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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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카렐은 더 이상 티틀의 움막에 함께 머물고있지는 않았다. 그는 직접 잡은 짐승들의 가죽을 엮어 집 뒷켠에 작은 움막을 쳐 두고 고기는 일부러 티틀의 집 문 앞에 버려주었다. 티틀도 눈치를 챘지만 워낙 궁한 형편이라 모르는 척 요리해 카렐에게 반 이상을 주는 정도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자신의 '미인' 가디언에게 엉큼한 생각이 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차갑고 살기가 감도는 카렐의 표정이나 짐승 울음소리 같은, 특이하다못해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대할 때마다 엉큼한 생각은 고사하고 자신이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위압감에 눌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덕택에 새 주인 티틀은 자기 소유라는 가디언에게 여지껏 제대로 된 말 한마디 건네 본 적도 없었다.
그날 아침 따라 티틀이 정성이 든 음식을 해 내놓았다. 염소젖에 옥수수, 삶은 콩에 큰 양고기 한 덩이가 놓여있었다. 식탁을 둘러본 카렐은 주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티틀이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외출 할건데, 나하고 같이 가겠어?"
"도시로 가십니까?"
카렐이 무표정하게 묻자 티틀이 흠칫 놀랐다.
"그, 그래......"
"알겠습니다."
무슨 이유엔지 이 큰 키의 가디언은 고기를 빼면 채소는 고사하고 곡물이나 다른 것들은 전혀 입에도 대지 않는 이상한 습관을 보이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기껏 차려준 식탁에서 양고기만 골라 먹은 카렐은 나머지들을 모두 남겨둔 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딴에는 깨끗한 옷을 꺼내 입은 티틀은 이 가디언과의 첫 외출이 조금은 흥분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실, 난 태어나서 도시는 처음이야."
"......"
"넌 줄곧 도시에서만 살았어?"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추억도 있겠군."
"그런 건 없습니다."
카렐의 쌀쌀맞은 대답에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보려던 티틀은 또다시 기가 확 죽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상징같이 항상 몸을 감싸고있는 녀석의 검은 망토 안으로 푹 감추어진 지금 표정이 어떤지 조차 티틀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카렐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칼의 묘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을 따름이었다.
카렐과 함께 말없이 한참을 걷던 티틀은 도시의 거대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얼떨떨해진 표정으로 잠시 멈춰 서서 그 풍광을 말없이 바라보기도 했지만 카렐은 그런 주인의 촌스런 행동 따위에는 관심 없는 듯 혼자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엉?"
도시의 조금은 낯선 풍경에 티틀은 잠시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멀리서는 그리도 호화찬란해 보이던 도시에 정작 들어섰어도 길거리를 '걸어서' 돌아다니는 행인은 거의 볼 수 없었고 그나마 잠시 잠시 눈에 띄던 사람들도 가디언을 거느리고 있던가 꽤나 빠른 걸음으로 허겁지겁 길을 가고 있었다.
티틀도 그들의 태도가 꽤나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도시에 온 이상 그들 하는 식대로 따라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방책이었다.
티틀이 앞서 걸어가는 카렐의 등을 쿡 찌르며 물었다.
"뭐 물어봐도 돼?"
"말씀하십시오."
"왜......이렇게 행인이 없는 거야?"
"도시민들은 개인 차량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바깥에 나오기를 꺼립니다. 선대 황제 폐하 시절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차를 타지 않은 일반 보행자들이 길을 다니는 것이 많이 위험해졌습니다."
"뭐?"
아무 생각 없이 도시의 거리를 걷고있던 티틀은 그의 대답에 순간 기겁하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망할......가디언이 날 지켜야 한다구? 그러면 이 사람은 등급도 없는 형편없는 가디언인데 이런 가디언을 믿고 가도 되는 건가......뭐 잘못한 거 아냐......아차, 그건 그렇고 시내에서 이 가디언을 팔고 나면 어떻게 집에 돌아가지? 돈을 수중에 갖고 가는 건데 그러면......'
티틀의 머리가 아찔해져왔다. 이 '형편없는' 가디언의 호위를 받으며 가는 것 자체가 극히 위험한 일에 틀림없다는 말이었다.
