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화 (2/1,132)

< -- 2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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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부터 너희들 검술 수업은 내가 한다."

다음날 아침 조회 시간에 맞춰 페로 관의 연병장에 등장한 카인이 자리에 도열한 오십 여명의 초급 가디언들에게 말했다. 카렐을 기다리던 그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렐 선생님은요?"

"이제 너희들 가르치는 일은 접고 주인님 시중에만 주력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포프가 죽어서가 아니구요?"

"뭐야!"

카인이 대뜸 소리를 지르자 그 젊은 가디언은 겁에 질려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모습들을 뒤에서 뒤숭숭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다른 현역 가디언들 몇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뭐라 한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포프 녀석, 카렐 누님이 그렇게 아껴주셨었는데......쯧쯧."

"그 녀석 소문대로 누님하고 그런......사이였던 거 아냐? 어제부터 누님은 식사도 안하시고......게다가 어젯밤엔......."

"닥쳐, 누님이 어떤 분인데......금기를 어기고 그딴 짓을 하셔?......그리고 말은 바로 하라고, 카렐 누님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한테 더 인기가 좋잖아, 킥킥,"

"어제 여자 장난감을 둘이나 데리고 잠자리에 드셨다니까, 정말로. 남쪽 사랑채 지키는 놈이 그랬어."

그 말에 깜짝 놀란 가디언들이 일제히 옹기종기 모여들어 저마다 한마디씩 내놓고 있었다.

"정말?"

"말도 마, 그년들 아주 좋아 죽을려고 했다던데?"

"뭐야? 주인님이 누님 기분 상한 거 달래주려고 그러신 건가?"

"글쎄, 그렇겠지 뭐."

"어쨌든 누님이 갑자기 저러시는 건 이해가 안돼. 지금까지 그렇게 죽은 게 한둘이 아니었는데."

"포프는 누님이 직접 가르친 놈이었잖아. 천하에 카렐 누님이 말이야, 복터진 거였지 뭐. 하긴, 재수 없이 첫날에 1등급을 만날게 뭐냐구. 하기사, 뒈진 1등급 놈도 카렐 누님을 만나다니 재수 지지리 없긴 매한가지지.......훗,"

"그렇다고 해도......"

"게다가 20년 동안 직접 자식같이 키워주었고."

"쉿!"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평소보다는 약간 흐뜨러진 모습의 카렐이 모습을 나타내자 신나게 떠들던 가디언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카렐의 별로 곱지 않은 시선이 자신들을 한번씩 훑고 지나가자 지금껏 수다를 떨던 가디언들의 표정이 파랗게 굳어버렸다.

다행히도 카렐의 눈동자는 마당에서 뭐라 지시하고 있는 카인에게 가서 멎었다.

"카인이 새 검술 선생을 맡았나?"

".....그렇답니다,"

"이번에 특급으로 승급했다지?"

카렐의 표정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어두웠다. 가디언 하나가 그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젯밤에 숙소에서 안보이시던데......"

카렐이 질문을 한 가디언을 홱 돌아보았다. 그는 카렐의 곱지 않은 시선에 깜짝 놀라 뒤로 몇 발 물러나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버렸다.

어린 가디언들의 수련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에게 페로의 비서 한 명이 다가와 쪽지를 내밀었다.

"총리 각하의 명령입니다. 오늘 저녁에 재종형이신 보벤 슈트란 경이 이곳에 오신다고 하십니다. 자정 조금 넘어 여기 도착하실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돌아오시라고 합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 혼자 나가시라 하셨습니다."

카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서가 내민 쪽지를 잠시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오넷 광장? 거긴 사람이 없는 황무지인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

불안한 표정을 지은 카렐은 주인 페로가 머무는 사랑채가 있는 북쪽을 문득 돌아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망토를 얼굴까지 푹 눌러쓴 카렐은 쏟아지는 한밤의 빗속을 뚫고 단신으로 오넷 광장을 걷고 있었다. 흉악 범죄가 종종 벌어지는 것으로 유명한 이 옛 도시 터엔 여느 때처럼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기분 나쁜 곳을 가끔 지나다니는 도시 외곽 빈민들의 모습도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카렐은 광장 한중간에 우뚝 서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자정에서 정확히 5분전이었다.

"누구냐."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카렐이 칼을 움켜쥐며 뒤로 홱 돌아섰다.

"칼 같은 카렐 누님이 시간보다 일찍 오시다니 예상 밖이군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카인이었다. 잠시 긴장했던 카렐은 그제야 안심하며 칼자루를 쥔 손을 놓았다.

