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문제를 모르는 게 문제임 (1)
연옥.
생전의 죄가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고 판단된 죄인들이 천국에 이르기 전 정화되고 단련을 받는 곳을 일컬었다.
즉,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
최대한 많은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우주의 자비로움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자 증거였다.
그리고 그런 연옥을 관리하는 총 관리장, 라파엘라.
그녀는 루시퍼, 미카엘, 가브리엘과 함께 사대천사로 불리는 대천사이며, 정화와 치유를 관장하기에 연옥의 총 관리장으로 지내고 있었다.
―어서 와요. 루시퍼.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나? 라파엘라.
라파엘라는 느닷없이 찾아온 루시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평소 과도하게 엄격한 정의를 부르짖는 루시퍼를 부담스러워하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그의 열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그녀였다.
―연옥까진 무슨 일이죠?
―별거 아니야. 그냥 연옥 상황이 궁금해서 왔지. 정화 작업은 잘 되어가고 있나?
―음… 그럭저럭? 뭐 평소와 별다를 건 없어요.
라파엘라는 루시퍼의 말에 대답하며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참 별일이네요. 루시퍼가 연옥에 관심을 가질 줄은… 평소 연옥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싫어했지. 지금도 싫어해. 하지만 싫어하는 것과 관심을 두는 건 별개잖나?
―흐음… 그런가요. 뭐, 어쨌든 오랜만에 만나서 좋긴 좋네요.
라파엘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정화의 대천사 라파엘라 그리고 심판의 대천사 루시퍼.
신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두 존재는 존재 의의부터 상극을 이루고 있었다.
라파엘라는 가벼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연옥을 관리하고자 했으나, 루시퍼는 가벼운 죄인 따위는 없다며 연옥을 없애고 모든 죄인을 지옥에 넣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다행히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라파엘라가 연옥을 관리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나, 그 이후 루시퍼는 연옥의 연 자도 듣기 싫다며 연옥을 멀리했었다.
―후후후… 철이라도 든 건가요.
라파엘라는 드디어 루시퍼가 연옥의 가치를 알아준 것 같아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싸웠던 친구가 먼저 화해하자며 손을 내민 것 같은 두근거림이 라파엘라의 심장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때, 루시퍼가 물었다.
―지난 일백 년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 존재가 몇이나 되지?
―일백 년이요? 음… 아마 없을걸요.
―…없다고?
라파엘라의 대답에 루시퍼는 살짝 놀란 듯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라파엘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죄를 정화해 없는 일로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연옥에서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죗값도 추가되니 연옥의 죄인들이 천국에 올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천국으로 올라가는 존재는 수천 년에 한 번 정도 나온다고요.
―…그렇게까지 해서 연옥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루시퍼의 의미심장한 말에 라파엘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수천 년에 한 번이지만, 그래도 천국에 올라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들을 구원해야죠.
―그 극소수를 위해 죄인들을 벌하지 않고 연옥에 붙잡아둔다는 건가.
―…루시퍼? 오늘따라 이상하군요. 대뜸 찾아와서는 이상한 말을 늘어놓… 커헉!
라파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루시퍼의 손이 라파엘라의 명치를 꿰뚫었다.
주륵 ―
루시퍼의 기습에 당한 라파엘라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라파엘라. 아무리 생각해도 연옥은 필요가 없어. 죄인들을 정화하느라 이런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계속할 바엔…….
우둑……!
―차라리 제물이 되어 중간계의 선량한 이들을 구원하는 게 낫다.
우두두둑 ― !
라파엘라의 명치를 뚫은 루시퍼의 손이 그대로 치솟아 그녀의 뇌수를 꿰뚫었다.
―꺼억……!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존재해왔던 대천사 라파엘라가 그렇게 어이없이 절명하고,
번뜩!
연옥의 지배권을 강탈한 루시퍼는 회색빛 안광을 번뜩이다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뒤,
―뭣이라?!
천계가 발칵 뒤집혔다.
* * *
―연옥을 마계에 빼앗겼소.
―……!
천계의 최고신들이 긴급회동을 가졌다.
주제는 마계의 연옥 탈취 건.
모든 최고신의 시선이 옥황상제와 천신을 향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연옥은 분명 라파엘라가 맡고 있었을 터!
그리스 로마 신화체의 최고신, 제우스가 호통을 쳤다.
연옥을 지키던 자가 천신의 수하인 라파엘라였고, 연옥의 관리를 부탁했던 자가 바로 옥황상제였으니까.
연옥을 마계에 탈취당한 모든 책임을 크리스트교 신화체와 도교 신화체에 떠넘기려 했다.
제우스가 크게 흥분하자 힌두교 최고신, 브라흐마가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시게. 지금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그렇지 않은가! 오딘?
브라흐마가 자신을 말리자 제우스는 자신과 성정이 비슷한 북유럽 신화체의 최고신, 오딘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오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지… 이런 큰일일수록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뒤탈이 없을 거야. 마음에는 안 들지만 나는 제우스의 말에 동의하네.
그런 오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다른 최고신들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
―그만하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천신이 입을 열었다.
꿀꺽 ―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한 천신이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자, 다른 신화체의 최고신들은 은근히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켜댔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그러니 무의미한 말다툼은 그만둬.
천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자,
―크흠…….
―그렇다면야 뭐…….
대충 만족한 듯한 제우스와 오딘이 헛기침을 하며 한발 물러섰다.
