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화 (10/1,132)

< -- 10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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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따스한 햇빛에 카렐의 가슴에 안겨있던 솔이 눈을 스르르 떴다. 카렐은 어제 확실히 피곤했던지 아직까지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엔 카렐의 등을 껴안은 채 잠들었던 솔은 자신이 지금 왜 카렐의 가슴에, 그것도 풀어헤쳐진 그의 맨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안겨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싸움꾼 특유의 비릿한 피비린내가 어린 카렐의 체취가 솔의 코를 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솔은 그의 팔에 난 상처를 다시 풀어보았다. 괜찮을 것이라던 카렐의 말대로 앞뒤로 관통 당했던 그 큰 상처가 하룻밤 새 꽤 아물어 있었다.

솔은 잠들어있는 카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가 이 무서운 전사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하나하나 뜯어본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페로 관에서 카렐의 지위는 주인인 페로 바로 다음이었고, 솔 같은 노예는 고사하고 심지어 귀족인 페로의 참모들까지도 그를 감히 바라볼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특히나 카렐의 회색빛 매서운 눈매는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 카렐이 지금은 이런 누추한 헛간에서 자신을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카렐의 겨드랑이를 힘껏 껴안은 솔은 그의 가슴에 말없이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깼구나."

그제야 눈을 부시시 뜬 카렐은 헛간 안으로 스며드는 바깥의 햇빛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출발할 준비를 해야겠다."

따뜻한 카렐의 품안에서 나가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대놓고 일어나라는데 솔도 별 도리가 없었다.

또 한번 낙심한 솔은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헛간 밖으로 나섰다.

문을 밀고 나서던 솔은 발길에 무언가 채이자 문득 밑을 내려다보았다.

"어?"

헛간 문 앞엔 어디서 난 건지 빵이 몇 개 들은 주머니와 큼직한 돼지 허벅다리 절임이 놓여있었다. 솔은 카렐이 아직 잠들어있는 헛간 쪽을 바라보았다. 일행이 잠들어있을 동안 카렐이 어딘가에서 먹을 것들을 훔쳐온 모양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티틀이 반대편 오두막에서 눈을 비비며 나온 것도 그때였다. 하룻밤 지내면서 어젯밤의 충격도 많이 가셨는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카렐이 훔쳐온 빵과 돼지고기로 아침을 먹고 난 티틀이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싸쥐었다. 어제 근위대와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 역시 카렐처럼 수배자 신분이 되었을 건 뻔한 일이었다. 한때 '굴러온 복덩이'로 생각했던 저 가디언 덕택에 자기 신세가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며 티틀이 내심 카렐을 원망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덤벼들 정도의 용기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 꼴 보기 싫은 가디언이 유령같이 쓰윽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그는 웅크리고 있는 티틀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가시죠."

"어디로?"

"따라오시면 압니다."

"어딘데?"

"근위대들에게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한 마디를 툭 던져버린 카렐은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티틀은 지금 도대체 누가 명령을 내리는 주인인지 영 헛갈리고 있었지만 카렐의 사뭇 위압적인 태도에 결국 그를 따라 길을 나서는 밖엔 없었다.

일행은 이미 옛날이 버려진 마을인 듯 폐허가 되어버린 집들을 지나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듯한 흙길을 따라 어딘가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카렐이 맨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고 티틀은 약간 헐떡대며 겨우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런데, 네가 싸움을 그렇게 잘해?"

"......"

"그런데 왜 아직까진 네 정체에 관해 한마디도 한했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기가 막혀,"

티틀이 이마를 탁 쳤다.

"나도 주인으로서 몇 가지는 알아야겠어. 이름은 카렐이면, 성은 뭐야?"

"가디언에겐 부모가 없기 때문에 성이 없습니다."

"......형제도?"

"저흰 수정캡슐 안에서 자랍니다. 같은 프로세스에서 합성된 동기생이 형제입니다."

"......나이는?"

"161년 28일 전에 인큐베이터에서 해제되었습니다."

"무슨 표현이 그래?"

티틀이 얼굴을 찌푸렸다.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카렐에게 가디언 부모형제가 있을 턱도 없었지만 그 로보트같이 말하는 꼴을 봐서는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대로변에 도착한 카렐은 멀리 사방을 죽 둘러보았다. 3번 도시에서 남쪽을 향해 뚫린 이 넓은 대로는 대사막을 가로질러 남반구 타르서스까지 이어지는 큰 도로였지만 그 뜨거운 대사막을 차로 횡단하는 사람 자체가 워낙 드문 탓인지 차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카렐은 도로변 바위에 잠시 걸터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다른 이정표도 없었지만 솔과 티틀은 무슨 노선 차량이라도 기다리려니 하며 그 옆에 말없이 쭈그려 앉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군요."