"웬일이지? 카인?"

"저도 여기서 명령을 받았죠. 12시 정각에."

"주인님이 염려가 많이 되신 모양이군. 언제는 혼자 오라 하시더니."

카렐이 어두컴컴한 광장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염려?"

카인이 대꾸했다.

"제가 받은 명령은,"

카인이 갑자기 칼을 붙들었다.

"누님을 죽이라는 겁니다."

카렐이 순간 자리에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칼자루를 움켜쥔 카인이 멍 하니 서 있는 카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지?"

카인의 번쩍거리는 칼날이 빗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 황당해진 카렐이 고개를 거칠게 가로 저으며 말했다.

"말도 안돼, 넌 날 죽이지 못해. 넌 내 적수도 못 되잖나?"

"어쨌든 명령을 받은 이상 합니다."

카렐은 카인이 내질러오는 칼을 옆으로 슬쩍 피해버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 명령을 받았을 리가 없다, 너 뭐 잘못들은 것 아니냐?"

"카인은 멀쩡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카렐이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주인 페로가 다섯의 가디언들을 거느리고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무, 무슨 뜻이신지......"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카렐이 약간 경계하는 태세로 다른 가디언들을 하나씩 노려보며 물었다. 카렐을 공격하던 카인이 그제서야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동안 고마웠다. 카렐. 네 덕택에 난 특등급 가디언만 6명을 가지게 되었거든. 값으로 치면 엄청난 액수지. 그 동안 네가 길러낸 가디언들을 판 값도 꽤 괜찮았어."

"이제......저를 버리시려는......"

카렐의 표정이 파랗게 얼어붙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자정의 빗줄기가 그의 망토를 타고 약간 드러난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래. 이게 내 마지막 명령이다. 여기서 죽어라."

페로의 손끝이 카렐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에 잠시 굳은 듯이 멍청히 서 있던 카렐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며 천천히 꿇어앉았다. 컴컴한 광장에서 번쩍거리는 파란빛의 단검과 더 번쩍거리는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가 흔들릴 뿐이었다.

꿇어앉은 카렐의 떨리는 시선이 잠시 페로를 올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페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려버렸다. 쏟아지는 빗물이 페로의 얼굴을 타고 충혈된 눈을 지나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카렐의 붉어진 눈동자에서도 빗물이 뺨을 따라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카렐이 아직까지 칼을 쥐고 서 있던 카인을 문득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인. 준비해라."

"예."

카인이 꿇어앉은 카렐의 등뒤에서 칼을 치켜들고 목을 벨 자세를 잡았다.

"카인."

카렐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넌 내 밑으로 들어온 첫 번째 아우였지."

"......"

"나하곤 각별하구나......그러니 제발 머뭇거리지 말고 한번에 목을 날려다오."

"알겠습니다."

카인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렐은 단검을 이마까지 치켜올리더니 단숨에 자기 아랫배를 푹 찔러 위로 갈랐다.

"이악!"

카인이 칼을 내질렀다.

"잠깐!"

페로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있는 힘껏 칼을 휘두르려던 카인이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으, 으으윽......"

카렐이 내장이 터져 나오려는 배를 움켜쥐고 처절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로는 이를 악물며 옆으로 돌아섰다. 버둥거리던 카렐이 카인의 발목을 꽉 붙들었다. 칼을 치켜든 카인은 '결단'을 머뭇거리고 있는 페로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렐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며 중간에서 당혹스런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카렐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떡할까요......주인님......"

보다못한 카인이 입을 열었다. 카렐의 시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던 페로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넌 너무 유명해져서 이제 효용가치가 없어졌어. 어떤 놈도 나한테 재산을 걸고 도전해오지를 않거든. 그깟 가디언 몇 놈 키워 파는 건 별로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니야. 지난번의 얼간이도 네가 한동안 여기 없을 거라는 내 거짓 정보에 속고 나서야 나한테 덤볐으니......그렇다고 널 다른 놈한테 팔아 치울 수도 없고......이게 첫 번째 이유지."

고통에 겨운 카렐은 페로의 설명을 듣는 건지 아닌 건지 옆의 빗물 구덩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거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의 신음 소리를 들은 페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로 네놈은 감히 가디언 주제에 너무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어. 병신 같은 것.....감히 가디언 주제에 네 유전자 코드를 찾다니......셋째, 네놈이 포프를 왜 그리 아꼈는지 내가 몰랐으리라 생각했나? 네놈이 그 갓난 핏덩이를 안고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넌 그래서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카인! 칼을 안 넣고 뭐하나!"