겁먹은 티틀은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티틀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카렐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돌아오실 땐 가디언 중개인에게 돈을 조금 지불하면 집에까지는 차에 태워 호위해 줄 겁니다."
"으, 응?"
티틀이 깜짝 놀라 카렐을 올려보았다. 망토 속에 감추어진 카렐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 알고 있었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카렐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티틀은 종종걸음으로 카렐의 뒤를 따라가며 더듬더듬 계속 말을 이었다.
"미안해......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아다시피 난 가난한 글쟁이야. 수입이라곤 글 써주고 받는 푼돈 뿐이야. 나 혼자 먹고살기도 힘든데......너를 먹여 살려줄 여유가 없거든......그리고 나 사는 데선 사실 가디언이 별 쓸모도 없고......"
카렐은 여전히 말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널 시장에 내놓아서 돈을 챙긴다는 것부터가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티틀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카렐이 움찔 하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티틀이 자리에 다시 멈춰섰다. 한 손을 칼 쪽으로 반쯤 가져갔던 카렐은 옆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의 건장한 가디언에게서 줄곧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후에야 칼에서 손을 뗀 카렐이 냉랭하게 말했다.
"21등급이었습니다."
"그 정도면.....쎈 거야?"
"가디언은 51개 등급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최고 등급은 특등급이고 처음엔 50등급부터 시작합니다."
"어휴,"
"95%의 가디언은 15등급 이하에 속합니다. 제명 당한 가디언들을 제외하면 현재 특등급은 황제령에 13명이 고작입니다. 21등급이면 중상급에 속합니다."
"그런데 넌......왜 등급이......아냐,"
그에게 벼르던 질문을 하려던 티틀은 카렐이 행여 자존심 상해할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남부 프라임 지역 수도인 3번 도시의 노예 시장은 도시 북쪽의 약간 외진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매일 열리는 시장이 아니어서인지 따로 지어져있는 건물은 중앙의 노예 경매를 위한 큰 단 하나가 고작이었고 나머지는 그 주변을 둘러선 큰 공터에 아침부터 주변에서 몰려온 노예 상인들이나 가디언 중개인들이 각자 가져와 주변에 설치하는 이동용 건물들이나 간판들이 전부였다.
카렐을 일단 밖에 세워놓은 티틀은 와튼이 적어준 쪽지를 손에 쥐고 노예 상인 구역 한 귀퉁이의 작은 이동 사무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디밀었다. 조그만 몸집에 주름이 잔뜩 진 얼굴을 한 지저분한 몰골의 여자 하나가 주변을 청소하던 노예들에게 아침부터 한참 신경질을 부이던 참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온 이 촌 청년을 한 번 째려보았다.
"아직 개장 시간은 30분이나 남았다구,"
"저, 어, 와튼 소개받고 왔는데요."
한참 신경질 부리던 여자의 표정이 소개받고 왔다는 말에 갑자기 싹 풀어졌다.
"아아, 네가 티틀인가 하는 친구냐? 좀 기다려. 개장 전엔 제일 바쁘단 말이야."
"그럼 기다리죠, 뭐."
티틀은 뎀의 사무실 옆의 우리에 갇혀있는 노예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악취가 풍기는 철창 안에 맥없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들이 가디언들인가요?"
"가디언? 천만에, 가디언 중개 면허는 귀족 놈들이 다 독차지하고 있거든. 그러고 이렇게 형편없는 용모의 가디언들이 어딨어. 게다가 가디언들을 우리에 가뒀다간 무슨 꼴을 당하려구,"
"예?"
뎀이 티틀에게 갑자기 바싹 다가오더니 입을 붙이고 말했다.
"가디언은 최소한 10년은 수련해야 만들어진다구. 아기 때부터 별도 관리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수련장에 따라선 웬만한 시민 하나 평생 교육시키기보다 돈이 몇 배는 더 드는 곳도 있어. 같은 등급의 가디언이어도 어디서 등록되었냐에 따라서 팔찌의 색깔이 달라지거든. 좋은 데서 수련했다는 건 그만큼 품질이 좋은 유전자 은행에서 나왔다는 뜻이고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거지. 그래서 값이 비싸. 수련이 잘 되어서 행실이 확실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에."
