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6화 (6/1,132)

< -- 6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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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페로 가디언들의 동향이 갑자기 이상합니다."

근위대 특급가디언 시로가 황궁 101층의 자기 집무실에서 서류에 파묻혀있던 베흔에게 직접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이상하다고?"

베흔이 하던 일을 문득 멈추고 그쪽으로 돌아앉았다. 베흔에 이어 근위대 가디언 2인자인 시로는 엔간해서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차분한 성격과 부하들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으로 강력한 권위와 힘의 상징인 베흔과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며 근위대를 이끄는 인물이었다. 그런 신중한 시로가 '이상하다'라고 말할 정도면 무언가 정말로 이상하기는 한 것이 틀림없었다.

"놈들이 3번 도시 근교 촌들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습니다."

"근교 촌이라고?"

"예. 두셋씩 짝을 이루어 다니는 것으로 보아서 아무래도 순찰 내지는 수색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순간 입가를 일그러뜨린 베흔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촌이라......페로 녀석이 촌을 수색한다고? 녀석은 그런 빈민가 잡놈들한테는 관심도 없는 녀석인데?......영 구린내가 나는걸. 놈들이 자주 출몰하는 촌이 어디인가?"

"남쪽의 빈민굴들입니다."

"남쪽이라......오넷 광장이 있던 곳이군. 이거 정말 재밌게 되어 가는걸......카렐하고 관계되었다면 말이야......잠깐,"

무언가가 머릿속을 퍼뜩 스친 베흔이 갑자기 이마를 붙들었다.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던 베흔은 시로에게 조용히 말했다.

"특급들을 집합시켜라. 1급도 10명, 2급 10명을 여기 모이라고 해. 정규군들은 빼고 가디언들만 데려간다. 같이 갈 데가 있다."

3번 도시 남쪽의 넓게 트인 황무지 한중간에 내려선 셔틀에서 중무장한 근위대 가디언들 삼십여명이 우루루 내려섰다. 그들의 앞에는 들짐승들이 뜯어먹다 만 사람의 썩은 시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지난번 이곳에 베흔과 함께 왔던 수에보가 시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였습니다. 지난번의 포렐과 그 가디언들의 시체가 이것들입니다."

베흔이 그 악취 나는 시체들을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족적이 한사람 분밖에 안된다고 그랬었나?"

"예. 확실합니다."

수에보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베흔이 고개를 들어 멀리 구릉지대를 가리켰다.

"저기에도 촌놈들 부락이 있지?"

"예."

"몇 개나 되나?"

"세 개 정도."

"저기로 간다. 모두 나를 따른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던 티틀은 그 큰 물통이 힘에 부치는지 몇 번이고 내려놓고 들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크고 힘도 세 보이는 카렐은 도무지 이런 일은 도와줄 생각도 않고 낮 내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도 않다가는 밤중에야 무슨 유령같이 자기 움막에 불을 밝히는 것이었다.

"제에길, 가디언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이런 거나 도와주지,"

티틀이 물통을 집안에 들여놓으며 결국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주인의 모습에 빙긋이 웃음지은 솔은 티틀이 가져온 물통의 물을 다시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자기가 낑낑대며 두 팔로 겨우 들고 온 물통을 어찌된 일인지 여자인 솔이 한 팔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리자 자존심이 상한 티틀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얼떨결에 자기 소유가 되어버린 저 미녀 노예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해서 어제인가는 와튼 녀석이 '하룻밤만 빌려달라고' 애걸했다가 티틀에게 꿀밤만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고, 밖에 나가기만 하면 추근덕거리는 마을 건달 녀석들 때문에 이젠 엔간해서는 집밖에 내보내는 일도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명색이 주인이라는 티틀이 우물가까지 가서 물을 떠오는 생고생을 떠 안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건 저 노예가 깜짝 놀랄 미모는 접어두고라도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힘까지도 장사라는 사실이었다.

바닥에 앉아 쉬고있던 티틀의 눈은 곧 탁자 위에 놓여있던 껍질이 벗겨진 산양에 가서 멎었다.

"우와, 웬일이야. 어디서 났지?"

"방금 그분이 산양 한 마리를 잡아오셨어요."

"재주도 좋아. 맨날 산짐승도 잡아오고."

티틀이 입맛을 쩝 다시며 식탁에 앉았다.

"가디언은?"

아직 카렐과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본 티틀에게 카렐의 호칭은 그냥 '가디언'이었다.

이런 빈민굴에 카렐 외의 다른 가디언이 있을 턱도 없으니 '가디언'이라는 호칭으로도 어차피 불편한 건 전혀 없었다.