"예."

카인을 얼른 칼을 도로 칼집에 넣었다. 카렐이 바닥에 떨어졌던 단검을 더듬거리며 다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이미 피가 범벅이 된 그 칼로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다.

"막아!"

페로의 명령에 카인이 단검을 쥔 카렐의 손을 재빨리 발로 밟았다. 카렐의 고통은 이미 극에 달하고 있었다. 거의 기진맥진한 카렐이 피를 토하며 낮게 물었다.

"수우 녀석.......때문입니까......"

페로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죽어 가는 카렐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보았다. 카렐의 핏발선 눈동자가 페로를 처절하게 올려보았다. 갑자기 뜬금 없는 미소를 띠기 시작한 카렐의 입에서 거의 신음에 가까운 마지막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난 괜찮아......"

뻣뻣하게 세워져있던 카렐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꺾여졌다. 버둥거리던 다리도 가끔 보이는 약간의 경련을 빼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긴 눈썹은 핏발이 어린 매서운 눈을 덮었다. 그러나 한 손의 단검만은 그대로 움켜쥔 채였다. 카렐의 마지막 말을 들은 페로는 무엇에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카인이 얼른 카렐의 목옆을 짚어보았다.

"아직......살아있습니다. 확실히 해둘까요?"

"어차피 죽을 거다."

한참 후에야 겨우 대답한 페로는 눈 주위로 흐르는 빗물을 옷자락으로 훔쳐내며 이를 악물었다.

"시체는 가져갈까요?"

"그냥 놔둬. 집안사람들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아......특히 근위대 놈들을 혼란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쓰러진 카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페로는 끝내는 카렐을 확인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채 그대로 돌아서서 가디언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카렐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고인 빗물을 온통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아직 숨이 가늘게나마 붙어있는 카렐의 처절한 신음 소리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들릴 듯 말듯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감겨있던 카렐의 눈이 가늘게 열리면서 멀리, 아주 멀리서 느껴져 오는 낯선 인기척을 향해 조금 움직였다.

페로의 가디언 수련장의 분위기가 갑자기 침울해져 있었다. 카렐을 비롯한 7명의 지도 가디언들이 모두 집안을 비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페로와 그를 따라 돌아온 6명의 특급 가디언들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은 내 친척을 지키다가 죽었다."

페로 가디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카렐이 죽었다는 소식에 가디언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웅성대는 그들 가디언들을 뒤로하고 무표정하게 북쪽 사랑채 안으로 들어선 페로는 특등급 가디언들의 교대표가 걸려있는 대청마루 기둥 앞에 잠시 멍 하니 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살아있었다면 오늘밤 페로의 침소를 지키고 있었을 카렐의 이름이 아직 그 위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저어, 카렐의 숙소는 어떡할까요? 다 치울까요? 안 그래도 특급 가디언 숙소가 모자라던 참이었는데......"

미리 기다리던 로카가 교대표 앞에 넋 나간 듯 우두커니 서 있던 페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놔둬. 아무도 못 들어가게 폐쇄하고."

"예?"

로카의 얼굴을 한 번 무섭게 째려본 페로는 대뜸 성질 난 목소리로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그냥 놔두라니까!"

"아.....예. 알겠습니다."

겁에 질린 로카가 뒷걸음질치며 얼른 물러났다. 방안으로 사라진 페로는 무슨 일인지 그 다음날까지 다른 사람들 앞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에길,"

티틀은 투덜거리며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끄응하고 한 번 힘을 주자 썰매가 겨우 그를 따라 움직였다. 겨우겨우 한 발짝씩을 옮기던 그는 썰매 밑으로 배어 나오고있는 피를 보고는 또 한번 놀라 옆에 대고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몇몇 빈민굴 사람들이 구역질 소리에 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어이구, 오늘 큰 생 고깃덩이라도 구했나보지? 저녁에 한 덩이 얻으러가도 돼?"

"이씨, 놀리나...... 아참, 와튼 녀석 좀 불러 줘, 급해."

