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화 (8/1,132)

< -- 8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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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 너 때문이야."

티틀이 추위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카렐에게 연신 투덜거렸다. 카렐은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막을 가리개를 만들고 있었다. 솔은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근위대와 페로 가디언이 팽팽한 대치를 벌이던 마을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셋은 겨우 찾아낸 주인 없는 폐가에 피신해 있었다. 구멍난 창을 다 막은 카렐은 마른 나뭇가지들을 가져다가 능숙하게 불을 피웠다.

낮의 사건에 많이 겁먹은 티틀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갈라진 벽 틈새로 자꾸 밖을 내다보았다.

"말해 봐. 아까 그 금띠 두른 놈들은 도대체 뭐야?"

카렐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티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카렐의 날카로운 눈빛을 처음 대한 티틀이 흠칫 놀랐다.

"며, 명령이야. 나 주인이잖아."

카렐이 시선을 도로 반대편으로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근위대들입니다."

"무어?"

티틀의 떨림이 딱 멎었다.

"너, 너 나쁜 짓 하다 쫓기는 거지? 그렇지? 그래서 그 망토도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 아냐?"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절 죽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거짓말 마! 이유도 없이 왜 죽여! 그것도 황제 부하들이!"

"......제가 그들에게 잠재적인 위험요소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

티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렐이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할복한 채 오넷 광장에 버려져있었고, 이젠 근위대에게까지 쫓기고 있는 이 가디언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어리숙한 티틀은 아니었다.

"말해 줘. 너......나한테 오기 전에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카렐이 문득 고개를 들어 티틀의 어린애같이 해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티틀이 카렐의 큰 손을 붙들며 다시 간곡하게 물었다.

"알고싶을 따름이야. 말하고싶은 정도로만 말해 줘. 제발."

"페로 자이센 총리대신의 수석가디언이었습니다."

"뭐, 뭐?"

"그리고 많은 선대황제의 신하들을 죽였습니다."

티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 팔찌에 아무 기록이 안되어있던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네 이름이.......그........"

"카렐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아니 충격적인 사실에 티틀은 무언가로 한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멍 하니 서 있었다.

"등급도 없고 가격도 없다던......그게 바로 너였다고?"

넋이 나간 티틀이 맥없이 침상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정치니 하는 따위의 일에 뭐 아는 것이라도 있다면 이것저것 질문이라도 해보련만 티틀은 가디언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인지, 이자가 그간 해왔다는 일이 도대체 무얼 뜻하는지도 알아먹지 못할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제가 다른 길을 찾아볼 테니 걱정 마시고 오늘은 일단 주무십시오."

거의 얼빠진 듯한 얼굴로 더 이상의 질문을 할 의욕조차 잃어버린 티틀을 카렐로서는 일단 달래주는 수밖에 없었다. 카렐은 한쪽에 웅크리고있던 솔을 안아 무릎에 앉히고는 입고있던 검은 망토를 벗어 얼굴까지 푹 덮어주었다.

모처럼 밝게 웃음 지은 솔은 그 품안에 얼굴을 깊이 파묻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궁금한 게 있다."

수우가 한밤중에 베흔을 불러다놓고 입을 열었다. 하늘높이 솟은 황궁의 150층 황제 침실에서 멀리 촌을 내려다보던 수우는 등뒤에 서 있는 베흔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카렐의 정체에 관해서."

수우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베흔이 움찔 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베흔이 대답했다.

"아시다시피......X-11세대 가디언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그건 알아. 하지만 11세대는 카렐 단 한 명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어. 게다가 지금 합성되는 어린 가디언들은 13세대인데도 2세대 전의 카렐에 비해 한참 수준이하잖아. 왜 카렐만 그렇게 특별히 만들어진 거지?"

수우는 오래된 말린 꽃잎이 가득 들어있는 작은 병을 만지작거리며 흐릿한 눈동자를 다시 창밖으로 고정시켰다.

"......당시에 선대 황제께선 세 번의 암살기도에 말려드신 후에 아주 강력한 가디언을 필요로 하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인 가디언을 훨씬 뛰어넘는."

"그래서?"

"유전자 합성에 있어 비교우위가 있던 자이센 가 수련장과 유전자 보유량에 있어 우위에 있던 황실 유전자은행과의 합작프로젝트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어떤 규정이나 법령도 적용치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흠......"

수우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당시 그쪽 수련장의 주인은 현 페로 자이센 총리의 아버지인 슈막 자이센 이였습니다."

"알아......내가 매일 드나들었으니까."