"이 주변 어딘가 계시겠죠. 멀리는 안 계실 거예요."

솔이 창밖을 한 번 둘러보며 뜬금없이 빙긋 미소지었다. 티틀도 같이 내다보았지만 무성한 나무와 수풀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별난 친구네. 그 친구 식사는?"

"이미 드셨어요."

"뭘 줬는데? 집에 먹을 거 없었잖아?"

"산양 간하고 염통만 생으로 드셨어요. 이분 원래 육식만 하시거든요."

솔이 이미 도려내어진 산양의 배를 가리키며 씨익 웃어 보이자 티틀이 온몸을 움츠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이야?"

"항상 생 내장만 드시죠. 지방이 제일 많아서요. 저분 체질이 조금 독특하시거든요."

그제서야 카렐이 매번 고기만 먹고 일어서던 것을 떠올린 티틀은 소름이 잔뜩 돋는지 몸을 연신 손바닥을 부벼댔다.

바깥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건 솔이 칼을 들고 산양의 살점을 발라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산양에 정신이 팔렸던 티틀이 문 밖으로 삐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뭐."

무언지 알아듣기도 힘든 사람들 고함소리에 티틀이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어나와 어디론가도 도망치는 중이었다. 마을 중앙에 있던 경보종이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티틀은 문 앞에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도망쳐요!"

이쪽으로 도망쳐오는 한 마을 주민의 필사적인 고함소리에 티틀은 그제서야 이 소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도적떼다!"

그때까지 집안에 있던 솔이 고함소리에 놀라 소스라치게 놀라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마을 중간으로 밀어닥친 지저분한 대형 화물차에서 땟국물이 흐르는 누더기를 걸친 수십의 무장한 도적떼들이 우루루 내려서고 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 도적떼를 경험해본 솔은 집에 달려들어가 돈주머니부터 뒤지는 티틀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야 돼요! 지금 뭐해요!"

"그, 그 가디언은 어디 있는 거야! 망할! 그놈 가디언 맞아? 이런 때 안 나타나고 뭐해! 살림살이 다 도둑맞게 생겼잖아!"

집과 도적떼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티틀이 애가 타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난번 카렐이 강도들에게서 돈 7천 골드를 빼앗아온 이후로 티틀의 주머니사정도 모처럼 나아져서 집안 살림이 꽤 불어나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놔두고 가야 하는 것에 미련이 남는지 티틀은 여전히 도망갈 생각을 못한 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이쪽을 발견한 십여 명의 도적들이 티틀과 솔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투박해 보이지만 위협적인 큰 칼을 보고는 겁에 질린 티틀의 온몸이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빨리요!"

당황한 솔이 정신나간 주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앞으로 벌러덩 자빠지며 정신을 차린 티틀은 솔을 혼자 내버려두고 허겁지겁 집 뒷켠 풀숲 속으로 냅다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주인님!"

티틀을 따라가려던 솔은 함께 도망치는 것보다는 따로 흩어지는 것이 낫다 판단했는지 이번엔 티틀과 반대편으로 죽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티틀을 도망치게 만드는 새 도적들은 이미 솔의 코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저년 잡아!"

선두에 선 도적이 달아나는 솔을 향해 갈고리를 힘껏 내던졌다. 출발이 늦었던 솔은 변변히 도망도 못해본 채 뒤꿈치를 채이며 앞으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헐떡이며 달려온 도적이 거친 손으로 쓰러진 솔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가슴을 깔고 앉았다.

"어라? 이년 좀 봐? 대단한데,"

비명을 지르는 솔의 얼굴을 확인한 도적이 깜짝 놀라며 그의 얼굴을 좌우로 확인해보고 있었다. 솔이 거칠게 버둥거리며 도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움직이지 마라 솔."

어디선가 들려온 카렐의 목소리에 움찔 한 솔이 급히 몸을 조금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무언가 번쩍 하는 것이 순식간에 날아와 도적의 귀밑을 꿰뚫었다.

단검이 얼굴 앞을 스쳐 날아가자 겁에 질린 솔 역시도 온몸이 잠시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단 한방에 급소를 관통 당한 도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단검의 위력에 밀려 오른쪽으로 벌렁 쓰러져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카렐의 특기라고 듣기만 해 온 단검던지기를 솔도 난생 처음으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늦지 않았구나."

급히 달려왔는지 카렐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도적의 목에 꽂힌 단검을 뽑아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빨리 도망가라. 솔. 내가 시간을 끌어줄테니."

"카렐 님.....몸도 성치 않으신데....."

"잔말 말고 가."

