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화 (4/1,132)

< -- 4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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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동안 숲 속으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던 카렐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큰 털가죽 몇 장을 어깨에 짊어진 채 모습을 나타냈다. 뻣뻣한 평소 성격처럼 변변한 설명 한마디 없이 자기 천막 안으로 사라져버린 카렐은 밤늦게까지 호롱불을 켜 놓은 채 혼자서 '무언가' 하는 모양이었다.

이웃의 친구 집에 놀러가 버린 티틀 때문에 저녁 내내 혼자 집을 지키던 솔은 용기를 내 카렐의 천막에 다가가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저어......들어가도 돼요?"

"맘대로 해."

카렐은 천막 안으로 기어 들어온 솔을 힐끗 쳐다보았다. 낮에 입고있던 검은 수트와 망토를 모두 벗어놓은 카렐은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한구석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큰 바늘과 가위로 털가죽을 잘라 엮는 솜씨가 꽤 능숙한 걸 보아서 전에도 많이 해 보았던 일인 모양이었다. 털을 손질하는 그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구경하던 솔이 카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디 쓰실 거죠?"

"......"

"이불 같네요?"

"그래."

카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솔이 꿇어앉아 가죽을 만져보며 카렐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무슨 가죽인데요?"

"여우털이다."

"우와, 되게 크네......몇 장이나 붙인 거예요?"

"5장."

카렐은 손질이 끝난 모피를 쫙 펼쳐 자기의 침상 위에 펼쳐놓았다. 두세 사람 겨우 누울만한 움막 중간에 작은 화덕이 희미한 불빛을 뿜고있었다. 솔의 시선은 작은 침상 머리에 꽂혀 있는 몇 송이의 들꽃에 가서 멎었다. 그 향기를 맡으며 잠시 미소지었던 솔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작게 물었다.

"저......오늘 여기서 자도 되나요?"

"노예는 주인집에 함께 기거할 권리가 있다."

카렐은 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의 카타나를 갑자기 죽 뽑았다. 번쩍이는 녹색빛 칼날에 카렐의 부릅뜬 회색 눈동자가 반사되고 있었다. 자기 앞으로 칼끝이 오자 솔이 놀랐는지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났다. 칼날을 살펴보던 카렐은 몇 개의 공구를 꺼내 직접 날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칼을 쓰고 돌아온 날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작업이었다. 낮에 만난 자들을 '설득해 돌려보냈다'는 카렐의 말은 솔의 예상대로 사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까 카렐 님 눈 색깔이 정말 희한하시네요?"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가 그제서야 솔을 향해 조금 움직였다. 천막 안의 희미한 호롱불이 흔들릴 때마다 카렐의 회색 눈은 마치 오팔처럼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며 그 톤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회색 오팔 눈동자다. 북부에서 희귀하게 나타나는 돌연변이라더군."

"카렐 님은.......북부 사람이 아니시잖아요? 가디언이신데......"

솔의 당연한 호기심에 대한 카렐의 대답은 잡아먹을 듯 매서운 눈초리뿐이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솔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 이불은 이제 네 꺼니까 가져가."

"하지만......"

"솔."

카렐의 번득이는 눈이 확 노려보자 겁을 덜컥 집어먹은 솔이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어요."

이불을 챙기려던 솔은 카렐 쪽을 한 번 더 힐끗 쳐다보았다.

"저어......주인님은 나가셨어요......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데 졸릴 때까지 잠깐만 여기 있어도 안되나요?"

카렐은 칼 손질하는 데 정신이 팔렸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은 일에 열중한 카렐의 앞에 쭈그리고 앉으며 입가에 다시 미소를 띠어 보였다. 희미한 화롯불빛에 솔의 뽀얗고 아름다운 얼굴과 유난히 선해 보이는 짙은 파란색 눈빛이 그 매력을 더해가고 있었지만 카렐은 여전히 무관심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카렐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까 네 사람은 다 죽여버렸나요?"

"......"

"전 주인님은 카렐 님이 싸우다가 도적에게 당했다고 하시던데......"

"......"

"카렐 님이 도적 따위한테 당하실 분이 아니죠. 그렇죠?"

추운 듯 몸을 조금 움츠리는 솔의 모습을 힐끗 바라본 카렐은 화덕에 땔감을 더 넣더니 속을 조금 헤집었다. 화로 속에서 따뜻한 공기가 뿜어 나오자 솔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 얼음장같이 차가운 저 가디언이 속까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이 어린 솔도 이미 잘 알고있었다.

