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4화 (14/1,132)

< -- 14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날 바보로 만들 참인가!"

수우가 보고자료를 가지고 들어온 베흔에게 평소 유순하던 그답지않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었다.

"카렐 처형 소식을 이제야 나한테 알려? 앙! 내가 누구냐! 대답해봐!"

"저의 주인이십니다."

수우의 추궁에 베흔이 눈동자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난 네 주인인데, 왜 감추었냐는 말이야! 카렐을 어젯밤에 잡아왔다며! 그런데 이제야, 처형도 네 멋대로 정해놓고, 겨우 1시간 전에 '통지' 하는거냐는 말이다!"

"전하의 심적 고통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심적고통? 지금 넌 내가 여전히 그녀석하고 놀던 꼬마애로 보이나!"

"아닙니다."

베흔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그럼 날 당장 카렐이 갇혀있는 곳으로 안내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테니까!"

수우가 평소같지않게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언성을 높이자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던 베흔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하, 그건......거긴 전하께서 가실만한 곳이......"

"명령이라니까!"

수우의 고집에 베흔은 하는 수 없이 수우를 악명높은 황궁의 지하감방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수우에게 이꼴을 보여주고싶지 않았지만 명색이 '제위후계자'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그와 이런 사소한 일로 나쁜 감정만 쌓을 필요는 없었다.

수우와 베흔은 엘리베이터로 한참을 내려오고서도 가파르고 비좁은 계단과 복도를 몇번 지나서야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감방에 도착했다. 처음 와 본 낯선 분위기에 수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순간 째지는 비명소리가 공기를 울리자 심하게 놀란 수우의 어깨가 순간 들썩 했다.

"카렐의 비명소리야?"

"아닙니다. 놈은 비명을 절대 지르지 않습니다."

그 끔찍한 비명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베흔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수우가 손에 맺힌 식은땀을 옷에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방음장치라도 해 놓을 것이지......"

"저런 비명을 들어야 감방안의 놈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못합니다. 방금 비명은 난동을 피웠던 노예놈의 팔다리를 조금씩 잘라내는 소리입니다. 10분마다 한치씩 잘라내고 있습니다. 점심때 시작했으니 이제 죽을때가 다 되었을겁니다. 카렐이 다음차례입니다."

사람으로서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형벌에 놀란 수우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손에 땀이 배어나는지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카렐도 저렇게?"

"아닙니다."

베흔이 옆으로 길을 꺾어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적당한 불꽃으로 발끝부터 천천히 익혀올라올겁니다."

"......"

"발이 다 익으면 절단해내고, 다리로, 종아리로, 허벅지로 해서 팔과 몸통까지 다 익으면 죽습니다."

"왜 그렇게......아니다."

카렐에게 그렇게 '쓸데없이' 힘든 처형을 내리는 이유를 물어보려던 수우는 괜한 오해만 살까 하는 생각에 질문을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좁은 계단 몇개를 더 내려가자 묵직한 문으로 가로막한 지하 12층 고문실이 드러났다. 문앞을 지키던 간수가 베흔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생각외로 어두운 분위기에 수우가 조심스럽게 몇발을 내디뎠다. 방엔 작은 등 하나만 켜져있을 따름이었다. 큰 그림자 하나가 그의 눈앞을 불쑥 막아서자 수우가 흠칫 놀라 뒤로 조금 물러섰다.

높은 형틀에 누군가가 겨우 발돋움을 한 채 묶여있었다. 허리와 팔이 쇠로 단단히 채워진 채 고개는 앞으로 약간 늘어뜨린 아주 불편한 자세로 겨우 서있는 중이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볼 수가 없었지만 수우는 이미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에 기가 죽고 있었다. 그때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째지는 소리가 그의 등에서 울렸다. 얼이 반쯤 나간 수우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어올랐다. 죄수는 약간 몸을 뒤틀었을 뿐 소리도 내지 않았다.

"5분마다 한대씩 치고 있는데 94대째니 지금이 저녁 8시 15분인 모양이군......"

거친 숨을 헐떡이던 카렐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정확하군."

베흔이 시계를 보며 대꾸했다. 카렐의 등쪽을 보던 수우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녀석은 워낙 독종이라 저정도로는 안죽습니다."

'전하'소리에 카렐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카렐의 눈동자가 수우를 똑바로 향했다.

카렐의 매서운 시선에 수우는 너무 놀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카렐, 카렐 어디갔어요? 예?"

