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문제를 모르는 게 문제임 (2)
마신성 안.
기다란 테이블 양 끝에 바알과 루시퍼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천계에서는 벌써 마기를 중화하기 위해 중간계에 신력을 불어넣었더군. 덕분에 인간들은 두 힘이 중화된 마력이라는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모양이야.
―…그럼 일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 마력은 두 힘 모두와 상생 가능하다고. 마기가 중화된 내 계약자도 여전히 잘 활동하고 있고 말이지.
바알은 이를 드러내며 기껍다는 듯이 웃었다.
―그 계약자라는 자… 그 녀석은 믿을 만한 존재인가? 누누이 말했듯 내 조건은 마계가 중간계를 암암리에 지배하는 것이다. 대놓고 지배해서는 선량한 이들을 보호할 수…….
―쯧쯧… 의심 하나는 대악마 저리 가라군. 계약자는 이미 속여두었다. 대의명분을 부여해두었거든.
―대의명분?
루시퍼의 회색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뭐, 대충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녀석들의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말했다.
―대충…? 그런데 그걸 믿는다고?
루시퍼의 의문에 바알은 킥킥대며 웃음을 흘렸다.
―그럼 뭐 중간계의 존재들이 똑똑할 줄 알았나? 놈들은 결국 짐승의 한 종류에 불과해. 겉으로는 고상한 척 똑똑한 척 다하고 있지만 실상은 순 멍청이들뿐이지.
―…….
―어쨌든 나는 네가 말한 일을 시작했다.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루시퍼.
바알의 두 눈에 검보랏빛 안광이 아른거렸다.
―천계의 신화체 하나를 먹게 해준다고 했지?
―…그렇지.
루시퍼의 대답에 바알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네놈은 한낱 대천사. 최상급 신들이 우글대는 신화체를 어떻게 먹게 해준다는 거냐?
―…최상급 신들이 우글대지 않는 신화체라면?
―……?
루시퍼의 말에 바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설마……?
루시퍼의 목표를 알아차린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지금 네놈이 소속된 신화체를 먹게 해준다는 거냐?
바알의 말에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큭… 크크큭… 크하하하하하핫! 이런 미친놈! 크하하하하핫!
루시퍼가 속한 신화체는 바로 크리스트교 신화체.
다른 신화체와 달리 신격에 이른 이라고는 유일신인 천신과 그의 사도이자 아들인 예수 단둘만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트교 신화체가 결코 약한 것은 아니었다.
신화체 속 유일신인 만큼 천신은 천계의 그 어떤 신보다도 강력했고, 그를 지키는 남은 두 명의 대천사와 다른 천사병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신화체 소속인 루시퍼는 크리스트교 신화체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었다.
―현재 천계의 신들과 천사들이 나를 쫓고 있다. 일단 나는 자수하여 천계로 잡혀 들어갈 거야.
―크크큭… 그래서? 그다음은?
루시퍼는 회색빛으로 물든 자신의 날개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 안에서 마기로 변질된 신성력들을 모두 네가 강제로 제어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으로 꽁꽁 숨겨. 그러면 아직 남은 신성력들에 의해 날개 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루시퍼의 두 눈에 회색빛 안광이 어른거렸다.
―매일 정해진 시간, 우리는 천신의 신혈이 섞인 포도주를 받고 우리는 거대한 포도주병에 각자의 피를 한 방울씩 넣는다. 그리고 그 포도주는 천신께서 드시지.
―…뭐야? 계약이라도 하는 건가? 쓸데없이 피는 왜…….
―모든 존재가 천신 아래 하나라는 의미를 매일 상기하는 의식일 뿐이다.
―크큭… 미친놈들. 그러면 농축시킨 마기를 그 포도주에 떨어뜨릴 작정인가?
바알의 말에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지고지순하며 맑은 존재. 평소라면 그분의 신성력으로 인해 마기 따위는 근처로 갈 수조차 없겠지만 그때만큼은 달라. 천신은 모든 이의 피가 담긴 포도주를 그대로 받아들이시니까.
―그렇다면…….
―그래.
루시퍼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내 피가 들어간 포도주를 마시는 순간… 천신께서는 타락하실 것이다.
선량한 이들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대의로부터 시작된 루시퍼의 계획.
그는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번뜩!
은은한 광기가 가득한 루시퍼의 두 눈이 흐릿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 * *
쩔그럭 ― 쩔그럭 ―
얼마 뒤, 천계로 돌아가 자수한 루시퍼는 양 발목에 신성력을 봉인하는 금구를 찬 채로 천사병을 따라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날개가 묶인 루시퍼의 처지는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
쩔그럭 ― 쩔그럭 ―
그래도 하얗게 돌아온 날개 색은 그가 정말 죄를 뉘우치고 자수하러 온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쩔그럭 ― 쩔그럭 ―
척.
천사병의 안내에 따라 커다란 문 앞에 선 루시퍼.
―드, 들어가라.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돌아온 상사를 안내하느라 잔뜩 긴장한 천사병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쿠구궁 ― !