저녁도 굶은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나자 솔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카렐은 눈동자를 날에 고정시킨 채 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카렐이 헤집어놓은 화로 속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던 솔은 그제서야 화로의 뜨거운 재 속에 갈색빛의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예요?"

솔은 잠시 카렐을 바라보았지만 여느 때의 그와 다름없었다.

"난 고구마 같은 건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카렐이 마지못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렐이 자신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고구마를 구웠다는 것을 깨달은 솔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재 속에서 고구마 두 개를 끄집어냈다. 잘 익은 노란 고구마를 벗겨먹으며 솔은 자신에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카렐의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저 그럼 들어가 볼께요. 아욱,"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등에 심한 통증을 느낀 솔이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칼을 손보던 무심한 카렐의 눈동자는 그제야 솔에게로 향했다. 카렐은 칼을 도로 칼집에 넣더니 한곳에 세우고는 솔에게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솔을 돌아 앉힌 카렐은 솔의 웃옷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렸다. 상체가 드러나자 솔이 부끄러운 듯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각목으로 맞았구나. 몇 대나 맞은 거지?"

카렐은 솔의 몸 이곳 저곳을 만져보며 물었다. 솔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몰라요.....그냥 정신없이 맞아서요....."

"뼈가 상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한동안 좀 쉬어야겠다. 온통 멍 투성이구나."

"아파서 못 일어나겠어요."

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카렐은 움막 구석의 가죽 자루를 뒤지더니 병 한 개를 꺼냈다.

"뭐죠?"

카렐은 아무 대답 없이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솔의 등위에 조금 떨어뜨렸다. 상큼한 박하 향이 움막 안에 퍼지자 솔은 뒤에 있는 카렐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카렐은 솔의 허리를 잡아당겨 자기 앞에 엎드리게 했다. 솔은 카렐이 만들어준 여우털 이불 위에 처음으로 몸을 뉘이며 그 부드러운 감촉에 잠시나마 몸을 내맡겼다. 바로 오늘 낮에 네 명의 사람을 잡아죽였던 카렐의 그 큰 손이 이번엔 솔의 멍을 조심스럽게 풀어주고 있었다.

"지난번에 카렐 님이 왜 제 몸엔 손도 안대셨었는지 잘 알아요."

잠시 멈추었던 카렐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렐 님께는 아직 제가 어른으로 안보이시는 거겠죠......안 그런가요?"

"......"

"전 기억해요. 제 전 주인님 집이 도적떼들한테 털리던 때를 말이죠. 전 그때 12살이나 됐었다구요."

카렐은 기름을 조금 더 붓고는 등을 가볍게 주물렀다.

"제 부모님이 도적들에게 돌아가시던 그때도 잘 기억하고 있구요.......더러운 달구지에 억지로 실렸던 것도 기억나요. 그런데 갑자기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는 달구지를 단번에 주먹으로 때려부수는데......얼마나 놀랐던지......"

카렐은 아무 말 없이 솔의 피멍든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카렐 님이 제게 처음 손을 뻗었을 아마 제가 비명을 질렀었죠? 근데 카렐 님이 그러셨어요. '안심해라. 내가 구해줄테니.' 하구요. 그런데 아세요? 솔직히 전 도적떼보다 카렐 님이 더 무서웠어요."

솔이 웃음을 흘렸지만 카렐은 그의 말을 듣고있는지 아닌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때 카렐 님이 절 어깨에 둘러멨을 때 사실 좀 아팠어요. 어찌나 제 다리를 세게 움켜쥐셨는지......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때 카렐 님이 절 어깨에 멘 채로 도적들하고 싸우시던 것도 기억나요. 솔직히요, 그때......너무너무 멋져 보였어요."

"이미 9년 전 일이다."

카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제 21살이나 됐어요. 이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솔이 카렐에게 갑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물었다. 조금 놀란 듯 한 카렐의 눈은 이 나이 어린 아가씨의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을 거쳐 탄력 있는 가슴으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솔은 그 무표정하던 카렐의 흰 얼굴이 어느새 조금 붉게 상기되어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카렐의 기름 묻은 거친 손을 살며시 붙든 솔은 그 손가락 끝을 조심스레 가슴에 가져갔다. 미끌거리는 박하유의 감촉이 솔의 아직 옅은 분홍빛 유두 끝을 부드럽게 자극하고 있었다.

"왜 절 내버려두고 언니만 데리고 들어가셨냐구요......제가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었는데......"

