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다들 성장하고 있음 (1)
핏 ― !
무언가 건물 위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후우우웅 ― !
뒤이어 불어오는 거센 바람.
“……?”
다행히 건물 위로 불었기에 길을 가던 사람들은 그저 조금 세게 바람이 부나보다 하고 느낄 뿐이었다.
쉬이이이익 ― !
태운이 가면을 쓴 채 건물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태운은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채 이동하고 있었다.
도심에서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칫하면 인근의 모든 사람이 마력에 노출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작에 생각해냈더라면…….’
태운은 가능했다.
피이이이잉 ― !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전력을 다해 신체를 강화한 태운의 몸뚱이가 거의 한줄기의 빛살처럼 나아갔다.
그럼에도 태운은 그의 등 뒤로 단 한 톨의 마력 입자도 남기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떠올렸어도 더 많이 살릴 수 있었는데…….’
태운이 다른 사건들과는 다르게 163빌딩 사건 앞에서 더욱더 큰 죄책감을 느낀 이유.
바로 마력 잔향 하나 없이도 전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떠올렸으니까.
그 비밀은 바로 태운의 세 번째 능력, ‘강력(强力)’에 있었다.
‘강력’의 힘은 결합하고 붙들어놓는 힘.
‘강력’은 어느 정도 주변의 것들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작용하는 힘의 범위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사실상 한번 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초특급 강력 접착제 정도로 봐도 무방했다.
163빌딩 초대형 화재 사고 당시 여의도로 향하면서 어떻게 사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던 태운은 ‘강력’이 보다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활용의 예시 중 하나가 ‘강력장’으로 그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든 것.
그리고 그 두 번째 예시가 바로 마력의 잔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렁 ―
빛살처럼 나아가는 태운의 피부가 간간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태운이 자신의 피부 표면에 얇은 강력장을 씌운 까닭이었다.
[강력피(强力皮)]
스륵 ―
전신의 피부를 고르게 감싸고 있는 강력피.
덕분에 태운의 몸에서 새어 나가던 마력의 잔향이 강력피에 붙들려 단 한 톨의 입자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태운의 마력 통제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마력의 잔향 하나 남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손으로 꽃을 감싼다고 하여 향기가 퍼지는 걸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강력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핏 ― !
1분도 채 되지 않아 서울에서 인천항까지 도달한 태운.
초음속에 진입하여 분속 30km가 넘는 엄청난 속도였다.
지금은 특임반장으로서 인천항에 발생한 A급 던전을 조사하러 온 것이었다.
투아아아앙 ― !
강력피를 해제하자 던전 앞에 도달한 태운의 사방으로 돌풍이 뿜어져 나갔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강력피의 외부에 붙들렸던 공기들이 단번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푸왁 ― !
파라라라라라 ― !
던전 입구 주변 일대에 델타조가 쳐놓은 접근금지선이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마구 휘날렸다.
접근금지선을 꽤 넓게 쳐놓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가까웠어도 전부 찢어져 날아갔을 터였다.
‘…아무 데서나 한 번에 제거하면 안 되겠네.’
163빌딩 화재를 진압했을 때 강력장에 조그만 구멍을 냈었던 걸 떠올린 태운이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주의하자.’
최근 사건으로 인해 경각심을 느꼈던 태운은 자신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매순간 더 깊이 고민하고 연구해 나가고 있었다.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눈앞에서 잃는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의 어깨 위에 얹어진 갖가지 책임감과 의무, 복수 등이 그로 하여금 더욱더 강해지라며 무게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힘에 대한 활용 방법을 점점 더 많이 찾아내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계속 강해지고 있는 태운이었다.
“일단… 일은 해야겠지.”
불과 얼마 전인 163빌딩 화재 사고 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태운이었지만,
슈룩 ―
던전에 홀로 입장하는 그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가 않아 보였다.
* * *
한 차례 장마가 지나간 8월 초중순.
“…….”
“…….”
맑은 하늘 아래, 모자와 마스크를 쓴 두 남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8월에다가 날씨는 맑았지만, 날이 그리 덥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색해!’
‘뭐, 뭘 해야 하지?’
두 사람의 정체.
바로 헌터 협회 알파조의 한기성과 유인하였다.
특임반장이 알파조의 일을 대부분 가져가 준 덕분에 알파조 3인은 퇴근이 있는 삶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네? 진짜 괜찮아요?
―얌마, 나 이태성이야. 괜찮으니까 둘이 쉬다 와!
이태성의 배려로 두 사람은 며칠간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러 나온 두 사람이었다.
‘데이트 때는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동안 했던 데이트라고 한다면,
정글형 던전에서 탐험 데이트.