쌀쌀맞게 대꾸한 카렐이 허리에서 카타나를 뽑아들며 도적들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 정신이 없던 솔은 가슴을 짓누른 무거운 시체를 치우고 나무가 우거진 풀숲으로 허둥지둥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솔을 뒤쫓아오던 도적들은 길 중앙을 가로막고 선 예사롭지 않은 카렐의 모습에 잠시 주춤거렸다. 6척 반이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키에 넓은 어깨, 날씬한 허리와 긴 팔다리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단련을 한 몸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카렐은 자기 단검에 범벅이 된 도적의 피를 혀로 한 번 죽 핥더니 갑자기 그 매서운 눈가에 악마적인 미소를 지었다.

"모두 함께 덤벼!"

도적 중 한 놈이 큰 소리로 외쳤다. 숨죽이고 있던 도적들이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일제히 카렐에게 달려들었다.

땅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도망치던 솔은 이번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일군의 사람들의 인기척에 자리에 급히 멈춰 섰다. 하지만 도망가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던 솔의 눈앞에 나타난 건 놀랍게도 제복을 입은 수십의 가디언들이었다.

"어디 급하게 가던 길이셨나?"

솔에게 다정하게 질문을 던진 건 처음 보는 낯선 남자였다. 콧수염을 기른 날카로운 인상의 큰 키의 단정한 미남자가 솔을 내려보며 씨익 웃음짓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매에 압도당한 솔은 자기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들의 자로 재놓은 듯한 큰 키와 놀랄 만큼 탄탄한 근육질 체구들에서 솔은 이들이 가디언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걱정 마라. 널 해치지 않을 테니. 우린 근위대들이다."

입가에 웃음을 지은 베흔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린 솔은 마을에서 홀로 도적들과 싸우고 있을 카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 저기 마을에 도적떼가 나타났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솔의 애원에 베흔이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카렐을 당장 찾아내야 하는 지금 도적떼를 잡아죽이는 시답잖은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명색이 황제령의 치안을 담당하는 근위대로서 도적떼가 코앞에 나타났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베흔은 권력에 대한 탐욕이 유별난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책임까지 저버리는 삼류급 소영웅은 결코 아니었다.

"뭐야.....하필 이런 때......"

"그런데......저어......지나가도 되나요?"

"마음대로."

베흔은 아무 생각 없이 솔을 보내주었다. 계속 도망치는 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베흔이 마을 쪽으로 문득 시선을 돌렸다.

카렐은 나무를 등진 채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삼십여 도적들을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천하의 카렐이었지만 죽기 직전의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성치않은 몸으로 이 많은 놈들을 상대로 몇 분 이상 싸움을 지속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랫배를 엄습하는 통증에 빠른 보법을 무기로 한 특유의 공격을 구사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근근히 현상유지만 하던 카렐은 슬슬 달아날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저가 누가 와!"

반대편 숲에서 다가오는 수십의 수상스런 인기척에 도적들이 움찔 하자 순간, 카렐은 잽싸게 나무를 박차고 뛰쳐 올라 도적들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기랄! 쫓지 마!"

카렐과 싸우던 도적들 역시 바닥에 흩어져있는 십여구가 넘는 동료들의 시체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친구들의 시체를 수습하려던 그들의 등뒤로 때맞춰 베흔을 선두로 수십의 무시무시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베흔 녀석이 방금 3번 도시에 온 모양입니다."

새 수석가디언 다룬이 페로를 갑자기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카렐 일로 가뜩이나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던 페로의 어깨가 순간 들썩했다. 지난번 노예상인녀석이 카렐의 일을 밀고한 이후로 휘하 가디언들을 총동원해 남쪽 빈민가를 뒤지고 있던 페로는 그 신경 쓰이는 녀석의 출현에 내심 기겁을 하고 있었다.

"베흔이?"

"그쪽 세작 보고에 따르자면 오늘 아침에 갑자기 우리 도시 남동쪽 촌에 직접 나와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급들까지 모두 데리고 나간 모양입니다."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가볍게 깨문 페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히 어디지?"

"3441호부터 3443호 부락이 있는 지역입니다. 특급들을 몰고 나간 것으로 짐작됩니다. 베흔 녀석 이외에 근위대 다른 단위부대들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이런 상황에서 특급들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오다니, 그 녀석

답지 않은걸. 우리 특급들을 집합시켜라."

베흔의 출동이 카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페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지시를 내렸다.

"예!"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녀석이 내 구역을 집적거린다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으앗!"

