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징2 01
<148>
“도련님, 편찮으신 데는 없습니까?”
“저야 뭐 당연히 팔팔합니다. 근데 실장님은 괜찮으세요?”
2002년 1월 9일 수요일 밤 9시.
한파가 밀려들며 현재 바깥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뚝 떨어진 상태다.
정장에 두꺼운 긴 외투를 입고 목도리까지 하고서 나타난 강제철 실장.
그런데 백발의 강제철 실장은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하하, 저 말입니까? 평소 운동을 많이 하다 보니, 나이가 들어도 아직은 충분히 견딜 만합니다. 근데 날씨가 춥긴 춥네요.”
그렇듯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강제철 실장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의 강제철 실장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좀 전의 약간 어색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고, 나에게 무척 인자한 그런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근데, 제가 괜히 만나자고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즘 일들이 많아 힘드실 텐테···.”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즉시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저는 항상 괜찮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참! 아까 전화 중에 하신 말씀들은···.”
그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이번 사건의 범인인 김주호를 직접 만나고 싶다며 그 일과 관련된 일들을 이야기했고.
강제철 실장은 현재 수사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려줬다.
즉, 이번 사건의 수사는 병원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두 범인들의 구속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경찰의 손을 떠나 어느덧 검찰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라고 한다. 이때, 검찰에선 전담수사팀이 꾸려지게 되었고, 검사 4명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건 특수 기획 수사에 버금가는 대단한 규모다.
그런 대단한 전담수사팀이 꾸려진 거라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 구속 상태인 이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유사 범죄들이 확인되었는데.
수사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추가 범행이 몇몇 드러나자, 그때부터 태도가 확 바뀌었다고 한다.
마치 그 범행들을 전리품인 듯 그들은 말했고. 프로파일러가 합류하여 자백을 유도하자, 이때부터 자신들의 범행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로 인해 수사 범위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도련님, 그 사건은 저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검찰로 넘어간 사건이다 보니, 의원님께서도 이것저것 확인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제가 궁금한 점은··· 구태여 도련님께서 그 범인을 다시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도련님은 사건 관련자, 참고인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이런 행위는 담당 검사가 좀 의아해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대면 자체가 불필요한 행동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생각해 봤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들과 두 번이나 마주쳤다. 정확하게는 동생 김주태였고. 첫 번째 만남 때, 나는 김주태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땐 망치를 휘둘러 김주태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물론, 현재 수사 기록에는 김주태를 제압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 기억상실 상태인 서수연으로 기록되어 있는 상태다. 망치에 대한 지문 감식과 내 증언 때문이었다.
한편, 나는 잠시 더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건 특히 유나와 관련된 일이고···. 저로선 충분히 명분이 있다고 봅니다.”
“아! 저번 병원에서 있었던 그 사건의 배후 때문에 그렇습니까?”
“네.”
그렇듯 내가 바로 시인하자, 강제철 실장은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좋습니다! 도련님! 그럼 제가 한번 진행해 보겠습니다. 근데 이것은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검찰에서 지금 대대적인 전담수사팀을 꾸린 건, 이 사건이 거대한 청부 살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여러 범행에 대한 이야기들은 술술 흘러나오고 있으나 청부 의뢰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자들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고, 어쩌면 흑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흑심이라고 하시면?”
“그 정보를 이용해서 중간에 검사들과 형량을 딜(deal)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청부 의뢰자들에게 뭔가 요구하는 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딜이 되겠죠.”
그러니까 쉽지 않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있다. 나한텐 [거짓 없는 입] 특전이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 화제를 우선 마무리한 뒤, 곧이어 나는 다른 화제도 꺼냈다.
“근데 최근에 특별한 일들은 없습니까? 요즘 들어 제가 흉몽 같은 걸 자주 꿉니다.”
나는 일부러 그런 식으로 표현하며 병원 바깥소식을 물었는데···. 현재,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과 관련하여 아버지에겐 무언가 심각한 일들이 생길 테고, 그게 대체 뭔지 미리 확인해 보는 게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그러자 강제철 실장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눈에 띄게 변했는데···. 뭔가 놀란 표정.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제철 실장은 다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의원님께선 의정 활동 때문에 항상 바쁘시고 항상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아직 별다른 징후가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시스템 경고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어봤다.
“그럼, 고상중 의원 쪽은 어떻습니까?”
“아, 고상중 의원? 그쪽은 검찰에서 확실히 밀고 나갈 거라서 조만간 고상중 의원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물론, 검찰 출두를 거부한다면, 곧바로 수사 결과가 발표될 거고, 더 큰 정치적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일도 잘 진행되고 있다.
근데 왜 이렇게 갈수록 불안해지지.
아무래도 서철성 교수님 사건을 최근에 겪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 아닌가. 특히, 이번 미션의 목표는 아버지의 생명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참! 그리고 도련님.”
“네?”
“혹시 시간 되신다면 조만간 저택으로 오시겠습니까? 저번에 도련님이 방문하신 뒤, 의원님께선 도련님 생각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혹시 시간 되신다면 꼭 한번 찾아주십시오. 의원님께선 큰 힘을 받으실 겁니다.”
“네. 그건 제가 꼭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 오프 때 최대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도련님 약혼식과 관련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현재 약혼식 준비 상황에 대해서도 강제철 실장은 설명했다.
“···현재 신라그룹 비서실과 더불어, 약혼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다만, 약혼식 예물과 예복 결정 때문에 도련님이 잠시 병원 밖으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조만간 신라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유나와 통화하다가 그런 이야기들을 얼핏 들은 것 같다.
“알겠습니다. 약혼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저도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노파심에 말을 좀 더 덧붙였다.
“사실, 약혼식도 중요하지만, 요즘 저는 아버지가 더 걱정됩니다. 물론, 따로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느낌이 안 좋고···. 그래서 강 실장님! 혹시 무슨 일들이 생긴다면 저한테 즉시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가 다시 나타났다.
“도련님,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원님께선 아주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선 절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다른 곳에서 들었는데··· 신라그룹 안주인 손미희 여사의 움직임이 요즘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듯 손미희 여사가 갑자기 언급되자 나는 의아해했다.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간단히 설명했다.
“신라전자를 포함하여, 각 계열사 기관투자자들. 그들과 만남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한태산 회장의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데, 하필 이 시점에···.”
손미희 여사가 뭔가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럼 혹시 손명국 의원 쪽은 반응이 없습니까?”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두 눈에 묘한 이채를 보이더니 다시 설명했다.
“도련님도 잘 아시는군요. 손명국 의원이 손미희 여사의 친오빠입니다. 그리고 아실지 모르겠지만 고상중 의원의 계파에 속한 정치인입니다. 현재, 고상중 의원은 검찰 출두를 앞두고 있다 보니, 손명국 의원은 아주 조용한 편이고 현재까진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목적이 있다면, 손명국 의원 쪽도 뭔가 움직이려고 하지 않을까요?”
“음, 그건 좀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강제철 실장은 카페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했고, 곧이어 강제철 실장은 머리를 숙여 나한테 인사했다.
나도 황급히 마주 인사하며 예의를 갖췄는데. 그리고 잠시 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나는 신경외과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고.
강제철 실장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다. 즉, 그는 지하 3층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량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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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대략 3분 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신경외과 병동에 도착하던 중.
갑자기 나는 깜짝 놀라며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콰아-앙!
갑자기 그렇듯 엄청난 굉음이 어디선가 들려왔고.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병동 전체에 큰 진동까지 느껴졌다.
“대체 이게 뭐야?”
“선생님, 이게 무슨 소리죠?”
“뭐가 폭발했나??”
“대체 무슨 소리야??”
그렇듯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는데.
한편, 나는 잠시 멍해졌으나.
순간 본능적으로 엘리베이터 탑승 버튼을 다시 눌렀다.
하필이면, 강제철 실장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런 굉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괴상한 불안함이 전신으로 파고들었고,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엘리베이터를 잡고 선 나는 재빨리 강제철 실장한테 전화했다.
그런데 신호음만 갈 뿐, 통화가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불안감이 점점 더 가중되던 중.
다행히 생각지도 않게, 통화가 갑자기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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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님!! 괜찮으세요?”
통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크게 외쳤다.
그리고 이때,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배경음처럼 수신되는 와중에 강제철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도 곧이어 들려왔다.
“도련님! 제가 지금 많이 바쁩니다! 사고가 생겨···.”
뭐? 사고?
그럼 정말 강제철 실장과 관련된 폭발음이란 말인가.
“혹시 그 폭발음은??”
“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끊어야겠습니다. 참고로 전 무사합니다. 수행원한테 키를 넘기고 화장실에 갔다가··· 도련님! 지금 당장 의원님께 가 봐야 합니다!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즉각 통화가 끊어졌다.
나는 놀라며 가만히 서 있다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리고 그 즉시 지하 3층을 눌렀다.
그로부터 잠깐 뒤.
지하 3층에 도착했고.
나는 주차장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엄청난 광경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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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불타고 있는 한 대의 차량.
그리고 그 차량 때문에 주변 차량들도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상태다.
근데 그 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주변이 활활 데워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소화기를 손에 든 보안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일제히 하얀 분말을 분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을 듯, 갈수록 강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나한테 다가왔다.
“도련님, 여긴 위험합니다!”
그 친숙한 호칭에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들을 쳐다봤는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이때, 누군가 다시 외쳤다.
“강제철 실장님 지시사항입니다. 혹시 여기로 오시면, 바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도 외쳤다.
“도련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혹시 모릅니다. 여길 피하시는 게···.”
그러면서 그들은 엘리베이터 탑승구 쪽으로 내 발걸음을 유도했고.
내가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 타자, 그제야 그들은 물러서더니 지하 주차장 안으로 황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나는 호기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버튼을 눌러 막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안쪽 주차장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그리고 이때, 내 시야엔 좀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아까 날 보호해줬던 남자들.
그들은 서둘러 두 대의 SUV 차량에 각각 나누어 탑승하고 있었고.
이때, 굉음을 내며 달아나는 어느 오토바이 한 대를 따라잡기 위해.
강하게 액셀을 밟으며 급출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생각지도 않은 추격전이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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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징2 02 >
<149>
“의원님!! 접니다!!”
황급히 저택 서재 안으로 뛰어들어간 강제철 실장.
그가 그렇게 나타나자, 김윤상 의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김윤상 의원.
그는 일어서서 데스크 앞쪽 테이블로 걸어갔고, 강제철 실장은 김윤상 의원을 마주 보며 잠시 후 나란히 그 테이블 앞 의자에 앉게 되었다.
갑자기 두 사람은 봉변을 당한 느낌이었다.
뭔가 일들이 착착 진행되는 듯하다가.
난데없이 자동차 폭파 사고가 발생했다.
마치 자신들에게 강한 경고를 하는 것 같은 누군가의 음모였다.
그래서 표정이 무척 딱딱해진 강제철 실장.
그는 조금 전 사지(死地)에서 걸어 나온 것과 다름없는데.
그런 강제철 실장은 곧이어 뜻밖의 소식을 김윤상 의원한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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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던 중에 상해 쪽에서도 연락을 받았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대체 어떤 문젭니까?”
갑자기 말이 빨라지고 있는 김윤상 의원.
현재, 김윤상 의원 역시 자동차 폭파 사고 때문에 무척 당황한 게 확실했다.
“히트맨들이···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김윤상 의원은 크게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최덕렬은, 최덕렬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으음. 동시에 최덕렬도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한편, 그 말이 끝나자마자 김윤상 의원은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그의 눈 밑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게 무리 없이 해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역시 최덕렬은 절대 쉬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럼 자동차 폭파 사고도···.”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동의하듯 대답했다.
“상해에서 연락들이 끊긴 게 이미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반나절이라면, 최덕렬이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흠, 그래서요?”
“상해의 최덕렬이 국내에 연락을 취해 하수인을 보낸 게 확실합니다. 그 정도로 과감한 사람을 찾긴 쉽지 않습니다.”
과감한 사람이라···.
민간인들이 있는 주차장에서 자동차 폭탄 테러가 터졌다.
사실, 이런 엄청난 일을 대 놓고 저지르긴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김윤상 의원조차 모든 일들을 아주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황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박 사장 애들이 추적하고 있으나 그 하수인을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혹시, 그자는···?”
“네! 제 생각에도 전직 블랙요원이 아닐까 그렇게 추정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강제철 실장은 주차장의 일을 다시금 떠올려봤다.
시뻘건 화염.
그 화염이 차량 전체를 집어삼켰고.
자신을 대신해서 운전석에 탔던 사람은 순식간에 새카맣게 타 버렸다.
“의원님, 제가 알기론··· 이런 방식이 최덕렬 전 안기부장의 방식이 아닙니까?”
그 말에 김윤상 의원의 표정은 갈수록 더 심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덕렬은 기세 제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정보전에서도 기세를 잡은 뒤 팽팽한 균형을 깨고서 전리품(정보)을 획득한다.
특히,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첩보전보다는, 대인 형태의 정보 획득에서 그는 더 뛰어난 역량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최덕렬이 종적을 감추자마자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이런 자동차 폭파 사건만으로도 전체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변화에 국정원 고위직들은 뭔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김윤상 의원은 김 차장에 대해서 걱정이 되었다.
최덕렬이 죽지 않으면, 최덕렬을 두려워하는 김 차장이 갑자기 변심할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상황이 많이 난처해졌다.
혹시 자신이 너무 성급했던 걸까.