초라한 움막, 흙으로 지은 비 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고 땅엔 구정물이 한가득 고인 빈민굴을 겨우 지나 티틀은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모아 급조한 썰매를 집에까지 끌고 왔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집도 동네의 집들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결코 나을 것도 없었다. 일단 썰매를 바깥에 놔둔 채로 집안에 들어간 티틀이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전의 폭우에 너와로 엮은 지붕이 또 샜는지 책상에 펼쳐놓은 책 한 권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망할,"

그는 책들을 정돈하려다가 다시 썰매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사람이 우선이지,"

다시 바깥으로 달려나온 티틀은 썰매를 덮은 큰 나뭇잎을 치웠다. 그리고 그 위에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던 카렐을 힘껏 어깨에 둘러멨다.

"으이구,"

엄청난 무게에 티틀의 다리가 휘청 했다. 키가 큰 카렐의 발끝이 땅에 질질 끌렸지만 자그만 티틀로서는 그 이상 도리가 없었다. 한술 더 떠 몸에 주렁주렁 단 무기들은 그 무게가 티틀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결국 업고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티틀은 카렐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들어가 그 거구를 겨우 낑낑대며 침대에 눕히고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살면 좋은 거고......안돼도......"

문이 열리면서 티틀의 친구인 와튼이 훌쩍 뛰어들어온 건 그때였다.

"제엔장, 자알 자고있는데 왜 부르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지 알기나 해.......흡!"

와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위의 카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야?"

"책 사러 갔다오다가......지름길로 오넷으로 왔거든, 그런데 그 한중간에 끙끙대고 있더라구. 비도 펑펑 쏟아지는데 그냥 두고 오기도 뭐해서......"

"땡잡았네,"

와튼이 키득거리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는 들고 온 큰 가방에서 톱과 큰 식칼 두개를 끄집어내 허리띠에 꽂았다.

"저거 잘 토막내서 황야 사람들한테 고기로 갖다 팔면 적어도 5골드는 받겠는데, 덩치도 큰 게, 남자야?......우와, 여자네, 뭔 여자가 저렇게 커? 어쨌든 가격도 괜찮겠는걸......근데 재수 없게 왜 집안에 들여놨냐? 청소하기도 어려울 텐데 밖에서 해체하자,"

"닥쳐,"

티틀이 친구의 손에서 톱을 거칠게 빼앗아들었다.

"왜? 너 혼자 먹으려고? 너무 많을걸."

"난 식인은 안 해......그리고 아직 살았어."

"뭐야!"

깜짝 놀란 와튼이 얼른 옆에 있던 손도끼를 집어들었다.

"너 미쳤냐! 저거 생긴 거 보니까 보나마나 도시인이야! 저건 빨리 죽여서 그냥 소지품이나 챙기는 게 나아."

"그만 두라니깐!"

티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의사 맞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 아직 심장이 뛰고있는데!.....너도 얼마 전까지는 도시에 살았잖아?"

와튼이 풀이 팍 죽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넌 아직 도시란 델 몰라서 그래......내가 왜 여기 와서 이 짓 하는지 알아? 씨발, 망할 곳,"

친구의 성인 군자 같은 한바탕 잔소리에 와튼은 있는 대로 투덜대며 가져온 초라한 진료 상자를 펼쳐놓았다.

"난 또, 토막내는 법이나 알려달라는 줄 알고......뭐야? 어딜 다친 거지?"

"복부 같아."

"'같아'? 넌 그럼 상처도 안 봤냐?"

"......역겨워서......"

"멍청한 새끼,"

와튼은 혼잣말로 연신 무어라 투덜대며 카렐이 입은 망토를 걷어냈다. 피범벅이 되어있는 카렐의 모습에 와튼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들었다.

"......자살하려던 놈이네."

"뭐?"

"할복했어. 얼씨구, 칼도 그대로 쥐고있네. 훗, 칼 보니까 돈 깨나 있던 놈이구먼......이 망토 좀 봐, 시커먼 게 단순해 보여도 이거 황실에서나 쓰는 최고급 방수가공 실크인데......어라? 안에 입은 건......바다사자 가죽 같은데? 이 귀한걸......벨트하고 신발은 악어가죽인가? 장갑은 뱀가죽 같고......우와, 브레이서엔 이거 다이아몬드 아냐? 버클 장식은 오팔 같고. 완전 갑부 아냐? 오호, 잘하면 한몫 잡겠는데?"

와튼의 관심이 엉뚱한 곳에 쏠리자 티틀이 친구의 머리를 그대로 쥐어박았다.

"망할 놈, 너 사람 치료하려고 앉은 거야? 장물 건지러 온 거야?"