티틀이 뎀의 지독한 입냄새를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와튼이 제가 부탁한 가디언을 팔아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거야 기꺼이 해 주지. 내가 직접 취급은 않지만 좋은 가격 정도는 받아줄 수도 있어."
티틀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등급하고 수련지가 어디야?"
"몰라요."
"이런,"
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팔찌 색깔은?"
"파란색이요."
"파란색? 오호......그럼 자이센 가문 수련장 출신인데? 허,......등급이 문제네."
"팔찌가 고장났을지도?"
"그런가보지, 요즘 팔찌 고장난 게 가끔 나와서 매일 가디언 등록 명부 뒤지느라 고생한다고들 하던데."
"그렇군요......거기 출신이면 가격이 높은가요?"
뎀이 티틀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대꾸했다.
"뭐 비슷비슷해. 등급 따라가는 거지 뭐."
티틀은 이 늙은 여자의 오락가락 하는 말투가 영 믿음이 가지 않는지 갑자기 입을 씰룩거렸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그였지만 눈앞의 이 늙은 여자가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틀림없이 아니었다.
그런 티틀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뎀이 그의 손을 다짜고짜 붙들고 밖으로 잡아끌었다.
"직접 봐야 알지. 어떤 놈인지 한번 보자."
"직접 취급 안하신다면서요?"
"품질을 알아야 적정한 가격에서 흥정을 할 거 아냐?"
"좀 있다가 개장하거든 봐요."
기분이 적잖이 상한 티틀은 뎀의 손을 겨우 떨쳐버리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노예 상인들은 질이 낮습니다. 그들은 되도록 상대 안하시는 게 좋습니다. 차라리 직접 가디언 중개인들을 만나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들은 대개 인텔리들이죠."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카렐이 떱떠름한 표정으로 나오는 티틀에게 한마디 던졌다.
약간은 머쓱해진 티틀은 카렐을 놔두고 이번엔 시장 반대편에 간이 사무실을 차려놓은 한 가디언 중개인에게 직접 찾아갔다. 중개인의 사무실 구석에는 중무장을 한 화려한 복장의 가디언 네 명이 무표정하게 서서 상인 조수가 해주는 정성스런 몸단장을 받고 있었다.
꽤 고급스런 사무실 분위기와 마치 보물 다루듯 조심조심하는 조수의 태도를 보아서 가디언이라는 존재들이 와튼 말마따나 부유한 시민계급의 최고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디언들은 얼핏 무표정해 보였지만 맥풀린 노예들과는 달리 눈에서는 살기가 뻗치고 있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단한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 나란히 서 본 티틀은 그들의 키와 카렐의 키를 어림해 비교하며 화들짝 놀랐다.
"그 녀석 키는 꽤 크네......"
"말씀하신 대로라면,"
깔끔한 차림새의 젊은 중개인은 무슨 규정집인 듯한 책을 한참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그건 당신 소유가 확실하군요. 그런 규정도 알고 있다면 나이하고 경험도 꽤 있는 가디언일텐데, 등급이 상당하겠군요."
중개인은 쪽지에 무어라 적어 넣으며 대답했다. 티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등급은 팔찌를 분석해서 명부 검색하면 알 수 있을 테고......자이센 가문 수련장 출신이면 값은......동급의 타 수련장 출신보다 다섯 배 더 쳐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사겠습니다. 최고가로 쳐드리죠. 자이센 가문 출신 가디언을 매입할 능력 있는 사람은 흔치않을 겁니다."
티틀은 물을 마시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가다듬었다. 그는 내심 '봉'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도대체 얼마 정도에서 가격이 나올지 벌써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거기 가디언들은 머리도 똑똑한가요?"
"머리요?"
중개인은 머리를 조금 긁적거렸다.
"글쎄, 보통의 가디언들은 무술과 예절 이외의 별도 교육은 시키지 않죠. 하지만......"
"하지만?"