"당시 유전자은행 책임자였던 모렌 박사 지휘하에 가디언 유전자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을 동원해 총 사십 만개의 강력한 수정란을 제조해냈습니다. 모두 훌륭한 Y유전자를 지닌 남성이었고 일부 잘못 합성되어 XX가 된 것은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폐기?"

수우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원래부터 가디언은 남자만 합성되어 왔던 것이 당시까지의, 아니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관례였다. 이 관례와 강제적인 거세조치는 가디언 사이의 혼인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강력한 인종'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지배계층의 특단의 조치였다.

그렇다해도 불법으로 '복원수술'을 하고 시민과의 사이에 2세를 가진 가디언이 있다는 소문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여전히 침착한 표정의 베흔이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그 사십 만개의 수정란은 1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다 죽어버렸습니다. 기본 개념설정 과정에서 치사유전정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카렐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

"연구원 중 한 명이 지난번에 여자로 밝혀져 폐기 처분된 수정란 캡슐 중 하나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포착해냈습니다."

"그게 가능해?"

"지독하게 생명력이 강한 수정란이었습니다. 밀폐된 캡슐 안에서 안에 저장되었던 양분과 폐기물 처리장의 부패발열만으로 느리지만 분열을 계속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뭐.......학자들 말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일이라고들 했지만......"

수우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소년처럼 앳되고 선한 표정과 핏줄하나 보이지 않는 곱고 부드러운 손은 바로 뒤에 선 크고 건장한 베흔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행여나 하는 마음에 그 캡슐을 다시 가져다가 성장을 시켜보았습니다. 그래서......10개월 후에 완성된 여자아기가 태어난 겁니다. 그리고 이름은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를 뜻하는 카레르 강을 받아 카렐이라고 붙였습니다."

수우는 만지작거리던 병의 뚜껑을 열고 안에서 풍기는 향기를 한 번 죽 들이키더니 다시 뚜껑을 닫았다.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버린 그 병 안의 꽃잎들은 이제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을 듯 싶어 보였지만 수우는 그 병을 무슨 보물인 양 연신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 수우의 모습을 별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보던 베흔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 태어난 카렐은 우리가 기대했던 강력한 기질이 전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성장속도도 비슷했고, 특별히 강한 것도 아니었고......결국 프로젝트 전체가 실패로 판정 내려지면서 원래는 생후 18개월에 폐기 처분될 계획이었지만 합성자인 모렌 박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황궁에서 자이센 수련장으로 추방되어졌습니다. 웃기게도 어린 카렐이 워낙 두드러지게 예뻐서 슈막 자이센은 처음엔 그 아이를 잘 키워 첩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8개월이나 된 '아기'에게 적합할까 싶은 '폐기'라는 표현에 수우가 마음에 영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또 한번 찡그렸다. 슈막이 카렐을 첩으로 삼으려 했다는 말에 수우의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수우가 그답지 않은 냉랭한 투로 물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저보다 아시지 않습니까."

베흔이 무성의하게 말하자 수우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페로하고 있었던 그 일이었군......그래, 카렐을 데려와 도대체 어떻게 훈련시킨 거지?"

"선대폐하의 명에 따라 최대한 잔혹한 방법으로 훈련시켰습니다."

"어떻게?"

수우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야생에서 지내게 하고 일체의 의식주는 주지 않았습니다."

수우의 표정이 더 일그러들었다. 그의 어두운 시선은 손에 쥐고있는 꽃잎병에 다시 가서 멎었다.

"어떤 이유든 만들어서 하루에 한 번 지독한 벌을 가했죠, 어느 날은 채찍질, 다음날은 구타, 다음날엔 얼음물에 내던지고......그렇게 강한 놈이 심리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들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 복종하는 한사람 외에는 철저하게 잔혹하게 구는 살인마로 키워지게 되죠."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야?"

수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조금 높아져 있었다. 그런 수우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씨익 웃음 지은 베흔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책임자였던 모렌 박사에 따르면 X-11세대 개량형 유전자는 파충류와 조합된 반인 반수의 특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결국 놈은 극도로 높은 근육비와 면역력, 재생 가능한 빠른 신경계와 어떤 상처를 입어도 스스로 깨끗하게 치료하는 가증스러운 수준의 회복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녀석의 특이한 목소리도 파충류 유전자의 부작용 때문에 성대와 혀가 기형화된 결과로 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년은 뱀과 악어의 유전자가 섞인 괴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베흔의 싸늘한 목소리에 순간 겁에 질린 수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들개가 버리고 간 굴에서 날고기와 과일로 연명했고 옷은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 직접 해 입게 만들었죠. 사형수의 처형을 시키고 그 피와 살을 먹게 만들었습니다. 체력훈련부터 무술, 군사학은 물론이고 해부학, 심리학, 컴퓨터, 분장, 연기술까지 사람을 죽이는 데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다 세뇌시켰습니다. 그러는 데 총 10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카렐의 훈련시절을 말하는 베흔의 눈에서 묘한 흥분이랄지 쾌감인지가 뒤섞인 묘한 감정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표정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북스런 미소를 대뜸 지은 베흔이 말을 이었다.

