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7화 (17/1,132)

< -- 17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시 자이센 가문의 후손이구나. 부총리가 위기에 처했던 자이센 가문를 다시 일으켜세워놓은 것도 모자라서 이젠 이런 큰 공훈까지 세우다니."

황궁의 화려한 대전 상석에 앉아있던 세나우스 3세 황제가 씽긋 웃으며 페로를 내려다보았다. 네피를 비롯한 네 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무장을 한 부총리 페로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원정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문관인 부총리라는 지위가 이런 원정을 지휘하기에 그다지 적당한 관직은 아니었지만 수천에 달하는 자신의 사설 가디언부대를 이끌고 있는 그는 근위대와 함께 도적소탕작전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특별면허'까지 가지고 있었다.

얼굴가득 만족스런 표정을 짓던 황제는 페로의 보고서를 넘겨받으며 그의 어깨을 한 번 두들겨주었다.

"이번에 소탕한 도적떼는 우리 근위대도 곤란을 느끼던 녀석들이었는데, 정말 장한 일을 했구나. 젊은 자이센. 역시 자이센 가문의 피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황공하옵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해 온 공로를 인정해 내가 특별한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페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와, 그 옆에 앉아있는 황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제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좌우를 한번씩 둘러보았다.

"내 소유물 중에서 뭐든지 가지고싶은 것을 하나 골라라."

큰 선택이 시간이 왔음을 깨달은 페로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황제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기 옆에 선 다섯 공주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저 황제가 의도하는 바는 말하나마나였다. 저 공주들 중 한명을 데려가 제국의 부마가 되라는 명백한 눈짓이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행방불명되어버린 수우를 대신할 새로운 후계자로 바로 자신을 선택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전에 모여선 각부 대신들의 분위기가 무섭게 술렁이고 있었다. 이제 문제는 페로가 '어떤 공주'를 택하느냐일 뿐이었다.

즉시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던 페로가 잠시 말이 없자 황제가 그를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어여쁜 내 딸도 좋고 이 용의 보검을 원해도 좋다. 뭐든지 말해라."

페로가 눈을 감았다. 옆에 앉아있던 로카가 페로의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각하, 공주저하를 원한다고 하십시오, 폐하께서 각하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시는 게 확실합니다. 이번이 기횝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막내 라이 공주가 그나마 가장 황제의 총애를 받고있다 하니 그쪽을 택하십시오."

로카의 간언에 낮은 한숨을 내쉰 페로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화려한 대전 안은 온갖 보물들로 꽉 차 있었고 황제와 함께 나온 공주들도 페로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공주들에게 있어서도 페로는 수려한 외모와 막강한 세력, 지도력을 모두 겸비한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 아닐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판별할 능력도 없는 심각한 정신지체인 세째와 네째공주를 제외한, 그나마 어느정도의 분별력을 갖춘 나머지 세 명의 공주들도 아버지 황제가 자신들에게 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페로를 향해 최대한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긴장한 페로의 눈동자가 대전의 황실 보물들과 공주들을 한 번 훑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곧 황제 바로 뒤에 베흔과 나란히 서 있는 큰 키의 한 사람에게 멎었다. '등급없는 가디언'이며 근위대 남부파견군 사령관인 카렐은 자신을 바라보는 페로의 묘한 시선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못했다.

고개를 천천히 떨군 페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렐을 주십시오."

순간 황제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다. 페로가 당연히 공주 중 한명을 택할 것으로 믿고있던 대신들 역시 갑자기 터져나온 황당하기까지 한 페로의 요구에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가 원하는 폐하의 소유물은 가디언 카렐입니다."

황제의 거듭된 질문에 페로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카렐과 페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음장같던 카렐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의 당혹스러움을 달래주려는 듯 페로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카렐을 데리고 더 많은 도적들을 소탕한 후, 폐하께서 또다시 제게 새로운 소원을 물으실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페로의 명쾌한 대답에 몇 대신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큰 박수는 대전 안에서 계속 번져나갔다. 자신의 말을 주워담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줄수밖에 없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게 누구야?"