카렐이 몸을 일으키더니 바위 옆에서 뒹굴던 죽은 나무둥치를 힘껏 뽑아 손에 들었다. 노선 차량 잡는 것 치고는 참이나 희한한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시 달려오는 차와의 거리를 가늠하던 카렐은 어느 순간, 나무둥치를 길 한중간에 휙 내던졌다. 느닷없이 앞에 던져진 나무둥치에 고속으로 달리던 차가 즉시 급제동을 걸었다. 4, 5인승 정도 됨직한 꽤 고급승용차였다.

"씨팔! 어떤 새끼야! 죽을 뻔했잖아!"

차안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가디언 둘이 성난 얼굴로 훌쩍 뛰어내리며 대뜸 무기를 뽑아들었다. 상석의 주인이 차창을 열고 카렐에게 마구 욕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그의 욕지거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주인 앞에 뻔뻔스럽게 나섰다.

"이 차 좀 내가 잠깐 써야겠소."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냐?"

즉시 나선 두 명의 가디언이 주인과 카렐의 사이를 막아서며 위협적으로 쏘아붙였다.

"난 12등급이다."

"난 15등급이다. 까불 텐가?"

그들의 가소로운 협박에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카렐은 그들 두 가디언의 귀에 대고 들릴 듯 말듯 작은 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파란빛 팔찌와 칼을 들어 보였다.

"어쩌지. 난 등급 같은 건 없는데."

카렐의 팔찌를 눈앞에서 확인한 두 가디언이 기겁을 하고 놀라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가디언들의 눈짓을 받은 주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빨리 차의 뒷자리 상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냥......가져가세요....."

씽긋 웃음 지은 카렐이 솔과 티틀에게 차에 타라는 손짓을 보냈다. 주인이 제 손으로 내놓았으니 강탈이라기도 뭣했지만 어쨌든 '자기 식'으로 차를 구한 카렐은 그 운전석에 거리낌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가디언과 주인은 차를 내놓기가 무섭게 일찌감치 북쪽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카렐은 운전석에 앉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계기판 한 개를 박살을 내 버리고는 안의 회로를 만지고 있었다.

"뭐해?"

"추적장치입니다."

그 순간 쌔앵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남쪽, 대사막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대여섯 시간 동안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온 차는 어느덧 깎아지른 바위산들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두세 시간쯤 전, 도로를 빠져나온 이 차는 온통 먼지에 돌덩어리뿐인 황량한 사막벌판을 달려 이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 같군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카렐은 깎아지른 절벽 앞에서 차를 세웠다. 양쪽으로 높이가 3스타디아가 넘을 가파른 사암절벽이 드리운 험한 계곡 한쪽에 차를 감춘 카렐은 솔과 티틀 두 사람을 데리고 절벽 한쪽의 좁은 협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가 안전한 곳이라고? 그래그래, 그렇겠지, 이렇게 험한데 어떤 미친놈이 오겠어. 좀 천천히 좀 걸어. 힘들어 죽겠어.....어휴......"

절벽 밑을 내려다보며 순간 기겁한 티틀이 다리를 질질 끌고 겨우 카렐의 뒤에 따라붙었다.

아무도 살지 않을 듯한 이 험한 계곡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지만 저 가디언이 마치 제집인 양 한 번 헤매지도 않고 길을 찾아 올라가는 것도 신통한 노릇이었다. 아마도 전에 와 본 일이 있는 곳인 모양이었다.

쩔쩔 매는 주인과는 대조적으로 카렐을 따라 산을 잘 오르던 솔은 무언가 불안한 듯 연신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카렐 님, 주변에......"

"안다. 그냥 따라와라."

솔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 카렐은 다시 위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걸려 절벽 꼭대기에 도착한 일행의 발 밑에는 키 큰 풀이 우거진 거대한 분지와 오아시스, 그리고 그 주변을 빙 둘러 세워져있는 수백, 수천 채의 이동용 가옥들이 펼쳐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족히 수천 명, 아니, 만 명은 넘는 사람들이 살 수 있음직한 규모의, 말 그대로 '작은 도시' 였다. 사방을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이곳은 얼핏보기에도 천혜의 요새지임에 틀림없었다.

사막 한중간의 분지에 이런 곳이 있다는 데 놀랐는지 솔과 티틀이 조금 멍 한 얼굴로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숨을 내쉰 카렐은 무언가 맘먹은 듯 입술을 굳게 깨물며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네피. 계속 숨어서 쫓아오지 말고 빨리 나오지 그래."