먼저 최덕렬부터 처리한 뒤, 조상천, 윤평근 등을 처리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김윤상 의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후회는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군다나 최덕렬 작전이 실패한 이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 일들을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왜냐하면, 조상천, 윤평근 등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최덕렬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들마저 놓칠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즉, 안타깝게도 최덕렬은 놓쳤으나, 그의 수족을 자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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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상해 쪽은···.”
한편, 아쉬운 듯 김윤상 의원은 다시 말했는데. 이때 설명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강제철 실장은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의원님! 아시다시피, 히트맨들은 전직 블랙요원들이었습니다. 박 사장을 통해 상당한 비용까지 지불했고···.”
그리고 줄줄 이어지는 설명들.
그러나 중간에 김윤상 의원은 갑자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배신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러면서 김윤상 의원의 눈빛이 무척 날카로워졌는데. 지금 김윤상 의원은 히트맨들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은밀하게 접근한 뒤 한낱 노인 한 명을 처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걸 실패했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러니까 그들이 이미 최덕렬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제철 실장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신분은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담보까지 잡아뒀습니다.”
그러자 김윤상 의원은 더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듯 잠시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담보 때문에 그들이 조용히 모습을 감춘 거라면···.”
즉, 그냥 조용히 스스로 사라지면, 최덕렬을 죽이는 데 관여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들의 담보도 지킬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려면, 그냥 자신들이 사라지면 되는 일이다.
그러자 이번에도 강제철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 담보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그게 공개되면, 중국과 북한의 타깃 일순위가 됩니다. 그 담보까지 가져와, 의원님께 머리를 숙인 자들인데, 절대 배신하긴 힘듭니다.”
그 때문에 김윤상 의원의 머릿속은 좀 더 복잡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김윤상 의원은 가만히 최덕렬 전 안기부장의 모습을 떠올려 본 뒤, 곰곰이 더 생각하다가 짧게 탄식했다.
사실, 일반 정치인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정보 계통의 거물과 싸우는 것은 그 피로도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상해 작전은 실패!
기껏 늙은이 한 명 잡는 일이었지만, 그 작전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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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실장님.”
“네!”
“우선, 상해 쪽에 사람을 좀 더 보내··· 아, 아닙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돌연, 김윤상 의원은 자신의 말을 멈췄고.
백발의 강제철 실장은 그런 김윤상 의원을 불안한 듯 쳐다봤다.
“음! 갑작스러운 제 공격을 알아챘다면, 제가 아는 최덕렬이라면··· 바로 다음 작업을 진행할 겁니다. 느낌이 안 좋군요. 최덕렬은 은퇴한 블랙요원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이런 정보 계통의 생리상, 우리도 이런 식으로 대응해선 안 됩니다.”
“의원님, 혹시?”
“네! 히트맨들의 정보는 미국 CIA 한국지부에 넘기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 정보는 그들이 사망했다면 무용지물이 될 테고, 배신했다면 담보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러고는 김윤상 의원은 벌떡 일어섰다.
“갑시다! 미국 대사관으로 가야겠습니다!”
그 순간, 강제철 실장은 놀란 듯 쳐다보다가 재빨리 김윤상 의원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김윤상 의원의 인맥은 확실히 대단했다.
사실, 지금껏 큰 공을 들였던 미국 쪽 인맥 관리. 이제 최덕렬을 지우는데 그 인맥을 쓸 생각인 것 같았다.
한편, 강제철 실장은 운전석에 앉으면서 문득 이번 미국 대사관 행이 아주 대단한 변화를 내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개인의 복수.
그러나 그게 국가 간의 치열한 정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생겼는데.
왜냐하면, 과거 친미주의자였던 최덕렬 전 안기부장은 어느 순간 친중 인사로 바뀌게 되었고. 최근엔 상해와 북경에 머물며 중국 고위직 인사들과 각종 친분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저변 상황들로 인해, 결국 이 일 자체가 갈수록 확대가 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고.
특히, 이 시점은 그런 변곡점에 해당되는 바로 그런 시기인 것 같았다.
어쨌든 잠시 뒤.
새카만 중형차 세 대가 일제히 출발했고.
도심을 가로지른 끝에, 김윤상 의원은 무사히 주한 미국대사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150>
찰칵. 찰칵. 찰칵.
요란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2002년 1월 13일 일요일 오후 2시.
김윤상 의원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방문한 시점부터 며칠간 무척 긴박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편, 이날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 국무위원급 고위직 간부가 특사 형태로 갑자기 방한하게 됐는데.
이 중국 특사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컸지만.
이 중국 특사와 함께 나타난 어느 노인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이 크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모자를 쓰고 긴 외투를 입고 있는 노인.
그런데 그 노인의 신분이 알려지면서 더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라 최덕렬 전 안기부장이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날카로운 눈매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카메라 플래시에도 전혀 위축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듯 그가 나타나자, 미 대사관뿐만이 아니라 CIA(미국 중앙정보국) 소속의 OSE 서울사무국 요원들도 갑자기 무척 바빠졌다.
주로 상해에서 지내던 최덕렬 전 안기부장이 국내에 입국한 이후부터, 그의 행보가 갑자기 확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날 신라그룹 손미희 여사가 관장으로 있는 신라뮤지엄을 가장 먼저 방문했고.
이후, 고상중 의원, 손명국 의원 등 주요 국회의원들과 오찬을 같이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때때로 중국 특사와 함께 움직이며 정부 기관의 주요 기관장들과도 만남을 가졌는데, 중간중간 연기금 쪽 기관장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그 때문에 최덕렬 전 안기부장은 그때부터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고.
이때, 사람들은 최덕렬 전 안기부장이 왜 저렇듯 중국 특사와 친한 모습을 보이는지 무척 의아하게 여기게 되었다.
여하튼 그런 변화 속에 갑자기 정계를 달구는 뜻밖의 보도가 터져 나왔다.
[한성화학], [한성클린] 사태로 법적, 도덕적 치명상을 입고 있는 고상중 의원.
그가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처한 뒤, 뜻밖의 고발성명을 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4선 국회의원 김윤상 의원은 모 건설회사 대표로부터 수십억 원대의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수수했으며 각종 이권과 관련하여···.”
그렇듯 고상중 의원은 난데없이 김윤상 의원에 대한 정치적 저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1월의 강추위 때문에 정치적 이슈가 소강상태나 다름없었던 정계엔 때아닌 정치적 대형 이슈가 발생하게 되었고.
갑자기 불붙기 시작한 언론은 그때부터 아주 소란스럽게 각종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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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실장님, 이건 좀 심각한 거 아닙니까?”
2002년 1월 16일 수요일 저녁.
이날 저녁이 되자, 다시 하얀 눈들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강제철 실장은 성국대 병원을 다시 방문한 상태다.
한편, 나는 강제철 실장이 타고 왔던 차량의 뒷좌석에서 그와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병원 카페나 휴게실 같은 곳에선 대화가 위험하다는 강제철 실장의 의견에 따라 그냥 차 안에서 대화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실장님! 좀 더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도대체 이 사달이 왜 벌어진 겁니까? 어제, 서울지검 특수부 김덕규 검사와 통화를 했고, 이것저것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됐습니다. 현재, 고상중 의원 수사에서도, 정치권의 강력한 압력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혹시 최덕렬 때문입니까?”
그렇듯 내가 구체적으로 묻자, 뒷좌석 옆자리에 앉은 백발의 강제철 실장은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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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징2 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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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속담엔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있다. 이건 바로 현재의 최덕렬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 최덕렬이 나타나자 정세에 큰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유나의 일 때문에 주변 상황에 관심이 큰 나는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보다 내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강제철 실장은 적잖이 당황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장님! 어제 김도윤 검사한테서 이야기들은 들으셨죠?”
그러자 강제철 실장은 묘한 탄성을 내며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달받았습니다. 도련님.”
사실, 어제 나는 강제철 실장이 주선해준 루트에 따라 김주태의 형 김주호를 만났다.
이때, 담당 검사가 있는 자리에서 정말 경악스러운 이야길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긴··· 저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당분간 수사 기밀로 해서 집중적인 내사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잘 아시겠죠? 유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 하! 말이 됩니까? 그 새끼가 손명국 의원입니다! 바로 손미희가 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운 일이다.
어제 [거짓 없는 입] 특전을 발동시켰을 때.
김주호는 한유나 사건의 배후에 대해 그렇듯 짤막하게 대답했는데. 물론, 그 대답을 마친 뒤, 김주호는 너무 경악했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뒤늦게 날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 때문에 김주호와의 만남은 그때 짧게 끝나고 말았다.
“실장님! 지금껏 한윤기, 한윤수, 한윤형 형제들이 무척 위험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더 위험한 자들은 손명국, 손미희 같은 인간들입니다. 특히, 제가 듣기로, 손명국 의원의 [태평그룹]은 신라건설 지분 12.2%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온전한 지분이 아닙니다. 한태산 회장의 차명 지분으로 의심되고 있고. 더 정확하게 추정한다면, 한태산 회장이 자신의 자금을 은밀하게 넘겨 [태평그룹]을 직접적으로 만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태평그룹]은 한태산 회장이 그룹 후계 조정을 위해 제3의 장치라고 할 수 있고 일종의 가신 형태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 내가 다시 설명하자, 강제철 실장은 다시금 기묘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반응만 했다.
“···네. 그렇군요.”
근데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강제철 실장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아끼고 있는 걸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는 별다른 코멘트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여하튼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결국, 손명국은 한태산 회장의 대리인입니다. 그 때문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나는 신경외과 인턴 생활 중에 틈틈이 떠오른 생각들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때 그 사건! 그 사건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 사건엔 또 다른 베일 속 인물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중간 브로커들! 무언가 이득을 취한 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중간 브로커라? 근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나의 정보만 더 추가된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현재 드러난 바와 같이, 한태산 회장은 최덕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간 인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유나의 일 때문에 함께 일하게 된 김경준 전무는··· 저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그래서 자신이 확보하고 있던 정보 일부를 며칠 전 저한테 공개했습니다. 근데 그때 알게 된 건··· 손명국 의원의 외가 쪽 삼촌! 그게 바로 최덕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손명국을 통해 한태산 회장은 최덕렬과 연결된 것이고, 내 어머니와 동생이 죽게 된 사건의 배후에 손명국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손명국은 어쩌면 그 사건의 주요 공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건 또 다른 제 예측인데··· 손명국은 그 때문에 한태산 회장의 신임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동생 손미희가 한태산 회장의 셋째 아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손명국 일가는 절대 단순하지 않습니다. 최덕렬과 연결된 괴물들. 실장님! 어떻습니까? 제 예측이?”
그렇게 내 설명이 끝나자 강제철 실장은 다시금 짧게 탄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사실, 요즘 제가 접하는 정보량이 아주 많아지고 있습니다. 근데 상황이 좀 복잡합니다. 현재 모종의 제약이 걸려 있어, 제 입을 통해 어떤 정보든 반출되는 게 불가합니다.”
그러면서 강제철 실장은 어떤 확답을 줄 수도 없고, 또한 어떤 정보도 추가 공개할 수 없다는 그런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계속 묻자, 강제철 실장은 결국 탄식하며 대답했다.
“으음, 의원님께서 결국··· 미국 측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강제철 실장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얼마 전부터··· 미국 정부의 제어를 받게 됐습니다. 이것도 극비입니다.”
그 순간, 나는 흠칫했는데.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미국 정부의 제어를 받고 있다?
특히, 강제철 실장의 굳은 표정을 보고서.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들과 사건들이 사방에 존재한다는 걸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덕렬이 그렇게 강한 존재인가.
한편, 최덕렬은 요즘 중국 특사 건과 관련하여 언론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최덕렬이 전 안기부장인 것을.
그런데 그자는 아직도 대한민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유형의 인물일까. 아버지는 4선 국회의원이지만, 그 위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형 정치인이 아닌가. 최덕렬 역시 드러난 것 이상의 힘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 때문에 복잡했던 퍼즐들은 오히려 더 쉽게 맞춰지고 있었다.
손미희, 손명국으로 이어지는 퍼즐들 속엔 최덕렬이라는 퍼즐이 끼어있었고.
그 손명국은 고상중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퍼즐을 만들어냈으며.
한태산 회장의 욕망이 표출된 끝에 만들어진 퍼즐들 속엔 손명국과 최덕렬이 강력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듯 서로가 서로 이어졌고.
그런 퍼즐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내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고.
한유나가 죽을 뻔했다.
그 이전에 한유나의 어머니도 살해당했다.
또한, 서철성 교수님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당할 뻔했다.
서수연 역시 그런 위협의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한편, 그들은 나마저도 죽이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에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나와 한유나의 만남이 왜 운명적인 만남인지도 좀 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히든 미션(운명적 만남)]!
그래!
한유나와의 만남은 정말 운명적이었다고 단연코 말할 수밖에 없다.
손명국! 손미희! 최덕렬! 고상중! 한태산!
그러고 보면, 그들 각자의 퍼즐이 서로 흩어져 있을 땐, 그땐 이유를 제대로 몰랐으나.
이젠 그 퍼즐들이 대략 연결되자, 마치 내 눈앞에 거대한 벽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든다.
저 한 명, 한 명의 위치가 정말 대단하다.
국회의원!
재벌 총수의 아내!
전 안기부장!
다시 국회의원!
그리고 재벌 총수!
그렇듯 그들의 면면은 대단했고,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모습들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회귀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물론 그땐 내 주변에 날 도와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을 테고, 나는 그 어떤 해결 방법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한유나 역시 내 옆에 있다.
그래서 무언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런 변화가 있어야 한다.