카렐이 근위대에 끌려가고 난 다음날 페로의 집을 찾아온 어린 수우는 집안을 다 뒤지고 돌아다녔지만 카렐은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꽃씨 구해다달라더니......어딜간거야......"

집안을 다 헤매고다녔던 수우는 결국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카렐이 즐겨 앉아있던 떡갈나무 언덕쪽을 올려보았다.

"카렐은 이제 안와."

그의 옆에 털석 앉은 건 풀이 죽은 모습의 페로였다. 심하게 맞았는지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늑대에게 물려 으스러진 한쪽 손에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뭐?"

"갔어."

"어딜 가?"

"몰라, 나도 몰라."

페로가 훌쩍거리며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밤새 울었는지 페로의 눈도 퉁퉁 부어있었다. 수우가 멍 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이제 다시 안오는거야?"

수우는 친구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년이 넘게 이곳에서 함께 뛰놀았던, 아니 페로와는 3년가까이 둘도없는 사이로 지냈던 여자친구가 단 하룻밤새에 아무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황당한 상황이 열살박이 어린 수우에게 쉽게 납득이 갈 턱이 없었다.

"100년동안 아무도 볼 수 없는데로 간대.......100년 후에 무서운 가디언이 되어서 돌아올거래. 아빠가 그랬어."

너무도 뜻밖의 말에 수우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도안돼, 카렐같이 겁많은 애가 무슨 가디언이야!"

"나도 몰라......"

충격을 받은 수우는 가져간 꽃씨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져버렸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글썽글썽하기 맺히기 시작했다. 페로가 그런 수우의 앞에 파란 병 하나를 내밀었다.

"카렐이.....너 주랬어......나중에 꼭 돌아온다고......울면서 끌려갔어......"

수우는 페로가 내민 병을 급히 열어보았다. 카렐이 그동안 모아온 마른 꽃잎들이 병 안에서 은은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우......정말 오랫만이야......결국 만났네......"

형틀에 묶여있던 카렐이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그 와중에도 미소를 짓고있었다.

"무엄하게!"

베흔이 옆에 놓여있던 가죽채찍으로 카렐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기세와 강도에 깜짝 놀란 수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카렐의 뺨과 입술이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많이 맞았는지 그의 긴 눈썹엔 피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긴 머리가 다시 카렐의 얼굴을 내리덮었다.

"이녀석이 전하를 능멸하려 듭니다. 어떡할까요?"

카렐의 머리채를 움켜쥔 베흔이 수우를 홱 돌아보았다.

"합당한 벌을 내리십시오."

베흔이 힘을 주어 말하자 채찍질을 하던 간수와 주변에 둘러선 여럿의 시선들이 일제히 수우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암묵적인 강요를 결국 이겨내지 못한 수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열대만......더 때려."

"예!"

간수의 대답과 함께 채찍이 바람을 갈랐다. 귀를 찢는 채찍의 타격음과 함께 카렐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고통에 겨운 카렐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지금까지처럼 단 한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고 있었다. 10대를 더 맞은 카렐의 등은 형편없는 꼴이 되어있었다. 고통에 이를 악문 카렐이 다시 수우를 돌아보았다. 핏발이 선 채 촛점을 잃어가는 그 희미한 눈빛이 자신의 허리에 찬 파란 꽃잎병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좋아. 처형시간도 다 되었는데 지하 2층으로 옮겨."

베흔이 병사들을 손짓해 불러들이며 말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수우는 피가 튀어 더러워진 자신의 옷과, 처참한 꼴로 늘어져 있는 카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150년만에 처음 마주한, 그리도 보고싶어했던 카렐을 이렇게 끔찍한 몰골로 만든 건 자신의 오기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이었다. 조금 벌어져있는 카렐의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장, 그냥 여기서 때려죽여도 될걸 왜 거기까지.....거긴 공공구역하고 가까와서 보안상태도 안좋고....."

고문실을 지키던 쿠베가 불만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베흔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 손님이 있거든. 아참, 감방 의무실에 연락해서 각성제 놔 줄 준비시켜. 또렷한 정신에서 형을 치러야 하니까. 걱정 마. 페로 새끼들은 지금 우리 요원들이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으니까."

