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아버지 02
<135>
2001년 12월 30일 일요일 아침.
전날 밤늦게 서울에 도착한 나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왜냐하면, 오늘 할 일들이 무척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오피스텔에서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샤워를 마쳤고, 이것저것 준비를 끝내자마자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번 약속 장소는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저택. 바로 내가 한때 살았던 바로 그 집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저택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뒤.
그곳에서 강제철 실장을 만났고.
그와 함께 곧장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이 저택은 한유나의 저택 수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상 2층 구조 외에도 지하 1층의 공간을 또한 갖고 있고.
정원 규모는 한유나의 저택보다는 좀 작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운치가 있는 편이다.
그리고 한편, 밤새 눈이 내린 듯.
정원은 이미 하얗게 변해 있고.
저택의 지붕 역시 온통 하얗게 변한 상태다.
사실, 이런 풍경은 내가 한때 무척 좋아했던, 바로 그림 같은 저택의 모습인데.
그런 모습이 지금 연출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내 눈은 저절로 즐거워졌고.
은근히 뛰고 있던 내 심장도 조금은 차분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로부터 잠시 뒤.
아주 넓은 거실.
그 거실을 거쳐 나는 응접실로 드디어 들어갔다.
한편, 그곳엔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 조용히 앉아 계셨다.
그리고 이때, 인기척을 들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정치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늘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고 계시는 아버지.
종종 염색하며 머리 관리도 하시지만.
그럼에도 어느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지는 그는 오늘따라 아주 새카만 머릿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날 염색을 한 모양인데···.
순간, 나는 즉시 깊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때, 나는 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
과거!
사실, 내가 그렇게 인사를 많이 해도, 항상 못 본 척하며 매정하게 자신의 일만 하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놨고, 돋보기안경 역시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만히 날 쳐다봤다.
노쇠해진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 그곳엔 내 모습이 현재 투영되고 있었고.
그러다가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보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
“정민아.”
정민아??
근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너무 온화하시지?
상황이 많이 달라진 터라, 결국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 정도까지 목소리가 달라질 줄은 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 역시 나이가 많이 드신 것이다.
그래서 무척 유해진 모습이었다.
어쨌든 그런 목소리 때문에 나는 잠시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휘말렸다가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데 곧이어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래. 잘 왔다.”
잘 왔다?
잘 왔다고?
내가???
도무지 그 한 단어 한 단어를 가볍게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귀한 목소리였고.
무척 의미심장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눈앞의 아버지가 동생과 어머니를 일부러 죽였다고 믿었다.
그 지독한 마음.
그 이기적인 마음.
그리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기합리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버지.
권력! 권력! 권력!
아버지가 원하는 그 권력에 대한 탐욕.
사실, 내가 성장하면서 봤던 아버지는 늘 냉정했다.
늘 차가웠다.
늘 나한테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런 무관심은 더 큰 증오를 낳게 했고, 더 큰 괴리를 낳게 했다.
더군다나 그날 아버지는··· 무척 난폭하게 운전하시지 않았나.
자신의 방향으로 핸들을 틀었고.
그 결과, 자신은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어머니와 동생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나 역시 그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런 끔찍했던 사고.
그런데 그 끔찍했던 사고 이후, 아버지는 더 끔찍해지셨다.
당시, 경찰 조사 과정에서 내 모든 증언을 조종했으며.
자신의 죄과를 회피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아버지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그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그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어버렸다.
그때 이후, 몇 년간 우리는 단 한마디 말도 서로에게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일절 말이 없으셨고.
나 역시 그러했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이 집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가···.
지금 날 그윽하게 쳐다보며, 또한 웃으며, 나에게 입을 열고 있었다.
#
한편, 아침 식사와 함께 우리는 아주 긴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길어졌다.
특히, 그 과정에서 나는 지난날에 대해 많이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는 자신의 두려움과 미안함을 하나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즉, 자신도 두려웠다는 것이다.
아내가 죽었고 둘째 아들이 죽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당시 모든 것들을 모조리 다 던져버리고, 자신의 인생마저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이 가문이 끝나게 되고.
아들인 나 역시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명이지만···.
가문과 날 생각해서, 억지로 억지로 권력을 향해 다시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나에 대해 큰 오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무척 매정하게 대하는 내 모습.
그래서 그는 더 분노하게 되었고, 더 냉정한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다시금 확인했고.
지금껏 큰 후회를 안고서 살아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그 지독한 성격 때문에 그 말들을 감히 나한테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척 미안했다고···.
너무나도 미안했다고···.
그리고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다고···.
젠장!
순간, 나는 참을 수가 없었고.
순간, 눈시울이 극도로 뜨거워졌다.
그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들이 폭발했는데.
그러고 보면, 아버지도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없을 기회라는 것을···.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남처럼 살았던 회귀 전의 모습.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작된 우리의 대화!