"110세가 되어서 다시 사회에 들여보내졌을 때 놈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땠길래......"

"규율을 어긴 1급 가디언을 처단하는 것이 첫 임무였습니다."

"그래서."

"다 모인 투기장 안에서  중무장하고 달려드는 놈을 30초만에 9토막을 내 놓았습니다."

수우가 이마를 싸쥐었다. 그 모습에 약간의 미소를 띤 베흔이 설명을 계속했다.

"선대폐하께서는 그 모습에 대단히 만족하셨습니다. 그 후에 근위대에 들여보내졌다가 다시 얼마 후에 슈막의 아들 페로에게로 소유권이 돌아간 겁니다."

"지금 날 봐도 알지 못하겠군......"

"알아본다면 곧바로 칼을 들이댈 겁니다."

수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착한 아이였어......정말로 귀엽고 순한......꽃을 무지하게 좋아했었지. 워낙 작아서 매일 페로한테 맞고 울곤 했었는데."

수우는 꽃잎병을 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수우에게 한발 다가서며 베흔이 비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카렐이 왜 그리 작았는지는 모르시죠?"

"왜라니?"

수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흔을 올려다보았다.

"아실지 모르지만......제가 카렐을 처음 데려왔을 때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습니다."

"무슨 소리야? 자이센 수련장서 얼마나 잘 먹였는데......걔가 워낙 약해서 맨날 토하던지 탈나서 그렇지."

"당연히 탈이 났겠죠."

베흔이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하자 수우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려 보였다.

"사람이 먹는 것만 먹였으니 당연히 탈이 났겠죠.......짐승에겐 짐승다운 걸 먹였어야 하는데......"

"짐승이라니?"

수우의 질문에 베흔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목소리에 약간 힘을 주어 말했다.

"카렐은 육식동물입니다. 그것도 원칙적으로 익히지 않은 생고기를 먹어야 하죠. 기초대사량이 커서 특히 근육보다는 지방이 풍부한 생내장을 잘 먹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뼈나 가죽까지도 소화할 수 있죠. 고기 외에 약간의 과일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주식은 못됩니다. 그런 카렐에게 사람의 식사만 줬으니 당연히 탈이 났겠죠. 영양실조로 발육도 당연히 부실했을 테고 말씀입니다."

수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걸 들어보십시오."

베흔이 손에 쥐고있던 자신의 칼을 불쑥 내밀었다.

"응?"

무심결에 칼을 받아든 수우는 엄청난 무게를 감당 못하고 앞으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4척이 넘는 그 장대한 칼은 보기에도 묵직해 보였지만 실제 손에 들어본 무게는 그 이상이었다.

수우가 칼을 베흔에게 돌려주며 중얼거렸다.

"이게 이렇게 무거웠던가......"

"이게 카렐의 칼보다는 훨씬 가볍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입니다. 가디언의 평균 근력은 일반인의 4배에서 6배 수준이지만 카렐은 그런 가디언의 4배 이상입니다."

수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들었다. 그렇게 강력한 가디언으로 자라난 카렐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는 것은 수우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베흔의 말을 종합해보면 카렐은 반인 반수의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렐이 페로 관을 떠난 이후 단 한번도 얼굴을 마주해 본 일이 없는 수우로서는 일단은 베흔의 말을 믿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카렐은 틀림없이 작았습니다. 나란히 동갑이었던 페로 경이나 전하보다도 작았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전하는 발끝을 돋아봐야 카렐의 어깨밖에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의 카렐은 그때의 어린애가 아닙니다. 아니, 지금의 카렐은 사람이 아닌 괴물입니다. 그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수우를 세뇌시키듯 몇 번을 강조해가며 말한 베흔은 저으기 겁에 질린 수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뒤로 돌아섰다.

수우를 뒤로하고 150층의 방을 나선 베흔은 근위대 중앙본부가 있는 10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들릴 듯 말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렇게만 알고있어라, 꼬마야......그년이 누군지......"

"왜 나왔지?"

카렐이 움막 밖으로 나온 솔에게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으......주인님이 너무 코를 심하게 골아서요."

움막 앞에서 밤이슬을 그대로 맞으며 앉아있던 카렐은 잠시 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렐 님하고 함께 있는 게 더 편해요."