동굴형 던전에서 동굴 데이트.
화산형 던전에서 등산 데이트.
사막형 던전에서 모래 데이트 등등….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B급 던전이 너무 넓을 때 셋이 따로 흩어지게 되면 이태성 몰래 만나 둘이 함께 다니는 정도?
그러니까 사실상 제대로 된 일반적인 데이트는 두 사람 다 처음이었던 것이다.
“…….”
“…….”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한 상황에 두 사람은 연인 사이임에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동안은 알아서 이야깃거리가 생겼었는데…….’
몬스터나 던전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게서 서로를 지켜주거나 했던 지난 나날들.
그동안 피와 땀으로 가득했던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은 일반적인 연인의 애정보다 전우애 적인 측면이 너무 컸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우애가 전혀 필요치 않은 상황이 갑자기 닥쳤으니 어색할 수밖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자 두 사람은 서로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돼!’
‘뭐라도 해야 해!’
결심을 세운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당황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미루었다.
“머, 먼저 말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민망했던 인하가 먼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기성도 사고가 마비된 건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야, 너부터 말해!”
“으, 응? 나부터? 어…….”
머릿속이 하얘진 인하가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성의 머릿속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지금까지 평범하게 잘 지냈는데 오늘은 대체 왜 이런 거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대고 대화를 했던 날들은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고작 환경이 뒤바뀐 정도로…….’
기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백은 어떻게 한 거지?’
고백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는 기성.
운전을 맡아준 델타조 직원과 이태성이 편의점에 간 사이, 두 사람은 캠핑카 안에 드러누워 있었다.
물론 피곤에 쩔어서.
―우리 어차피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은데 연애라도 할래?
―…그럴까?
화아아아악 ―
‘이, 이게 뭐야.’
새삼 기억을 다시 되짚어본 기성의 얼굴이 빨개졌다.
‘뭔 고백이 이래!’
생각해보니 두 사람의 연애는 진짜 얼렁뚱땅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선 데이트랍시고 같이 던전 조사를 하고 캠핑카 안에서 피곤에 절여져 서로 기대어 잤을 뿐.
심지어 그 흔한 뽀뽀 한번 해본 기억조차 없었다.
기성은 벌써 2년이 넘었건만 일반적인 연인은커녕 자신과 그녀와의 사이가 그저 편한 친구 사이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울컥 ―
갑자기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억울했으니까.
‘그동안 인하한테 해준 게 뭐지?’
희대의 로맨티스트인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는 행복해하셨고,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도 행복해하셨다.
애정이 만들어낸 선순환.
그리고 어린 기성은 자신도 나중에 커서 연인이나 아내에게 아버지처럼 해주고 싶다고 생각해왔었던 것이다.
“후우…….”
기성은 여전히 머릿속이 하얘진 채 두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을 어색해하는 인하의 모습 자체가 기성의 마음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기성은 차근차근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동갑이지만,
‘반년 먼저 태어난 내가 정신 차려야지!’
부릅!
기성은 인하에게 오빠처럼 여겨지고 싶었으니까.
아, 친오빠 말고.
다른 의미의 믿음직한 오빠 말이다.
덥석 ―
기성이 먼저 인하의 손을 잡았다.
“어……?”
놀란 인하의 입이 벌어졌다.
피곤에 쩔어 기댈 때와는 다른 스킨십의 찌릿함이 마주 잡은 두 손을 타고 흘렀다.
“따라와.”
갑자기 인하의 손을 끌고 어디론가 앞서 걸어가는 기성.
당황한 인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어, 어디 가는 건데?”
기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뷔페.”
“어?”
인하가 두 눈을 끔뻑였다.
“가, 갑자기?”
“생각해보니까 네가 뭐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거든.”
여전히 기성은 앞만을 바라본 채 걸어가고 있었다.
“2년 동안 실속 없이 보냈으니까 얼른 제대로 알아야겠어. 내 여자친구에 대해.”
“……!”
크게 뜬 인하의 두 눈이 살짝 붉어졌다.
좀 더 연인답게 지내고 싶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애초에 혼자서 결혼까지도 생각했던 인하였다.
하지만 서로 매일매일 너무 힘들게 지내고 있음을 알았기에 속으로 꾹꾹 눌러왔던 그녀.
울컥 ―
찰싹.
인하는 자신의 손을 잡고 앞서가는 기성의 팔을 바짝 끌어안아 그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뭐, 뭐야?”
나름 상남자처럼 인하를 끌고 가던 기성은 갑자기 자신의 팔에 찰싹 달라붙는 인하의 행동에 쑥맥처럼 당황했다.