솔의 목소리가 떨리는 호흡과 함께 마치 울먹이듯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단히 악문 카렐의 이 사이로 조금은 거칠어진 숨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난......그럴 자격이 없어. 난 말이다....."

카렐의 더 이상의 속삭임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이마를 기대온 솔에게 또 한번 가로막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어깨 버클에 어느새 살며시 다가온 솔의 손목을 거칠게 붙든 카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라. 오늘밤은 추울 것 같으니까 안에서 따뜻하게 자도록 해. 여긴 네가 자긴 너무 춥다."

솔에게서 천천히 손을 뗀 카렐은 박하유가 묻은 손을 천조각에 닦으며 결국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솔은 눈앞의 이 매정한 사람을 잠시 애타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완전히 옆으로 돌아앉은 카렐은 더 이상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빨리 나가라."

카렐의 재촉에 결국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솔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그가 만들어준 여우털 이불을 품에 끌어안고 작은 천막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가 없이 황상께서 승하하셨을 때는,"

연단에 선 대신 한 명이 모두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황궁의 대회의실에 백여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모인 채 이미 몇 시간째 똑같은 내용만을 반복해가며 설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흰 비단포에 내각의 수장을 뜻하는 화려한 금색 조복까지 갖추어 입고 중앙의 상석에 앉아있던 페로 자이센 총리는 이런 소모적인 설전이 심히 듣기 싫은지 아까부터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딴 짓만 하던 중이었다.

"총리가 그 자리를 승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장례식도 끝나고 했으니 자이센 총리를 속히 새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정권 이양이 되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른 대신이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섰다.

"후계자가 없다니요! 우리에겐 이미 선대 황제께서 입양해 후계자로 지명한 수우 델루지 경이 계십니다."

"맙소사, 수우 델루지 경이 세상을 즐기며 돌아다니겠다며 사라진지 9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폐하가 돌아가시니 이제 와서 갑자기 나타난 그런 사람에게 제위를 승계시키다니요!"

"그래도 후계 지명은 지명입니다!"

양 당파의 대신들이 침을 튀기며 설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페로는 팔짱을 끼고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각하,"

갑자기 회의실에 들어온 몇 명의 보좌관들이 페로와 대신들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일그러든 페로의 표정을 놀리듯 뚱뚱한 대신 한 명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새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기립하십시오!"

"하여간, 유치하긴,"

페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껏 수우의 귀환을 반대해온 페로를 압박하기 위해 근위대장 베흔 녀석이 그간 제국 어딘가를 멋대로 유람하며 떠돌던 수우를 끝내 찾아내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초강수를 쓴 모양이었다.

바로 이 순간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대신들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몇몇 대신들은 수우를 반기는 의미에서 즉시 일어섰고, 페로를 지지하는 측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쪽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머지 대신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양쪽 눈치를 보며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페로는 회의실의 문이 열릴 때까지 여전히 딴 짓만 하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십시오."

장대한 체구의 근위대장 베흔이 맨 앞장서 들어오며 문을 열자 그의 뒤를 이어 동안의 청년 한 명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엷은 갈색 머리칼과 파란색 눈동자, 보통 키에 선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얼핏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오랜만이군. 클레모."

청년이 맨 앞장서 달려나온 몇몇 대신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들 중 한 명인 내무대신 펠리페 클레모 경은 아직까지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일어나지 않고 있는 페로를 돌아보며 딴에는 매서운 미소를 던졌다.

하지만 불룩한 배뿐만이 아니고 뺨과 눈가에까지 가득히 기름기가 낀 그의 얼굴은 아무리 좋게 보아줘도 누굴 겁줄만한 위협적인 인상은 되지 못했다.

클레모 대신의 도발이 내심 가소로운 듯 피식 웃음을 지은 페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수우."

페로가 오만한 태도로 다리를 꼬며 말하자 그 차가운 기세에 압도당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수우는 약간 기가 죽은 표정으로 페로에게 이를 드러내며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 오랜만이군. 그 동안 자네 소문 많이 들었네."

"고마워서 감격할 지경이네."

페로가 그제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90년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살았었는지 정말로 궁금하네 그려. 내 소식을 들어왔을 정도면 촌에서 나무뿌리나 캐먹고 살아오지는 않았을 테고?"

"무엄하군요!"

클레모 대신이 페로를 쏘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클레모, 네놈은 까불지 마라. 난 지금 내 어릴 적 친구인 수우와 오랜만에 상봉해 얘기를 나누고있는 것 뿐이야."