#
“도련님,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아쉬운 듯 강제철 실장은 그렇게 말했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이 시각.
스노우 체인을 바퀴에 감고 있는 그 차는 천천히 지하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다시, 아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151>
“지부장님!! 정말 급한 건인데, 이거 좀 보시겠어요? 좀 전에 확보한 도청 자료입니다!”
찰스 그라임.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지부장.
순간, 그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데스크 앞에 앉아 북한 관련 기밀 문건들을 확인하던 중, 갑자기 노크 소리와 함께 린다 슈츠가 들어왔는데. 현재 그녀는 랭글리(CIA 본부)의 허락을 받아 인공위성을 이용한 도청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뜻밖의 도청 정보를 갖고 왔다.
2002년 1월 18일 금요일 밤늦은 시각.
잠시 후, 찰스 그라임은 간단히 영어로 번역된 도청 정보를 유심히 살펴봤고.
그리고 잠시 뒤.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스터 최가 미스터 손을 만나고 있고, VIP(김윤상 의원)를 죽이는 방법을 논의했단 말이지?”
여기서 미스터 최는 최덕렬, 미스터 손은 손명국을 의미한다.
“네. 대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 정보국의 전직 블랙 요원이 이 일을 맡을 것 같고, 암살 방법은 독극물이 될 것 같습니다.”
금발의 미녀 요원, 린다 슈츠.
그녀는 파란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말했고.
찰스 그라임은 좀 더 집중해서 도청 문건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경기도 모처의 어느 한적한 별장.
지붕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그 별장.
그 별장 안, 거실에는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고.
거실 안쪽 소파에는 몇몇 남녀가 앉아 있었다.
바로 최덕렬, 손명국, 손미희였다.
한편, 그들은 각자 큰 와인 잔을 손에 들고서 붉은 와인을 즐기며, 계속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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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핫핫!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우리 가문도 자손 대대로 물려줄 큰 부를 얻게 될 거다! 핫핫핫! 무려 10년짜리 대형 프로젝트였는데,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됐어. 명국아. 미희야, 마지막까지 집중하자! 한태산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눈썹이 짙고 입매가 얇은 손명국 의원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고.
와인을 조금 마시던 손미희는 활짝 웃으며 곧이어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삼촌. 김윤상이 죽고 나면, 신라그룹은 우리 마음대로 해체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맛있는 살덩이만 가져가, 마음대로 팔아먹을 수 있을 테고.”
그러자 최덕렬은 다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인이지만, 최덕렬의 목소리는 무척 카랑카랑했다.
“핫핫핫! 우리가 구태여 신라그룹을 가질 필요가 있나? 알다시피 남들 주목을 끌다간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어. 내가 정보 밥을 많이 먹다 보니, 이런 은밀한 것들을 좋아한단 말이야. 핫핫핫!”
그렇게 웃던 최덕렬은 다시 눈빛이 차가워졌다.
“김윤상이 죽으면, 그때 한유나부터 제거할 거다. 유산 관계부터 정리해야 하니까. 근데 저번에 내가 추천했던 그 인간들. 멍청하긴 해도 일회용으로 괜찮은 인간들이었는데. 왜 한유나를 죽이는 데 실패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네. 저도 그게 좀 의아합니다. 그 친구들, 실력은 아주 뛰어났는데.”
“현재 구속 중이라며?”
“네. 성국대 의대 서철성 교수 집에서 강도 짓을 하다가···.”
“강도 짓? 흥! 정말 강도 짓인가?”
“대충 그 정도만 파악됐습니다. 검찰 쪽은 너무 꽉 막혀 있어···.”
그러자 최덕렬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김윤상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이 정보 계통의 수장이었다고 해도, 검찰은 또 다른 별개의 기관이다.
그리고 그 검찰 라인을 장악한 거나 다름없는 인간은 바로 김윤상, 바로 그 인간이었다.
자신과 무척 닮았고, 자신과 아주 비슷한 유형의 인간.
그래서 자신이 일부러 그를 키웠고, 많은 것들을 기대했다.
그런데 김윤상은 그 이상이었다.
검찰의 힘, 정계의 힘, 정보기관의 힘까지 두루 활용하며 그는 크게 성장했고.
더 높이 오르려고, 또한 더 열심히 발악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위에 있는 존재를 그냥 두지 않는다.
자신 역시 그런 성향이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 그가 자신을 노렸다.
물론, 그의 처자식과 관련된 사건이 드러나면서 생긴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과감하게 공격했고, 자신의 주요 수족들을 과감히 잘라냈다.
그래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무조건, 무조건 말이다.
그 순간, 최덕렬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다가, 갑자기 뿌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이때, 놀란 듯 손명국과 손미희가 자신을 쳐다봤으나, 최덕렬의 눈빛은 갈수록 더 섬뜩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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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징3 01 >
<152>
“의원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참 문건을 쳐다보며 고심하던 김윤상 의원.
그는 고개를 들었다.
CIA 한국지부 지부장이 보내온 극비 도청 문건.
확인 즉시 폐기하라는 지침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후, 김윤상 의원은 서랍에서 라이터를 꺼내 2장의 문건에 불을 붙였다.
활활 불타는 종이들.
그리고 그것들을 철제 휴지통에 던졌다.
잠시 타오르던 그 불길은 어느새 새카만 재만 남기고 사그라들었는데. 이제 그 문건의 내용은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강 실장님! 최덕렬이 다시 움직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이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고개를 드는 김윤상 의원.
그런데 그 눈빛이 무척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강제철 실장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그 말에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하지만, 의원님! 최덕렬은 현재 대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타깃으로 잡기엔 무척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실패든 성공이든,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김윤상 의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철 실장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다.
실제, 무척 부담스럽게 된 상황이다.
비록 중국 특사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최덕렬은 국내에 남게 되었고.
그는 이후 이런저런 대외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최덕렬이 정계 진출을 계획한다는 그런 말들까지 돌고 있는 중이었다.
“의원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는 게 더 낫습니다. 혹시 이 일이 잘못되면 아주 큰 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 고상중이 최덕렬과 연계해서 의원님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몸을 낮출 때입니다.”
강제철 실장의 이런 조언은 무척 현실적이라.
김윤상 의원은 할 수 없이 눈을 감고 좀 더 생각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이미 자신은 가장 좋은 시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최덕렬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문제는 왜 그 작전이 실패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히트맨들의 행적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고. 마치 증발하듯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참! 정민이 약혼식이··· 얼마 안 남았죠?”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럼, 약혼식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음. 의원님! 근데···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이런저런 좋지 못한 일들이 좀 있다 보니, 신라그룹 측에서도 언론 보도에 많이 민감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복과 예물뿐만이 아니라, 예식도 최소화해서 진행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는데, 의원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그게 현실적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뭔가 생각하던 김윤상 의원은 불쑥 이렇게 물었다.
“약혼식 때··· 최덕렬, 손명국, 고상중도 참석한다고 했죠?”
한편, 그런 질문에 강제철 실장은 쓴 미소를 지었다.
“네. 맞습니다. 최덕렬은 한태산 회장이 상태가 나빠지기 전, 이미 초대한 사람이고. 손명국은 손미희가 초대했으며 고상중은 한윤형이 초대한 것 같습니다.”
각자 다른 이들로부터 초대를 받았으나.
공통적으로 그들은 아들의 약혼식 자리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식을 최소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불편한 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 경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도련님 쪽에는 총 20명의 인력이 파견되어 있습니다. 박 사장이 추천한 경호회사 경호원들인데, 주로 전직 특수부대 출신들입니다.”
“음, 박 사장도 전직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했죠?”
“네. 군 복무 중에 생긴 얼굴 상처 때문에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는데, 원래 아주 유능했던 사람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잠깐 병원을 한번 찾아가 봐도 되겠군요?”
“네?”
그 순간, 깜짝 놀라는 강제철 실장.
그리고 이때, 김윤상 의원은 설명을 덧붙였다.
“성국대 병원으로 가봅시다. 적어도 약혼식 전에 정민이를 한번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들을 약혼식 전에 한번 보겠다는 말인데.
이때, 강제철 실장은 즉시 난색을 표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딜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그만큼 위험도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냥 이곳 저택에서 비록 연금 상태나 다름없다고 해도, 계속 버티는 게 지금은 현명한 일이었다.
“의원님, 많이 위험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강 실장님! 제가 쥐 죽은 듯 지낸 게 벌써 꽤 되었습니다. 최덕렬은 저렇듯 날아다니고 있는데, 저만 소심한 몰골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김윤상 의원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겨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강제철 실장은 다시 만류했다.
“의원님! 최덕렬은 과거 안기부 내에서도 요인 암살 기획 분야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런 자와 정면으로 싸우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잘 압니다. 하지만 잠깐 다녀오는 일인데. 그렇게 아시고 그냥 준비해주십시오! 더군다나 다음 달부턴 임시 국회도 열립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속에 갇혀야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에 결국 강제철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물러서고 말았다.
김윤상 의원의 말이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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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9일 토요일 저녁.
세 대의 검정 승용차가 김윤상 의원의 저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차량들은 일렬로 줄을 서서 성국대 병원으로 향했는데.
그런데 바로 그 시각!
한국 CIA 지부에선 다시금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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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지부장님! 좀 전에 도청된 겁니다.”
“하지만 이건···!”
CIA 지부장 찰스 그라임의 표정은 순간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좀 전에 도청한 직후, 번역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자료인데.
그래서 더 급해진 정보였다.
“지부장님! 제가 지금 즉시 김윤상 의원한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당황한 CIA 요원 린다 슈츠는 그렇게 외쳤고.
이때, 지부장 찰스 그라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도청 문건을 한 번 더 쳐다본 뒤, 재빨리 전화기를 잡았다.
한편, 그때부터 무척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일 초라도 빨리 김윤상 의원과 통화가 되길 기대했는데.
그리고 마침내 전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무척 저음이자 무척 허스키한 목소리다.
바로 김윤상 의원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안도해 하던 찰스 그라임.
그는 그때부터 이번 도청 문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그 문건을 다시 쳐다봤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전화기에서 들려왔고.
요란한 경적 소리도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이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며 김윤상 의원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러나 그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신음 소리들이 계속 들리더니.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다시 울리더니 전화는 끊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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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t! Shit! Shit! Shit!”
CIA 지부장 찰스 그라임, 그는 욕설을 퍼부은 뒤 전화기를 내팽개치듯 던져 버렸다.
이때 놀란 듯 쳐다보던 린다 슈츠, 그녀는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재빨리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정신을 차린 찰스 그라임.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화기를 다시 손에 잡았다.
그리고 즉시 랭글리에 전화를 걸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기 위해서다.
사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덕렬의 암살 계획은 전직 블랙 요원을 보내, 독침으로 김윤상을 독살하는 방법이다.
물론, 그 독침은 CIA에서 사용되는 독극물들이 발라져 있어 혈액 분석을 하더라도 쉽게 잡히지 않을 거고, 단순 심장마비사로 위장할 수 있다. 그래서 찰스 그라임은 각종 해독약들을 김윤상 의원에게 미리 보낸 상태다.
그런데 좀 전에 알게 된 건, 두 번째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좀 전의 도청 과정에서 확인된 두 번째 암살 계획.
그런데 그게 정말 뜻밖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덕렬은 정말 무시무시한 설계자였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그는 고안한 것이다.
바로 대형 트럭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는 김윤상 의원이 움직일 수 있는 곳들을 몇 군데 예상했고.
이때 대형 트럭을 이용해 단숨에 압살하는 방법을 계획한 상태였다.
특히, 김윤상 의원이 성국대 병원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좀 전에 전해지자.
그는 대형 트럭 한 대를 즉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이때,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의 암살 지시를 했다.
즉, 다리 교차로에서 대형 트럭을 그대로 날려, 다리 아래쪽 김윤상 의원의 차량들을 그대로 덮치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방법을 최덕렬은 지시한 것이다.
특히, 정확한 시점, 동선 예측, 속도 예측, 그리고 뛰어난 트럭 운전실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최덕렬은 그런 지시를 내렸고.
더 큰 문제는 통화 중에 드러난 바와 같이, 트럭 운전사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직 블랙 요원으로 짐작되며.
트럭을 이용한 각종 위장형 교통사고살해에 능하다는 게 그 통화 중에도 드러났다.
그리고 실제, 눈 깜짝할 사이에 김윤상 의원한테 큰 문제가 발생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요원들이 정신없이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현 시각 상황을 즉각 즉각 알려줬다.
#
“지부장님! 트럭 추락했고··· 차량 세 대를 덮친 게 확인됐습니다!”
“차량을 덮친 뒤 차량들을 쭉 끌고 밀려났고··· 충격 직후 큰 폭발이 트럭 하단에서 발생해···.”
“지부장님! 다시 확인됐습니다! 차량 세 대에 큰 화염이 번졌고 인명 구조 자체가 현실적으로 힘든···.”
“지부장님! 트럭 기사는 구조됐다고 합니다!! 충돌 직후 튕겨져 나갔고, 바로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고···.”
“···깔린 차량 전부 전소될 것 같은···.”
그렇듯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전언들이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은 찰스 그라임.
그는 그 사실들을 즉각 즉각 랭글리에 보고했고.
그런 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답답해서 말이다.
사실, 김윤상 의원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인물인데···.
그런 자가 도로에서 암살당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찰스 그라임이 사고 지점에 거의 도착했을 때, 휴대폰은 요란하게 진동했고.
찰스 그라임은 그 즉시 전화를 받았다.
사고 지점으로 먼저 달려갔던, 요원 린다 슈츠의 전화였다.