베흔이 카렐을 이용해 페로에게 미끼를 놓은 것임을 깨달은 쿠베는 그제서야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궁지하 2층은 악질 정치범이나 체제범---주인을 살해한 노예나 규정을 어긴 가디언들과 같이---들을 수용하는 근위대 황궁감옥의 최상층이었고 미결수를 수용하는 유치장, 경비병 숙소와 '제한된 손님'이 있을 때 드물게 사용되는 간이처형장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보안을 걱정하던 쿠베 말마따나 황궁감옥 내에서는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페로 가디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쓸만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미 곤죽이 된 카렐이 평소 입던 망토에 돌돌 말린 채 짐짝처럼 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들어왔다. 한구석에 기다리던 모렌 박사는 하루만에 마주한 카렐의 처참한 몰골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베흔이 그런 모렌 박사에게 유난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모렌 박사님께서 그리도 원하시던 광경이니 똑바로 쳐다보시죠. 똑바로요."

상석엔 수우가 앉아있었고 그 좌우를 베흔 이하 네 명의 특급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베흔이 옆에 서 있던 시로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페로 녀석 가디언들 지금 어딨어?"

"그게......아무 조짐 없습니다."

시로의 대답에 베흔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럴리가 있나? 이놈 죽으면 자기네들도 끝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정말로 아무 움직임도 없습니다."

페로가 카렐을 구하는 바보짓을 하느니 이놈을 포기하고 다른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기회에 페로를 덫에 끌어들여 완전히 몰락시켜버리려 했던 베흔으로서는 이만저만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페로의 출동을 대비해 페로 관과 3번도시 인근에는 이미 근위대 대병력을 집결해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미리 나눠준 페로 가디언들의 얼굴과 대응방법을 완전히 숙지한 근위대원들이 이곳 주변 사방에 깔려있었다.

형리가 불붙은 큰 토치를 중앙에 세워놓자 병사들이 반 쯤 정신이 나가 흐느적거리는 카렐을 그 앞에 앉혔다. 피부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등에 의자의 등받이가 닿자 카렐이 그 와중에도 몸을 약간 움찔 했다.

"쯔쯔, 좀 안되긴 했군. 그래도 명색이 내 수제자인데."

카렐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베흔이 낮게 중얼거리고는 그의 얼굴에 범벅이 된 피를 한 번 핥았다. 쿠베와 수에보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들보다 근위대 선임멤버들인 시로와 제파는 한때나마 동료였던 카렐의 그런 모습이 보기에 부담스러운지 연신 엉뚱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렌 박사는 베흔과 카렐을 번갈아 쳐다보며 약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저어, 베흔 근위대장......그......."

모렌 박사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베흔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카렐에게 예의 그 심술을 그대로 부리고 있었다.

"네 모든 게 다 꼴보기 싫지만......네 이 골아픈 색깔나는 회색눈깔하고 갈색머리는 특히 꼴보기싫어......내가 무지 싫어했던 년을 생각나게 하거든. 기왕 시작하기 전에 아예 없애주는 게 낫겠군."

베흔이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대뜸 카렐의 눈에 가져갔다. 카렐의 눈을 파내려는 베흔의 손목을 시로가 갑자기 확 붙들었다.

"뭐하는 짓이야? 감히,"

베흔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장작구이' 처형에서 백미는 죄수가 자기 몸이 타들어가는 걸 직접 본다는거죠."

시로가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자 베흔은 그 말이 그럴듯한지 어깨를 한 번 으쓱 했다.

"하긴, 그렇긴 해.....야! 각성제 놔!"

베흔의 명령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무병 하나가 주사기를 들고와 카렐의 목에 들이댔다. 희미하게 의식이 있던 카렐의 눈동자가 그 의무병의 시선과 바로 코앞에서 마주쳤다. 순간 움찔 한 카렐의 목에 의무병이 주사약을 쏘아넣었다. 이 처형실 안의 그 누구도 이 병사의 왼손이 카렐의 옆 목을 일정한 템포로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근위대 가디언들이 쓰는 암호코드라는 사실도.

주사를 찔러넣은 병사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여섯시간동안 정신이 또렷할겁니다."

"좋아. 슬슬 요리를 시작해야겠군. 카렐을 깨워라."

베흔의 지시에 의무병이 카렐의 뺨을 톡톡 두들겼다. 고개를 가누며 눈을 뜨는 듯 싶던 카렐이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우욱,"

카렐이 입에서 갑자기 피가섞인 거품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붉게 변해버린 카렐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덩어리피가 쏟아질 듯 끔찍하게 변해 있었다. 카렐의 뜻밖의 반응에 깜짝 놀란 베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뭔가!"