페로의 눈이 무섭게 살기를 뿜자 결국 겁을 집어먹은 클레모 대신이 조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보다못한 베흔이 결국 페로의 앞으로 한 발 다가오면서 잠시 둘의 팽팽한 눈싸움이 오가고 있었다.

상급귀족이며 명문가 종장인 총리 페로와, 가디언 신분으로 그간 제국을 쥐락놔락 해온 베흔 이 두 사람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맞수가 될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베흔이 수우에게 방금 전까지 페로가 앉았던 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석에 앉으시지요. 전하."

"누구 맘대로?"

페로의 대꾸에 회의실 안에 갑자기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상석에 오르려던 수우가 겁을 먹었는지 움찔 했다. 페로가 모두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자기의 의무를 포기했으면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선대 황제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이후로 나라꼴이 어디 한번이라도 제대로 돌아간 일이 있었나? 그때 '질서'를 세웠어야 할 황제는 주색에 빠져서 세상을 돌보기는커녕 더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고, 그 후계자란 녀석은 황제가 공부하라며 내려준 자금을 다 챙겨서 자유롭게 놀면서 살고싶다는 명목으로 잠적해버렸지."

페로의 살벌한 기세에 대신들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흔들리던 '질서'를 잡은 게 누군가? 수백의 가디언을 잃어가면서 전쟁만 일으키던 그 쓰레기 같은 종족들을 싹 쓸어 노예로 얽어버리고, 황제령에서 도적떼의 씨를 말리고 최소한도의 치안이나마 잡은 게 누구냐는 말이다. 앙? 그게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간 바람둥이 변태성욕자 수우인가? 아니면 그를 이용해 권력을 움켜쥐려는 이 뚱돼지 클레모 대신인가? 대답을 하란 말이야!"

페로의 이마에 어느새 선명한 핏발이 서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수우의 앞은 이미 베흔이 막아서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회의실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그 앞에 대기하던 십여 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무장을 한 채 회의실 안에 난입해 들어왔다. 그들의 악명을 모를 리 없는 수우 편 대신들이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하면서 회의실 안에는 순간 공포 분위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지킵니다. 다른 가디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베흔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가 없으니 근위대도 없다."

페로가 태연스럽게 상석에 다시 앉았다. 베흔의 눈짓과 함께 다시 십여 명의 근위대의 가디언들이 달려나와 페로 가디언들의 앞을 막아섰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팽팽한 긴장이 잠시간 감돌았다.

"보기 싫으니까 가디언들은 모두 다 내보내."

페로가 내뱉었다. 베흔도 그의 이 '협상안'에 동의한 건지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따라나가라 눈짓을 보냈다. 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회의를 너무 오래 끌었어, 이제 그만 끝내지."

그대로 가방을 챙겨든 페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을 따르는 대신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페로와 함께 반 정도의 대신들이 빠져나가 버리면서 회의는 갑자기 썰렁해지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무래도 페로를 말로 설복하기는 힘들 듯 합니다."

한숨을 푹 내쉰 베흔이 멍해진 표정으로 서 있던 수우에게 달래듯 말을 건넸다.

프라임 지역 중심부의 1번 도시에 위치한 황궁은 그 거대한 규모와 170층에 달하는 높이만으로도 주변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제국의 명멸에 따라 그 명암을 달리해온 그런 곳이었다.

이곳은 북부제후군의 공격으로 황제 세나우스 1세가 피살당하고 하마터면 황실이 몰락할 뻔했던 서기 97년에 지하층만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어버린 치욕적인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다.

이후 그 딸인 세나우스 2세의 명으로 다시 지어진 이 새 황궁은 그때의 악몽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노력의 소산이기도 했다.

비행체까지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에너지 장벽을 비롯한 최고의 보안 기술과 건축술의 총 집합인 황궁, 특히 일반인은 물론이고 엔간한 귀족까지도 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상층부는 그 비밀스러움과 호사스러움으로 인해 갖은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황궁은 그 아들인 세나우스 3세를 거쳐 이제 또 다른 새 황제를 맞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옛 황제의 침소이기도 했던 150층에 도착한 수우는 베흔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많이 심난한지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곳곳에 서 있던 많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베흔과 수우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지만 이런 분위기 역시 많이 어색한지 수우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침실 문 앞에 도착한 수우가 베흔을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어떻게들 되었지? 옛날 신하들이나 장군들이나......"

베흔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쿠겔 대신은 전하께서 사라지고 나신 직후에 모반죄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왜......"

