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해가 지자 수련장에 걸려있던 흰색의 휘장이 내려졌다. 흰 팔찌의 가디언들과 수련생들은 모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후였다. 그 정적 속으로 웬 그림자가 휘익 하며 지나갔다. 그 검은 그림자는 높은 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넘어버리고는 중앙에 있는 화려한 저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서와."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매서운 눈매에 검은 피부의 매끈하고 관능적인 몸매를 한 여자가 속이 거의 비치는 옷만 입은 채 그 '그림자'를 맞았다. 가디언답게 다부진 체격에 매끈한 용모의 그 미남자는 대뜸 웃옷을 벗어던지고 침대위로 뛰어올랐다.
"하여간, 급하기는, 서두르지 마. 이익, 무겁다니까......앗!"
남자의 목을 껴안으려던 여자는 방 한구석에 웬 시커먼 물체가 쓰윽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놀라 남자를 밀어냈다.
가디언은 그제서야 자기 본분이 생각났는지 허겁지겁 바닥에 벗어던진 옷에 달려있던 칼을 집어들었다. 여자가 담요로 급히 몸을 감추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누구야!"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카렐의 회색 눈동자가 방 한구석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희미한 빛을 뿜었다.
"누구냐니까!"
여자의 째지는 고함소리에 카렐이 불빛 아래 나타나며 얼굴의 후드를 벗었다. 여느 다른 가디언과 마찬가지로 남자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의 팔찌부터 살피고 있었다.
"가, 가, 가디언 카렐입니다, 주인님,"
알몸의 남자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지만 가디언으로서 주인을 버리고 혼자 달아날수는 없었다. 표정이 약간 창백해진 여자는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카렐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런 모렌 박사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인 카렐이 말했다.
"모렌 박사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 걱정마십시오."
"난 총리하곤 아무 볼일이 없는데."
모렌 박사가 카렐을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때 황실 유전자은행 책임자로 있던 유전학자 겸 의사인 자그룰라 모렌 박사는 학계에서도 가장 알아주는 권위자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 명성을 발판삼아 작으나마 자신의 수련장까지 운영하고 있는 그였지만 타협이라고는 없는 깐깐함에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으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전 비무장입니다. 다시말씀드리지지만 개인적으로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것 뿐입니다."
카렐이 공격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두팔을 벌려보이자 기회를 노리던 가디언이 대뜸 칼을 내질러왔다. 하지만 카렐은 기다리고있었다는 듯 대뜸 가디언의 팔을 나꿔채 바닥에 꼬꾸라뜨렸다. 맨손인 카렐에게 어처구니없는 메치기 공격을 당한 그가 공중을 한바퀴 빙 돌아 바닥에 동댕이쳐졌다.
"으윽,"
카렐의 발에 목이 밟힌 가디언은 숨이 막힌 듯 칼을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거칠게 버둥거렸다. 카렐이 그 가디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낙법은 제대로 배웠군. 복원수술 후에는 낭심공격에 취약하니 그쪽을 조심하게나."
모렌 박사가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바닥에 짓뭉개진 한심한 자기 가디언을 힐끗 바라보았다.
"못난 놈,"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렌 박사가 대뜸 가디언의 얼굴을 걷어찼다.
"꺼져. 빨리."
사지에서 벗어난 가디언은 엉금엉금 기어 겨우 방을 빠져나갔다. 벗고있던 몸 위에 나이트가운을 챙겨입은 모렌 박사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는 카렐을 위아래로 죽 훑어보았다.
"다 큰 너를 실제로 보다니......후훗, 내 작품이지만 정말 멋있군. 대단해. 자로 재놓은 것같이 완벽한걸. 네가 꼬맹이였을 때 마지막으로 봤는데. 이거 도대체 얼마만이지?"
박사는 카렐의 클록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리고는 어깨와 가슴, 배를 차례대로 더듬어내려갔다.
"군살하나 없어.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야. 그래. 목소리가 좀 특이하게 될 것 같긴 했어......훗, 그래도 어릴땐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크더니 정말 희한해졌는걸, 회색 눈동자는 옛날 그대로고. 아직도 날고기만 먹고사나?"
"여쭙고싶은 게 있습니다."
"그얘긴 조금 이따가 꺼내. 이렇게 오랫만에 봤는데.....인사라도 해야지."
모렌 박사는 장에서 병을 하나 꺼내더니 잔 두개에 나눠담고는 그중 하나를 카렐에게 내밀었다.
"다 마셔. 그러고나서 질문해. 독약은 아니니까 걱정 마. 뭐, 엔간한 독약에 죽을 너도 아니지만."
