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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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좀 쉬세요! 잠깐이라도 하이드레이션(hydration, 수액 주사) 하시는 게?”
“아냐. 괜찮아. 여기, 구멍 난 것도 아닌데. 신경도 말짱한 것 같고···.”
“그래도···.”
“야, 괜찮으니까 됐어. 그리고 고맙다.”
한편, 조은하 선배는 날 빤히 쳐다봤다.
“아까 도와준 거, 그거 말이야.”
“아··· 선배님! 제가 너무 늦게 움직여서···.”
“아니! 난 깜짝 놀랐어.”
“네??”
“갑자기 나타나던데?”
“······??”
“정말 갑자기.”
하긴, 그때 [혼미] 특성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그 [혼미]에서 즉시 풀려나던 그 순간, 조은하 선배는 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비록 1, 2초라고 해도 위급한 순간의 당사자는 그 1, 2초의 간극이 보통 사람과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불안해졌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슬쩍 물어봤다.
“혹시 제가··· 순간이동 하는 것처럼 보이던가요?”
“응.”
네???
순간, 나는 경악했다.
맙소사, 이를 어쩌지.
그러나 이어지는 조은하 선배의 말에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래서 더 고마워! 그 정도로 빨리 달려와 줘서···.”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긴,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순간이동 자체를 믿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뒷정리다!
나는 즉시 휴대폰을 꺼냈다.
이젠 좀 더 확실하게 이번 사태를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잠시 뒤.
강제철 실장과 통화가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30분 뒤.
이곳 관할 경찰서 서장이 직접 이 현장을 찾게 되었다.
<126>
“···강 팀장, 괜한 짓 하지 말고, 저 취객 잘 잡고 있다가 정신 차리면 바로 ‘서’로 데려와!”
“네! 서장님!”
“그리고 저쪽에 있는 저 젊은 의사분, 잘 살펴봐. 뭐든 도와주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잘 해봐!”
“네! 서장님!”
“···아아,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뭐든 일이 있으면 여기 강 팀장한테 말씀해주십시오. 저희 강 팀장이 아주 싹싹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참! 아까, 차관님 전화도 받았는데···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하하하···.”
그러고는 서장은 웃으며 응급실을 나갔고.
그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큰 사건이 있었던 뒤라 시간은 생각보다 잘 갔고.
유난히 사건이 많았던 내 24시간은 그렇게 과거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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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그러고 보면, 진짜 정신이 없었다.
그 24시간 동안, 나는 서울로 가서 한태산 회장의 병문안도 했고.
한태산 회장의 입을 통해 ‘최덕렬’이라는 이름도 알게 되었다.
고태진을 회복시켰으며.
그로 인해 김덕규 검사, 강지연 검사 등이 고상중 의원에게 다시금 칼을 겨눌 수도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야간 응급실 주취자 난동 사건도 생겼다.
물론, 이 주취자 난동 사건은 뒷정리가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
관찰 경찰서 서장이 야간에 직접 현장을 방문했고.
관련 수사를 즉시 지휘하다 보니 삽시간에 사건 정리가 된 것이다.
우선, 주취자는 ‘특수상해’로 입건될 예정.
반면, 내가 주취자에게 주먹을 날린 건 단순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예정이고.
간호사들이 주취자를 응징한 것은 쌍방폭행 내지 정당방위 정도 선에서 정리될 거라고 했다.
물론, 강제철 실장은 관할 검찰 쪽에도 연락을 취한 터라.
이 상황에서 특별한 변화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듯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와중에 날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확실히 달라져 버렸다.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각임에도 경찰서장이 직접 현장을 방문한 데다가.
경찰서장이 마치 내 앞에서 굽신거리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걸 직접 봤던 형사들과 간호사들.
그들은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부패가 만연했던 70년대, 80년대가 아니라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있는 2001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도시의 경찰서장은 과거로 회귀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아버지가 지닌 막강한 권력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저번에 고상중 의원을 공격하면서 아버지는 전리품을 차지하듯 그 힘이 더 커져 버렸다.
당내 주요 계파가 되어버렸고.
이런저런 의원들에게도 손을 뻗쳐 어느새 당내 거대 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것이다.
물론, 여러 의원들이 고상중 의원에 대한 손절을 택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란 건 무척 지저분하면서도 자기 생존을 위해 상대를 압살하게 되는, 끝없는 전쟁터와도 같은 일면을 갖고 있다.
여하튼, 나는 아침 7시 무렵, 오늘 일요일 근무를 맡게 된 김한석 선생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뒤, 조은하 선배와 함께 응급실에서 나왔다.
한편, 조은하 선배는 상처 보호와 치유를 위해 반깁스까지 한 상태인데.
그 때문에 당분간 환자 진료가 어려워질 것 같았다.
아마 저 상처가 다 나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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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선배! 요 앞에 꽤 괜찮은 국밥집이 있다고 하던데 거기서 아침 먹죠?”
“국밥?”
“네. 콩나물국밥.”
“음, 괜찮겠다. 가자.”