분지에 내려선 카렐이 풀숲에 대고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으악!"

깜짝 놀란 솔이 비명을 지르며 카렐의 팔을 부둥켜안았다. 조용한 줄 알았던 풀숲에서 수십의 중무장한 가디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훗, 눈치챘군."

그들 중앙에는 파란색 팔찌를 한 거구의 사나이가 큰 도끼를 쥔 채 카렐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날씬한 몸매의 카렐과는 대조적으로 굵직굵직한 팔다리에 엔간한 날씬한 남자 두 명은 합쳐놓은 듯한 떡 벌어진 어깨, 다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칼을 지닌 그 거친 인상의 남자는 갑자기 코웃음을 지으며 카렐에게 쏘아붙였다.

"결국 알아냈군......네놈이 디오의 목을 베었다던데......네 특기인 고문이라도 했었나?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지?"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디오를 죽이기 전부터 알고있었어."

카렐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꾸하자 그 사나이, 네피가 대뜸 이맛살을 찌푸렸다.

"디오를 왜 죽였지? 그 앤 소문을 좀 모으러 내려갔을 뿐인데."

"15살 짜리 여자노예를 겁탈하다가 나한테 걸렸다."

"와하하하!"

카렐의 대답에 네피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군......너나 우리나 이미 거세된 몸이야. 디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여자를 겁탈해?"

"묶어놓고 성기에 칼자루를 밀어 넣은 것도 당연히 겁탈이지."

카렐의 거리낌없는 대답에 네피가 움찔 하고 말았다. 그는 옆에 있던 부하 하나를 대뜸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이런, 개 같은 새끼......그런 보고 안했잖아, 에이 썅,"

"대장, 저놈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설마......"

네피의 옆에 선 다른 부하가 카렐을 곱지 않은 눈길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런 부하들의 불만에도 아랑곳없이 표정을 가다듬은 네피가 도끼를 내려놓으며 카렐 앞에 성큼성큼 나섰다.

카렐도 입고있던 클록을 들어 보이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제국 관습대로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상대방이 적의가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겨우 몇 발 거리로 나란히 마주섰다.

"이놈이 거짓말은 할 놈이 아니란 건 알아.......내가 잘 알지.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어......그래. 그럼 디오를 죽인 건 묻지 않겠다. 근데, 너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여기 우릴 소탕하러 온 건가? 그런 모양 치곤 조금 이상하군. 저 쬐끄만 친구하고 이 여자아인 누구지? 가디언은 아닌 것 같고......"

"네피 너에게 부탁이 있다."

"부탁?"

네피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카렐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뻔뻔스러운걸......너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부탁? 넌 내 적인데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난 네 적이지만 이 사람들은 아니야. 내 목이 필요하다면 지금 가져가라."

카렐이 허리에 차고있던 무기를 바닥에 끌러놓으며 다시 두 팔을 다시 벌려 보였다.

"카렐 님, 이러시지 말아요......제발......"

솔이 카렐의 허리를 꽉 부둥켜안았다. 네피의 짙은 눈썹이 묘한 호기심에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둘이 어떤 사이지? 설마 너까지 넘어선 안되는 선을 넘은 건 아니겠지?"

"이 두 사람을 보살펴 줘. 그게 내 부탁이다."

"흠......천하의 카렐도 결국 일을 저지른 모양이군......"

네피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카렐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솔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여자아이 이름은 솔이다. 지금 스물 한살이고 페로 관 남쪽 안채에 노예로 있었어. 착한 아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페로 관 노예였다는 말에 네피가 솔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보았다. 페로 관 남쪽 안채는 페로의 그 많은 미녀 노예들을 수용하는 하렘과도 같은 곳이었다.

당황한 솔은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저 건장하고 험상궂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럼 이 쪼끄만 친구는?"

"솔의 주인이시다."

"무어? 총리는?"

"말하기 곤란한 사연이 있다. 그러니 제발 내 부탁을 좀 들어다오."

카렐이 그답지 않게 간곡한 말투로 네피에게 말했다.

"네가 지키는 게 훨씬 안전할 텐데 왜 여길 데려왔지?"

카렐의 계속된 애원에 처음보다 한결 누그러든 표정의 네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지금 쫓기고 있어. 가디언 때문에 목숨을 잃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선 곤란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너한테 부탁하러 온 거다. 이 두 사람을 맡아주면 난 여길 떠나겠어. 놈들이 노리는 건 나니까 나와 떨어져 있으면 아무 상관없을 거야. 너희 조직은 근위대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걸 잘 알아. 내 부탁이다."

