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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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잘난 건 알지만 말이야, 어차피 싸움이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제아무리 잘난 고수라도 열 명이 둘러싸고 동시에 창으로 쑤시면 못 막고 뒈지기는 매한가지야. 맹자님이 말씀하셨지? 천리마가 하루에 가는 천리도 보통 말이 열흘을 달리면 갈 수 있다고."
5명의 휘하 가디언들과 함께 카렐 주위를 빙빙 맴돌며 베흔이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그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는 카렐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창이라도 쥐고있다면 모를까 카타나 한 자루만을 쥐고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카렐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의 가디언들을 데리고 베흔이 출현했다는 촌으로 허겁지겁 찾아온 페로는 마을 전경을 보기 위해 제일 높은 언덕 위에 멈춰섰다. 그의 뒤에는 특급들과 이십 여명의 1등급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저길 보십시오!"
킵이 소리쳤다. 고지대의 외딴 오두막을 빙 둘러 근위대 가디언들이 검은 망토를 입고 어깨에 웬 남자를 둘러멘 한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반짝거리는 황금 팔찌를 한 여섯 명이 그 불쌍한 두 표적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카렐......"
중앙에 선 검은 망토가 누군지를 깨달은 페로가 떨리는 입술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마 전 자신이 자결명령을 내렸던 바로 그 가디언이었다.
"살아있었다니......"
경악하고 있는 것은 페로뿐이 아니었다. 다룬과 킵을 비롯한 페로 가디언들도 멀리 보이는 틀림없는 카렐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페로가 결국 자신의 가디언들을 홱 돌아보았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카렐을 저들 근위대들의 손에 죽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페로의 눈가에 잠시 비치던 망설임이 곧 사라지더니 곧이어 쩌렁쩌렁한 명령이 울려 퍼졌다.
"카렐을 지켜라!"
"예!"
삼십여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큰 함성을 지르며 카렐을 포위하고 있던 근위대 가디언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뭐야!"
베흔이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무서운 기세로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는 삼십여명의 괴한들은 틀림없는 페로 가디언들이었다.
다룬, 킵, 판을 비롯한 페로 휘하의 특등급 가디언들이 그 선두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아 페로 녀석이 마음먹고 자신을 기습한 것이라는 베흔의 판단이 그다지 이치에 어긋난 건 틀림없이 아니었다.
"젠장! 함정이었군!"
약삭빠른 페로의 의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해 버린 베흔은 순간 머릿속이 아찔 해오고 있었다. 이곳 3번 도시 권역은 사실상 저 페로 녀석의 영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이 적진에서 페로의 세력과 싸우는 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는 티틀을 짊어진 채 죽음만을 기다리던 카렐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결명령을 내렸던 페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자신을 그대로 놔둘 턱이 없었다.
지금 돌격해오는 페로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베흔을 공격하려는 것인지조차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녀석들을 막아! 빨리!"
페로 가디언들의 돌격과 함께 카렐을 둘러싸고 있던 근위대 가디언들의 진영이 순식간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황제 가디언들과 페로 가디언들이 서로를 향해 넓게 장사진을 이루며 칼을 겨누고 마주섰다.
"지고하신 근위대 가디언들께서 이런데서 촌놈들이나 공격하고 계시다니 모양이 안 좋군요."
페로의 수석가디언 다룬이 베흔에게 칼을 겨누며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생각보다 약삭빠른 녀석들이었군. 이런 수단으로 우리 근위대를 기습하려 했다니."
"누가 카렐 누님을 먼저 건드리랬나?"
눈을 부릅뜬 다룬과 베흔이 날카롭게 기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양 측 모두, 이 상태에서 붙는다면 승부야 어쨌든 서로의 거의 대부분이 쓰러지는 끔찍한 결과가 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카렐이 사라졌습니다!"