“어떻게 됐어?”
그러자 린다 슈츠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행원 전원··· 사망한 것 같습니다.”
수행원 전원이 사망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최덕렬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암살 작전도 결국 나중엔 단순 교통사고 사망 사건 등으로 보도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도청을 갑자기 잡지 않았다면, 자신들 역시 이게 최덕렬의 작품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
< 응징3 02 >
#
“그럼 VIP(김윤상)는···?”
한편, 그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서 그렇게 물었는데.
이때, 린다 슈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VIP는 뜻밖에도 가장 끝 차량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처음엔 화염 정도가 약했고. 강제철 실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VIP(김윤상)를 전력을 다해 밀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마··· VIP가 살았나?”
“아직 모릅니다. 의식은 없다고 했고, 앰뷸런스에 실려 인근 성국대 병원으로 가긴 했는데··· 좀 전에 받은 연락에선 어레스트 상황이 됐고, 머리 일부가 심하게 함몰된 상태로···.”
그리고 그 순간, 찰스 그라임은 끝내 탄식하며 휴대폰을 내려놨다.
머리 일부가 심하게 함몰됐다?
그 말은 결국 김윤상 의원이 살아도 정상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아니지.
그런 상황에서 어레스트(심정지)까지 왔다면, 생존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하!”
결국, 다시금 탄식하며 그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잠시 후 그는 사고 현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정말 끔찍하면서도.
너무나도 위압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대한 트럭 한 대.
그 거대한 트럭이 세 대의 차량을 짓눌리고 있었고, 아직도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강렬한 열기.
그 엄청난 열기.
한편, 그 아래에 짓눌린 세 대의 차량은 점점 더 부서져, 완전히 새카맣게 타 버린 납작한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광경.
비현실적이고, 전율적인 광경.
찰스 그라임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다.
VIP(김윤상)는 병원으로 호송됐고, 그와 함께 움직였던 수행진 중에는 생존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맨 끝쪽 차량을 쳐다봤다.
강제철 실장이라고 했던가.
그가 VIP(김윤상)를 마지막 순간에 밀어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저 불덩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아마 그는 저 안에서 새카맣게 타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짓눌려 다 부서졌을 테고···.
그런 절망이 서려 있는 그 맨 끝 차량의 모습.
그 차량 쪽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찰스 그라임은 고개를 저으며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다시 복귀한다.”
구태여 병원으로 갈 필요도 없다.
린다 슈츠가 따라갔으니까 뭔가 소식을 또 전해올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은 참으며,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사망 혹은 생존?
바로 결정될 것이다.
물론, 현재로선 ‘사망’으로 무게의 추가 더 기울어지고 있었다.
<153>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
아버지가 응급실에 와 있다는 급한 연락을 갑자기 받게 되었다.
놀란 조은하 선배가 황급히 연락을 준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멍해졌다가.
그것도 잠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땀을 뻘뻘 흘리며 심장 압박을 시도하고 있는 응급실 치프 장태욱 선배의 모습이 보였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그 옆에서 돕고 있는 조은하 선배의 모습도 보였다.
뛰어갔다.
그리고 이때, 놀란 듯 날 쳐다보던 조은하 선배, 그녀가 갑자기 날 막았다.
내가 응급처치에 방해가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절대 물러설 수가 없다!
순간, 나도 모르게 조은하 선배를 옆으로 밀쳤다.
쿵! 하며 밀려나는 조은하 선배.
그 소리가 분명 내 귀에 들려왔지만, 나는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
이때, 놀란 장태욱 선배는 당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바로 베드에서 내려왔다.
이때, 그는 무척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날 가만히 쳐다봤고.
나는 그저 멍하니 아버지 얼굴을 쳐다봤다.
[사망 예정: 김윤상]
[남은 시간: 00:01:02]
맙소사.
이럴 수가 없다.
[사신의 낫(S)] 특성에 의해 아버지의 상태가 확인됐다.
근데 고작 남은 시간이···.
고작 1분???
그런데 그 시간만큼이나 아버지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일대일 교환(S)] 특성을 발동했다.
[당신의 수명이 일년 감소됩니다···]
[김윤상의 수명은 비례적으로 늘어납니다]
하지만 이게 가치가 있을까.
저번 서철성 교수님 사건 때 겪은 일이다.
생명을 파괴하는 그 원인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일대일 교환(S)] 특성은 그저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하다.
[사망 예정: 김윤상]
[남은 시간: 00:01:04]
결과적으로 내 생명력은 1년이나 사라졌으나.
그렇듯 고작 몇 초가 늘어나는 데서 끝났고.
그 시간도 어느새 사라진 뒤, 결국 원래의 시간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고.
도무지 믿을 수도 없다.
현재 겉으로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
그저 끔찍할 뿐이다.
머리 한쪽이 완전히 눌려 버렸고 온통 피범벅이다.
어깨와 팔이 기형적으로 꺾여 있고.
어레스트(심정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더는 복귀할 수 없는 심정지 상태로 현재 나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 뒤 [베살리우스의 눈(SS)] 특성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상황을 확인했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떠올려봤다.
그런데 이걸 어떡하지.
불가능했다.
씨발! 지금 뇌수술을 해야 한다!
지금 발생한 어레스트의 주요 원인은 바로 저 망가진 두부 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데 문제는 나는 신경외과 의사가 아니다!
나는 흉부외과 의사일 뿐.
그래서 나는 절망했다.
사실, 수술 관련 전용 특성이라는 건, 내가 가진 본래의 수술 능력과 합쳐지면서 그때 진정한 효과가 발휘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남은 시간이 겨우 1분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그대로··· 그냥 미친 상황에 불과했다.
#
“하! 김 선생, 도저히 안 돼···. 하아! 안 되겠어. 미안···.”
치프 장태욱 선생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흉부 압박을 했던 그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왜 그렇게 그런 위로의 말이 싫은지, 나도 모르게 어깨를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장태욱 선생은 움찔하더니 결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다가가 아버지를 쳐다봤다.
현재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고, 그 입술은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또한 메말라 있었다.
얼굴은 무척 창백했고.
이미 파란 기운, 바로 청색증이 가득했다.
사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
그리고 실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려고 한 것인데.
나도 모르게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 손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나!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혹시 몰라 다시금 [일대일 교환(S)] 특성을 발동시켜, 내 수명 1년을 아버지한테 넘겼다.
그러나 이내 차가운 응답만 돌아왔다.
고작 1초, 1초가 늘어난 죽음의 카운트다운!
그런 1초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새 카운트다운 30초를 남겼을 때.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이렇게···.
쉴 새 없이 눈물은 쏟아졌고.
온몸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
그 현실 앞에 나는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그렇듯 절규하던 중, 불현듯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스템 알람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시스템 알람 때문이었다.
#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클래스 S)··· 김윤상 의원의 생명을 구하세요!]
[김윤상 의원의 죽음. 그 죽음의 숙명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당신의 지속적인 개입! 그로 인해 김윤상 의원의 사망 일자는 더 앞당겨졌습니다···]
[특전: 천사의 노래]
[천사의 노래를 발동시켰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는데.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위급한 상황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특전이 있었다.
근데 시스템은 그 특전의 사용에 대해 갑자기 알려줬고.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 사신 강림 때, 사신과의 딜을 통해서 다시 얻게 됐던 [천사의 노래] 특전.
현재, 카운트다운 16초가 남은 시점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네’를 외쳤다.
그러자 특전 발동과 동시에, 세상의 시간은 갑자기 정지되었다.
#
[천사의 노래가 발동됩니다!]
[사신의 강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신 강림 원칙에 따라 시간은 정지됩니다···]
그렇게 카운트다운은 16초 지점에서 멈추게 되었는데.
그리고 잠시 뒤.
마치 채색이 되듯, 응급실 전체가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렇듯 음울해진 세계 속으로, 이때 초월적 존재가 아주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때, 시스템 경고가 쉴 새 없이 울렸고.
그 경고가 사신 위치 5m 지점을 예고하는 순간.
그리고 마침내!
천장에서부터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며, 사신은 드디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섬뜩한 사신의 모습.
그 사신은 드디어 다시 세상에 강림한 것이다.
#
[···아버지를 구하고 싶은가?]
잠시 후, 사신은 시스템을 통해 나에게 그렇게 물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시퍼런 낫으로 내 목을 위협했다.
그러자 치지직! 거리며 고통이 내 목에서 느껴졌는데.
실제,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
[사신의 분노 Lv.1] 때문에 사신의 직접적인 상해가 가능해진 상황.
그리고 실제, 그 낫이 내 목에 가까이 닿자, 내 생명력은 빠르게 소멸되었고.
그걸 알리는 시스템 알람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생명력이 초당 하루씩 파괴되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위헙합니다!]
그렇듯 무척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외쳤다.
“거래하고 싶다! 아버지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현재, [천사의 노래] 발동에 따라, 저 사신은 강림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특전에 따라 나는 사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할 수 있다.
거래 대상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그러자 사신은 자신의 낫을 아래로 내리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마치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기생충 같은 느낌이었고.
섬뜩한 기운들이 사방에서 날뛰며, 그 웃음 때문에 거대한 죽음의 회오리까지 형성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시간 정지 상태임에도 내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그 회오리에 휩쓸리며 제멋대로 흩날리고 있었고.
그러던 중 사신은 다시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왔다.
#
[···너의 아버지의 영혼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벗어났다···]
[···생사의 율법은 영혼을 잃은 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16초의 시간··· 그저 사자(死者)가 가진 미련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발광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16초가 미련이라니!
아버지를 살려내!
뭐든지 다 하겠어!
나는 그렇게 외치며 발악했고.
그러자 사신은 다시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왔다.
#
< 응징3 03 >
#
[···세계를 벗어난 영혼··· 내 힘으로도 돌릴 수가 없다···]
[···인과의 율법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율법···]
[···저 육체는 이미 생기를 잃었다···]
그러고는 사신은 슬그머니 제안도 했다.
[···허나 그대가 원한다면, 방법이 있다···]
[···죽은 영혼을 부르는 16초의 시간··· 그 시간을 내가 허락할 수 있다···]
[···그대는 16초간 사자(死者)와 대화할 수 있으며···]
[···사자(死者)는 그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원하는가?]
[···그걸 원한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게 내 조건···]
[···나의 조건······]
한편, 나는 그 제안을 던진 사신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그게 조건이라고?
그런데도 아버지를 살릴 수 없다고?
그저 16초간의 대화? 그게 전부라고???
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당장 사신과 싸우고 싶었고.
내가 죽더라도 그냥 무조건 싸우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로 그때······.
정말 기이한 뭔가가···.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였고.
언젠가 내가 잊게 되었던···.
내 추억 속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선 무언가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처음엔 희미한 자국 같다가.
어느 순간,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 뚜렷해지자, 나는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 저건···.
그저 내 환각일까.
하지만, 너무나도 뚜렷했다.
어머니의 모습.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
그 어머니가 그 허공 속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고.
또한, 하염없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그런 어머니의 옆으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스르륵 겹쳐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잊혀졌던 우리 가족의 모습.
그 찰나, 동생의 모습도 그 옆으로 나타나고 있었고.
내 눈에선 폭포수같이 다시 눈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눈물들 때문에 결국 내 시야가 흐려지자.
그 환영들도 이내 그 눈물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사신을 쳐다봤다.
좀 더 생생해진 눈으로.
그러고는 나는 다시 생각해 봤다.
사신이 내건 조건.
단지 무릎을 꿇으라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게 내키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내 본능은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고작 무릎을 꿇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내가 좀 전에 봤던 환영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16초.
그와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16초.
그걸 놓치는 게 무척 아쉽기도 했고.
무척 안타깝기도 했다.
또한,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스템 알람이 터져 나왔다.
#
[···사신의 제안이 거부되었습니다···]
[···사신은 강제 귀환됩니다!]
그리고 그 찰나!
크게 놀란 사신.
그 사신은 거침없이 낫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낫이 내 목을 가르기 전!
죽음의 낫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사신은 강제로 자신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때 정지되었던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
15초.
14초.
13초.
12초.
11초.
10초.
그렇듯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
한편, 나는 어느덧 10초가 남자, 지금껏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특이 특성 하나를 즉시 발동시켰다.
[진귀한 모래시계(S)]
[생사 위기에 놓인 환자에게 가장 귀중한 10초, 그 10초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제한 조건: 하루 1회. 특성 발동 페널티: 사신의 목소리]
[사용하시겠습니까?]
네!
그러자 그 10초가 다시 20초로 바뀌었고.
저 머나먼 곳에서 사신의 저주 섞인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신의 목소리를 무시한 뒤, 그저 10초 늘어난 세상을 내 마음속에 잡아두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카운트다운 7초가 남겨졌을 때.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이때, 좀 전과 달리 이번엔 새로운 시스템 알람이 내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
[연계 미션(3): 피 흘리는 약혼식(클래스 S)··· 김윤상 의원의 생명을 구하세요!]
[연계 미션(3) 실패 가능성은 현재 99.9999999%입니다···]
[경고! 이 연계 미션(3)이 실패할 경우, 메인 미션 실패 및 모든 미션은 조기 종료됩니다···]
[···이때, 시스템은 파기되며··· 당신의 능력도 다시 봉인됩니다!]
[다만, 플레이어는 특정 인과율에 도달하여 ‘죽음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지배하는 죽음의 의사···]
[···공포의 존재···]
[···그런 존재가 된다면, 당신은 아버지의 죽음을 일시 보류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최장 10일간 보류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기간 동안 시스템은 유지되며··· 10일 이후 모든 시스템은 종료됩니다···]
[선택하세요!]