"맙소사, 안돼요, 전 함께 있을래요."

솔이 카렐 옆에 얼른 꿇어앉으며 다리를 부둥켜안았다.

네피가 사뭇 쌀쌀맞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대가는? 설마 공짜는 아니겠지?"

카렐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카렐은 눈에 핏대를 세운 채 무기 하나씩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네피 부하들을 죽 둘러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페로 수하에서 수석가디언으로 있었던 카렐에게 이들 무장집단 떠돌이 가디언들의 감정이 고울 턱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카렐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날 10분 동안 너희 맘대로 린치하게 내주지. 내게 한을 품은 놈들이 많을 거다."

"미쳤군!"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다."

카렐이 망토를 벗어 멀리 던지자 황당한 표정의 네피가 잠시 혀를 끌끌 차더니 카렐이 땅바닥에 내려놓은 무기를 집어들었다.

"좋아.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해주지. 얘들아! 그 말 들었나? 천하의 카렐이 지금부터 10분 동안 우리 장난감이다. 너희 맘대로 해. 대신 무기는 쓰지 마라."

"안돼요! 안돼요!"

네피가 거칠게 울부짖는 솔을 나꿔채 부하에게 넘겨버렸다.

"훼방놓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어. 저 쪼끄만 친구도."

카렐이 문득 솔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솔이 카렐에게 팔을 뻗으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카렐과 눈동자가 마주친 솔은 그제서야 저 잔혹한 가디언의 회색빛 눈시울도 약간 젖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카렐의 뒤통수를 누군가가 주먹으로 힘껏 후려치자 카렐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신호로 머뭇거리던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와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카렐에게 달려들었다.

"제발! 하지 말아요!"

솔의 고함소리는 흥분한 사람들의 함성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악명 높은 가디언에 대한 네피 부하들의 분노가 가혹한 린치와 함께 한번에 뿜어 나오고 있었다. 엔간한 시민이라면 한번 채이는 것만으로 절명해버릴 거센 발길질이 카렐의 얼굴과 몸을 마구 짓밟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황토색 땅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이, 익,"

카렐의 그 아름다운 갈색 머리가 흙투성이가 되고 맑은 회색빛 눈동자엔 핏발이 섰다. 붉고 윤기 흐르던 입술이 사정없이 터져 살점이 너덜거렸다. 카렐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츠린 채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질세례를 신음소리 한번 없이 그대로 감수해내고 있었다.

네피도 이 광경을 차마 볼 수 없는지 시계만 보며 시선을 연신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만! 이제 됐어!"

시간을 확인한 네피가 소리를 지르며 카렐에게 달라붙은 수십의 흥분한 무리들을 떼어놓았다. 하지만 누군가 함께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린치를 가한 시간이 10분이 아닌, 기껏해야 5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팔을 붙들고있던 가디언을 뿌리치고 달려나간 솔이 피투성이가 된 채 흙바닥에 쓰러져있던 카렐을 와락 껴안았다.

"저 이런 데 안 있을래요. 정말이예요."

울먹이던 솔은 엉망이 된 카렐의 얼굴에서 피를 닦아주며 고개를 거칠게 가로 저었다. 카렐의 흐릿해진 눈동자가 솔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선 안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솔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카렐의 주먹에 관자놀이를 직격당한 솔은 의식이 없는지 눈을 뜬 채로 멍해져 있었다.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카렐의 뜻밖의 행동에 깜짝 놀란 네피가 흐느적거리는 솔을 얼른 일으켜 세웠지만 꽤 강한 타격이었는지 솔은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이 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두 사람을 잘 보살펴다오......나도 약속을 지킬 테니......특히 이 아이는......"

"이 아이가 왜?"

솔을 부축해안은 네피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피에게 무어라 말해주려던 카렐은 아직까지 자신을 노려보며 살기를 불태우고 있는 네피의 휘하 가디언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다......나중에 조용한 자리에서 얘기해주마."

이곳을 떠나겠다는 카렐의 모습에 억지로라도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던 솔은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며 결국 다시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런 솔을 꼭 안아 추스려주며 네피가 카렐에게 쏘아붙였다.

"이 모진 녀석 같으니라구......이렇게 울며 매달리는데......"

"난 가겠다."

네피가 무기들을 도로 돌려주자 카렐이 칼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망토를 다시 둘렀다. 그렇게 가혹한 몰매를 맞은 카렐이 제발로 다시 일어나는 모습에 그에게 린치를 가했던 사람들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로 한발씩 물러나고 있었다.

절벽의 협로를 다시 돌아 내려가는 카렐의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네피는 문득 옛 생각이 드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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