덤불에 숨어있던 솔은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에 기겁을 하고 놀라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그의 몽둥이에 하마터면 얻어맞을 뻔한 카렐이 솔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제서야 카렐의 얼굴을 확인한 솔은 참던 울음을 터뜨리며 카렐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카렐은 심하게 놀란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려 주었다.

한참 지나서야 솔이 울음을 멈추자 카렐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은?"

"몰라요, 집 뒷켠으로 도망가신 모양인데......못 봤지만 잡히신 것 같지는 않아요. 어, 이게 뭐죠?"

카렐을 껴안았던 솔의 팔에 피가 묻어있었다. 망토 속 카렐의 왼팔에서 계속 흘러내리고 있는 피는 적의 몸에서 묻은 건 절대 아니었다.

"맙소사, 피가 나잖아요?"

"심하지 않다."

"아파 보여요."

카렐의 의도적인 무관심에도 솔이 용감하게 그의 팔을 꼭 붙들었다. 솔은 입고있던 옷소매를 찢어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성치않은 몸으로 싸우느라 탈진한 카렐은 나무에 기대앉은 채 그의 손에 팔을 내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가 엄청 많이 나요. 세상에, 칼이 뚫고 지나갔잖아요? 이런 몸으로 왜 싸우셨어요?"

"널......"

무어라 더 말하려던 카렐은 입을 다물며 짐짓 무관심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솔이 상처를 힘껏 눌렀지만 관통상에서 피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이상 피를 닦는 것을 포기한 솔은 결국 입을 가져갔다.

상처에서 오는 따뜻하고 묘한 감촉에 흠칫 놀란 카렐이 눈을 뜨고 솔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팔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입으로 조심스럽게 빨아 삼키고 있었다. 이 뜻밖의 상황에 더 당혹해하고 있는 쪽은 카렐이었다.

그의 경악하고 있는 시선에 솔이 약간 멋적어하며 피묻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입에 묻었다."

카렐이 손을 뻗어 솔의 입술에 묻어있는 자신의 피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솔이 또 한번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웃음은 얼마못가 묘한 긴장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는 카렐의 손끝을 뚫어지게 내려보고 있었다.

"어,"

그의 손끝이 입안으로 살짝 들어오자 솔이 움찔 하며 놀라고 있었다. 나무에 기대며 눈을 지그시 감은 카렐이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침은.....약간 달짝지근하고.....긴장했구나, 맑은 침이 나오고 있는 걸 보니....."

솔은 언젠가 들은 일 있는, 이 특별한 가디언이 손가락으로도 맛을 본다는, 그 특이한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카렐의 가슴에 바싹 기대앉은 솔은 자신의 입안을 더듬는 카렐의 큰 손가락을 마치 혀처럼 느끼며 조심스레 눈을 감았다.

"으, 음,"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눈을 번쩍 뜬 카렐은 어느새 가늘게 몸을 떨고있는 솔을 내려보며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돌아가자. 지금쯤 도적들도 도망갔을 테니.....내 팔은 돌아가서 치료하면 되겠지."

마을이 조용해지자 집으로 서둘러 돌아온 티틀은 자기 집 마당에 모여선 수십 명의 건장한 무사들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가디언들 중앙에 있던 베흔은 먼저 카렐이 죽였던 시체들과 티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의 뒤편에는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근위대에 체포된 도적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있었다.

도적떼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현장에서 참살하는 페로 가디언에 비하면 근위대에 잡혀 형식적이나마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된 이 도적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베흔이 시체들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사뭇 쌀쌀맞은 말투로 티틀에게 물었다.

"네가 이렇게 했나?"

"아, 아니요. 전 그냥......"

"아니면 너희 집에 있다는 그 가디언이 이렇게 했나?"

"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거구의 무사가 지난번 들었던 그 무시무시한 근위대장 '베흔'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티틀은 그의 추궁에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저 녀석들이 그러더군, 이 집 가디언이 그랬다고. 시커먼 망토를 입은 덩치가 사자만한 놈이라고 말이야."

"그, 그 친구는......그냥......"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나?"

베흔이 눈을 부릅떴다.

"모르겠어요, 워낙 보이다가 안보이다가 해서......"

"닥쳐."

특등급 가디언 쿠베가 계속 무성의한 대답으로 일관하던 티틀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 팔로 번쩍 들어올리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다시 묻겠다. 그놈 지금 어디 있나?"

"정말 몰라요. 정말로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티틀이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또 모른다고 한 번 답할 때마다 네 사지를 하나씩 잘라내 주마."

쿠베의 거대한 세이버 날이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히자 티틀은 그대로 호흡까지 멈추고 벌벌 떨기만 했다.

"네 가디언은 어딨나?"