[죽음의 의사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다시 시스템을 종료하시겠습니까?]
그렇듯 뜻밖의 선택지가 날아들었는데.
이때, 시간이 마치 늘어지듯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154>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현재,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다.
시간이 정지된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이 공간.
무척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 기이한 것은 시스템이 나에게 제시한 선택지였다.
뭐? 죽음의 의사???
죽음의 의사가 되라고???
그런데 그건 사신이 나한테 과거 제안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시스템이 이번엔 제안했다.
그리고···.
시스템이 종료된다고???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10일간 보류할 수 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한편, 그렇듯 갑작스러운 선택지가 주어지자 무척 놀랍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시스템이 좀 전에 내게 들려준 어느 단어였다.
‘다시?’
분명 ‘다시’라는 표현을 시스템이 썼다.
[아니면, 다시 시스템을 종료하시겠습니까?]
다시?
다시??
다시???
그 순간, 나는 뭔가로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듯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다시’라는 말을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즉, 내가 겪은 이 회귀가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겪은 이 시스템 역시 처음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고 보니 그때 새로운 칭호 ‘인덕의 아스클레피오스’가 나한테 주어졌을 때.
그때도 ‘새로운 칭호’라는 단어가 무척 이상했는데.
시스템은 ‘최초 칭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칭호’라고 지칭했을 뿐이다.
반면, 시스템이 ‘최초’라는 말을 쓸 때도 있었다.
과거 [갈렌의 나이프] 특성과 [이격 블레이딩] 특성의 조합에 성공했을 때, 시스템은 ‘최초’라는 말을 쓰며 여러 혜택을 준 적이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은 갑자기 차가워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시스템을 향해 나의 회귀 횟수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물론, 시스템은 절대 답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스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냉정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79회]
맙소사.
이럴 수가.
나는 다시금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미 내가 79회의 회귀를 했고.
그럼에도 다 실패했다고??
그런 많은 시도를 했음에도.
아버지의 숙명만큼은 내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숙명이란 말인가.
하지만 페널티도 있었다.
첫 회귀 이전의 내 삶은 기억하지만.
회귀 때마다 변한 내 삶은 내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끝없는 실패를 내가 어쩌면 반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곧이어 시스템은 또 다른 답변을 보내왔다.
[···악업은 선업으로 지울 수가 없다···]
그 순간, 나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시스템이 내게 전한 말이지만.
어떤 누군가가 직접 나한테 말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즉, 악한 일(악업)은 선한 일(선업)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 같은데.
그러니까 아버지는 평생 저지른 죄악들 때문에 그 숙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 같았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때 또 다른 시스템 설명들이 이어졌다.
[···특정 인과율에 도달하여···]
[···시스템과의 대화가 현재 가능합니다···]
[···당신의 회귀 중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고는 다음 알람이 이어졌다.
[시스템이 종료되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새로운 회귀를 선택하거나···]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껏 수많은 회귀를 택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가능한 것들에 계속 도전했던 것 같았고.
그것을 깨닫게 되자, 마음이 저절로 심란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고.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눈을 떴는데.
이때, [죽음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뒤,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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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 미션(3)! 일시 보류됩니다!]
[···연계 미션 (4)로 연결됩니다···]
[연계 미션(4)··· 죽음의 의사(클래스 S)···]
[···당신의 손에 의해 인간의 생사는 결정됩니다!]
[특전: 사신의 낫(SS)]
[당신의 손에 사신이 낫이 강림합니다···]
[유효 기간: 2002년 1월 26일]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의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고.
갑자기 세상에 변화가 생겨났다.
#
“선생님! 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놀라며 외치는 어느 간호사.
한편, 가만히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버지의 바이탈 모니터에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심장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며, 치프 장태욱 선배가 달려왔고.
조은하 선배도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이때, 나는 천천히 물러섰다.
저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 손에 나타난 [죽음의 낫]!
그래서 아버지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나는 저절로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의지에 따라 [죽음의 낫]은 잠시 사라졌고.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열흘간 식물인간 상태가 될 것이다.
뇌사가 지연됐고.
심장은 다시 뛰고 있지만.
저 상태는 그저 인과율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이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열흘 뒤에 소멸될 것이다.
결국, 나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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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의사 01 >
<155>
2002년 1월 26일 토요일 오후 4시.
약혼식이 열리는 오후 5시까지 한 시간이 더 남았지만, 하객들은 이미 밀려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유나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강소정, 김유리 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식장 입구에 서서 하객들을 직접 맞이하게 되었다.
고작 약혼식이다 보니 부담은 없으나 워낙 대단한 하객들이 많이 오기로 되어 있다 보니, 나로선 나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한편, 상태가 좋지 못한 한태산 회장, 그는 약혼식 참여가 불투명했었다. 그러나 막판에 손미희 여사가 참석을 강행하겠다고 했고, 한태산 회장은 산소마스크에 휠체어를 타고서 이날 약혼식 참석을 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아버지···.
물론, 아버지는 참석할 수가 없다.
죽음이 보류되어 있는 아버지.
식물인간 상태로 유지되고 있고.
현재 상태는 너무 나빠, 수술 불가 판정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저 그는 영혼이 이 세계에 잡혀 있을 뿐,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저 멀리 또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
“···음. 자네가 김정민 군인가?”
“네. 그렇습니다.”
어느 국회의원.
그는 보좌관과 함께 하객으로서 이곳을 찾았고, 내 앞에 서서 잠시 말을 걸고 있었다.
“하! 이거 참! 자네 아버지와는 오랫동안 의정 활동을 같이했는데 어쨌든 많이 안타깝네. 쯧! 쯧! 사람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그렇게 칼을 세워서 사람을 대하더니, 끝이 이렇게 안 좋은 줄 누가 알았나.”
그렇듯 뭔가 이상하게 말을 이어가는 중년 남자.
“근데, 자네는 이 약혼식이 그렇게 중요한 모양이지?”
“······?”
“하, 참! 아버지가 그리됐는데. 어쩜 이렇게 자식은··· 쯧! 쯧! 암튼, 자네도 자네 아버지도 다 똑같나 봐···.”
처음엔 애잔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비웃고 있는 어느 국회의원.
나는 잠시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곧이어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며칠 전부터 정계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 둔 게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저 사람은 바로 최경석 국회의원이다.
한때, 아버지와 경쟁했던 유력정치인.
그러나 막말 파문 등으로 인해 호된 질타를 받았고, 최근엔 아주 조용조용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되자, 그는 갑자기 기세가 살아난 모양이었다.
한쪽 입꼬리까지 씩! 올라가며 나에 대한 비웃음의 눈빛이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작은 앙갚음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웃었다.
저 사람, 어쩌면 저렇게 번지수를 잘못 찾았을까.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나한테 하필 그런 말을 하다니.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안다면 절대 이래선 안 되는 것이다.
[칭호! 죽음의 의사!]
[사람을 살리는 의사··· 그러나 이제 죽음을 선사하는 의사··· 죽음의 낫으로 무시무시한 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악업의 흔적··· 그 악업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인과율에 따라 악업을 징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징벌한 악업은 당신의 악업이 됩니다···]
[주의하세요!]
[칭호에 쌓인 악업으로 인해 당신은 훗날 큰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악인을 징벌할 수 있으나 그 징벌의 대가로 내가 그 악업을 떠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 악업의 누적으로 인해 내가 고통받게 된다는 것.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모든 게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그 칭호의 마력 때문일까.
그 칭호를 받기 전, 만약 내가 이런 알람을 받았다면 훨씬 더 위축됐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감정적으로 전혀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런 상태가 오히려 더 무서운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의지도 더 과감해졌다.
왜냐하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많은 격변 속.
수많은 위협과 수많은 상처를 받으며 내 주변 사람들과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런 고통과 불행은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보다 제3 자의 의도와 탐욕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불행을 반드시 내 손에서 끊어내야 한다.
특히, 내 앞에 존재하고 있고 내 주변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지독한 악연의 사슬들.
그런 사슬들을 서둘러 끊어내지 않는다면, 그 불행은 더 크게 번지게 될 것이다.
물론, 회귀 전의 삶처럼,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한다면, 나만의 삶을 홀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시엔 그저 공허만이 남았다.
무언가 잃은 듯,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그런 공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자넨 앞으로 똑바로 살아!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이야. 알겠나? 내가 자네가 조카 같아서 하는 말인데, 항상 긴장하면서 살아. 내가 자네 계속 살펴볼 테니까, 정신 놓치면 금방 병신 된다니까! 알겠나?”
한편, 최경석 의원은 갈수록 거만해졌고, 이제는 위협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나는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의원님.”
“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큼직한 안경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최경석 의원.
그는 날 빤히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묻고 있었다.
이때, 나는 다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의원님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시는군요.”
그 순간.
“뭐??”
눈이 동그래지며, 황당함과 노함이 동시에 나타나는 최경석 의원.
이때, 나는 차갑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약혼하는 곳은 신라그룹입니다. 신라그룹이 어떤 곳인지··· 혹시 아십니까? 일반인들은 모르는··· 그래서 제가 의원님을 특별히 잘 지켜보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아주 당황한 표정이 되는 최경석 의원.
한편, 나 역시 속으로 좀 당황했다. 아무래도 그 칭호의 여파가 내 의지와 감정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무척 내 의지와 감정이 모질어진 것 같았고···.
한편, 신음성을 내던 최경석 의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거리다가 뒤늦게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신라그룹이 뭐라고.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한때 뿌리째 뽑힐 뻔했던 신라그룹.
그런 신라그룹이 무서워 목을 움츠리고 있는 2선 국회의원 최경석 의원.
이때, 나는 죽음의 낫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죽음의 의사]로서 또 다른 능력이 발휘되었다.
내가 좀 전에 보지 못했던 최경석 의원이 가진 수많은 [악업의 흔적]들.
그러자 내 눈앞에 그 모든 게 나타났다.
수천, 수만 개로 쌓여 있는, 드글드글거리는 그 악업의 잔재들.
그 흔적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고.
저절로 길어진 시커먼 낫은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뒤돌아보던 그의 입을 쓱! 베고 지나갔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앞으로 최경석 의원은 기나긴 실어증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내가 그에게 집행한 징벌이었다.
#
하! 근데 도대체 시스템은 왜 이런 능력을 나한테 줬을까.
무척 위력적이고 전율적인 능력을 말이다.
갑자기 내가 또 다른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생경하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고.
무언가 이질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떠올려봤다.
이치에 맞추어 많은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확인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몇 가지 가능성에 도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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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또 다른 하객이 나타났다.
<156>
“···자네가 김정민인가?”
눈썹이 짙고 입매가 얇은 중년 남자.
보좌관과 함께 나타난 남자는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아버지 일은··· 무척 유감이네.”
그리고 이때 마치 승리의 미소와도 같은 그런 미소가 슬며시 나타났는데.
그런 미소를 머금은 채 그는 곧장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편,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봤다.
누군가한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인사를 받기도 하며.
그렇게 식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남자.
저자는 바로 손명국 의원이었다.
한편, 나는 어느새 죽음의 낫을 들고 있었고.
[악업의 눈]으로 손명국을 한참 쳐다봤다.
이때, 그가 가진 수많은 악업의 흔적들이 파도치며 밀려왔고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가 이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듯 나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인기척이 옆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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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인사만 하는 중년의 백인 남자.
깨끗한 정장 차림이었고, 그의 옆에는 파란 눈의 금발 백인 미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한테 인사를 한 뒤, 간단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그들은 계속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음, 김윤상 의원의 일은 저희로서도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러면서 그 남자는 나한테 악수하는 시늉을 하면서 내 손에 뭔가를 건넸다.
내가 의아해하며 빤히 쳐다보자,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희가 우연히 얻게 된 자료인데,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한태산 회장과 태평그룹 간의 계약 관계, 그리고 태평그룹으로 흘러간 한태산 회장의 자금 이동 기록입니다.”
그러고는 그는 물러서며 한 번 더 웃더니 그대로 식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 옆에 있던 백인 미녀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가 역시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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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잠시 후,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고 그가 건넨 물건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다시 손을 뺐다.
지금 촉감으로 확인된 것은 바로 USB였다.
무척 의아해진 나는 죽음의 낫을 손에 쥐었고.
그러고는 다시금 그들을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며 나도 모르게 USB를 다시 한번 만지게 되었다.
그들의 악업 속에 보이는 잔재들.
저들은 미국 정보기관의 요원들이다.
그래도 아버지를 도우려고 했던 요원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계속 바라보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때마침 상당히 중요한 인사들이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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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희 여사.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한태산 회장.
“야, 빨리 움직여! 회장님께서 오셨다!”
“빨리빨리 움직여!”
그렇듯 갑자기 부산해지는 주변 분위기.
손미희 여사와 한태산 회장이 나타나자, 사방에 경호원들이 쫙 깔리고 있었고.
신라그룹 비서실 직원들까지 대거 동원되어 한태산 회장을 수행하는 아주 대단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때, 한태산 회장은 마치 병든 황제의 모습과도 같았는데.
아마도 저런 연출은 손미희의 작품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내가 공손하게 인사하자, 손미희는 힐끔 날 쳐다보더니 쌩!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손미희는 한태산 회장의 휠체어를 직접 밀며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렇듯 완벽하게 날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한편, 내 손에는 다시 죽음의 낫이 나타났고.
그들을 향해 [악업의 눈]이 열리고 있었다.