잔을 받아든 카렐은 그 냄새를 맡아보고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답지않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카렐은 입을 조금 벌리고 잔에 들어있는 황금빛 액체를 입 안에 확 쏟아부었다.
"욱,"
카렐이 자리에 털석 주저앉으며 입에 들어간 독한 리커를 그대로 토해내고 말았다. 카렐의 눈에 순간적으로 핏발이 서 있었다. 카렐은 자신에게 짓궂게 독한 술을 권한 모렌 박사를 한 번 노려보았다.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린 모렌 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욕심부리지 마. 넌 술에 약하잖아?......네 두개짜리 간은 다른 해독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알콜 분해능력만은 빵점이거든. 아직까지 그걸 모를리는 없을텐데? 후훗. 합성에 따른 일종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네 희한한 목소리처럼."
"그걸 아시면서 이렇게 독한걸 주시는군요......"
주저앉았던 카렐이 일그러뜨린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프로세스 막판에 실수를 발견하긴 했는데 그걸 고치려니 다른것까지 왕창 다 고쳐야겠더라고. 그래서 될대로 되라고 놔두고 대신 혀에서 강한 알콜성분을 감지하면 반사적으로 구토를 일으키게 엉터리로 땜질한게 고작이었지. 후훗."
모렌 박사의 웃음어린 눈동자 위로 굳은 카렐의 표정이 반사되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잠시 기세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인큐베이터 해제 후부터 18개월까지 자식처럼 돌본것도 나였고. 그후엔 슈막 자이센이 데려갔지......그 핏덩이가 이렇게 자랐다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모렌 박사를 내려다보며 카렐은 겨우 한모금을 더 들이켰다. 몇방울 마시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수정후 10개월에 체중은 다른 신생아 평균치보다 도리어 좀 적었고...... 혈압은 정상치보다 약간 낮았고, 헤모글로빈이나 면역 수치는 극히 높고, 심박수가 신생아 평균치보다 아주 낮은 걸 빼면 뭐, 별 특별난점도 없었지. 아참, 머리털이 하나도 안 자라서 혹시 실수로 대머리를 만든 게 아닌가도 했었거든. 후후후......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나오다니......"
모렌 박사의 손이 카렐의 길고 윤기흐르는 머리카락을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자 그가 무심결에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제 질문은......"
"다 마시고 나서 하라니까. 뭐가 그리 급한데?"
모렌 박사가 술잔을 가리키자 카렐이 이를 악물고 한모금을 더 삼켰다. 흑인종 특유의 약간 탁한 목소리로 박사가 말을 이었다.
"귀여운 아기였어......날 엄마로 착각하고 내 젖가슴을 더듬기까지 했었지......기억은 안나겠지만. 난 그 2년동안 널 키우는데만 정신을 쏟았거든. 나도 그땐 내 스스로를 보통의 아이엄마로 착각했던것 같아. 내가 젖을 물려주면 아무것도 안나오는데도 열심히 빨아대더군. 어찌나 세게빨던지 아파서 혼났어."
카렐의 술잔이 거의 비자 모렌 박사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모렌 박사가 미소를 띠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박사는 침대맡에 놓여있던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넌 내 가디언인 시아푸를 죽였지?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그렇습니다."
"근위대 가디언들이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알겠지? 베흔놈만 빼고는 모두 다 내 피조물들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내게 반기를 든 거야. 가디언들의 반란예방책을 보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야. 널 만들고 2년 후에 난 누명을 쓰고 유전자은행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하지만 난 죽지 않아. 그 노하우로 이 모렌 수련장을 또 만들었으니까. 시아푸는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던 내가 모렌 수련장을 열고 최초로 합성해낸 가디언이었어. 그래, 그놈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애한테 해꼬지하리란 건 짐작하고는 있었어."
둘의 눈이 희미한 불빛 아래서 무섭게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겨우 100살에 1등급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작이었지. 백년 정도만 더 지나면 특급을 따서 세상에 저희 뿐인줄아는 그 개같은 근위대놈들 엿먹여줄 수 있겠다고 자축을 하고 있었거든. 그래. 내가 녀석의 백살 생일에 너무 기분이 좋아 좀 취했었어. 그래서 그놈 데리고 잠깐 즐겼지. 그랬더니 다음날 새벽에 베흔 자식이 쳐들어왔더군. 그리고는 그 예쁜 시아푸를.......데리고가버렸어. 며칠 이따가 돌아온 건 살점이 그대로 붙어있는 녀석의 팔찌 뿐이더군......카렐이라는 무시무시한 황제 가디언의 화려한 데뷔무대에 쓰였다고......내가 110년 전에 황제 밑에서 합성했던 그 아기......"