베흔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저, 전 정말로......"

쿠베가 칼날을 치켜들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칼날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던 티틀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까무러쳐 버렸다.

"그 칼을 휘두르면 다음은 네 목이다."

티틀을 움켜쥐고 있던 쿠베가 순간 몸을 움찔 했다. 풀숲에서 순식간에 달려나온 카렐의 모습에 오두막 앞에 모여있던 황제 가디언들이 일제히 칼에 손을 가져가며 사방으로 쫙 흩어졌다. 미처 피하지도 못한 쿠베의 목에는 어느새 번득이는 날의 카타나가 얹혀 있었다. 시커먼 망토로 얼굴을 가린 카렐은 그들을 한 번 빙 돌아보았다.

"카렐이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몇몇 가디언들이 벌벌 떨며 뒤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저놈은 진짜 카렐이 아닐 수도 있어."

베흔이 겁을 집어먹은 부하들을 급히 진정시키며 카렐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흔과, 티틀을 한 팔에 들고있는 쿠베를 번갈아 노려보던 카렐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빨리 그 칼날을 치워라. 쿠베."

"이 칼을 치우면 곧 네 칼날이 내 목을 벨 텐데?"

쿠베가 눈을 부릅뜬 채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하의 카렐의 칼이 목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이만큼이나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쿠베 정도 되는 강심장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카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좋아. 그렇다면 구령에 맞춰 일제히 떨어지기로 하지."

"좋다."

"하나, 둘, 셋!"

카운트가 끝나기가 무섭게 십년감수한 쿠베가 잽싸게 베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카렐은 이미 까무러쳐 바닥에 쓰러져있던 티틀을 급히 어깨에 둘러멨다. 하지만 그새를 놓치지 않은 근위대 가디언들이 카렐의 주위를 빙 둘러 완전히 포위하며 일제히 칼을 겨누었다.

"카렐인가? 하긴.....네 목소리가 틀림없긴 한데......."

태연한 표정의 베흔이 천천히 카렐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건 중요치 않아. 난 싸우고싶지 않다. 싸울 이유도 없고."

헐떡거리는 숨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카렐이 어두운 망토의 그늘 밑에서 자신을 에워싼 근위대들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럼 방법은 하나 뿐이군."

허탈한 표정으로 빙긋 미소를 지은 베흔은 허리에 차고있던 유난히 두터운 칼집에서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고문장이 가득 새겨진, 톱날무늬의 번득이는 날이 돋은 4척이 넘는 거대한 플람베르주가 반짝이며 그 잔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의 숱하게 많은 영웅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온 저 칼은 사람을 베어 죽이기보다는 그 우둘두둘한 날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로 유명한 악명 높은 검이었다.

카렐의 숨소리를 유심히 듣고있던 베흔이 입가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 녀석은 지금 탈진했어. 네 지친 숨소리가 들리는군. 그 짐승같이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말이야......후훗,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그렇다면 지금이 널 없앨 절호의 기회군."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렐의 왼손 끝으로 아직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선명한 핏방울을 놓칠 베흔은 결코 아니었다. 베흔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아악!"

하늘을 찢는 기합소리와 함께 베흔이 칼을 치켜들고 카렐에게 돌진했다. 카렐도 칼을 그에게 똑바로 겨누며 한발을 뒤로 조금 움직였다. 쾅 하는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둘의 칼이 맞부딪혔다.

"으아!"

자리에서 꿈쩍도 않은 채 베흔의 돌격을 그대로 받아낸 카렐이 있는 힘을 다해 한 손으로 칼을 내휘둘렀다. 힘에서 밀린 베흔이 그 기세에 그대로 한참을 튕겨나가 부하들 앞에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쿠베가 급히 베흔을 일으켜주었다. 베흔이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갑자기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맞아, 카렐이 틀림없어. 내가 만들어낸 지독한 괴물. 푸하하,"

"왜 웃으십니까?"

"녀석 탈진상태야. 그러니 제 특기인 빠른 공격을 못하고 날 힘으로 겨우 떠밀어내지. 보법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걸 보니 완전히 맛이 간 상태로군. 게다가 지금 왼팔도 병신이다. 피도 많이 흘린 모양인걸. 놈을 없앨 절호의 기회니까 특급들은 모두 나와라. 괜히 모험 걸지 말고 놈을 계속 사방에서 위협만 해.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을 때까지 말이다. 카렐, 얼마나 버틸 수 있으신지 재볼까?"

베흔의 들으라는 듯 놀리는 목소리에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한 스텝을 내밀던 카렐의 다리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면 내가 저 괴물의 머리를 잘라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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