이때, 나는 한태산 회장과 손미희가 지금껏 쌓아온 수많은 악업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특히, 한태산 회장의 악업은 거대한 탐욕의 탑과도 같이 끝없이 쌓여 있었고.
수많은 악업을 얼굴 뒤에 숨기고 있는 손미희는 무척 위선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듯 그 악업들을 확인한 뒤, 나는 표정이 저절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악업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것일까.
이런 거대한 악업은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였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악업들을 그들은 한없이 쌓아가며,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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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의사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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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약혼식이 시작되기 5분 전.
식 참여를 위해 하객 인사를 마무리하던 중.
나는 무언가 서늘한 기운이 내 얼굴을 터치하는 듯한 느낌에 잠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때, 알 수 없는 감각에 이끌리며 한 노인을 유심히 쳐다봤는데, 수행비서 두 명과 함께 나타난 그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서 어느덧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고, 모자 아래에 날카로운 눈빛이 번득이고 있는 노인.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가 있어, 지금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때, 나는 첫눈에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수많은 언론 보도 때문에 내가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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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노인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
최덕렬!
바로 최덕렬이다!
한태산 회장이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지만, 설마 진짜 나타날까 했는데, 그는 정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그 사건의 기획자!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인간!
“좀 긴장하셨나 보군. 약혼식이라고 해도 긴장할 수밖에 없겠지. 핫핫.”
내가 굳어있자, 최덕렬은 웃으며 그렇게 또 말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즉시 죽음의 낫을 손에 들었고.
[악업의 눈]으로 그의 악업의 흔적들을 즉시 확인했다.
그리고 잠시 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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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의원이 아주 훤칠한 아들을 뒀군. 어찌 사람이 그런 사고를 당하게 됐는지 참 세상이 무섭단 말이야. 그리고 혹시 부탁할 게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요. 김윤상 의원과 인연을 생각해서, 내가 뭐든 도와줄 테니까.”
그러면서 최덕렬은 자신의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걸 받은 뒤 살펴봤다.
모 정당의 정치연구소 소장 직함을 그는 지금 갖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가 고개를 들자, 날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가 다시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하! 정말 지독한, 지독한 인간이구나.
어떻게 저런 가식을 보일 수가 있지.
좀 전에 내가 봤던 그의 악업들.
그 수많은 악업들은 한태산 회장의 악업을 능가하고 있었고.
그 악업들 속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 지령. 그리고 최근에 그가 내린 지시(악업)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런데도 최덕렬은 저런 미소를 보이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표정이 계속 굳어있자, 최덕렬의 눈빛은 결국 변했다.
무언가 서늘해졌고 또한 날카로워졌다.
어느 순간, 그의 한쪽 눈은 찡그려져 있었고.
알 수 없는 살의가 내 피부에 와 닿고 있었다.
설마?
설마 나마저 죽이려고?
그런데 바로 이때, 그가 펼쳐낸 수많은 악업들 중에서 나는 뒤늦게 아주 중요한 흔적들을 또한 발견하게 되었다.
#
한유나였다.
한유나 살해 지령.
먼저 그는 한유나의 살해를 계획했고, 과거엔 나 때문에 그게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한유나를 죽이기 위해 최근에 또 다른 살인 계획을 짜고 있었고.
그런 최덕렬의 모습이 그 악업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버지를 현재의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것도 바로 저 최덕렬의 짓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입술을 악물며 억지로 참아냈다.
그렇게 참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최덕렬의 멱살을 잡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점점 서늘해진 눈으로 날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주름진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보이며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나는 끝까지 쳐다봤는데.
마지막으로, 한윤기, 한윤수, 한윤형 등이 예식 시간에 딱 맞춰 식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척 거만한 표정이었고.
날 한번 쳐다본 뒤, 내 인사도 받지 않고 곧장 식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악업까지 모두 확인한 뒤, 모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그래! 이제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잠시 후, 나는 차가워진 시선으로 앞쪽 테이블에 앉은 최덕렬, 손명국, 한태산, 손미희 등을 노려봤고.
곧이어 약혼식이 어느덧 시작되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강소정, 김유리와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유나.
대기실에서 머물다가 이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새하얀 살결,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환한 웃음.
마치 아름다운 천사와도 같은 모습을 한 그녀는 새하얀 드레스와 빛나는 티아라를 머리에 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슬쩍 웃자,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이제 나란히 대형 특급 호텔 내, 약혼식 식장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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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김정민 군과 한유나 양의 약혼식을 축하하며 함께 건배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느덧 약혼식은 순식간에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는데···.
좀 전, 케이크절단식이 있은 뒤, 우리는 요란한 박수를 받으며 하객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무척 조용히 진행됐던 약혼식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는데.
이때 누군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렇듯 요란한 건배 제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일에 건배가 빠질 수 없다는 강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누군가가 손을 들며, 그 건배 제의를 취소시켰다.
아버지의 상황이 좋지 못해 계속 약혼식을 즐길 수 없었던 나로선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날 위해 당당하게 발언을 진행하는 서철성 교수님을 쳐다보며, 나는 그 감사의 마음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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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정민 군과 한유나 양의 약혼식은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약혼식입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결혼까지 잘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에서 모두 축복을 하고 싶고 또한 축하의 건배를 하는 게 마땅하나··· 여기 계신 분들께선 잘 아시겠지만, 김정민 군의 아버님께서 크게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오늘 김정민 군이 힘들게 약혼식을 진행한 이유는 오로지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 자신의 약혼을 보여주고 싶은 아들의 애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갈 게 아니라, 그저 조용히 두 젊은 커플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게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뒤 서철성 교수가 자리에 앉자, 건배 제의자는 멋쩍은 표정을 하더니 도로 자리에 앉았고.
결국,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개별적으로 와인을 마시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한편, 나는 서철성 교수님의 말씀 중에 울컥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억지로 감정을 참으며 수습했는데.
그렇게 감정을 수습한 뒤 옆을 쳐다보니, 한유나가 우울해진 눈으로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웃었고, 그러면서 슬며시 내 왼손에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손에 쥐어진 시퍼런 거대한 낫.
그 죽음의 낫을 다시 손에 쥔 나는 차분하게 좌우를 살핀 뒤, 드디어 죽음의 복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157>
죽음의 낫.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죽음의 낙인.
그 낫에 서린 죽음의 기운과 섬뜩한 징벌의 기운은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예식장을 크게 휘어 감으며.
차가운 가시와 절규로 이루어진 징벌의 장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죽음의 낫을 크게 휘두를 필요도 없다.
내가 의지를 보이는 순간, 낫은 한없이 커지고 있었고.
사방에 죽음의 광풍을 만들어냈으며.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의 목을 베기도 했고 누군가의 심장을 찍기도 했고 누군가의 폐를 도려내기도 했다.
이때 치솟는 죽음의 회오리는 사신의 위력과 다름없는 광풍을 만들어냈으며.
내가 낙인해 둔 사람들은 그 광풍을 휩쓸리며.
내가 만든 죽음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해져 흠칫하던 유나.
그녀가 본능적으로 내 어깨에 몸을 기대는 순간.
그 죽음의 낫은 다시 내 손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나는 눈을 감았다.
이때, 환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강제철 실장님의 모습이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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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하하하. 아이고, 김 장관님, 어쩐 일이십니까? 그래요. 좋습니다. 저녁 식사 스케쥴은 제가 되도록 맞춰보지요. 그럼 그때 한번 뵙도록 하지요.”
약혼식이 끝난 뒤, 특별한 행사가 없어 거기서 저녁 식사만 마치고 호텔에서 나온 최덕렬 전 안기부장.
그리고 차량 뒷좌석에 앉아 전화통화를 마친 최덕렬은 무척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현재, 모자를 벗고 있어 듬성듬성한 하얀 머리숱과 얼굴 주름이 훨씬 더 두드러진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잊은 듯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사실, 중국 특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무척 위험천만했다. 하지만, 중국 특사 때문에 김윤상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그사이 자신은 준비할 시간을 얻은 뒤 마침내 김윤상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현재 식물인간 상태라고 해도, 뇌사가 진행되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라고 한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다시금 웃음이 우르르 밀려왔다.
미친 새끼!
그 미친 새끼!
김정민이라고 했던가.
흥!
자식은 잘 키워놔도 소용없다더니.
자식 놈은 자기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인간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신을 면전에서 그냥 보내줬다.
하긴 절대 모를 테지.
의사 나부랭이가 뭘 알겠는가.
“핫핫핫!”
다시금 웃다가, 최덕렬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러고 보면, 조금 꺼림칙한 부분도 있다.
아까 봤던 그놈의 잔뜩 굳은 표정.
정확하진 않으나 뭔가 마음에 걸리기도 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최덕렬은 결국 휴대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래. 기분이 이상할 땐 후환을 두는 게 아니지. 오히려 그 새끼한텐 잘 된 거지. 약혼녀랑 같이 저세상으로 가는 건데, 저세상에서 결혼하면 되겠군. 흐흐흐. 그러니 내가 참 자상하단 말이야.’
음산하게 웃던 최덕렬.
그는 곧이어 그 휴대폰에서 전화번호 하나를 찾은 뒤, 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최덕렬은 멈칫했다.
갑자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고.
전신이 마치 통나무가 되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고개를 돌리려고 노력했고.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온 힘을 쥐어 짜내며 집중했으나 한 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오히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뭔가가 코에서 투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더 끔찍한 일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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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 여기저기.
사람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창백한 피범벅의 얼굴들.
처음엔 뭔가 싶었다가 나중엔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인 자들이었고.
그자들의 얼굴이 환상처럼 나타나, 피를 철철 흘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드드드드.
순간, 최덕렬은 온몸을 부르르 떨렸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감지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전혀 감기지 않는다.
이때 시커먼 뭔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차 안의 모습은 사라지고.
낫을 들고 있는 시커먼 무언가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낫으로 자신의 심장을 찍더니 그대로 심장을 뿌리째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는 자신의 심장을 들고서 홀연히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 순간.
그리고 바로 그때, 마비가 풀렸는데.
놀란 최덕렬은 허겁지겁 자신의 가슴부터 만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앙! 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그는 허공으로 한없이 날아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창밖을 쳐다보니 가로등 불빛이 밝혀진 시커먼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현재 그의 차량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저 멀리 튕겨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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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의사 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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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렬은 신음을 토해냈다.
하늘과 땅이 몇 번 바뀌었고.
곧이어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전복된 상태로 차가 주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스파크가 일어났고.
머리와 발의 위치가 바뀐 상태에서 온몸이 제멋대로 틀어졌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기분나쁜 뼈 소리가 들렸고.
놀라며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그는 다시금 뭔가 거칠게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대경실색하며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 순간, 쏴아악! 퍼져나가는 차가운 느낌.
머리가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이때,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차체.
그런데 이때, 끼이이익!! 하는 요란한 굉음 소리가 근처에서 들렸고.
수많은 경적 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왔다.
빠아앙! 빵! 빵!
그리고 쿠왕! 쾅!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정면 유리창을 사정없이 부수며 무언가가 스르륵 밀려들어 왔다.
길쭉한 무언가.
쇠봉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대로 쭉 밀려들며, 굳어버린 최덕렬의 가슴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있었다. 정장 외투와 와이셔츠, 갈비뼈마저 통째로 부수며 밀고 들어온 쇠봉은 뒤쪽 트렁크 너머로 쭉 밀려 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쿠엑!
최덕렬은 목뼈가 기형적으로 부러진 상태로 핏덩이를 뱉어냈다. 그 핏덩어리는 그의 눈과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와 발의 위치가 바뀐 상태에서 그런 핏덩어리를 뱉어내다 보니 그렇게 피가 흘러내렸고.
잠시 후, 피범벅이 된 눈으로 그는 불안한 듯 좌우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 순간, 콰-앙! 하는 굉음와 함께 불길이 확 위로 치솟았는데.
그 불길은 돌풍에 휘말리듯 휘어졌다가 다시 쏜살같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부서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그 불길은 최덕렬의 어깨에 철썩 달라붙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경악한 최덕렬은 발악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도 없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 피부를 태웠고, 눈을 태웠고 코를 태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가슴이 관통된 상태이고 목이 부러진 상태인데도 최덕렬은 의식을 잃지 않았다.
몸이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그는 의식이 있었고.
그 때문에 화염의 끔찍한 고통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어느새 식도가 타버렸으며 머리 피부가 거의 다 사라졌다.
손발은 새카맣게 변했고.
하반신을 태운 불이 내장까지 번져, 대장을 태우고 있었고 위장은 노랗게 그을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전신은 완전히 불덩이가 되었는데.
점점 더 왜소해지던 그의 형체는 어느새 힘없이 무너졌고.
마침내 새카만 뼈다귀로 변해가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한 해골.
그런데 그 해골은 끔찍한 고통에 절규하듯 불타버린 입술 대신에 울퉁불퉁한 치아를 드러내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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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손미희는 한태산 회장과 함께 호텔을 벗어나 신라병원으로 향해 출발했다.
사실, 그녀는 약혼식 내내 무척 냉랭한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한유나가 죽지 않고선 완벽한 승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와중에 틈틈이 오빠 손명국에게 전화를 했고.
몇 번이고 확답을 받은 뒤 안도해 했다.
그렇게 통화를 하던 중,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조금 가려워 손으로 얼굴을 조금 긁었다.
처음엔 가볍게.
그런데 갈수록 얼굴이 더 가려워졌다.
보통 때 같았으면 긁지 않고 거울부터 봤을 텐데.
그러나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는 그저 본능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긁기 시작했다.