"부작용인가봅니다......워낙 특이체질인데다가 약물을 쓴 데이터가 없어서......이, 이런......"

당황한 의무병은 어쩔 줄 몰라하며 미쳐 날뛰는 카렐의 뺨을 마구 후려쳤다. 카렐을 진정시키려는 의무병의 옷자락도 피와 침으로 순식간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베흔이 잔뜩 일그러든 표정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이놈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처형해야 한단 말이다! 망할!"

"30분만 주신다면 윗층 의무실로 데려가 치료를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제기랄! 쿠베! 네가 뒤따라가라. 혹시 놈이 딴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의무병이 그때까지도 몸부림을 치던 카렐을 어깨에 번쩍 둘러메자 중무장을 한 쿠베가 두명의 근위대원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붙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베흔이 갑자기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아까 그 의무병녀석......덩치도 별로 안크던데......카렐같이 무거운 녀석을 그렇게 쉽게 짊어지지?"

경비병과 가디언들에게 페로의 특급과 1등급 가디언들의 얼굴, 행동양상을 숙지시켜 이곳 처형실 주변에 온통 깔아놓은 상태였지만 방금 그녀석은 틀림없이 '가디언다운' 체형은 아니었다. 순간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듯한 표정이 되어버린 베흔이 허둥지둥 칼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로, 제파. 날 따라와라, 어딘지 이상해."

카렐을 등에 짊어진 의무병은 경비병들이 빽빽히 깔려있는 지하 2층을 보란듯이 가로질러 빠져나와 지하 1층에 있는 의무실을 향해 바삐 걷고 있었다. 두 명의 경비병을 동반한 쿠베가 놓칠세라 그 뒤에 바싹 붙어있었다. 의무병이 빠른 발걸음으로 모퉁이에 확 접어들자 쿠베도 그를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 때, 막 지나쳐온 복도의 방화셔터가 내려지는 소리에 쿠베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욱!"

옆구리를 불로 지지는듯한 끔찍한 통증에 쿠베가 그만 앞으로 주저앉았다. 쿠베가 칼을 뽑아들려 했지만 옆구리에 이미 깊숙이 박혀버린 단검 때문에 거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오호, 쿠베아냐?"

쿠베를 향해 씽긋 웃음지어보인 건 다름아닌 가디언 네피였다. 카렐을 짊어지고 가던 '의무병'이 휙 돌아서며 씨익 웃음지었다. 단검에 찔린 채 위를 올려본 쿠베는 그제서야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전혀 가디언답지않은, 평범한 남자와 별다를것 없는 조그만 체구의 '의무병'은 근위대 가디언이었다가 10여년 전 네피의 무리에 합류한 조페였다.

"이익......"

어처구니없이 속아넘어간 자기 스스로에게 울분이 치솟은 쿠베가 온몸을 거칠게 떨기 시작했다. 쿠베를 따라온 두 명의 병사들은 조페와 함께 온 가디언들에게 이미 기습을 당해 목이 뒤로 돌아간 채 구석에 팽개쳐져 있었다.

"따라나선 네놈한테는 불운이고 내겐 횡재로군."

카렐을 네피에게 넘겨준 조페가 빈정거리며 칼을 뽑아들었다. 자신의 목을 향해 겨누어진 칼을 바라보며 쿠베가 모든것을 각오한 듯 눈을 감았다. 옆구리의 상처를 움켜쥐며 쿠베가 이를 악물었다.

"이놈!"

귀청을 찢는 마찰음과 함께 웬 물결무늬 칼날이 금속제 방화셔터를 찢고들어와 조페의 뺨을 가르고 지나갔다. 쿠베의 목을 베려던 조페는 뺨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뒤이어 거대한 도끼날이 찢겨나간 반대편 한구석을 또다시 찢어발기며 파고들어왔다. 조페를 따라온 가디언 중 한명이 도끼날에 엉덩이를 베이며 급히 셔터에서 떨어졌다. 기회를 잡은 쿠베가 조페 반대편으로 허둥지둥 몸을 날려 기어가기 시작했다.

"썅! 베흔하고 시로야!"

카렐을 짊어진 네피와 뺨을 다친 조페, 그리고 두 명의 가디언이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엄청난 힘으로 셔터 한쪽을 순식간에 찢어낸 베흔과 시로가 세 명의 가디언과 함께 결국 셔터를 뚫고 넘어들어왔다.