친구의 핀잔에 와튼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카렐이 입은 가죽옷의 버클을 풀고 피로 범벅이 된 상체를 드러냈다.

"알았다구, 알았어.......근데 신기하네. 자기 손으로 이렇게까지 할복을 해? 보통 찌르고 나면 그 자리에 발랑 자빠지는데. 정말로 자기 배를 세로로 갈랐어? 이 지경인데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야?......티틀? 티틀!"

티틀은 그새 보이지 않았다. 창 밖을 보니 아니나다를까 또 토하는 중이었다.

"저 또라이 같은 놈,"

와튼은 얼굴을 또 찡그리고는 상자에서 몇 개의 조잡한 수술 도구들을 꺼내들었다. 다시 돌아온 티틀이 이쪽과는 등을 돌리고 앉아 계속 물었다.

"다 끝났니?"

"아아니."

"......다 끝났어?"

"좀 기다려, 이게 무슨 양복점 옷 만드는 건 줄 아냐. 근데 이 여자 이상해. 완전 기형이야, 젖가슴도 없는데 제거한 것 같지도 않고......피하 지방층도 무지 ㅤㅇㅏㄼ은 게......근육이 장난이 아냐. 감촉도 좀 이상한걸, 사람 근육 느낌이 아냐......무지 단단하고 퍽퍽해. 꼭 껍질 벗겨 논 뱀 만지는 것 같아,......이거 사람 맞아?"

"우욱,"

무심결에 꿰매는 광경을 돌아본 티틀이 다시 입을 움켜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참 걸려 봉합 수술을 다 끝낸 와튼은 가방을 챙기고는 카렐의 옷을 대강 여며놓았다.

"됐어. 봐도 돼. 돈많은 놈 같으니까 정신만 차리면 가족들한테 사례금 두둑이 챙길 수도 있겠다. 그때 가서 입씻지마, 이 새끼야."

티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그제야 카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솔직히,"

"뭐?"

"미인인데......정말로."

"닥쳐, 넌 가슴도 없는 이런 괴물 여자한테 그런 생각이 드냐?"

와튼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친구를 확 떠밀었다.

"이제 내 손은 떠난 거다. 패혈증이나 다른 합병증 생길 가능성이 꽤 높은데 내 능력 밖이야. 살려주고 싶으면 제때 먹을거나 잘 챙겨 줘. 죽으면 지 팔자지 뭐."

"알았어......그런데 뭘 하던 사람일까?"

"글쎄,"

카렐의 몸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와튼이 카렐의 손목을 잡고 브레이서 밑을 슬쩍 들쳐보았다.

"으악!"

"뭐, 뭐야!"

와튼의 비명에 지레 깜짝 놀란 티틀이 영문도 모르고 벽 구석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이, 이놈은 가디언이야! 어쩐지! 지독하게도 강하다 했지! 망할! 내가 가디언을 치료해줬어! 씨발! 이, 이일을 어쩌지! 웬 여자 가디언이 다 있어!"

"왜 그래? 뭐 짐승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

"짐승이 낫지!"

와튼은 별다른 대답도 해 주지 않은 채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구석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있던 티틀은 용기를 내어 카렐의 몸을 막대기로 한 번 쿡 찔러보았다. 몇 번을 찔렀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티틀은 조금 용기를 내어 카렐의 곁에 더 다가갔다. 그러나 카렐은 눈을 감은 채 희미한 호흡을 겨우 잇고 있었다.

티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밖을 바라보았다.

"거 참, 이상한 녀석이네, 노이로제가 따로 없다니까......"

책상에 쭈그리고 잠들어있던 티틀은 창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어제의 쏟아지던 비가 정말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티틀은 창문을 활짝 열고 카렐이 누워있던 침대로 가 보았다. 다행히 카렐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워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든 티틀은 살그머니 카렐의 코에 귀를 가져갔다. 어제보다 숨소리가 조금 커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움막 한구석의 푸대자루를 뒤적거려 달걀 두 개를 끄집어냈다.

자기도 평소 못 먹고 아껴두던 달걀이었지만 중환자에게 자신이 평소 먹는 풀죽이나 쑤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일밖에 안 되었으니까......상하진 않았겠지,"

찌그러든 냄비에 물을 담던 티틀은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안녕, 너 아직 살아있나 보러왔다."

와튼은 여전히 어제처럼 쌀쌀맞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아직 저 괴물을 데리고있어? 아직 안 죽었냐?"

티틀이 빈정대듯 대꾸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야. 그리고 애석하게도 아직 살아있어."