통화 중에 계속 긁었고, 또 긁었다.
그런데 갈수록 더 가렵기만 했고, 도무지 미칠 것 같아 더 심하게 긁게 되었다.
‘도착하면 약이라도 발라야겠어.’
문득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던 그녀는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긁다 보면 시원해졌고, 그래서 쉴 새 없이 긁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의아해하며 손을 잠시 멈췄다.
뒤늦게 깨달은 점.
자신이 너무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계속 긁고 있었고, 그 자체가 너무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재빨리 얼굴을 만졌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며, 재빨리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냈고.
몸을 조금 틀며 그 손거울을 자신의 얼굴에 바짝 대며 자신의 얼굴을 살펴봤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로 그때였다.
손거울을 보던 손미희.
갑자기 하이톤의 요란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비명 소리가 어찌나 큰지 깜짝 놀란 운전사.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운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후방에서 엄청난 충격이 느껴지며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바로 발생했다.
뒤따라 달리던 차량.
그 차량이 급브레이크 상황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후미를 박았고.
뒷좌석 안전벨트를 잘 매지 않는 이 시대.
손미희는 급브레이크와 함께 몸이 휘청거렸다가.
미사일처럼 그대로 앞으로 튕겨 나갔다.
콰앙!!
순간,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한편, 후방 충격에 주르르 미끄러지던 차체는 간신히 멈춰섰는데.
이때, 운전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옆을 쳐다봤다.
앞면 유리창 전체가 거미줄처럼 심하게 금이 갔고.
덜컹덜컹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창 전체가 뜯겨져 나갈 거 같은데.
문제는 머리가 뒤로 꺾인 채 목이 부러져 있는 여자가 자신의 옆에 경직된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
그 얼굴에선 피가 우수수 터져 나오고 있었고.
부풀어 오른 목에선 금방이라도 피가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평상시에는 몽롱하던 한태산 회장.
그는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그는 끔찍하게 변해 버린 손미희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가.
순간, 자신의 가슴을 쥐어 잡으며 발악했다.
요즘 실어증 상태인 한태산 회장.
그는 그 와중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는데.
뒤늦게 알게 된 운전사가 황급히 조치를 취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번개같이 찾아온 죽음은 한태산 회장을 단숨에 집어 삼켜버렸다.
두 눈을 부릅뜬 채 굳어버린 한태산 회장.
거대한 악업으로 가득했던 그의 생애는 그렇듯 무척 허무하게 끝나고 있었다.
한편, 그렇듯 모든 일들이 끝났을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앰뷸런스들은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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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보좌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까?”
“생각보다 차들이 많지 않아서··· 30분, 40분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오케이. 수고해.”
겨울이라 일찍 밤이 오고, 그래서 어느새 세상은 무척 어두워진다.
호텔 약혼식 참석을 마친 뒤, 경기도 별장으로 향하는 손명국 의원.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약혼식이 끝나고 최덕렬과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그는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더러운(?) 작업들은 조만간 끝나고, 큰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역시 안기부장 출신은 다르긴 달라. 본격적으로 나서니까 뭐든 술술 풀리고···. 이렇게 기분 좋은 날! 밤새워 마시며 뒹굴어야지.’
그래서 그는 곧장 자신의 별장으로 갈 생각이다.
김 실장한테 전화까지 해 둔 터라, 별장으로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올 것이다.
밤새 정신없이 즐길 생각.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씩 웃다가, 그는 문득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뒤.
경기도 별장으로 향하는 차량은 어느덧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었는데.
그러던 중, 손명국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얼굴을 만졌고.
이내 뭔가에 놀라며, 더 세세히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다.
얼굴 여기저기에서 울퉁불퉁한 뭔가가 만져졌다.
놀라며 이마를 만지다가 더 놀랐다.
이마 양쪽에 날카로운 돌출부가 만져졌고.
갑자기 얼굴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너무 아파, 인상을 팍 쓰며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얼굴이 마치 좌우로 비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턱마저 갑자기 틀어지며 사방에서 고통이 유발되었다.
그러던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바깥.
그 때문에 차 창문이 거울 작용을 하며 어렴풋이 자신의 모습이 보였는데.
흐릿하지만, 저게 대체 사람의 모습인가.
얼굴은 제멋대로 틀어져 있고.
순간, 자신의 코에선 피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는 두 손으로 코를 잡았다.
“야! 빨리 병원으로 가!”
그렇게 손명국은 외쳤으나.
무척 이상한 일이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보좌관들.
그들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사이 피는 우수수 쏟아졌고.
잔뜩 겁이 난 손명국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코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코를 완전히 밀착하듯 막았는데.
그런데 동시에 입에선 내장 조각 같은 게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그 내장 조각을 보고서, 몸을 부르르 떨던 그는 다시 본능적으로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무척 어색한 행동이고 이해 불가의 행동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입과 코를 미친 듯이 압박하며, 피가 나오는 것과 내장이 나오는 것을 막느라 사활을 다했다.
그러던 중, 손명국은 힘없이 축 늘어졌고.
점점 그의 얼굴은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질식에 의한 청색증의 징후.
그리고 한참 뒤.
한적한 별장에 도착한 뒤, 뒤돌아보던 운전석의 보좌관과 조수석의 수석보좌관.
그들 두 사람은 이내 경악하며 큰 비명을 질렀다.
“의, 의원-님!!”
“으으어! 뭐, 뭐야??”
자신의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얼굴이 파랗게 변한 채 죽어 있는 손명국의 모습.
보좌관들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나왔고, 부들부들 몸을 떨며 경찰에 서둘러 신고했다.
그렇듯 이날 약혼식 이후, 곳곳에선 아주 끔찍한 일들이 그렇게 발생하고 있었다.
<158>
2002년 1월 29일.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식물인간 상태였던 아버지는 끝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나는 홀로 상주가 되어 묵묵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때, 유나는 계속 내 옆에 있으며 날 위로하며 많은 일들을 도왔다.
이제는 아버지의 후광이 없어져, 나와의 인연을 끊어도 되는 그녀.
그러나 그녀는 계속 내 곁에 있었고.
장례식이 끝난 뒤, 적당한 시기에 결혼식 날짜를 정하자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사이는 더 애틋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도 얼마 전 부친상을 치렀다.
한태산 회장은 죽었고.
손미희가 사고로 죽었다.
손미희 오빠, 손명국도 죽었고.
최덕렬 역시 목숨을 잃었다.
한날한시에 죽게 된 그들.
그 기이한 죽음들을 알게 된 기자들은 대서특필했고.
수사기관에서 즉시 조사에 나섰으나 어떤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각자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각자 나름의 인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이하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인과들 때문에 제삼자와의 관련성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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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 01: 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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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렇게 최덕렬 등이 죽고 나자, 고상중 의원에 대한 수사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존속살인미수 교사 혐의까지 추가된 그에게 구속영장이 전격적으로 발부되었다.
또한, 그 와중에 손명국 의원의 죽음과 관련해선 온갖 잡음과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결국, 그때 같은 차량에 있었던 두 명의 보좌관들에 대해선 수사가 진행되었고, 이들을 살해 용의자로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언론 발표에 의하면, 두 보좌관들의 집과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했더니 비자금 10억 원이 나왔으며 각종 차명 계좌를 통한 차명 이체 내역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그 이력들 중에는 서철성 교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김주태, 김주호의 계좌로 수천만 원이 이체된 내역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들 보좌관들은 살인미수교사 혐의가 추가되었고, 전격적으로 구속영장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와중에 신라그룹은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윤기, 한윤수, 한윤형, 그리고 이 전쟁에 갑자기 끼어든 한유나까지.
그 전쟁은 처음엔 4파전으로 이어졌으나.
[태평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신라건설 지분 12.2%와 [태평그룹] 전체 지분 62.5%가 한유나의 모친 것으로 확인되면서 큰 반전이 일어났다.
그렇듯 혼란과 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신경외과 인턴 근무를 마친 뒤, 차기 신경외과 과장으로 확정된 한정미 교수의 격려를 받으며 신경외과 병동에서 나오게 되었고.
2월 내내 흉부외과 인턴 생활을 하다가.
어느덧 2002년 3월이 되자, 흉부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드디어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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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 선생! 수술 스케쥴 나왔으니까 확인 좀 해 봐···.”
“선생님! ER(응급실) 콜입니다! 어서 가보세요!”
“···우린 바빠도 컨퍼런스 시간은 지키자고···.”
“···김정민 선생님! 방지현 선생님! 교수님 콜 왔습니다!”
“···김정민 선생!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에휴, 새벽 3시에 저녁 밥이라니···.”
“···김정민 선생님! 수술방 콜입니다!”
흉부외과 레지던트로서의 일상.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일상이었고 경험한 일상이라, 어떤 면에선 무척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몸은 무척 바빠졌다.
특히, 레지던트 1년차가 그렇게 시작된 거지만, 내가 지닌 수술 능력 때문에 정신없이 흉부외과 수술에 투입되었고.
막 인턴으로 들어온 3월 인턴 관리까지 맡다 보니 하루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래도 조금의 시간이라도 남게 되면, 유나에게 전화했고 또한 유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나머지 시간들을 모두 할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국정원 김 차장이라는 중년 남자가 날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들을 했고, 그러면서 국정원 내부 정리가 끝났다며, 전직 요원들의 형사 처리가 시작될 거라는 애매한 말들을 남긴 뒤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고는 다시 시간은 흘러갔는데···.
어느덧 무척 산뜻한 봄날, 5월이 되었다.
하지만 외과 분야 레지던트 과정들이 누구나 그러하듯, 그 봄날의 정취를 누릴 여유는 없었고, 나는 계속 수술방에서 환자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때, 아쉬운 점은 시스템 종료로 인해 그 획기적이었던 [전용 특성]들은 다 사라졌고.
그래서 내 원래 실력으로만 퍼스트 어시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 때문에 안타까운 일들을 다시금 겪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미래를 아는 건 나름 큰 도움이 되었다.
근데 그러고 보면, 5월엔 원래 지옥 여행 스케쥴이 잡혀 있지 않았나.
6개월 제약이 걸려 있던 그 페널티, [지옥 여행 6일]!
그걸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시스템 종료로 인해 그 페널티는 존재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만약 내가 [피 흘리는 권좌(클래스 S)]를 성공했다면, 지금 이 무렵 나는 지옥 어느 곳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피 흘리는 권좌(클래스 S)] 미션은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시스템은 종료되었다.
사실, 그 메인 미션과 관련된 연계 미션(4)는 [죽음의 의사]였고.
곧이어 이어진 연계 미션(5)는 [탐욕의 죽음], 즉 한태산 회장의 죽음이었다.
결국, 연계 미션(4)와 연계 미션(5)가 한 번에 달성되었지만, 나는 연계 미션(6)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연계 미션(3)이 실패하면서 연계 미션(6)으로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즉, 인과에 의해 연계 미션(6)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메인 미션 [피 흘리는 권좌(클래스 S)]는 그렇듯 실패했으나, 아버지의 복수와 내 복수는 완성되었고···.
그런 일들의 성공 때문인지 몰라도, 시스템은 종료 직전, 나에게 히든카드 한 장을 부여했다.
문제는 그 히든카드가 무척 놀라운 것이었고.
그 히든카드를 사용하는 데 있어 앞으로 많은 고민들이 필요해 나는 잠시 그 결정을 보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갔고···.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버지의 옆에서 일들을 도왔다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온갖 가능성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봤으나, 종료 직전의 시스템이 나에게 은밀하게 전했던 이야기들이 다시금 생각났다.
[···38회차 회귀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생존했고 한유나는 사망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고··· 당신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 없었을까.
[···45회차 회귀 때, 당신은 아버지를 구했으나···그는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결국 자살했습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시스템은 슬쩍 귀띔했다.
미래를 바꾸는 건, 한 개인의 노력만으론 크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인과가 모여야, 하나의 거대한 인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즉, 내가 수많은 기회를 가지는 동안, 아버지 역시 수많은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기회 속에서 아버지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행위는 수많은 인과를 만들어냈고 그 인과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었던 미션이었던 것.
하지만, 그런 미션들 때문에 내가 얻은 수확은 대단하다.
[계좌 잔고]
[523,336,336,138원]
나스닥 지수에 대한 풋옵션 투자를 했고, 그때 투자했던 3억 원이 5,233억 원으로 바뀌어 내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 덕분에 나는 유나의 지분 50%에 대한 의결권을 갖게 되었고, 향후 그녀가 가진 지분의 10%가 내게 증여된다.
나는 천문학적인 부자가 되었다.
물론, 지분으로 이루어진 유나의 재산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졌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일 년이 되던 시점에 과거 시스템에서 부여받은 히든카드를 오픈하게 되었고.
이때 다시 한번 결정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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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회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이 회귀를 선택하면, 미션 중간에 플레이어가 사망하더라도 회귀는 반복됩니다···]
[···시스템 완전 종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며··· 이 현실은 바뀌지 않는 종속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사망했던 회귀 때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순간마다 나는 무조건 전자를 선택했던 모양이다.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가능성을 내가 꾸준하게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번엔 많은 게 달라졌다.
시스템은 [죽음의 의사]를 갑자기 제안했고, 나는 그 [죽음의 의사]를 승낙했다.
그 때문에 복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모든 복수가 완료되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 전에 다시 시스템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왜 나에게 갑자기 [죽음의 의사] 옵션이 주어진 것인지···.
그러자 시스템은 정말 간단하게 답을 보내왔다.
[···사신···]
사신?