그게 바로 새로운 계기이자,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평생 처음으로 큰 용기를 낸 것이다.
무척 고맙게도.
무척 자상하게도.
그리고 드디어 다시 없을 기회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되었고.
점점 더 우리의 두 눈은 축축해지고 있었다.
이때,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게 되었고.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의 이야기들도 쉴 새 없이 오가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 대화들이 이어진 뒤.
어느 정도 각자의 감정들이 수습되자.
이제 끔찍했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어지게 되었다.
#
한편, 나는 그때 그 사고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즉, 내 기억을 되찾았다며.
나는 당시 사고 이후의 일들도 자세히 언급했다.
즉, 그때 우리 차량으로 다가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던 그들.
그들이 나눴던 그 대화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는데.
그러자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갑자기 눈이 커졌고.
아주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얼굴은 완전히 납덩이처럼 굳어버렸다.
그 와중에 내가 ‘최덕렬’이라는 이름까지 이야기하자.
아버지의 동공과 입술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아주 결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최덕렬? 정말 그자들이··· 정말 최덕렬을 언급했다고?”
“네! 저는 분명히 그렇게 기억합니다.”
나는 그렇듯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는 한태산 회장으로부터 알게 된 ‘최덕렬’이라는 이름을 적당히 그들 대화 사이에 집어넣었고,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최덕렬’의 존재를 알려줬는데.
한편, 아버지는 그 이름을 듣게 되자,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분노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두 눈엔 섬뜩한 기운이 불같이 일어났고.
그의 두 눈은 무척 차갑게, 무척 사납게 빛나기 시작했다.
#
“···그럼 최덕렬이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한편, 잠시 뒤.
나는 강렬해진 호기심을 보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금 자신의 시선을 내 눈에 맞춘 뒤 가만히 날 쳐다봤다.
그러고는 그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정민아.”
“네?”
“아무래도 너는··· 계속 모른 척하는 게 낫겠다.”
“네??”
“······.”
“아버지, 저는 그게 아니라, 저는···.”
“아니다!”
“???”
“그냥 너는··· 모르는 척하게 훨씬 더 나아. 그자는··· 무척 위험한 사람이야.”
무척 위험한 사람??
“니가 나섰다간, 괜히 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더 큰 일이 일어난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다시 한 번만 더 묻자. 정말 그 일들을 정확하게···.”
“네!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알겠다. 근데 어쩌다가···?”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갑자기 생각난 거라···.”
이때, 긴 한숨을 다시 내쉬더니 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알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너는 그 이름을 절대 모른 척하는 게 나아. 절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으음, 정민아.”
“네?”
“너까지 괜히 흥분할 게 아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진짜 웃는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이 이때 일어나고 있었다.
“네가 할 일이란 게 있고··· 내가 할 일이란 게 있다. 비록 네게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나는 한때 가장이었다. 그래서 내게 더 큰 책임이 있다.”
“아버지! 그래도···.”
“아니! 내 말을 잘 듣거라! 아까도 내가 말했지만··· 너는 병원 일과··· 신라그룹 일에만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기는 못하면서 남 탓만 하는 자들, 내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부류들이지. 그래서 내 사전엔 ‘용서’라는 단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정민아, 지금이 네 인생에 있어 아주 좋은 기회인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한편, 나는 그 말에 잠시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얼마 전, 한태산 회장의 상태가 더 심각해졌다고 하더군. 너도 병문안을 갔으니까 잘 알겠지?”
“···네.”
“과거 일들을 두서없이 쏟아낸다고 하던데···. 듣기론, 신라그룹의 후계자가 원래 한유나였다면서?”
그 순간,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벌써 아시는구나.
확실히 정보력이 대단하다.
그러니 강제철 실장을 통해 그 기밀서류를 나한테 보내줬을 것이다.
“네. 저번에 병문안 갔을 때 그런 말들을 횡설수설하듯 중얼거리는 걸 그때 들었습니다.”
“정민아!”
“네?”
“최덕렬은··· 바로 아, 아니다. 아무튼, 그 상황이 그렇게 됐으니까 한유나를 정말 돕고 싶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사인 네가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땐, 한태산 회장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이미 들었을 텐데, 강 실장이 짜 놓은 계획들이 있으니까 그것도 잘 활용해 보거라. 그리고 고상중 의원 건은 정말 수고했다. 그 아들놈(고태진)이 지금 강지연 검사한테 술술 불고 있는 것 같더라. 하긴··· 지 애비가 자길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구나.
일이 그렇게 전개되고 있구나.
“그리고 참! 강만희 회장이라고 했지?”
[MH투자펀드] 강만희 회장.
한유나의 하나밖에 없는 외삼촌이다.
“나름 도움이 될 거다.”
“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앞으로 네가 극도로 조심해야 될 사람이다.”
“네??”
나는 의아해하며 즉시 반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