"이놈은 사람이 아냐."

"너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티틀이 얼굴을 찌푸리며 움막 안으로 도로 들어가자 와튼이 쫓아 들어와 그의 팔을 탁 움켜잡았다.

"넌 촌에만 살아서 아무 것도 몰라, 가디언들이 뭔지.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설득하러 온 거야."

"그래, 설득해봐. 나도 설득 좀 당해보자."

티틀이 달걀을 품에 꼭 껴안으며 침대맡의 의자에 편하게 자리잡고 앉았다.

"이놈들은 인간이 아냐."

"그럼 뭐야? 귀신이냐?"

"이놈들은......합성 인간이야. 연구소에서 찍어낸 인간이라구."

"뭐어?"

처음 들어보는 말에 티틀은 하마터면 달걀을 떨어뜨릴 뻔했다.

"도시에 가면 유전자 은행이 있어. 제국민의 모든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지. 이 가디언들은 말이야......그 중에서 제일로 사나운 형질들만 모아서 만들어놓은 괴물들이란 말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그런 인간을 만들어 뭐에 쓰려고......"

"싸움 노예."

"뭐?"

"이놈들은 감정이 없어. 할 줄 아는 거라곤 주인을 대신해 싸우고, 죽이고, 또 싸우다가 결국 누군가의 손에 죽는 거야."

"감정이 없는 인간은 없어."

"있어."

와튼이 얼굴을 찌푸리며 카렐을 가리켰다.

"너 어제 이 여자가 예쁘다고 했던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꿈 깨. 가디언은 10살에 모두 거세를 해버려. 절대 자기의 핏줄을 가질 수가 없어. 여자 가디언 본적은 없지만 어쨌든 이자도 껍데기만 여자일 뿐이지 성별이 없는 존재라구. 알았어? 그래서 가슴도 없는 거라구."

"그럼 이 여자도......"

"그래. 전문 킬러. 이 손목을 봐. 가디언을 나타내는 팔찌가 끼워져 있잖아. 여기엔 이 가디언의 등급이 표시되어있지. 이놈은......등급이......어? 등급이 없네?......이름도 없고? X-11-1? 이것만 달랑 써있네?"

와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티틀이 이 성질 나쁜 친구와 카렐의 사이를 급히 막아섰다.

"시원찮은 가디언이었는지도 몰라. 사람 한 명도 안 죽여본. 봐, 여자잖아."

"시끄러, 할복을 한 솜씨가 그냥 칼솜씨는 아냐."

"딴사람이 그랬는지도 몰라."

"하여간에......"

와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티틀을 쳐다보았다. 티틀은 정성스럽게 보관해두었던 달걀 두 개를 물이 든 냄비에 넣고 화로에 얹었다.

"으, 윽,"

가만히 누워있던 카렐이 몸을 조금 뒤척이기 시작하자 와튼이 창백해진 얼굴로 뒤로 몇 발 물러났다.

"정신차려, 티틀,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이놈은 일어나자마자 네 목을 비틀어 끊어서 이 냄비에 넣을지도 몰라......이놈들은 뭐든지 하는 놈들이라구,"

"헉!"

약간의 신음 소리와 함께 카렐이 눈을 번쩍 뜨자 와튼은 기겁을 하고 문 쪽으로 달아났다. 티틀은 애써 태연하려 하고 있었지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다리는 그의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으윽,"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함께 카렐이 배를 움켜쥐었다. 그새 와튼은 입구에 세워져있던 작은 손도끼를 허겁지겁 집어들었다. 카렐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벽을 붙들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리고는 도끼를 든 채 부들부들 떨고있는 와튼과 자리에 딱 얼어붙어 있는 티틀을 잠시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서 깨어난 이 상황이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몇 번 가로 저었지만 꽤 꼼꼼하게 봉합되어있는 배와 멍 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순박해 보이는 두 청년을 보고서는 조금이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누가......날 구해줬습니까?"

와튼이 티틀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티틀은 너무 겁에 질려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당신입니까?"

카렐의 살기로 번득이는 눈이 티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티틀이 겨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오오오....오넷 과, 광장에 에서......."

"......"

"브, 배에.....사, 상처가 나, 나서....."