도대체 사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론, 나에게 [죽음의 의사] 칭호를 최초 제안한 것은 사신이다. 하지만, 그땐 사신의 추종자가 되라는 말과 함께 [죽음의 의사]가 제안되었고, 당시의 나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신이라···.
한편, 나는 잠시 눈을 감고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사의 율법.
죽음의 숙명을 극복하는 방법.
사신과 싸우는 방법.
사신의 위협 등등.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떠올려봤고.
그러던 중 다시금 무언가 퍼즐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로서 나는 환자를 구한다.
그러나 사신은 생명을 앗아간다.
영원한 대척점에 서 있는 우리.
하지만, 사신의 특성에선 인간의 숙명이 이야기되고 있으며 그 숙명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오로지 사신을 위협적인 존재로만 생각했고.
그럼에도 나는 사신의 낫을 들고서 징벌을 수행했다.
내가 숙명을 벗어나 타인의 생명을 구할 때도, 사신의 위협은 있었으나, 사신은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제시하며 날 채찍질했다.
그렇듯 이질적인 사신의 모습. 그리고 그 사신에서 비롯된 특성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차가운 이성은 즉시 발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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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누군지 알겠다.
날 선택한 최초의 성좌···.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미션들이 반복된다면.
그리고 무한히 반복된 끝에 내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한다면.
그때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시스템은 어느 인과에 도달해서 나에게 [죽음의 의사]를 제시했다고 했고.
어떤 인과율에 도달해서 시스템과의 대화가 가능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스템과의 내 친화력은 기존 회귀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언젠가···.
거대한 어둠을 둘러쓰고 있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즉, [사신의 분노 Lv.1]이라는 레벨도 내가 사신이 바뀌어 가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듯 그런 섬뜩한 가능성을 떠올린 뒤.
나는 아버지를 구하려는 미션 자체가 바로 내가 사신이 되는 과정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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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뒤.
나는 과감히 후자를 선택했다.
[시스템 완전 종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섬뜩한 기운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찰나! 내 눈앞엔 환영처럼 사신이 강림했다.
그런데 이전과 다른 변화가 있었다.
차가운 기운이 사방에서 몰아치고 있으나 사신은 절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 사신은 어둠 속에서 날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감춘 거대한 두건을 벗었다.
그런데 이때 내가 봤던 그 수많은 눈동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사신은 어느 평범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아쉬움의 미소를 지었고.
그러다가 이내 홀연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스템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시스템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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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 02: 운명 >
<159>
“···선배! 혹시 담배 끊으면 안 될까요?”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2003년 2월의 어느 날.
“몸에도 안 좋은데···. 이제 저도 안 피잖아요.”
깊은 밤, 흡연 구역에서 흡연하던 조은하 선배는 내가 계속 참견하자, 날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제 응급실 레지던트 4년차를 앞두고 있고, 기존 선배가 병원을 나가면서 현재 응급실 치프까지 맡고 있는 상태다.
“금연? 난 아직 안 돼.”
조은하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넌 대단하니까 끊은 거고, 난 아직 안 돼. 담배를 안 피면 초조해져서···.”
그러면서 뒷말을 흐리고 있는 조은하 선배.
하긴, 흡연 자체가 일시적으로 불안과 긴장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건 학계 연구에서도 보고된 바다.
그러나 흡연은 이런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면모가 훨씬 더 크다. 뇌의 노화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되고, 뇌의 인지 기능 저하 문제도 생기게 된다. 거기다가 담배와 관련된 상당한 금단 증상도 있다.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불안감과 초조함이 더 커져,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태우게 되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각종 암 발병 위험성까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사실은 조은하 선배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은하 선배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걱정 마.”
그러고는 조은하 선배는 화제를 바꿨다.
“곧 결혼한다며?”
이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축하한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근데··· 레지던트 과정이 결혼하면, 결혼 생활이 되게 힘들 텐데? 곧 외상센터 일도 하게 됐다면서?”
그 말에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성국대 병원에 새로운 센터들이 곧 오픈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흉부외과 일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업무 분담 과정에서 나는 주로 외상센터 쪽, 흉부외과 파트의 일들을 돕게 되었다.
“근데 어쩔 수 없죠.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환자들만 더 많아지고 일만 더 바빠질 텐데. 참! 요즘 어때? 수술은 계속 많지?”
“네. 그건 그렇죠 뭐.”
이때, 조은하 선배는 담뱃불을 껐고 꽁초를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근데 혹시 다른 바쁜 일도 있어?”
“네?”
나는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봤고, 조은하 선배는 날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틈만 나면 신경외과(NS)에 가서, 계속 기웃거린다며?”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랐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바쁜데, NS 수술 술기는 배워서 뭐하게?”
그 순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이것저것 알아두면 나중에 뭔가 좋을 것 같아서요.”
“뭐, 배우는 건 좋은데, 힘들지 않아?”
“뭐, 어쩔 수 없죠. 힘들어도.”
“근데 흉부외과 교수님들이 뭐라고 안 하시나?”
“서철성 교수님한텐 가장 먼저 허락을 받았고, 다른 교수님들께도 허락받았어요. 신경외과 한정미 교수님도 오케이하셨고···.”
그러자 조은하 선배는 다시 웃었다.
“천재라고 해서 특별 대우인가 보네.”
그 순간, 나는 어색해져 웃었는데, 조은하 선배는 앞장서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무튼, 뭐든 열심히 해. 의사가 뭐든 열심히 하면, 환자한테 이익이 되니까.”
한편,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걷다가,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갑자기 날 빤히 쳐다봤다.
“근데··· 나중에 여기 안 남을 거지?”
“네?”
“레지던트 마치고 나면···?”
아, 그 질문인가.
“네! 어쩔 수 없이 저는 신라병원으로 가야죠.”
사실, 회귀 전에도 성국대 병원에 남지 않았다.
다른 대학, 다른 병원으로 가서, 나는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목적지가 바로 정해졌다.
신라병원.
내가 가야 할 곳이다.
유나와 함께 내가 운영해야 할 곳이었다.
“그럼··· 나중에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
그러면서 날 가만히 쳐다보는 조은하 선배.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건 뭐, 취업 청탁인가.
그런 내 표정에 조은하 선배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러죠.”
“······??”
“오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은 그런 권한도 없지만.”
그러자 조은하 선배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다.
“고맙다.”
“다만, 실력 계속 유지하지 않으시면, 나중에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자 씩 웃는 그녀.
그리고 잠시 뒤.
본관 1층 입구에 다다르자, 그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전쟁은 언제 끝나?”
전쟁?
전쟁이라···.
그 질문에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2003년 2월.
현재, 신라그룹은 총 세 개로 나뉜 상태다.
한윤기의 신라그룹. 그러나 계열사로 남아 있는 회사들 수준이 처참해졌다.
한편, 한윤수와 한윤형은 서로 손을 잡아 그룹을 만들었는데. 특히, 이들이 가지고 떨어져 나간 몇 개의 회사들은 현재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였다. 한유나의 외삼촌인 강만희 회장이 이 회사들을 노리며 집중적인 공격을 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유나.
그녀는 한태산 회장의 유산 외에도 모친의 유산을 추가로 상속받았고, 그 때문에 신라그룹의 가장 큰 회사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신라전자, 신라건설, 신라자동차, 그리고 신라병원과 관련된 신라의료재단 운영권을 그녀는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는 [태평그룹] 지분을 모두 다 팔아치웠고, 그 자금으로 신라그룹 계열사 확보에 집중한 터라 그런 결과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들 회사를 그룹으로 합쳐 놓으면, 재계 순위가 바로 국내 5위권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룹 이름을 새롭게 정한 뒤, 완전한 분리까지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그럼에도 아직 외형적으로 봤을 땐, 세 동강이 난 신라그룹은 여전히 지속적인 전쟁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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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래도 조만간 일들이 다 끝날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조은하 선배와 헤어졌고.
응급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조은하 선배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봤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늦어진 수술 때문에 밤늦게 바이크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흉부외과 치프 최고은 선배.
그녀의 모습이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나는 멈칫하며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재빨리 본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이어 휴대폰을 꺼냈다.
늦은 시각이지만, 유나에게 전화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그녀는 비즈니스 때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었고, 그 시차 때문에 충분히 전화할 수 있는 그런 시각이었다.
<160>
“근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
2003년 5월 10일 밤늦은 시각.
흉부외과 의국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나는 어느덧 산부인과 레지던트 2년차가 된 이동욱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욱은 이때 뜻밖의 말을 나한테 했다.
“예전에 나한테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한 거··· 혹시 기억 나? 잊고 있다고 갑자기 기억이 나서···.”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 하며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막 회귀를 했을 때, 그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었다.
그리고 그 문제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된 이동욱과 방지현.
그때, 나는 그들에게 미안했고.
그래서 각자 부탁 하나씩을 들어주기로 한 적이 있다.
나중에 방지현은 수처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나는 그 부탁을 바로 들어줬는데.
생각해 보니, 이동욱은 지금껏 어떤 부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나는 즉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저번엔 왜 부탁을 안 했어?”
“어?”
“레지던트 진로 결정할 때!”
그러고 보면, 그때 녀석은 이런 식으로 부탁할 수도 있었다.
‘너는 다른 진료과로 가! 방지현은 흉부외과에 가야 하니까.’
그러나 녀석은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내 진로에 대해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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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전공 정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인생이 걸린 일이잖아. 어떻게 내가 방해하냐?”
그 순간, 나는 피식 웃었고.
아주 사소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때 고민했던 일이나 두 사람을 배려하려고 노력했던 일들이 절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럼, 그래서 무슨 부탁···?”
나는 다시 물었고, 그러자 이동욱은 마침내 자신의 부탁을 이야기했다.
“요즘 지현이가 많이 힘든 것 같은데··· 뭐든 꼭 좀 도와줘! 꼭 좀 부탁한다!”
“음, 지현이가 힘들다고 그랬어?”
“어. 많이 힘든 거 봐.”
레지던트 과정 이 시기엔 일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책임감이 따르게 되는 게 사실이다.
방지현도 어느덧 퍼스트 어시가 된 거고, 더 어려운 수술에 투입되고 있는 중이다.
그 때문에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알았어. 내가 뭐든 도와줄게.”
그렇게 말한 뒤,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이동욱은 언제나 방지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저들 두 사람의 사이는 정말 신기하다.
어느 순간 극도로 좋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연인이 될 뻔하다가, 다시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
그 인연이라는 게 참 희한한 것이다.
그만큼 인연이라는 건 쉬운 듯하면서도 절대 단순한 게 아니어서···.
그 작은 인연이라도, 우리는 그 인연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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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확실히 너밖에 없어.”
한편, 이동욱은 무척 고마워했고,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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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형사 재판이 열렸다.
신라병원 정상영 전 병원장과 강성훈 전 교수에 대한 재판은 시작되었고.
살인 혐의 및 횡령 등에 대한 제1심 공판이 시작되면서, 유나는 수시로 법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열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일 년 뒤, 유나는 그녀를 똑 닮은 딸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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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갔는데···.
2008년 6월 16일 밤늦은 시각.
일부러 성국대 병원 응급실에 들러 간단한 복통 처치를 받던 나는 슬쩍 방지현에게 전화했고, 그녀의 교수실을 밤늦은 시각 찾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일상 이야기들 외에도 전문적인 수술 관련 대화들도 진행됐는데.
그러던 중 방지현은 갑자기 쓰러졌다.
그러고 보면, 드디어 그 일이 시작된 것이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심장.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심근경색 증상.
그 증상을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
그 순간, 다음 조치가 재빨리 이루어졌다.
원내 방송에선 코드 블루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고.
자신의 교수실에서 원래 싸늘하게 식어갔을 방지현은 그 순간 아주 재빠른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연락을 하자, 성국대 병원 산부인과 조교수가 된 이동욱이 가장 먼저 달려왔고.
2년 전, 유나와 함께 성국대 재단 및 성국의료재단을 인수한 터라.
그런 내가 성국대 병원 흉부외과 교수님들한테 직접 연락을 취하자, 십여 명의 교수님들이 단숨에 달려왔다.
그제야 나는 안도해 하며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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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잘 된 것 같아.”
한편, 내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돼서 좋아···. 수술 힘들지 않아?”
잠결에 전화를 받게 된 유나.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게 들려왔다.
아마 유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내가 지금 성국대 병원에 와 있다는 것도 모를 테고.
그저 신라병원에서 내가 좀 전에 수술을 마쳤다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기 조금만 더 지켜보고··· 문제없으면 집에 갈게.”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시···?”
“새벽 4시, 아니면 5시쯤.”
“···알았어. 조심해서 와···.”
그러고는 통화가 끝났고.
나는 작은 미소를 짓다가, 슬쩍 지갑을 꺼내 지갑에 넣어둔 사진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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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들.
내 가족들의 사진들.
그 사진 속엔 한유나가 있었고, 딸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진, 다소 빛 바랜 사진.
그 속엔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웃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 역시 아주 환하게 웃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을 나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잠시 후, 그 사진들이 들어있는 지갑을 아주 조심스럽게 내 주머니에 넣었고.
그러고는 나는 내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만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현재, 초침은 그저 평범하게, 그저 보통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는, 그저 그런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내 입가엔 작은 미소가 돋아났다가 이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완결]
[완결 인사]
감사합니다.
드렁컨66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닥터 김정민의 회귀와 관련된 사건들이 이어지는 의학 회귀물이었고, 무사히 완결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끝까지 성원해 주셔서, 그리고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 뵐 수 있도록,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드렁컨66 배상
< 완결 02: 운명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