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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293화 (293/300)

293화. 외전 ― 오작교보단 청룡교임 (3)

띵띵~ 띠리링~

분위기 좋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별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런 음악 한가운데에서,

“…….”

어색한 두 남녀가 얼굴을 붉힌 채 애꿎은 테이블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런 미친 형 놈이……!’

남자, 호성은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어제의 일을 상기했다.

천용에게 쓴소리를 잔뜩 들으며 길드장실에서 내쫓기고 며칠 뒤였던 바로 어제.

호성은 천용에게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너도 선 볼래?}

―…갑자기 연락해서 뭔 헛소리야.

호성은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그날 천용이 했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했다.

호성과 혜지는 서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각자 어떤 행동을 하든 제3자가 끼어들어서 어떤 행동을 하든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일이 이성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지 않은가?

적어도 아는 사이에서, 그것도 친한 동생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선 자리를 알아봐주는 것이 맞는 일인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여전히 호성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상태였다.

―{아니, 억울하면 너도 선을 보라 이거지.}

그러나 천용은 그런 호성의 속도 모르고 딴소리를 해댔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끊어. 나 바빠.

―{바쁘긴 무슨. 그래봐야 네가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TV밖에 더 봐?}

마치 호성의 집에 CCTV라도 달아놓은 듯 그의 생활 패턴을 훤하게 꿰고 있는 천용이었다.

뜨끔.

그런 천용의 말에 속이 찔린 호성은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어쨌든 바쁘다고.

―{그래. 그렇게 맨날 되지도 않는 짝사랑이나 하면서 평생 그렇게 살아. 그사이에 혜지 씨는 다른 남자랑 잘돼서 신혼여행 떠나시겠지~}

―아니, 근데 이 형이……!

―{근데 너 연애해본 적은 있냐? 하긴, 너 같은 쑥맥이 연애를 해봤을 리가 없지. 아니 뭔 삽십 대 중후반인 놈이 연애도 안 해보고, 소개팅도 안 해보고, 그렇다고 대학을 간 것도 아니니 미팅도 안 해봤을 거고… 도대체 해본 게 뭐가 있냐?}

울컥 ―

천용의 계속된 팩트폭력에 호성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 알았어… 한다고! 하면 되잖아! 이 망할 자식아! 그만 뼈 때려!

결국 천용의 닦달에 백기를 들고 만 호성.

―{장소랑 시간 문자 보낸다.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

툭 ―

천용은 기다렸다는 듯이 통보하고서 그대로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아씨…….

계획에도 없었던 갑작스러운 선 자리에 크게 당황한 호성.

그렇게 멍한 상태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그때,

우웅 ―

천용에게서 문자가 왔다.

호성은 천용의 문자를 확인하고,

―…내일이라고?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 * *

그렇게 다시 레스토랑 별실 안.

호성과 혜지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음식만을 깨작깨작 먹고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모른 상태로 나온 두 사람.

그런데 갑자기 직장 동료가 떡하고 나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아… 대체 무슨 말을…….’

갑작스레 마주친 그의 짝사랑.

게다가 그 상대가 평소보다 훨씬 더 예쁘게 하고 나타났으니 오죽 긴장했으랴.

달달달…….

음식이 차려진 식탁 밑으로 호성의 두 다리가 소리 없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은 혜지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천용이 소개해준다는 사람이 부길드장인 호성이었을 줄이야.

물론 호성이 괜찮은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혜지는 단 한 번도 그가 자신과 이성적으로 엮이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잔잔한 클래식만이 흐를 뿐, 적막만이 가득하던 별실.

지잉 ―

그 적막을 깨는 진동음이 호성의 주머니 속에서 들려왔다.

슬쩍.

식탁 밑으로 살짝 폰을 꺼내보는 호성.

폰을 확인해보니 천용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이렇게 해줘도 놓쳐? 그럼 걍 포기하고 평생 혼자 살아. 새꺄.]

뭔가 천용답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말투.

하지만 그 안에는 호성에 대한 친근함과 응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호성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다못해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던가!’

지금 그는 가슴이 너무 벌렁거리는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상태였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호성이 혜지의 눈치를 흘깃흘깃 보는 그때,

“저…….”

결국 참다못한 혜지가 먼저 운을 떼었다.

“부, 부길드장님이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혜지도 많이 긴장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말에 호성도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뻣뻣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그, 그러게요. 저, 저도 혜, 혜지 씨가 나올 줄은…….”

“마, 많이 실망하셨죠?”

혜지의 말에 호성의 정신이 번쩍 뜨여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분위기를 이대로 흘리는 것은 그녀에게 실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호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혜지는 얼굴을 감추려 앞머리를 내리면서 말했다.

“길드에서는 거의 매일 꾀죄죄한 상태로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많이 보셨던 부길드장님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도 되게 부끄럽네요. 죄송해요. 더 나은 분을 기대하고 나오셨을 텐데…….”

거의 자기 비하에 가까운 혜지의 말.

그런 그녀의 말에 호성은 무언가 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패기와 용기가 그의 전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지금 되게 만족하는데요.”

“…네?”

“저는 좋다고요.”

호성과 혜지의 시선이 테이블 한복판에서 한차례 맞부딪쳤다.

묘하게 타오르고 있는 호성과 두 눈을 마주친 혜지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럴 리가요. 괜히 저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그래도 제가 평소에 보여드린 모습이 있는데…….”

“평소 모습이 어때서요?”

스륵 ―

호성의 두 다리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명(?) 같은 것이 호성의 심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

‘이 자리, 무조건 성공시킨다……!’