후미의 한 근위대 가디언이 소리치자 뒤를 돌아본 베흔의 입 언저리가 대번 일그러들었다. 방금 전까지 티틀을 짊어지고 서 있던 카렐은 근위대의 포위망이 풀어진 틈을 타 풀숲으로 잽싸게 도망쳐버린 후였다. 베흔이 애써 미소를 띠며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이런, 너희 작전은 실패였어. 카렐이 뜻밖에 적들 때문에 너무 지쳐있었거든. 어때? 카렐 없이 지금 우릴 공격할 텐가?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하고 싸워 너희가 이긴다해도 몇 살아남지 못한다는 건 잘 알텐데. 그 뒷청소는 카렐 님이 해 주시겠지. 어차피 마지막 승리는 우리 꺼다."
다룬과 함께 서 있던 노장 킵도 상황을 금새 파악하고는 넉살을 떨기 시작했다.
킵의 협박이 말도 안되는 허풍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베흔은 순간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대등한 숫자의 저들 페로 가디언들과 이 적진에서 싸워 자신을 비롯한 근위대 고급가디언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든 것은 저 교활한 총리 페로의 농간임에 틀림없었다.
베흔이 큰 숨을 한 번 내쉬었다.
"한발씩 맞춰서 뒤로 물러나도록 하지."
베흔이 결국 결론을 지었다. 다룬과 킵으로서는 베흔이 혹시라도 카렐이 더 이상 페로 수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있지나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하던 차에 이 제안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양 진영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쳐 서로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자 그들은 칼 한번 부딪히지 않고 깨끗이 이곳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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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수우는 고향인 남부 비엔 행성계를 떠나 어머니, 형과 함께 얼마간 황제령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지방제후가문에서도 종가 자손들의 경우는 황제령의 황실학교를 거쳐 제국의 최고 교육기관인 남극성당에 입학하는 엘리트코스를 거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고, 남부최고제후 테번 델루지 공의 둘째아들인 수우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였다.
현 황후와 전직 총리대신까지 배출한 북부 카파키 가문과 함께 제국의 제후가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명가인 델루지 가문이니 만큼 수우는 명실상부한 제국 제일의 귀공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문 종손인 그의 형 제롬은 주변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고 남극성당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수우 역시도 같은 길을 밟아나갈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흠잡을 데 없는 형제에 대한 주변의 찬사와 함께 이목을 끄는 또 하나는 수우의 어머니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이었다. 서부 최고제후 플레렌 가 종장이며 서부의 지도자로서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과 정략혼을 한 네페티 부인은 결혼 이후로는 서부지역의 세부적인 운영은 플레렌 가 친척들과 가신들에게 대부분 맡겨두고 줄곧 남편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한 집안의 종부로서, 두 아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쨌든 수우는 남부와 서부 양 지역 최고제후의 피를 받아 태어난, 더할 나위 없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학교에서도 특별 관리되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 수우와 나란히 3번 도시의 황실학교에 입학한 페로는 수석을 다투는 경쟁자로서, 또한 격이 맞는 최고의 귀족집안 자제들로서 곧 친구가 되었고,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면 항상 자이센 가의 영지인 이곳으로 놀러와 같이 어울려 놀곤 했다.
그리고 자이센 가에서 유난히 예쁘장한 외모로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어린 가디언 카렐도 언제부터인가 이 두 짓궂은 소년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고 있었다.
수우가 집에서 보낸 전용차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카렐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이 옆에 선 페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수우 언제 또 온대?"
"내일도 수업 없으니까 또 올 거야."
페로가 엉망이 된 옷에서 흙을 털어 내며 건성 대답했다.
집안에서는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항상 하인들이나 노예들을 골치 아프게 하는 이 주인집 외아들도 카렐에게만은 다른 또래의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 호감을 짓궂은 장난으로 대신 표현하는 동갑내기에 불과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이 동갑내기 소년소녀에게 명문가 상급귀족 자제와 가디언이라는, 턱도 없는 신분의 차이는 어울려 노는 데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사실 평균치도 한참 못 미치는 작고 여윈 카렐은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가디언의 유전자가 섞였다는 냄새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유난히 크고 조숙한 페로는 10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벌써부터 남자다운 외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카렐이 이 가문의 딸이고, 페로가 가디언이라고 한다면 더 어울릴 듯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페로가 언덕 위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카렐에게 말했다.