"근위대에선 정규군 부대에서도 지휘관들은 가디언들이죠. 5등급 이상의 가디언들은 장군 대우와 함께 관직이 부여되구요. 시민보다 나은 셈이죠. 아예 한술 더 떠서 황실까지 주무르는 근위대장 베흔도 가디언이고......지난번에 죽은 자이센 수련장 수석 가디언 카렐 같은 경우도 그랬고......그 정도 가디언이면 제가 여기 죽은 듯 엎드려있어야 될걸요. 가디언이라고 다 같은 가디언이 아니죠."
중개인은 유명한 페로 가디언을 소유했다는 티틀의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잡아보려는 듯 별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까지 하며 티틀을 계속 붙들어두었다.
"카렐이요?"
"자이센 수련장하고 황제 수련장에서 공동으로 길러낸 최고의 가디언이었죠. 어떻게 길러졌는지는 아직까지 불가사의지만 특등급하고도 비교할 방법이 없어서 그 친구는 등급을 매기지 않은 채로 총리가 직접 데리고있었습니다. 이젠 죽었지만 그전까지 저 세상으로 보낸 게 가디언만 수천이 넘는다니까......무시무시한 살인 기계였죠. 뭐, 그 정도 가디언들이라면 아예 가격 자체가 의미가 없죠. 아, 얘기가 밖으로 빠져나갔군, 어쨌든 거기 출신이면 최하 50등급이어도 7만 골드는 드리죠."
"예에?"
떨리는 가슴을 겨우 가라앉힌 티틀은 허둥지둥 밖으로 돌아 나왔다.
7만 골드면 도시의 주택 두세 채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것도 최하 등급이 그 가격이라면 그보다 윗등급은 말할 것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데리고 있는 가디언의 가격을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된 티틀은 멍 한 표정으로 카렐에게 돌아왔다.
카렐은 그 위치에 여전히 서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뭡니까?"
"네 등급 말이야,"
굳어있던 카렐의 표정이 갑자기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구석에서 왁자지껄하며 소란이 벌어지자 둘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노예 시장이 개장된 모양이었다. 이런 광경을 난생 처음 보는 티틀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단상을 올려보았다. 하지만 벌거벗겨진 노예들이 하나씩 끌려나와 경매에 붙여지는 모습에 그의 얼굴은 곧 불쾌감으로 일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럼......가디언 거래도 저렇게 되나?"
"아닙니다. 가디언 거래는 경매가 아니고 중개인을 통해 매수인과 일대일로 합니다."
"그렇군......"
"헉!"
단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카렐의 입에서 여지껏 들어본 일없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자 깜짝 놀란 티틀도 그편을 쳐다보았다. 온몸이 매질로 엉망이 된 미녀 한 명이 끌려나와 세워지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에 옅은 갈색빛이 감도는 피부,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와 흠잡을 데 없는 탄력 있는 몸매를 지닌 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어린 미녀는 이런 시장에 나와 본 일은 한번도 없는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어찌할바를 모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제엔장, 저게 뭐야."
티틀이 그나마 더 일그러든 표정을 지었다. 경매꾼이 단하에 모인 손님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페로 자이센 총리 공관에 있던 미녀입니다. 이름은 솔. 거래는 2000부터 시작합니다."
"페로 자이센? 너하고 같이 있던 노예겠네?"
카렐이 조용히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매질로 조금 망가졌지만 워낙 용모가 빼어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솔의 모습에 처음부터 넋이 빠져버린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시민 하나는 집 한 채 가격에 맞먹는 2만까지도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가격이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솔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울고 있었다.
경매꾼은 그런 솔의 턱을 강제로 추켜 올리며 그 빼어난 얼굴을 주변에 모여선 사람들에게 빙 둘러 보였다.
"공용어는 물론이고 기초적인 고대어도 읽을 줄 압니다. 장난감이나 창녀로 거의 비교할 바가 없는 최고 품질입니다. 페로 관에 있던 노예니 그 수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게다가 아직 처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웅성대며 일제히 가격을 더 올려가기 시작했다. 경매꾼이 처녀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가자 기겁을 하며 놀란 솔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카렐이 망토 속으로 얼굴을 깊이 감추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심코 카렐을 돌아본 티틀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고 있는 무시무시한 카렐의 표정을 난생처음 보고 말았다. 카렐의 오른손은 이미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깨달은 티틀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거기, 검정옷,"
단상의 경매꾼 옆에 서 있던 로카가 구경꾼 중에 제일 허름한 차림새로 서 있던 티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 저요?"