안면근육의 긴장이 풀리면서 호성의 표정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은은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홀짝 ―

고급스러운 유리잔에 담긴 물로 입술과 입안을 축인 호성의 행동에 조금씩 여유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이 맛있네요.”

나이프로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먹으며 호성이 말했다.

“스테이크 좋아하세요?”

호성의 본격적인 소개팅이 시작되었다.

* * *

호성의 노력 덕에 두 사람의 식사 자리는 뻣뻣한 분위기에서 꽤 유연한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

굉장히 고급스럽고 음식 맛도 좋았지만 평소 다니는 느낌의 식당이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긴장했는지 레스토랑에서 나오자마자 굳은 몸을 풀기 시작했다.

뚜두둑 ―

두 사람의 몸에서 동시에 뼈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식 ―

식사를 하며 한결 편안해진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흘렸다.

“많이 긴장하셨었나 봐요?”

“부길드장님은 어떻고요.”

꽤 편안한 분위기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띠게 했다.

호성은 이 기세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혜지에게 다음 코스를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잔…하실래요?”

“술이요? 어떤…….”

호성은 대충 방금 전의 레스토랑 분위기를 떠올리며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잠시만요. 근처에 좋은 와인바 같은 곳이 있을 텐데…….”

와인바를 다녀보지 않은 호성으로서는 아는 곳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선 자리에 나올 때 2차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나왔던 호성이었다.

틱 ― 티딕 ―

덜덜덜…….

갑자기 혜지를 기다리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호성은 다시 긴장했는지 핸드폰을 쥔 두 손을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아씨…….’

손가락까지 떨리는 바람에 자꾸만 오타가 생겨났다.

호성은 손가락을 마력으로 강화하여 떨리지 않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속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러던 그때,

“저… 부길드장님.”

혜지가 입을 열었다.

“…네, 네?”

그새 또 긴장하기 시작한 호성이 말을 더듬으며 혜지를 바라보았다.

혜지는 그런 호성을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아는 술집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거기로 가실래요?”

* * *

혜지가 아는 술집은 작은 호프집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호프집 알바생이 두 사람의 앞에 500cc짜리 생맥주 두 잔을 놓고 사라졌다.

안주로는 간단한 먹태와 땅콩.

호프집에서의 혜지는 한층 더 편안해 보였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요. 아까 같은 고급 레스토랑은 저랑 잘 안 맞는다니까요?”

“하하하… 그런가요.”

호성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침울한 기색을 숨겼다.

‘나랑 여기에 온 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거겠지……?’

여자가 편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리 관심이 없을 때라고 ‘글’로 연애를 배웠던 호성이었다.

그랬기에 혜지가 지금 호프집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있는 것은 자신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인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묘하게 침울해 보이는 호성의 표정에 혜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부길드장님…? 왜 그러세요?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혹시… 호프집 싫어하세요?”

혜지의 질문에 호성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벌컥 ― 벌컥 ―

순식간에 맥주의 절반을 비운 호성이 입과 코 안에 감도는 술향을 빌려 조심스레 진심을 드러냈다.

“그건 아니고… 그냥 조금 슬프네요.”

“…뭐가요?”

“혜지 씨는 제가 딱히 남자로 보이지는 않으시죠?”

끔뻑 ―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혜지는 조금 놀랐는지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야… 뭔가 너무 편해 보이셔서…….”

호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기어들어가기 시작하자 혜지는 그의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딱!

“……?”

“저기요. 민호성 씨. 정신 차리세요.”

레스토랑에서와 달리 어느새 주도권이 뒤바뀐 두 사람.

아까와는 정반대로 이번엔 호성보다 혜지 쪽이 여유가 더 넘치고 있었다.

“제가 부길드장님을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원래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는 잘 보이려고 하지 않나요? 조금 불편해도 애를 쓴다거나…….”

호성의 물음에 혜지는 맥주를 마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저는 편한 사람이 좋은데.”

“…네?”

호성의 두 눈이 끔뻑거렸다.

그런 호성을 바라보며 혜지는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편한 사람이 더 좋다구요. 그렇게 애써서 뭐 해요? 결국 시간 지나면 다 드러나는데. 꾸며진 모습은 결국 나중에 실망으로 다가오기 쉬워요. 저는 저 스스로나 상대방이 서로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질끈.

혜지는 가방에서 꺼낸 머리 끈으로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묶어 올렸다.

탁.

길드에서 보여주던 모습처럼 똥머리로 바뀐 그녀의 모습.

“에고, 안경은 안 가져왔네요.”

혜지는 렌즈까지 빼려다 안경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서 두 손을 다시 내렸다.

거치적거리는 머리가 올라가며 한결 편해진 그녀의 표정.

혜지는 그렇게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호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길드… 아니, 호성 씨.”

“…예.”

“저… 솔직히 평소에 호성 씨를 남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네.”

“근데 오늘 만나고 조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사실 호성 씨처럼 성격 좋고, 능력 좋은 남자가 드물다는 거.”

“……!”

호성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꿀꺽 ―

혜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의 목뒤로 마른침이 꿀꺽 꿀꺽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혜지가 다음 말을 내뱉는 순간,

“좀 급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저랑 천천히 가보실래요? 썸타는 것부터 천천히.”

호성의 고개가 미친 듯이 끄덕여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3주 후.

근 10년간 이어진 호성의 짝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천용은,

피식 ―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애 소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길드장님!”

길드원들의 소개팅 요청이 물밀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

천용은 곧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을 후회했다.

협회 직원이 너무 강함

— 글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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