"난 별로 편한 사람이 못돼."

쌀쌀맞게 대꾸한 카렐이 솔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버리고 말았다.

"꼭 여기서 이러고 계실 필요는 없잖아요. 날씨도 추운데."

"......"

"저 옆에 헛간에 들어가 쉬세요. 제가 상처도 좀 봐 드릴 테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은 솔의 말대로 헛간에 들어가 잔뜩 쌓여있는 짚더미 위에 몸을 뉘었다. 카렐이 주인 이외의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솔에게만은 예외였다.

"후우......"

카렐이 큰 숨을 내쉬며 몸을 쭉 뻗었다. 평소 좀처럼 보이지 않던 정말로 지친 모습을 보인 카렐은 눈을 감은 채 잠시나마 편안함을 맛보고 있었다. 솔은 그런 카렐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잠그고 누워있는 카렐에게 다가왔다.

빈집에서 가져온 희미한 호롱불을 옆에 내려놓은 솔은 누워있는 카렐의 망토를 직접 벗겨주었다. 그는 팔꿈치의 상처 외에도 군데군데 흩어져있는 크고 작은 상처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번엔 제가 상처 봐 드릴께요."

"그 정도로 큰 상처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카렐은 말로는 그러면서도 어깨의 수트 버클을 끌르는 솔의 손길을 굳이 말리지는 않고 있었다. 카렐의 왼팔이 드러나자 솔이 무심결에 그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징그러울 만큼 희고 투명한 피부 밑으로 근육과 핏줄이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비춰 보였다.

그 소름끼치는 모습에 솔이 움찔 하고 말았다.

"보다시피......내 몸은 정상이 아니다."

카렐이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피하지방은 너무 얇고 몸 군데군데 색소부족으로 속이 비쳐 보일 지경이지. 체온도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하다.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머리카락을 빼면 내 몸엔 털도 없다. 내 근육도 만져보면 알겠지만 차갑고 단단해.......마치 뱀처럼."

깊은 한숨을 내쉰 카렐은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혔다. 카렐 말마따나 목 양옆의 굵은 혈관과 힘줄이 이 침침한 헛간 안에서도 그대로 비쳐 보이고 있었다.

카렐이 왜 의도적으로 이런 흉한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지를 솔은 잘 알고있었다.

"전요, 이런 건 아무 상관......"

"내겐 아무 것도 없다. 난 겉보기는 강력한 가디언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결함 투성이의 괴물일 뿐이야. 난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냥 사람 비슷하게 생긴 육식동물일 뿐이다. 네가 아직 어려서 사람을 얼마 못 만나 나 같은 괴물에게 유별난 호감을 갖고있는 건 안다."

"그런 게 아니예요. 전 정말로......"

"넌 예쁘고 착하니까 곧 좋은 친구들과 애인도 만들 수 있을 거다. 내일은 네가 정붙이고 살만한 좋은 곳에 데려다줄 테니 이제 거기서 눌러 살도록 해라."

내일이면 자신과 헤어진다는 말에 솔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지 자리에 주저앉은 채 그 얇은 입술을 파르르 떨고있었다.

"5년 전에요......"

문득 눈을 뜬 카렐이 솔을 다시 올려보았다.

"제가 주인님 수발을 거절한 죄로 마당에 끌려가서 카렐 님한테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었죠. 스무 대나요."

카렐이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리자 솔이 그런 카렐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하지만 그날 밤에 몰래 제 방에 찾아와서 등에 약을 발라주고 가신 게 누구인지도 잘 알아요."

"그때 얘기는 하지 마라."

"그리고 며칠 이따가 절 안뜰로 불러내서......키스도 해 주셨었죠. 태어나서 처음 받은 키스였어요. 그땐 정말 뛸 듯이 기뻤는데....."

카렐은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솔이 카렐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맞댔다.

"그래서 주인님이 카렐 님의 수발을 들라고 했을 때 그렇게 기뻐했었던 거예요......그런데도 제 기대를 그렇게 무참하게......""

애타게 바라보는 솔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며 카렐은 냉랭하게 완전히 돌아누워 버렸다.

"빨리 자라. 내일은 갈 길이 멀다."

솔은 카렐의 등에 바싹 달라붙으며 카렐의 흉한 어깨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는 힘을 주어 껴안았다.

"응?"

카렐의 어깨에서 무언가 우둘두둘한 것을 만진 솔이 문득 몸을 일으켜 그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검은 색의, 무언가 고문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묘한 돌기가 돋아나 있었다.

"이게 뭐죠?"

돌아누운 채 눈을 감은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카렐의 여전히 차가운 태도에 솔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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