은 취객도 있었다. 수액주사를 맞으며 밤새 응급실 침대에서 푹 잘 생각인 듯, 베드에 눕자마자 수액주사를 요구한 뒤 바로 코를 드르릉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들이었다. 즉, 숙박료를 내지 않고 그렇게 하룻밤을 편히 보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래도 그나마 이들은 양반이었다.
미쳐 날뛰는 취객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응급실 간호사들은 점점 더 애를 먹었고.
조은하 선배도 그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그런데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119구급차에 실려 온 어느 주취자 환자.
30대 초반 나이로 보이는 그 남자는 입고 있던 잠바가 온통 피범벅인데, 완전히 필름이 끊긴 상태인 것 같았다.
그는 스트레처카에 실려서 들어왔고.
이후 응급실 베드로 옮기자마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충혈된 눈으로 광분하기 시작했다.
“시발, 새끼-들!! 다 죽어어어!!”
특히, 그는 갑자기 의료용 카트를 힘껏 밀어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그 요란한 소리에 간호사들이 놀라며 비명을 지르는 사이.
좀 전, 의료용 카트 위에 있던 가위를 언제 잡았는지 몰라도.
가위의 뾰족한 부분이 앞쪽으로 오도록 손에 쥔 뒤, 눈앞에 있는 박미옥 간호사한테 미친 듯이 가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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