그러고는 곧바로 우리는 병원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24시간 콩나물 국밥집으로 향했다.
현재 아침은 되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추운 상태였고.
거리 여기저기에는 며칠 전에 내렸던 눈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하! 왜 이렇게 춥지? 빨리 들어가죠.”
잠시 후, 우리는 국밥집에 도착하게 되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서 서로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주문도 넣었다.
“이모님! 콩나물국밥 2개, 파전 하나 주세요!”
그렇게 내가 주문을 마치자, 조은하 선배는 살짝 딴지를 걸었다.
“파전은 왜? 아침인데?”
“그냥 제가 살게요.”
“왜? 김 선생이 왜?”
“밤에 수고 많으셨잖아요. 그 손으로 환자 진료도 하셨고···.”
조은하 선배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저번엔 신경외과 치프 윤정화 선생과 사납게 싸우기도 했는데, 그땐 환자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면서도 날 도와주려는 고마운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박미옥 간호사를 구했다. 자신의 손을 저렇게 희생하면서.
그런데 그 일이 끝난 뒤에도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야간응급 진료 중, 그녀는 그 다친 손을 계속 움직이려고 했고. 그래서 놀란 나는 그 손을 보호할 생각으로 반강제적으로 저 깁스를 달아준 상태다. 반깁스 형태로 말이다.
“근데 이거 좀 답답하다.”
조은하 선배는 잠시 후 자신의 왼쪽 반깁스를 쳐다보며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난 담배를··· 왼손으로 피는데.”
그 순간, 나는 어이가 없어져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하! 참! 근데 선배! 다친 데 괜찮아요? 아프지 않으세요?”
그러자 인상을 더 쓰는 조은하 선배.
“아직 아파. 찌릿찌릿하면서도 많이 쑤시고, 그리고···.”
“혹시 약 드릴까요? 혹시 몰라 약들을 좀 챙겨왔는데, 진통제 드릴까요?”
즉시, 잠바 주머니에서 진통제가 든 알약 통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사양하지 않고, 알약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꺼내 바로 물과 함께 삼켰다. 생각보다 상처 통증이 심한 모양이다.
“혹시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아니, 괜찮아. 됐어.”
“아뇨, 말씀하시면···.”
“괜찮아.”
조은하 선배는 다시금 고개를 저은 뒤, 곧이어 또 입을 열었다.
“국밥 먹고 그냥 푹 자려고. 마침 일요일이고···.”
그렇지. 오늘은 일요일이다.
성국대 병원에선 딱히 일요일 휴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일요일의 여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가 있다.
물론, 응급실은 24시간 운영되다 보니 완전한 여유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 응급실 분위기는 일요일이 되면 확실히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저녁 근무··· 오프라고 했지?”
“네! 근데 혹시 힘드시면··· 이번 순번을 바꿀까요?”
그러니까 나는 내일 아침 7시까지 오프가 된다. 오늘 저녁 근무 없이 말이다.
그러나 조은하 선배는 오늘 저녁 7시부터 야간 근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나 괜찮아.”
“네??”
“쉴 때 쉬는 게 좋아. 그냥 넌 쉬어. 나도 좀 쉬면 저녁에 일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반깁스까지 한 사람이 혼자서 응급진료를 본다고?
“그냥 오늘은 쉬세요! 제가 할 테니까요!”
그 정도 일을 내가 못 도와주겠는가.
그리고 잠시 뒤.
조은하 선배는 날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신경 써 줘서···.”
그 순간,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뇨. 당연한 일인데···.”
그러나 조은하 선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하지 않지. 이럴 때, 무신경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러고는 조은하 선배는 또 말했다.
“내가 김 선생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건 확실히 알겠어.”
“네?”
“인정이 많은 것 같애. 남들 신경도 많이 써 주고···. 하긴, 그런 신경을 못 쓰는 사람이 외과 의사를 할 수 없지. 남들 편하게 잘 시간··· 밤잠을 포기하는 일이니까···.”
“근데 그건, 선배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조은하 선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실 의사도 그렇지. 그래서 남들이 봤을 땐, 정말 바보 같을 거야. 정말 멍청해 보이고. 이런 일들이 자기만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잖아.”
한편, 조은하 선배는 푸념 같은 말들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응급실 난동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충격이 좀 있었나 보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고.
인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조은하 선배는 얼마나 놀랐을까.
누가 그런 자리에서 자신의 손을 그렇게 뻗을 수 있을까. 자신의 손이 그대로 관통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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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정신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후우. 후우.
한편, 국물이 너무 뜨거워, 그렇게 후후 불어가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한참 뒤.
“하! 이제 좀 살 것 같네. 선배, 콩나물국밥 괜찮죠?”
내가 그렇게 묻자, 조은하 선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든든해진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만족해 하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식사를 모두 끝낸 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나는 그 밥값을 치른 뒤 가게 밖으로 나왔고.
이때, 조은하 선배는 잘 먹었다며 나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제 우리의 모자란 잠들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곧장 별관 숙소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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