"전 명령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카렐이 짐짓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 여자가 근위대 가디언들과 거의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라는 건 카렐이 근위대에 있을때부터 익히 알고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젠 까맣게 기억에서 지워져 무의식에나 남아있을 아기 때 이후로도 이 여자와의 몇번의 '나쁘지않았던' 만남이 희미하나마 카렐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페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카렐이 별다른 걱정 없이 이 여자의 침소까지 직접 찾아온 것도 그때문이었다.
"네가 다른 가디언들하고 똑같은 줄 아나?"
모렌 박사가 벌떡 일어서 카렐의 앞에 바싹 다가섰다.
"넌 달라. 수정란번호 90190번. 난 이미 다른 수정란들이 다 죽을줄 알고 있었어. 그 바보같은 황제는 무시무시한 걸 다 묶어놓으면 정말 무시무시한 게 나올 줄 알고 명령을 내렸지만 난 그 계획이 당초부터 실패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머지 일들은 밑의 놈들에게 맡기고 난 반쯤 장난삼아 재밌는 수정란합성을 했거든. 그게 너야. 앙? 넌 감수성이 예민한만큼 잔혹하고, 본능적인만큼 날카로워. 알아? 네몸엔 파충류의 유전자가 들어있는거? 그래. 난 시아푸를 사랑했지만 너도 내 피조물이긴 마찬가지야."
"제 질문엔 대답 안하셨습니다. 제 유전자의 억세스 코드를 알고싶습니다."
카렐은 계속 이야기를 겉돌리고 있는 모렌 박사에게 짜증을 내며 다시 물었다. 카렐이 바싹 달라붙어오는 모렌 박사에 떠밀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네 유전자를 알아서 뭐하겠단거지? 넌 내 피조물이야. 넌 갖은 인자들의 조합일 뿐이라구. 회색 눈동자의 인자에 큰 키의 인자, 높은 근육비의 인자, 그러저러한 인자들의 조합일 뿐이지. 아무 의미도 없어. 넌 누구나 가지고있는 걸 다른 여느 사람처럼 하나씩 나누어 갖고있는것일 뿐이야. 재밌는 확률놀음에 불과한거지."
"방금 말씀하신 본능의 일환입니다. 설마 뱀 알에서 나왔다고는 안하시겠죠?"
"네겐 쓰잘데기없는 본능일 뿐이야. 알아도 득될 건 하나도 없거든."
그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든 카렐이 눈을 부릅뜨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근을 에워싸고 있는 수백의 인기척이 그의 예민한 감각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망할!"
"무어?"
카렐이 갑자기 모렌 박사를 껴안았다. 모렌 박사가 어어 하는 새 그의 몸은 카렐에게 깔려 테이블 밑 바닥에 나딩굴고 있었다. 유리창이 모두 깨지며 쉿 하는 몇번의 소리와 함께 벽에 시퍼렇게 날이 선 암기와 투창이 날아들어와 침실 곳곳을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우욱,"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모렌 박사는 카렐의 허벅지에 깔린 자기 손에서 뜨뜻한 액체의 감촉을 느끼고는 기겁을 하고 놀라고 말았다. 그의 허벅지를 더듬던 모렌 박사는 그곳에 박혀있는 두 개나 되는 암기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직 움직이지 마시오."
카렐이 낮게 속삭였다.
밖에서 이미 귀에 익은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네 피냄새가 난다. 카렐. 여기서 또 보는군."
"베흔 저 개새끼,"
흥분한 모렌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카렐이 그를 거칠게 내리눌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험합니다."
"빨리 기어나와라. 카렐. 네가 비무장이란 걸 잘 안다. 여길 한달이 넘게 지키고 있었어. 네놈이 오기만."
베흔의 고함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깨진 창문으로 무언가 물체가 휙 던져졌다. 모렌 박사가 그것을 돌아보려는 것을 카렐이 얼른 손으로 가로막았다.
"볼 필요없습니다. 아까 나간 가디언녀석 머리니까. 녀석이 불은 모양입니다."
"흐흑......"
잔뜩 겁에 질렸던 모렌 박사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흑인종 특유의 도톰한 입술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저 미친놈......"
"빨리 네발로 기어나와. 안그러면 이집을 너하고, 네 창조주하고 함께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베흔의 고함소리가 또한번 들려오자 모렌 박사가 가쁜숨을 몰아쉬며 카렐을 올려보았다. 카렐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일이 꼬이는군......"