"너만 가격을 안 불렀다. 얼마 낼 거지?"
"저, 전 돈이 없어서......"
"여기 온 이상 누구든 값은 불러야 해."
"전 가난한 촌에서 와서......한 푼도 없는뎁쇼......"
"1을 걸어보십시오."
카렐이 갑자기 티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페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노예를 '처분'하는 평소 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있던 카렐에게 충분히 해봄직한 선택이었다.
"엉?"
"한 번 해보십시오. 빨리요."
카렐의 그답지 않은 간곡한 재촉에 티틀은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1이요."
티틀이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경매꾼에게 소리쳤다.
"낙찰!"
빈민굴 냄새를 빤히 풍기는 티틀의 형편없는 차림새에 만족한 로카가 씨익 웃으며 징을 두들겼다.
"너 검정옷이 가져가. 이년은 최하가 낙찰이었어."
"예에?"
티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돈이......실은 1골드도 없는데....."
"그냥 가져가. 대신 1년간은 거래 금지야."
경매꾼 조수들이 질질 끌고 온 솔을 티틀 옆에 거칠게 동댕이쳤다. 다시 울기 시작한 솔은 흙바닥에서 일어날 기운도 없는지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응?"
경매 단에서 내려오던 로카가 낯익은 모습을 발견했는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티틀 옆에 서 있던 카렐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잽싸게 천막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 로카는 별것 아니라 판단했는지 노예 시장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로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카렐이 다시 티틀 옆으로 다가왔다. 티틀은 쓰러진 솔 앞에 멍 하니 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도대체.....이게 뭐야? 나한테 노예라니?"
"거래 금지 조건이 붙은 최하가 낙찰은 이 노예에 대한 전 주인의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바닥에서 울고있던 솔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갑자기 위를 올려보았다. 그는 카렐의 망토 그늘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회색빛 눈동자를 넋나간 듯 올려보고 있었다.
"나다."
카렐이 자리에 쭈그려 앉으며 쓰러져있던 솔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카......"
다시 울음을 터뜨린 그는 이 무서운 가디언의 가슴을 그대로 와락 껴안고 말았다.
"아무 얘기도 하지 마라."
카렐이 무서운 눈으로 대뜸 솔을 내려다보자 그 매서운 눈초리에 그는 입을 꾹 다물며 안았던 손을 풀고 말았다.
카렐이 솔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마라. 내 이름도 비밀이다. 알겠냐?"
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렐의 얼굴에 뺨을 부볐다. 단상에선 또 다른 거래가 진행되고 있었다.
티틀은 옆의 한 천막에서 내버린 천조각을 가져다가 벌거벗은 솔의 몸을 감싸주었다.
"저보다는 이 여자가 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카렐은 기진맥진한 솔을 등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티틀의 뒤를 따랐다.
조금 늦게 열린 가디언 시장엔 이미 십여 명의 건장한 가디언들과 처음 시장에 나온 견습 가디언들이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었다. 그들을 빙 둘러본 티틀은 솔은 업고 서 있던 카렐을 힐끗 쳐다보았다. 방식이야 어쨌든 사람을 사고 판다는 사실에 그의 가슴속엔 이런저런 갈등이 맴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티틀이 한숨을 쉬며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자."
"......"
사람을 파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는지 티틀이 결국 뒤로 돌아서고 말았다. 카렐은 다시 아무 말 없이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시내를 걷던 카렐은 갑자기 무언가 의식했는지 솔의 얼굴을 천으로 푹 덮어 가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걸었을 즈음에야 티틀은 일행의 뒤를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돌아보지 마십시오."
갑자기 불안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한 티틀에게 카렐이 등에 눈이라도 달린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돌아보다 눈이 마주치면 상대의 도전을 받아준다는 뜻입니다. 모르는 척 가다보면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대로 따라오십시오."