카렐은 침대맡에 기대 세워져있는 자기 대도를 덥석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와튼이 도끼를 치켜든 순간 그의 눈이 카렐과 딱 마주쳤다. 그 매서운 시선에 와튼이 겁을 집어먹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카렐이 칼을 짚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6척 반이 넘는 그 어마어마한 키에 기가 눌린 티틀의 입이 짝 벌어지고 말았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키의 굳건한 몸이 공포에 떨고있는 티틀의 앞을 딱 막아섰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티틀은 결국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새 주인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읍!"

그의 귀에 들어온 뜻밖의 말에 티틀이 실눈을 조금 떴다. 그 큰 카렐이 티틀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성치않은 몸으로 칼이 기대 힘겹게 꿇어앉은 카렐이 끓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이제 당신이 저의 새 주인이십니다."

"내, 내가?"

와튼이 치켜들었던 도끼를 천천히 내렸다.

"네 이전 주인은?"

"그분은 저를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가디언으로 태어난 이상 저를 처음으로 거둔 시민이 새 주인이 됩니다."

"난 가디언이 필요 없어.......난 가디언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

"난......그저 네가 광장에 다쳐서 쓰러져 있길래......그것 뿐이야."

"그건 절 버리겠다는 뜻이십니까?"

카렐이 티틀을 똑바로 올려보았다. 와튼이 안된다고 팔을 마구 휘저어 보였다. 티틀이 계속 망설이자 와튼이 그에게 달려와 친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바보야, 너 굴러 들어온 떡을 그렇게 걷어찰래? 저 녀석 도시에 갖다 팔믄 아무리 시답잖은 가디언이어도 몇만 골드는 받어, 그리구 저 칼만 팔아도 그만큼은 족히 나올만한데, 네가 그냥 보내봤자 저 녀석은 어차피 누군가의 가디언이 되던지 다른 가디언들의 밥이 될 운명이야. 앙?"

지금껏 이 가디언인지 뭐시긴지를 죽이라며 날뛰던 그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도를 돌변해버린 친구의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던 티틀이 고개를 거칠게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떻게 가디언을......미안해요. 난 날 대신해 죽을 사람도 필요 없고......당신을 거느릴 처지도 못돼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해방시켜 주겠어요. 내가 주인이니까."

"가디언으로 합성된 자는 결코 시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인에게도 그럴 권한은 없습니다."

카렐의 단호한 대답에 난처한 표정의 티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내가 당신을 버리면 어떡할 생각이죠?"

"당장 여기서 나가서,"

카렐이 눈을 감았다.

"도시로 돌아가 첫 번째 보이는 가디언을 죽이고 그 주인의 새 가디언이 됩니다. 그것이 규칙입니다."

"미쳤군!"

티틀이 머리를 싸쥐었다. 마치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듯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이 '괴물'의 태도에 티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거리던 티틀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내가 당신 주인이 될 테니까, 겁나니까 제발 그 칼 좀 놓고 저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어요."

"알겠습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카렐은 칼을 제 위치에 놓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순간 얼떨떨해진 티틀은 와튼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되긴, 떼돈 구한 거지."

와튼이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나 좀 갈켜 줘, 도대체 가디언들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거지?"

"신경 쓸거 없어."

와튼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의자에 편하게 자리잡고 앉았다.

"아다시피 저놈들은 감정이 없어. 네 명령이라면 이 자리에서 죽으라고 해도 정말로 죽어. 필요한 말 이외엔 절대 하지도 않고 네 생활에도 절대 간섭 안 해. 가디언은 그냥......로보트라고 생각해. 도시인들은 침실에까지 가디언을 세워놓고 그 옆에서 섹스까지 한다니깐. 대신,"

"대신?"

티틀의 표정이 잔뜩 긴장되었다. 와튼이 키득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주인은 가디언의 의식주를 모두 해결해줄 의무가 있어."

"엥? 난......내 끼니 해결하기도 힘든데......난 그냥 글이나 몇 개 써주고 푼돈 받아 겨우 사는 처지라구,"

"그래그래, 내가 그걸 잘 알지. 그러니까 네가 데리고 있을 생각 말고 도시에 내다가 칼하고 같이 팔아버리면 될 거 아냐. 내가 가디언 시장 위치는 알려줄께. 열흘에 한번쯤 열린다니까 다음번 장 서는 날 데리고 나가 팔아버려. 돈은 나하고 7대 3으로 나눠 갖자."

친구 덕에 큰돈을 만질 수 있게 된 와튼이 어리벙벙해져있는 친구의 어깨를 두들기며 연신 키득거렸다.

누워있는 카렐을 한 번 돌아본 티틀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팔아?"