육중한 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천천히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
쩔그럭 ― 쩔그럭 ―
루시퍼는 홀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대전.
그 커다란 대전 끝에는 왕좌가 아닌 하얗고 커다란 방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가부좌를 튼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한 노인.
스윽 ―
노인, 천신이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왔느냐.
천신의 목소리가 따스하게 대전 안을 울렸다.
―…예. 천신이시여.
루시퍼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루시퍼를 보며 천신이 물었다.
―어찌하여 더 오지 않고 그 구석에서 무릎을 꿇느냐.
―제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자수하여 천계로 돌아온 것이 아니더냐?
―죄를 뉘우치고 자수했다고 한들, 제가 죄인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루시퍼의 단호한 대답에 천신은 흐릿하게 웃었다.
―너는 너에게도 그리 엄격하구나.
―…정의는 모두에게 공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공평해야 한다라…….
천신은 한숨이 살짝 섞인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공평함 때문에 라파엘라가 죽었구나.
―…….
―그리고 수많은 영혼이 악마들에게 고통받게 되었지.
―…죄송합니다.
쿵 ―
루시퍼는 대전의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었다.
주륵 ―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단 한 번의 찧음으로 루시퍼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못난 저의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수많은 이가 고통을 받게 되었나이다. 부디 저를 영혼까지 멸하시어 타락천사의 말로를 본보기 삼으소서.
―…꽤나 힘든 요구를 하는구나.
천신은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네 날개는 이미 빛을 되찾았다. 타락천사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너는 평범한 천사가 아니더냐?
―하지만……!
―그만하거라.
그그긍……!
천신의 표정이 굳어지며 루시퍼의 몸이 무거워졌다.
―모든 존재는 실수를 한다. 신들도, 최고신들도 예외는 없어.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반복하지 않는 일이다.
―…….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느니라. 하지만 그래도 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죽은 라파엘라의 몫까지 그리고 지금 악마들에게 고통받고 있을 영혼들을 위해 그 한 몸을 불사르거라.
―…예. 지대한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천신이시여.
루시퍼의 진심 어린 태도에 천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스륵 ―
천신의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루시퍼의 온몸을 묶고 있던 구속구들.
순식간에 자유의 몸이 된 루시퍼는 풀린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거라. 가서 다시 네 할 일을 하거라. 돌아와줘서 기쁘구나.
―…예, 아버지 천신이시여. 그럼…….
루시퍼가 이만 물러가기 위해 천신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그때,
―아, 그리고.
천신이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라파엘라가 다시 태어났다고 하더구나. 모든 격을 잃긴 했지만 다시 아기천사에서 시작할 것이야. 너의 잘못이니 네가 책임지고 돌봐주거라.
―…예.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보듬는 자애로운 신, 천신.
루시퍼는 그런 천신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천신이시여.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저는 그런 당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루시퍼는 그런 천신을 가장 혐오하는 천사였다.
그렇게 얼마 뒤,
쨍그랑!
―크아아아아아아!
천신이 타락했다.
* * *
“루시퍼여… 정녕 네가 원하던 것이 이것이었느냐……!”
염라의 바로 옆에 매달려 있던 한 젊은 청년이 검보랏빛 마기에 휩싸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염라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예수…! 정신 차리게! 자네까지 잘못되면……!”
예수마저 잘못되면 크리스트교 신화체는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아아… 아버지시여… 어찌 그리 가셨나이까……!”
예수는 이미 거대한 절망에 잡아먹힌 뒤였다.
루시퍼의 피를 마시고 타락하여 홀로 천계 전체를 부수려 했던 천신.
그리고 그런 천신을 막는 과정에서 다른 최고신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신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계 최강의 존재인 그를 막느라 모든 신들이 지친 상태였고, 곧이어 들이닥친 대악마들의 공격에 신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만들어낸 루시퍼는,
―움직이지 않는 정의는 그 자체로 대죄이니……!
―라파엘라아아아아!
끝까지 그다운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 갓 태어난 라파엘라와 함께 스스로를 멸했다.
“어디서부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예수의 타락을 무력하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염라의 두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로의 욕심을 경계해 중간계에 개입하지 말자고 합의했다.
모든 것은 중간계의 존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
생전의 죄는 그저 사후에 처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들은 그 사후 처벌에 대해 어떠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신들에게 피조물들이 겪는 생과 죽음(死)을 공감하기란 어려웠으니까.
“조금 더… 조금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것인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미친 사람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염라.
그렇게 모든 신들이 타락해가는 가운데,
“…틀렸어.”
염라의 모든 기억을 읽은 존재가 하나 있었다.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어떤 남성의 목소리에 염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마신성 상공에 떠 있는 한 청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신이라는 작자가 아직도 뭐가 잘못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
태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염라의 귓가 바로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번뜩!
염라를 내려다보는 태운의 두 눈엔 어느새 오색찬란한 빛깔의 안광이 담겨 있었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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