"집에 가자. 좀 있으면 가정교사 선생님 올 거야."
"벌써?"
페로가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작은 키의 카렐은 그런 페로를 종종걸음으로 겨우 쫓아가며 헐떡이는 소리로 말했다.
"페로, 천천히 좀 가. 힘들어."
"저 느린 곰탱이 같으니라구."
페로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뒤를 따라오는 카렐을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떡갈나무 밑에 도착해서야 가까스로 페로를 따라잡은 카렐은 숨이 많이 찬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왜 그렇게 약해빠졌냐?"
페로의 일갈에도 카렐은 가슴을 움켜쥔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페로는 바닥에 주저앉은 카렐의 앞에 급히 쭈그려 앉아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속이....."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던 카렐이 갑자기 욱 하고 토하기 시작하자 기겁을 한 페로가 한발 물러서며 얼굴을 찌푸렸다.
카렐의 구토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유난히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카렐의 비정상적으로 큰 손이 땅을 짚은 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끝도 없이 토해내는 것을 봐서 아침 먹은 것을 몽땅 다 게워내려는 모양이었다. 토악질을 끝내고 거의 탈진해버린 카렐이 결국 풀밭에 맥없이 드러누웠다.
무성한 떡갈나무 잎사귀가 지친 카렐의 얼굴 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괜찮아?"
카렐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페로가 웃옷을 벗어 카렐의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주었다.
"응. 이제 괜찮아. 미안해."
잠시 누워있던 카렐은 페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자리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윗통을 벗은 페로가 등을 내보이며 팔을 뻗었다.
"내가 업어줄께."
"괜찮다니까,"
"에이씨, 말 안 들을래?"
주인 아들인 페로가 한 번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 카렐은 움찔 하고 놀라며 페로의 벗은 등에 순순히 업힐 수밖에 없었다. 페로가 카렐을 업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게 사람 몸이냐? 뭐 이렇게 가벼워? 맨날 토악질이나 하고 있으니 몸이 이지경이지."
무안해진 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친 카렐을 등에 업은 페로는 언덕 밑으로 멀리 보이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말랐나 니 팔찌가 다 덜렁거린다."
"이게 제일 작은 거래."
카렐이 자신의 조그만 손목에 박혀있는 파란색의 가디언 팔찌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의 팔찌를 힐끔 돌아본 페로가 말을 이었다.
"이런 건 뭐하러 했나 몰라. 이거 할 때 그렇게 아팠어?"
"몰라. 손목에 이상한 바늘같은거 꽂던데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이거 한 의사아저씨가 그러는데 가디언팔찌 빼면 죽는대."
"알아."
페로가 카렐을 한 번 추켜 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 꽉 껴안아. 흔들리니까 힘들잖아."
"알았어."
아무리 체구가 작다지만 동갑나기 여자아이 하나를 한참 업고가 자니 페로도 점점 숨이 차오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등에 업힌 카렐은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양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너 공부 꽤 잘한다며?"
"괜찮게 해."
'기다리던' 질문에 으쓱 해진 페로가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친구도 많겠다."
"응."
"여자애들도.....있겠네?"
"물론이지."
등에 업힌 카렐이 질투심에 입을 삐죽거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며 페로가 내심 즐거워하고 있었다.
카렐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뭐 배워?"
"검술 배워야 돼."
"나도 이제 칼싸움 배워야 되는 거야?"
"무슨 말이야?"
"노예 아저씨들이 그러는데 10번째 생일이 지나면서부터 칼싸움 배운다던데? 가디언은."
카렐이 '칼싸움'을 배운다는 말에 페로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칼싸움은 고사하고 저 힘에 목검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너같은 애가 무슨 칼싸움이냐? 아빠가 그러는데 넌 수련장 안 보내고 계속 집에만 있을거랬어. 뭐래더라? 너 좀 있으면 안채로 옮긴다고 하던데? 가디언은 안채에 안 살아."