천신은 피곤한 듯 이마를 짚으며 이랑을 시켜 이번 사태를 조사한 옥황상제에게 물었다.
―설명을 좀 해주겠나. 옥황. 마계에서 어떻게 연옥을 강탈할 수 있었던 건지. 연옥에는 천계의 장벽이 있을 터. 애초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텐데…….
―…루시퍼.
옥황상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마자 천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뭐라고?
―루시퍼라네. 라파엘라를 연옥을 강탈한 자가. 루시퍼는 연옥을 강탈한 뒤 그 지배권을 바알에게 넘겼어.
―이런 미친!!
쾅!
유태교 신화체의 최고신, 야훼가 크게 놀랐는지 자리를 박차고 요란하게 일어났다.
―또 그쪽인가! 천신! 대체 부하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
천신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연옥을 관리하는 자도 크리스트교 신화체, 그것을 강탈하여 마계에게 넘긴 것도 크리스트교 신화체의 존재가 벌인 일이었으니까.
천신은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이마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퍼… 결국 네가……!
―그래서? 바알은 연옥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거지?
이슬람교 신화체의 최고신, 알라가 묻자 옥황상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까진 모르지. 이미 마계의 장벽이 두껍게 연옥을 감싸고 있다고 하는군.
으드득 ― !
오딘이 이를 갈며 자신의 신기, 궁니르를 꺼내 들었다.
―내가 당장 이 자식들을……!
―진정하게, 오딘. 혼자서 마계와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못할 건 또 뭔가! 악마들 따위야 나 혼자서도……!
오딘이 크게 흥분하자 제우스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바알을 이길 수 있다고? 그 괴물을?
―뭐……?
오딘의 핏발 선 눈이 제우스를 향했다.
―유피테르… 네놈, 지금 해보자는 거냐?
―크큭! 갑자기 이명을 부른다고? 오냐, 오티누스! 한판 뜨든가!
쿠구구궁 ― !
최고신 중 가장 다혈질인 두 신이 기세를 일으키자 최고신들의 회의장인 만신전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초로한 노인 하나가 일어나며 두 사람을 말렸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매번 만나기만 하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입니까.
노인의 말에,
―뭐? 추태?!
제우스와 오딘이 발끈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아주 그냥 자기들 성질 더럽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매번 질리지도 않습니까?
쿠구구구궁 ― !
노인의 말에 제우스와 오딘의 기세가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 그만하게! 환인! 더 화를 부추겨서 어쩌자는 게야!
불교 최고신, 석가여래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노인을 말렸다.
그러나 한국 신화체의 최고신, 환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싸움을 지들만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다들 열 받는데 참고 있구만. 본인들만 성질 있다고 꽥꽥대는데 계속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저 둘 때문에 매번 최고신 회의가 엉망이 되지 않습니까?
환인의 팩트폭행에 브라흐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한국 신화의 최고신인가… 상대방 도발하는 것만큼은 압도적이란 말이지!’
한국인의 DNA는 모두 환인에게서 물려받은 것.
도발과 팩트폭행의 시조답게 환인은 거세게 두 신을 몰아붙였다.
―거, 힘센 노친네 두 분! 둘 다 힘센 거 잘 알았으니까 그만 진정하고 앉으시죠. 두 분 때문에 회의가 진행되지 않지 않습니까? 막말로 두 분이 덤벼도 바알 하나 못 잡는 거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바알한테 싸움 걸 것도 아니면서 괜히 폼 잡지 마시고 당장 처앉으세요.
삐질삐질.
제우스와 오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서 더 자존심을 부렸다간 진짜로 둘이 손잡고 마계로 쳐들어가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다른 대악마들이라면 모를까, 바알은 진짜로 너무 강했다.
이미 예전에 바알에게 한 번 쫓겨 달아났던 적이 있었던 제우스는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제자리에 앉았다.
―크흠… 뭐, 일단 사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니까…….
―…회의 때문에 참는다.
오딘까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자, 환인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작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럼 다시 회의를 시작해보실까요?
그렇게 다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재개된 최고신 회의.
기나긴 회의는 결국,
―그럼 우선 이 사태의 원인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하겠소.
루시퍼를 체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 * *
그 시각, 연옥.
등 뒤의 날개가 회색빛으로 물든 루시퍼는 바알에게 연옥의 지배권을 넘긴 뒤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루시퍼는 연옥에 자신의 마기를 퍼뜨리는 바알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루시퍼에게 연옥은 어차피 모두 지옥에 떨어져도 무방할 이들만이 존재하는 곳.
어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스스스슥 ―
바알의 검보랏빛 마기가 연옥 전체를 감쌌다.
그러자,
―으윽!
이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드득 ― ! 우득 ― !
연옥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이 괴상하게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옥은 하나의 커다란 세계.
연옥에 존재하는 갖가지 다양한 환경에 맞게 영혼들이 변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우드득 ― !
풀숲에 사는 곤충부터 시작해서,
쿠드드득 ― !
거대한 괴수까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마물들이 탄생한 것이다.
―중간계를 암암리에 지배하라 했나?
연옥의 모든 영혼을 변형시킨 바알이 루시퍼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쿠구구궁 ― !
연옥이라는 세계 전체가 수천, 수만… 아니, 수도 없이 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크오오오오오!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나뉜 연옥 속에 갇힌 마물들이 울부짖었다.
―이것들이 그 미끼가 되어줄 것이다.
바알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지잉 ―
허공에 하나둘 차원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 미끼를 던져볼까?
중간계에 던전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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