"저쪽! 저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쿠베가 네피 일행이 달아난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헐떡이는 소리로 외쳤다.

"문! 문이 어디야?"

흐느적거리는 카렐을 지고 달아나던 네피가 피가 흐르는 뺨을 움켜쥐고 함께 달리는 조페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하 2층에 버글거리며 몰려있던 그 많은 경비병들이 곧 이곳으로 몰려올라올 건 뻔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데는 이곳에서 10년 전까지 특급 가디언으로 있었던 조페만큼 확실하게 기댈 사람도 없었다.

"1차 탈출로는 너무 멀어! 놈들이 이미 봉쇄했을거야! 따라와!"

자리에 멈춰선 조페가 오른쪽 창고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뒤를 쫓아오는 베흔과 시로의 모습이 벌써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들어오자 조페가 급히 창고문을 걸어잠궜다. 베흔이 이끄는 근위대들이 몰려들면서 문밖에서 요란스런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단 몸은 피했지만 녀석들이 문을 부수고 이 안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뭐야? 여기서 뭘 어쩌겠단거야?"

조페가 비틀거리며 네피를 한구석으로 이끌었다. 이 창고에 물건을 하역하는 데 썼음직한 쇠로 된 큰 손잡이와 문짝이 있었다.

"이, 이걸 부숴,"

"왜?"

"빨리!"

베흔의 무리들이 이미 바깥의 문을 부수고 있었다. 네피는 하는 수 없이 도끼로 손잡이를 힘껏 내리찍었다. 손잡이가 불꽃을 튀기며 부서져 날아가자 조페는 문짝을 홱 열더니 그 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뭐야! 썅, 설명이나 해주지,"

네피도 별수없이 카렐과 함께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화물이 떨어지는 큰 롤러 콘베이어를 타고 한참을 미끄러진 일행은 노예들이 화물을 나르고있는 화물 주차장 한쪽 수레에 볼쌍사납게 코를 처박으며 차례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카렐이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끄응 하며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비켜! 비키란 말야!"

벌떡 일어난 조페가 앞을 가로막는 노예들을 사정없이 떠밀며 길을 만들자 카렐을 등에 업은 네피가 한손에 도끼를 움켜쥔 채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차 한대에서 운전사를 거칠게 잡아 내동댕이친 조페가 네피에게 빨리오라 손짓을 보냈다. 서너명의 경비병들이 소란에 달려왔지만 칼을 들고 서 있는 조페와 네피, 그리고 그의 등에 업혀있는 카렐까지 포함한 무려 다섯 명의 막강한 가디언들의 모습에 소리만 지를 뿐 차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덤벼봤자 칼 한번 맞대보지도 못한 채 두토막나는 것이 고작이겠지만. 그들 중 한 명이 대담하게 네피에게 창을 던졌다가 도끼를 치켜들며 고함을 지르는 그의 기세에 놀라 기겁을 하며 내빼고 말았다.

"너 업혀있어도 얼굴빨은 통하는구나,"

네피가 등에 업힌 카렐을 달려주듯 킬킬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두 명의 가디언에 뒤이어 네피와 카렐이 오르자마자 요란스레 출발한 차가 화물 주차장을 빠져나가버렸다. 채 2,3분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동안 눈깜짝할새 카렐을 빼내온 덕에 근위대들은 이제서야 황궁 본관을 폐쇄하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경비 가디언들이 주차장에 몰려나왔을 때는 이미 네피가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난 후였다. 페로를 끌어들여보겠다는 욕심에 바깥과 바로 연결된 지하 2층에서 카렐의 처형을 진행하려 한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 셈이었다.

어쨌든 황궁 본관은 빠져나왔지만 아직 별관과 광장, 각종 부속시설들로 이루어진 황궁 컴플렉스를 빠져나가야 하는 두번째 단계가 남아있었다. 힘겹게 뜬 눈으로 바깥을 살피던 카렐이 끓는 소리로 말했다.

"왼쪽으로 틀어."

"뭐?"

"왼쪽!"

"바보야! 거긴 다시 황궁이야!"

"알아!"

차가 다시 황궁 본관 정문쪽으로 돌진해들어갔다. 카렐은 막 황궁을 나서서 한쪽의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검은 피부의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잡아,"

카렐이 눈에서 살기를 번득이며 말했다. 그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네피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입가가득 웃음을 지었다.

"오호, 괜찮은 생각이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