이미 겁에 질려있던 티틀은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형편없는' 가디언이지만 지금 이 순간 기댈 건 이 녀석밖에는 없었다.
길거리가 조금 덜 북적거리게 되자 이편을 따라오는 자들이 누군지 구분이 가기 시작했다. 세 명의 가디언과 주인이 일행의 뒤를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쫓고 있었다. 거의 사색이 다 된 티틀이 카렐에게 물었다.
"나, 어떡해야 하지? 응? 가디언이 3명이나 돼, 이걸 어째,"
"......제 앞에 서십시오. 제가 뒤로 가겠습니다."
카렐은 등에 업고있던 솔을 한 팔에 안아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그 몸을 천으로 감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솔은 카렐의 목을 꼭 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연신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으악!"
뒤에서 난 비명 소리에 놀란 티틀이 뒤쪽을 얼른 돌아보자 카렐이 얼른 그의 눈을 가렸다.
"뭐, 뭐야, 왜 그래?"
"놈들이 행인 하나를 쓰러뜨리고 소지품을 강탈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협박하려는 것 같습니다."
티틀의 눈을 가린 카렐의 망토 자락 뒤로 피떡이 되어 쓰러진 여자와 그에게서 소지품을 빼앗고 있는 가디언의 모습이 보였다.
"으, 으악,"
겁에 질려 도망가려던 티틀은 뒷덜미를 거칠게 나꿔채는 카렐의 손아귀 힘에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 하고 말았다. 카렐이 버둥대는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도망치면 놈들이 곧바로 뒤에서 공격해옵니다. 그래도 도망치시겠읍니까?"
"하, 하지만......대책이 없잖아......"
"제가 싸우기 시작하면 이 여자를 데리고 그때 도망가십시오."
"무, 어? 싸우려고?"
"필요하다면."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꾸하며 허리에 찬 칼자루를 한 손으로 조용히 붙잡았다.
일행은 어느덧 도시 외곽 황무지로 벗어나 있었다. 행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 가디언 무리는 여전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간격을 좁혀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선 카렐은 솔을 티틀에게 기대 세워주었다. 때맞춰 뒤에서 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그 노예는 내가 차지할 거였어. 그러니 죽기 전에 빨리 내놔."
카렐이 티틀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티틀은 하는 수 없이 솔을 붙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날 지나쳐서 쫓아가 보겠나? 포렐?"
카렐이 망토를 벗어 내던지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자신들이 겁없이 쫓아온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깨달은 그들의 표정이 순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한번 돌아보지 조차 않고 정신없이 도망쳤던 티틀은 정든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헉, 헉, 그런데......그 사람은......"
맘만 같아서는 카렐을 조금이라도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그런 상황을 버티기는 틀림없이 무리인 그의 새가슴으로는 그러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솔을 데리고 움막에 들어섰다.
"망할, 이걸 어쩌지? 십중팔구 그 사람도 당했을 거야......놈들은 넷이나 되었는데......아이구......여기까지 쫓아오면 어쩌지......"
티틀이 걱정스런 얼굴로 솔을 내려보았지만 이 여자 노예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 도리어 혼자 싱글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생명의 은인이 싸우러 나갔는데도 걱정하기는커녕 웃어대고 있는 모습에 황당해진 티틀은 그에게 한마디하려다가 문밖에서 난 인기척에 깜짝 놀라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나무문이 끼익 하며 열렸다.
"으익,"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다행히 침입자는 아닌, 평소에는 그리도 듣기 싫던 쇳소리 같은 카렐의 목소리였다. 그 잠깐 새 일을 해결하고 돌아왔는지 카렐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와 함께 온 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젠장할."
십년감수한 티틀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표정의 카렐은 품속에서 웬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물 한 컵을 들이키더니 도로 나가버렸다.
티틀은 그제야 카렐의 신발에 묻어있는 생생한 피얼룩을 보았다.
"이, 이봐,"
티틀이 급히 그를 쫓아나갔다. 자기 천막으로 들어가려던 카렐이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이 주머니는 뭔데?"
"......녀석들이 갖고있던 돈입니다. 7150 골드입니다."