"제길할, 다 네놈 때문이야, 내집에 저 베흔 새끼를 끌어들이다니,"
모렌 박사의 일갈에 카렐은 그의 눈을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름 뿌려!"
독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기름을 끼얹어대는 모양이었다.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카렐이 결국 천천히 일어났다. 모렌 박사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박힌 암기 두 개를 뽑아 내던진 카렐은 피가 흐르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문을 열어제꼈다. 집을 빙 둘러 삼십여명의 황제 가디언들과 수백명은 될 정규군 병사들이 겹겹이 새카맣게 포진하고 있었다. 중간에 서 있던 베흔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묶어!"
쿠베가 지난번에 당한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카렐의 등을 삽자루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카렐이 앞으로 꼬꾸라지자 다른 황제 가디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굵은 쇠사슬로 칭칭 동여맸다. 카렐의 뒤를 따라나오던 모렌 박사가 베흔을 힐끗 돌아보았다. 베흔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모렌 박사의 발밑에 몸뚱이만 남은 가디언의 시체를 내던졌다.
"잘했소. 모렌 박사. 당신이 근위대에 이렇게 협조적일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어주다니."
"내 가디언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또 날 엿먹이려는건가?"
그 둘의 이상한 대화에 깜짝 놀란 카렐이 모렌 박사를 홱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돌리며 카렐의 시선을 급히 피해버렸다. 이런저런 장광설로 카렐을 붙들어둔 것이 결국 근위대들을 불러들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음이 확실했다. 순간 배신을 깨달은 카렐의 얼굴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씨익 웃음까지 지어보인 베흔은 어깨를 으쓱 하며 사뭇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리얼하게 보이려니 어쩔 수 없었지. 죽은녀석 보상은 시세대로 쳐줄테니 걱정마시오. 그리고.....당신이 요구한대로 카렐 이놈은 시아푸보다 열배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주겠소."
믿었던 모렌 박사의 배신에 격노한 카렐이 이를 악물며 몸을 거칠게 뒤틀었다. 쇠사슬이 파고드는 살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모렌 박사가 여전히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물었다.
"......어떻게 죽일거지?"
"'장작구이'가 좋겠군. 손발, 팔다리, 몸통의 순서대로 불에 익혀가며 천천히 죽이는거요."
모렌 박사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렐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시아푸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베흔 녀석의 협박에 결국 이 길을 택하기는 했지만 카렐 역시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유아기를 보낸 자식같은 존재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사실을 모를 턱이 없는 베흔이 급히 눈짓을 보내자 쿠베가 모렌 박사를 무섭게 노려보던 카렐의 얼굴에 검은 자루를 씌워버렸다.
표정을 가다듬은 모렌 박사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직 근위대 가디언이었던 체면도 있고......비공개 처형하겠군."
"그래야겠지. 명색이 보안국 책임자에 남부 파견군 사령관이기까지 했는데 공개처형하기는 좀 그렇지."
모렌 박사가 베흔에게 다시 물었다.
"죄목은 있어야할것 아닌가?"
"죄목? 맞아, 명색이 처형인데 죄목은 있어야겠군. 뭘로하지? 마땅치않은데?"
베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폭하고 잔인한 그였지만 '명분없이' 제멋대로 구는 사람은 아니었다. 카렐을 죽일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말도안되는 엉터리 죄목이라도 좋으니 일단 붙이긴 붙여야 했다. 얼굴을 찌푸린 베흔에게 쿠베가 입을 열었다.
"60년 전에 페로가 자신의 가디언이 합성코드를 찾을 경우 처형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쿠베의 말에 베흔이 큭 하고 웃더니 무릎을 내리쳤다.
"그래, 그게 있었군. 뭐, 쉽구먼. 이봐, 넌 나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네 주인의 쓰잘데기없는 선언때문에 죽는거니까 그녀석이나 탓해. 난 죄없다구."
베흔이 쓰러져있는 카렐을 한 번 사정없이 걷어찼다. 모렌 박사는 머리에 자루가 씌워진 카렐을 한 번 쳐다보았다. 완전히 체념한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번 처형엔 모렌 박사도 꼭 참석해주십시오."
모렌 박사가 입을 씰룩거렸다.
"......사양하고싶군......대신 이녀석 머리나 보내줘. 난 끔찍한건 질색이야."
"반드시 와주십시오."
베흔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거의 협박조로 말하자 모렌 박사는 아무 대답 없이 집 안으로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카렐은 황제 가디언들의 손에 질질 끌려 황궁으로 옮겨졌다.
네피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솔의 주변을 자꾸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혼자 도서실 청소를 하던 솔은 그의 이상한 태도에 노골적으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소....올......"