“앞에 봐, 바보야. 나 앞에 안 보고 계속 이러고 있을 거니까. 나 넘어지게 하면 죽어.”
“아, 알았어.”
화악 ― !
서로 딱 달라붙은 채 걸어가는 두 남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을 비스무리한 늦여름 어느 날.
사귄 지 2년이 넘은 두 사람이 마침내 연인으로서 뒤늦게나마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 * *
경기도 남쪽 광교산 어딘가.
콰앙! 콰앙!
산 깊숙한 곳에 지어진 꽤 커다란 건물 안에서,
콰아아앙!
두 사내가 거칠게 부딪히고 있었다.
“허억… 허억…….”
백발의 사내, 정호백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확실히 일반형 능력자의 마력폭주를 인간 상태로 버티긴 힘드네.”
그리고 그와 마주 선 또 한 명의 짧은 까까머리의 사내.
“후아아아… 아이고 형님아, 나 죽겠소.”
대한민국의 7명뿐인 S급 헌터 중 하나이자 백호길드의 또 다른 S급 헌터인 구정태가 허리를 두들기며 서 있었다.
구정태가 앓는 소리를 하자 정호백은 꽤나 열이 받았는지 눈썹을 씰룩이며 삿대질을 해댔다.
“야, 이 새X야! 두들겨 맞은 건 난데 왜 네가 힘들다고 지X이야?”
“때리는 입장도 좀 생각해주쇼, 형님.”
쿵 ― 쿵 ― 쿵 ―
전신의 핏줄이 바짝 선 구정태.
그의 전신에서는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매 순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반형 헌터의 3차 각성 능력.
마력폭주가 발현된 모습이었다.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백호길드의 외부수련장.
마력이 새어나가지 않게 튼튼하게 지어놓은 외부수련장은 S급 헌터가 작정해서 외벽을 노리고 공격하지 않는 이상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 사람은 가끔씩 대련을 벌이곤 했다.
“아니, 같은 S급인데 저만 3차 각성 능력 쓰고, 형님은 2차 각성 능력까지만 쓰면 형님이 발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요?”
“뭐 발려? 당연해? 이 새X가!”
콰앙!
바닥을 박찬 정호백의 신형이 단번에 구정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길드장한테 못 하는 말이 없지!”
부아아아앙 ― !
횡으로 휘둘러진 정호백의 주먹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휙 ―
그러나 구정태는 그 주먹을 가볍게 피해내며 정호백의 몸통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요? 이거 몸에 무리 간다고!”
퍼어어엉!
정호백의 가슴에 손을 댄 구정태가 손바닥으로 발경을 구현했다.
“커헉!”
피를 잔뜩 토하며 날아가는 정호백.
쿠당탕탕! 콰앙!
물수제비마냥 바닥에 튕겨지다 벽에 처박히는 꼴이 꽤나 볼만했다.
그때,
비틀.
정작 공격을 가했던 구정태의 신형도 슬슬 비틀대기 시작했다.
‘아씨… 이제 한계인 것 같은데……?’
슈루룩 ―
전신에 돋아났던 핏줄이 사그라들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거친 위압감이 사그라들었다.
“커헉… 야이 씨… 나 아직 안 끝났어……!”
구정태가 마력을 거두자 벽에 기대고 앉아있던 정호백이 몸을 덜덜 떨며 일어나려 애썼다.
“아오, 형님! 적당히 하쇼! 할 거면 전력으로 제대로 하던가! 혼자 핸디캡 걸고 뭐 하는 거요? 나도 S급 헌터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구정태는 살짝 화가 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뭐 어디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꼬리 말고 도망이라도 친 거요? 왜 갑자기 상대보다 약한 상태에서 싸워보고 싶다고 난리를…….”
폭포수처럼 짜증을 내뱉던 구정태는 정호백의 모습을 보고 돌연 말끝을 흐렸다.
“…….”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호백.
좀처럼 볼 수 없는 그의 나약한 모습에 구정태가 악의 없이 쐐기를 박았다.
“와, 진짜로 꼬리 말고 토꼈소?”
“닥쳐, 이 새X야!”
쿠아아아앙!
순식간에 백호로 변신한 정호백이 이빨을 드러내며 구정태에게 달려들었다.
“히익! 자, 잠깐만! 나 마력폭주 풀렸…….”
콰아아아앙!
두 사람의 연이은 충돌에 외부수련장 건물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짹짹!
그래도 훌륭한 방음 설비 덕에 오늘도 산속은 그저 평화로웠다.
우르릉 ―
진동이 살짝 울리긴 했지만 말이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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