"페로 경이 선대 폐하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변했습니다. 의심스러운 증거들뿐이었지만 폐하께선 페로 경 편을 드셨습니다. 슈엘러 경은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다시 재산을 구하려고 한 유지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뜻밖의 패배를 당해 그 자리에서 참살 당했습니다."

"그리고?"

"바누 경은 40년 전 페로 경 축출 계획을 주도했다가 발각되어서 북부제후지역으로 도피했지만 얼마 못 가 뒤를 추적해 온 페로 가디언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동참했던 아센 경도 페로 가디언들에게 가디언 모두가 참살 당하고 혼자 살아 바누 경과 함께 도망쳤다가......역시 페로 가디언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지아중 경은 페로 가디언들에게 기습을 당해 숲으로 도망쳤지만 숲사람들에게 잡혀서 고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우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카렐은?"

"......40년 전 선대 폐하께서 도적을 섬멸한 대가로 페로에게 하사하셔서 그 뒤로 근위대를 떠나 그쪽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탄식을 내뱉은 수우가 눈을 감았다.

"바누 경과 아센 경을 추적해 암살한 것이 카렐이었습니다. 모두......손으로 목뼈를 부숴 죽였습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수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렐이 그렇게......무서운가?"

"카렐의 잔혹함에 관해선 모르고 계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수우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흔이 한마디 더 보탰다.

"지금의 카렐은 150년 전 전하와 같이 뛰놀던 그 열살 계집아이가 아닙니다. 무서운 살인 기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완전히 거세되었다는 건 아시겠죠?"

"카렐도 그렇게 했나?"

수우의 눈이 갑자기 빛을 뿜었다. 그를 힐끗 돌아본 베흔이 평소보다 훨씬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디언이니 당연합니다. 10살에 제가 직접 했습니다. 생식기는 물론이고 관련된 내분비선까지 모두 제거했습니다. 2차 성징이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가디언에게 이식하는 스테로이드계 호르몬 분비 기관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여자일지 모르지만 그 몸은 다른 가디언과 마찬가지로 아무 성별도 없는 무성(無性)의 존재입니다."

머뭇거리던 수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노예 불법 거래와 인육 매매를 하던 포렐 일당이 누군가에게 참살 당했는데 두목인 포렐은 온몸이 다섯 조각도 넘게 갈갈이 찢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반쯤 죽인 후 머리와 사지를 힘으로 비틀어 끊어냈던 모양입니다.....카렐이 아주 악독한 적을 죽인 후 시체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는 일이 가끔 있던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카렐에게 훈련받은 페로 가디언들이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놈이 어떤 녀석인지 아시겠습니까?"

"카렐을 그렇게 만든 건 자네 아니었던가?"

수우의 지적에 베흔이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다.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카렐은 가디언으로 만들어졌으니 전하께서도 더 이상은 생각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왜 생각해선 안되지? 자네 말 대로라면 나의 가장 무서운 적이어야 하는데."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뭐?"

수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페로 말로는 친척을 호위하다가 불의의 기습을 당해 죽었다고 하지만 믿기는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페로가 모종의 음모를 위해 스스로 폐기 처분했던가 죽은 것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더 크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 세작들을 동원해서 그 사건의 전말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수우는 또다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꽤 한참 동안 조용하던 그가 약간 메인 목소리로 바깥을 바라보며 물었다.

"페로의 요즘 동향은?"

"여전합니다. 정선된 유전자의 가디언들을 키우고 있고 이미 6명의 특급을 보유했습니다. 근위대에 특급이 7명이니 거의 맞먹는 수준까지 올라온 셈입니다."

"거기에 만약 카렐까지 살아있다면?"

"......카렐이 살아있다면 저희로서는 많이 어려워집니다."

"......"

"여전히 도적떼 소탕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고 요즘은 서부 제후 지역에 대규모 식량 단지 조성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역시......녀석은 어릴 때부터 지도자 기질을 타고났었어......"

"하지만 황제는 수우 님입니다."

수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온 수우는 옛날 황제가 쓰던 150층의 호사스러운 황제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수우는 그 동안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던 이곳을 빙 둘러보았다. 중앙에는 족히 대여섯 명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음직한 비단 침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자그만 연못과 조각 분수가 보라색의 물을 뿜어냈다.

침대 위를 한참 동안 멍 하니 바라보던 수우가 입을 열었다.

"좀 쉬고싶어."

"그때처럼 해 드릴까요?"

베흔이 약간의 미소를 띠며 수우를 돌아보았다.

"그래,"

수우가 그제서야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베흔이 밖으로 나가고 잠시 후 미녀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수우의 방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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