"정말?"
수련장에 가지 않는다는 말에 카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어린 가디언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받는지를 잘 아는 카렐은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말에 입이 어느새 귀밑에 걸려 있었다. 카렐이 기뻐하는 모습에 페로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한번 더 강조했다.
"정말이야. 내가 똑똑히 들었어. 걱정 마. 내가 못 가게 해줄 테니까."
"근데, 안채면 니 작은어머니들 있는 데 아냐?"
'작은어머니들'은 페로의 아버지 슈막 자이센의 첩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정실이던 페로의 어머니 네베드 슈트란과 누나 크낙스 자이센이 죽은 이후로 안채는 첩들의 세상이 되어있었다. 페로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등에 업힌 카렐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내가 그 말 쓰지 말랬지?"
페로의 눈초리에 깜짝 놀란 카렐이 얼른 둘러대기 시작했다.
"으, 응, 미안해. 그 여자들."
페로는 그제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페로는 아버지의 첩들을 절대 '작은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요한 꾸중에도 불구하고 페로에게 그들은 항상 '그 여자들'에 불과했다.
페로의 아버지 슈막 자이센의 여색은 대단해서 11명이나 되는 첩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손댄 여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안채에는 이 11명의 '공식적인' 첩들과 그들이 낳은 25명이나 되는 페로의 이복형제들이 살고있었다. 물론 이 이복형제들 중에는 페로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상황에서 7년여 전, 슈막의 정실부인이었던 네베드 슈트란이 정체불명의 도적떼에게 습격을 당해 장녀 크낙스 자이센과 함께 죽음으로써 그들간의 암투는 이제 확실한 목적성까지 띠고 있었다. 이들의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그 자리에서 용케 살아남은 유일한 적생자 페로가 되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모두 미제사건으로 판정된 4번의 살해기도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 어린 소년의 마음은 갈수록 차갑게 단련되어가고 있었다. 소년의 생존본능은 그 '작은어머니들'이 자신의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주입시켰고, 더 나아가 아버지에게 알랑거리는 '여자' 라는 존재 전제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 등에 업힌 이 순해터진 계집아이만은 제외하고.
"근데 내가 왜 안채에 가? 안채는 '그 여자들'이나 사는 데 아냐?"
'안채에 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아직 알 턱이 없는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페로 역시 어깨를 으쓱 하며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몰라. 너 있는 행랑보다 안채가 방이 훨씬 좋으니까 그런가보지."
"아아, 그렇구나."
카렐은 다시 페로의 목을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수우네 집 안채는 조용해서 좋던데, 우리 집 안채는 시끄러워서 싫어."
"거기야 수우 엄마 혼자 사시니까 그렇지."
"나도 엄마아빠가 있으면 좋겠다."
카렐이 페로의 목을 껴안으며 짙푸른 하늘을 문득 올려보았다.
카렐에게 무어라 핀잔을 주려던 페로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자존심강한 소년이 친구 수우에게 유일하게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살아있는 엄마'의 존재였다. 여자 품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버지는 첩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아들을 지켜줄 생각조차 않고 있었고, 항상 자신을 귀여워해 주던 착한 누나 크낙스도 엄마와 함께 참혹한 죽음을 맞았던 터였다.
그런 페로였지만 아예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카렐에게 쓸데없는 소리한다며 나무랄 정도로 돼먹지못한 소년은 아니었다.
페로가 풀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안채 들어가는 거 싫어."
"왜?"
"그냥 싫어. 그냥 기분 나빠."
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페로가 헐떡거리는 숨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아침 먹은 거 다 토했으니까 들어가거든 점심은 제대로 먹어."
"알았어."
주인집 아들 페로의 든든한 등에 업힌 카렐은 집에 도착한 것이 못내 아쉬운지 그의 목을 껴안은 작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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