무심코 산 위를 울려본 조페가 네피에게 물었다. 멀리 언덕 위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 한사람이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가운 위로 갈색의 긴 머리가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네피가 냉큼 대답했다.

"카렐."

"후아, 정말 저녀석 더럽게 빨리 낫네, 며칠이라고 벌써 바깥출입을 해?"

"열흘쯤 됐나?"

네피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카렐은 벌써 몇시간째 바람을 쐬며 동상처럼 그대로 서있는 중이었다. 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서 있는 것이 카렐이 생각이 많은 때 곧잘 보이던 습관이었다는 것을 잘 아는 네피는 조페에게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럼 저건 또 누구야?"

카렐이 서 있던 언덕 위로 쫓아 달려올라가고 있는 또한사람의 모습에 조페가 다시 질문을 던지자 네피가 냉큼 대답했다.

"솔인가 걔네."

"아직 바깥바람 쐬면 안좋아요."

망토를 끌어안고 집에서 이곳까지 달려나온 솔에게 카렐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솔은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던 카렐의 어깨에 예의 그 검은색 망토를 덮어주었다.

"영양식을 새로 만들었는데 아직 한수저도 못드셨죠? 얼른 들어가세요. 새로 차려드릴께요."

카렐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솔은 바람에 약간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져주었다.

"부럽군,"

카렐과 솔의 뒷모습을 멀찍이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피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부러워. 자기를 저렇게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니......후우......"

네피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묘한 외로움이 번지고 있었다. 조페는 평소답지않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 동료가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있었다. 한때 페로 가디언부대에서 카렐과 함께 최고의 지위를 구가하던 네피가 이곳까지 도망쳐와 이 '유랑민 집단'의 수장 정도로 전락해버린 것도 다름아닌 여자 때문이었다.

가디언으로 최악의 금기를 깨고 결국 탈출이라는 극단을 택했던 네피는 하지만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죽음을 당한 옛 연인의 시신조차도 챙겨줄수가 없었다.

또한번 한숨을 내쉰 네피는 언덕 위의 카렐을 다시한번 올려보았다. 조페가 멍하니 서 있던 네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니까 생각나는데......저 솔이란 애......어째 어디서 많이 본 얼굴같지 않아?"

네피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지며 옆에 선 조페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순간 당황한 조페가 흠칫 놀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쓸데없는 소리 해서."

"생각해야 돼, 머리를 굴려야 해. 네피가 페로 가디언을 도와주다니, 정말 이해못할 일이야,"

베흔이 계속 회의실 안을 서성거리며 성을 이기지 못해 계속 떠들어댔다. 부상을 입은 쿠베는 고개로 들지 못한 채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아시다시피 녀석은 페로 수련장 출신입니다."

시로가 즉시 대답했지만 베흔은 그의 말에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아, 알아. 하지만 페로같이 자존심강한 녀석이 자기 밑에서 달아난 도망 가디언과 손잡는 건 좀 이상하잖아?"

"실속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네피놈의 패거리하고 우리는 이미 거의 원수지간이고, 페로와는 지금껏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없던 것이 사실 아닙니까? 카렐이 죽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동맹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을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말입니다."

베흔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네피의 신상자료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아냐아냐, 네피녀석이 그럴리가 없어......딴사람도 아니고 페로하고 손잡을리가 없어......그 여자 때문에라도........"

"하지만 문제는 녀석이 실제로 도와주었다는 겁니다."

시로가 베흔의 손을 붙들고 잔뜩 힘을주어 말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베흔이 탁자위의 서류뭉치를 홱 집어던지며 멀리 창밖을 응시했다.

"이건 위기다. 중대상황이야. 카렐은 이번에 중상을 입어서 아무리 짧게잡아도 1달은 우리들과 싸움을 하기 힘들어. 하지만 네피 패거리가 동맹이든 고용이든 페로와 손잡았다면......네피, 조페, 체이호 세 놈의 특급 가디언이 놈의 손에 쥐여지는거다. 그러면 우리는 특급이 6명, 놈은 카렐을 빼도 9명......"

"페로의 특급들은 저희들보다는 경력이 짧은 신출내기들이 많습니다."

시로의 한마디에 베흔은 앞의 보드에 갑자기 이름들을 마구 적어내려갔다.