"예?"
솔이 한 발 네피에게서 떨어지며 쏘아보듯 눈길을 돌렸다.
"그으......카렐 말인데......"
"카렐 님이 왜요?"
솔이 사뭇 쌀쌀맞게 대꾸했다.
"카렐은 이제 완전히 여길 떠났다. 알아?"
"절 다시 데리러 오실 거예요."
솔이 네피의 묘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페로 관에서도 이런저런 남자들의 끈적한 접근이나 추군덕거림을 숱하게 경험해봤던 솔은 네피도 거기서 별다를것 없으리라고 생각하고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던 네피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한번 말했다.
"아니야......다신 올 수 없을거야."
"그만하라니까요!"
솔이 대뜸 네피의 얼굴에 빗자루를 내던졌다.
"지금 누굴 바보로 알아요? 댁도 날 어떻게 해보려는 거죠? 그 속을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냐. 실은......"
솔의 얼토당토않은 의심에 네피가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네피는 물론 그다지 진중한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옛 동료가 맡겨놓은 사람에게 쓸데없는 흑심을 품을 무뢰한은 결코 아니었다.
"집어쳐요!"
고함을 내지른 솔은 도서실에서 나가버렸다.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혼자 서 있던 네피는 한숨을 쉬며 도서실에서 나와 밖에 서 있던 같은 가디언 출신인 동료 조페와 마주쳤다. 얼굴을 찡그렸던 네피가 조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처형 집행이 언제라고했지?"
"오늘 저녁 9시. 황궁 감옥에 있는 녀석이 한 말이니까 맞을거야."
조페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가디언치고는 자그마한 체구에 순박한 인상을 지닌 조페는 특등급 황제 가디언 출신임을 나타내는 황금색 팔찌를 손목에 두르고 있었다. 네피의 무리에 속한 3명의 특등급 가디언 중 한명인 조페는 이곳에서 빈약하나마 황궁쪽의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통 역할을 맡아하고 있었다.
조페가 네피의 우울한 표정을 올려보며 자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할거야? 지난번 태도로 봐선.....카렐 그녀석 총리하고도 째진 것 같지 않았어? 베흔녀석 그동안 카렐 못잡아먹어 안달해온 거 보면 죽는 건 기정사실이지. 카렐 그 잘나가던 놈이 어쩌다가 그지경이 된건지 영 모르겠네."조페가 다시한번 네피의 눈치를 살폈다. 30여년간 페로 가디언부대에서 나란히 전우로서 피를 나누어온 카렐에게 이 단순우직한 사내의 우정이 남다르리라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있었다.
"어휴."
네피가 머리를 싸쥐었다.
"아무래도......그냥 놔둬선 안되겠어......"
페로는 한시간째 여전히 조용했다. 앞에 선 특등급들이 슬쩍 눈짓들을 주고받는 것 외엔 주변도 놀랄만큼 조용했다. 자리에 앉은지 한시간이 넘도록 페로는 입한번 벙긋하지 않고 있었다. 이 지루한 침묵을 결국 킵이 깨뜨렸다.
"카렐 누님이 우리의 일원이 아니라고 밝히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 한마디면 베흔녀석이 누님을 죽일 명분이 없어지는데......최소한 그걸 밝히면 근위대가 죄목을 만들어낼 며칠간이라도 목숨을 벌 수 있을텐데......"
카렐의 할복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킵조차 '떠도는 소문'이 혹시 진실이 아닐까 의심해오던 차였다. 그리고 할복을 명령하던 페로의 태도가 평소의 그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말을 뱉은 킵은 주인 페로의 눈치를 한 번 힐끔 살폈다.
"처형 직후에 근위대들이 우리를 총공격할겁니다. 미리 그에대한 대비를 세워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잘못이야......다 내 잘못이야......"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감한 페로가 바보같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카렐을 구하려 들 수 없는 상황임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똑똑한 베흔은 이미 페로 관 주변에 감시의 눈들을 온통 깔아놓았을테고, 자신이 카렐을 구하려 들어올 것을 예상하며 느긋하게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모든 건 자신의 혈통을 찾는답시고 설치다가 근위대에 그리도 어처구니없이 잡혀버린 카렐 그녀석의 잘못이었다.
모두 그녀석의 잘못이었다.
페로는 킵이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침통한 표정으로 탁자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하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페로의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X-11-1 가디언 카렐 유전자 조합표' 라는 제목이 붙은 작은 책자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책자 한쪽에는 페로의 친필로 짤막한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161번째 생일 축하한다. 카렐. -옛 친구 페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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