"그럼 네가 데리고 있을래? 돈도 없는 주제에......"

와튼의 눈꼬리가 험해지자 기가 죽은 티틀이 고개를 숙여 붙였다.

"걱정 마, 한몫 건진 거라니까."

벌써부터 눈에 돈독이 오른 와튼과 여전히 결정을 머뭇거리는 티틀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누워있는 카렐에게로 향했다.

"네 두 년이 말이야......"

페로가 포도주 잔을 천천히 돌리며 앞에 꿇어앉혀진 두 명의 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지난번 카렐의 시중을 들었던 그 두 여자들이었다. 페로는 포도주 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들며 두 여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짙은 화장을 한 성숙해 보이는 여자 한 명과 페로가 나중에 붙여준 그 '앳된 미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렸겠다?"

"아, 아니옵니다,"

그들은 자기 뒤에 큰 검을 들고 서 있는 카인을 힐끗 돌아보며 공포에 질려 겨우 대답을 뽑아냈다.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앉아있던 페로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카렐을 죽였다고? 후후후, 기가 막힌 노릇이군. 그으래. 내 카렐하고 하룻밤 붙여줬더니 그리 홀딱 빠졌어? 주제넘게 가디언이 쾌락을 즐긴다는 것부터가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녀석이야 워낙 뛰어난 녀석이었으니, 그래, 카렐이 침실에서까지 그렇게 기가 막히던가?"

"아니옵니다, 그분은......."

"아니야? 이런 이런, 내가 카렐을 잠자리에서 시중들라고 들여보낸 걸로 기억하는데? 내 명령을 감히 따르지 않았다는 건가?"

하얗게 질린 소녀가 답답한 듯 옆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벌벌 떨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카렐과 잠자리를 했다고 대답한다면 가디언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고,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페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이 심술궂은 주인의 추궁을 피해갈 수는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 시키신 대로 그냥......"

페로의 시선이 고개를 숙여 붙인 그 여자의 정수리에 가 멎었다. 카렐과 정말로 동침했다는 말에 페로가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그럼 네년이 다음날까지 카렐을 찾아댔다며? 내 이미 다 조사했는데."

"아니옵니다, 그건 그냥 카렐 님이 갑자기 안보이시길래...."

"안보여? 네년이 노예 주제에 내 수석 가디언이 보이건 안보이건 무슨 상관이라도 있었나? 하룻밤 같이 지내고 나더니 그 대단하신 수석 가디언이 네 애인이라도 됐다고 착각한 모양이지?"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소녀같이 천박한 노예가 어찌 감히......."

"잔말 마라. 아무래도 너희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겠는걸,"

두 여자 노예들이 결국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페로는 바닥에 엎드린 여자의 턱을 가만히 치켜들었다.

"미인인데......매력적인걸. 솔직히 죽이긴 좀 아까워. 하지만......"

페로가 피식 웃음 짓는 그 순간, 여자의 등뒤에서 무언가가 번쩍 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인의 칼에서 피 몇 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페로의 손에 들려있던 미녀의 잘린 머리가 쿵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굴러 떨어져 버렸다. 잘린 목에서 터져나온 피가 얼굴과 잘 차려입은 옷에 범벅이 되자 페로가 다시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옆에 있던 언니가 순식간에 목이 잘려 죽자 옆의 어린 미녀가 거의 이성을 잃고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있었다. 페로가 그를 돌아보며 피익 웃어 보였다.

"솔? 네가 솔이지? 지난번에 감히 나한테 방자하게 굴었던 그년. 그런데 카렐 시중 들라는 말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하더군. 바보 같은 년......내가 이유를 몰라서 너한테 그 일을 시켰는 줄 아냐? 어때? 너도 이렇게 해 줄까?"

"주인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발,"

"그래그래, 좋아. 넌 나이도 어리니 죽이진 않지. 대신 더 즐거운 일을 시켜주지. 로카!"

"옛!"

로카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페로가 냉랭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년은 내다팔어."

소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대신, 돈 많은 놈에겐 절대 팔지 마라. 제일로 가난하고, 노예 굶겨 죽이기에 딱 좋고, 무능력한 매춘부 뚜쟁이한테다가 말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공짜로 넘겨도 좋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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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르포세카 (Dimorphotheca) : 데이지 변종. 대개 흰색. 남아프리카 나미비아 등지의 사막지대를 원산지로 하는 대표적인 사막형 식물로 햇빛이 없으면 쉽게 시들어 죽는 속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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