"그, 그놈들은?"
"......항복하길래 돈만 받고 되돌려보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곳까지 절대 찾아오지 못할 테니."
"으, 응, 그래......?"
티틀이 잠시나마 놀랐던 가슴을 다시 쓸어 내렸다.
그 쫓아오던 놈들은 생각보다 시답잖은 놈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그를 짓눌렀던 공포가 사라진 티틀의 머릿속에는 무려 7천 골드의 어마어마한 거금이 공짜로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오르고 있었다.
저 가디언을 팔러나갔던 도시 구경이 결코 밑진 장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티틀은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당했군."
근위대 정복을 입은 베흔이 바닥에 흩어진 시체들을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카렐만큼이나 큰 키에 다부진 체격, 잘 다듬은 콧수염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이 당당한 미남자는 함께 나온 이십 여명의 근위대원들과 함께 흉악범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3번 도시 남동쪽 외곽의 황무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기원 59년 X군단의 쿠데타를 주도하고 제국을 성립시킨 이래, 그는 지금까지 4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모든 가디언들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황실의 수호자로서 굳건한 지위를 지켜온, 문무를 겸비한 가히 최고의 가디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물론 황실의 권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로도 22만에 달하는 황실 근위대의 총 지휘관으로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그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황제령은 물론이고 근위대 파견군이 나가있는 4개의 제후 지역들까지 한 손에 쥐고 황제의 이름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오던 터였다.
세나우스 3세 황제의 붕어로 가뜩이나 민심도 뒤숭숭하던 차에 '걱정스러울 정도로' 막강한 자이센 가문의 영향권이라고 할 수 있는 3번 도시에 분위기도 파악할 겸 잠시 나와있던 그는 도시 인근에서 오랫동안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흉악범의 끔찍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혹시 자이센 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직접 나와 둘러보고 있었다.
베흔의 부하 가디언인 수에보가 바닥에 구르고있던 머리 한 개를 뒤집어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포렐 일당입니다. 살인 청부에 노예 불법 매매, 인육 거래까지 못된 짓은 안 해본 게 없는 놈입니다."
"포렐이라......그러면 내가 알기론 그 녀석의 가디언들은 3등급 하나에 5등급 두 명인데......이 지경으로 당하다니, 상대는 몇 명 정도였지?"
"......하나입니다."
"하나라구?"
베흔이 얼굴을 찌푸렸다.
"농담이겠지."
"정말로 하나입니다. 족적이 한 명분밖에 안됩니다. 주인인 포렐이 가디언 팔찌의 메모리 기능을 고의로 꺼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죽였는지 추적도 안되고..... 게다가......"
"게다가?"
"족적 개수와 형태로 보아서 가디언 셋 모두 탐색전도 없이 단칼에 당한 것 같습니다. 카렐 녀석이 잘 구사하던 덴쿠스텝과 일치하는 걸로 보아서 페로 가디언이 아닐까 합니다."
베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에보가 바닥의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베흔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나......특등급이라고 해도 1등급 둘을 당해내긴 힘든데......이렇게 시체까지 산산조각을 내 놓았는데....."
"카렐 녀석 귀신이라도 나타난 모양입니다."
수에보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지만 베흔은 웬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총리인 페로 녀석은 며칠 전 자신의 가디언 카렐이 도적떼의 손에 죽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어리숙한 베흔은 아니었다.
후계자 없이 황제가 죽으면서 조만간 제국의 권력 구도가 재편될 것이 뻔한 이 예민한 시국에서 페로같이 똑똑한 놈이 가장 믿을만한 심복인 카렐을 기껏 도적떼 사냥 정도에 내보내 죽게 놔두었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도 페로와 카렐은 보통의 '주인과 가디언 사이'가 결코 아니었다.
"여긴 가디언들이 결투 벌일만한 장소도 아닌데......이 길을 죽 따라가면 뭐가 있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응?"
"꽤 떨어진 곳에 촌놈들이 사는 부락이 몇 개 있고 조금 더 가면 숲사람들 서식지역입니다."
베흔은 자신의 붉고 반짝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멀리 산중턱에 보이는 빈민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