"우리에겐 파견군 나간 놈들을 빼면 특급 여섯, 1등급 31, 2등급 61명이 있다. 페로에겐 역시 특급 여섯과 1등급 27, 2등급 40명이 있지. 우리가 확실히 우세한데 문제는 카렐이지. 그런데 여기에다가 더하기 네피 패거리의 특급 셋, 1등급 셋, 2등급 13명이 들어가면......휴우,"

베흔이 칠판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며 말했다.

"나와 시로가 우리중엔 가장 강하다. 페로 밑에선 다룬이 제일 강하지만 내가 맘만 먹으면 꺾을수도 있어. 그런데 네피 이놈은 확실히 강해......시로에겐 무리고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녀석이야. 묶어보면 네 명의 강자가 나오는군."

베흔이 그들의 이름위에 붉은 원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편의 제파, 쿠베, 셈, 수에보는 중간 수준이다. 페로의 킵과 판이 비슷하다. 네피의 조페 녀석도 괜찮은 수준이야. 칫, 이녀석도.....10년 전까지 우리 동료였는데......이렇게 되다니......"

베흔이 이들 일곱의 이름도 한데 묶었다.

"마지막으로 페로의 엘러, 헨지하고 네피의 체이호는 특급 치곤 좀 떨어져. 이녀석들이 3약이다. 그런데 페로 밑에서 새로 특급이 된 카인이란 녀석은 영 요주의대상이야. 가디언답지않게 너무 똑똑한데가 있거든......실력은 둘째치고 이놈은 각별히 조심해야 할 예외로 쳐두기로 하지. 휴우......여기에 카렐이라......골치아프군......"

수에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체 병력은 저희가 월등합니다. 녀석에겐 정규군도 없지않습니까."

"힘만으로 모두 되는 건 아냐. 수에보."

베흔이 얼굴을 찌푸리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정규군 수만하고 가디언들 긁어모아다가 제국 총리대신인 페로를 공격한다고? 무슨 명분으로? 그냥 눈에 거슬려서? 녀석을 지지하는 제후놈들 길길이 날뛸테고, 근위대라면 치를 떠는 유학자놈들도 사방에서 시민들을 선동할텐테, 또한번 내전상황으로라도 만들려고? 알아둬, 군사력의 일차 목표는 상대를 압도해서 의도한 바를 이끌어내자는거지 처음부터 칼을 뽑아들고 죽자사자 싸우는 게 아니야."

"페로와 싸우는 건 명분이 없지만 네피 녀석은 다르죠."

피식 웃음지으며 입을 연 건 셈이었다.

"네피 녀석이 페로와 손을 잡았든, 고용된 것이든간에 이대로 놔두면 자칫 그녀석이 페로의 정규군조직으로 변모될 수도 있습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쓸어버리는 게 상책이죠. 페로에게 근위대의 힘을 보이는 기회도 될 수 있고."

셈의 의견에 공감한 베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도 신통치않았던 몇 번의 원정을 빼고는 지금껏 그가 네피 녀석의 패거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녀석의 무리가 도적질을 하거나 체제에 심각한 도전을 해 온 일도 없었고 그냥 대사막을 떠돌며 오아시스를 찾아 농사를 짓거나, 광산에서 파낸 원석, 혹은 수공업제품을 암시장에 내다파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녀석들에게는 체제에 도전할 힘도 없었고, 세력을 키울 강력한 지도자도 없었다. 네피는 싸움은 잘할지 모르지만 단순우직한 성격에 정치의식은 거의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도자라기보다는 무장으로나 어울릴 인물이었다.

하지만 저런 녀석들이라도 페로의 손에 쥐여진다면 경우가 달라지는 셈이었다. 페로의 경제력과 지도력이면 네피 무리의 시민들은 언제든 정규군 병사들로 변모할 수 있었고, 페로가 직접 나서기 어려운 일들을 대신 수행하는 '2중대'가 되어줄 수 있었다.

"자신 있나?"

베흔이 셈을 힐끗 흘겨보며 물었다. 씽긋 웃음지은 셈이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정규군 만 명과 가디언 5백명만 주십시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