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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8화 (18/1,132)

< -- 18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네피가 초췌해진 몰골의 모렌 박사를 바닥에 질질 끌고왔다. 곱던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온몸은 때투성이였다. 의자에 앉아 쉬던 카렐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 지독한 년이지, 제가 만든 카렐을 베흔한테 넘겨? 이년을 어떡해야 하나?"

죽그릇을 들고 카렐에게 오던 솔이 깜짝 놀라 우뚝 섰다. 카렐이 들어오지 말라고 손짓하자 솔은 벽 뒤에 가만히 몸을 감추었다. 네피가 모렌 박사의 어깨를 밟은 채 물었다.

"어떡할거야? 카렐? 신경쓰이는데 그냥 죽여버릴까?"

"복수따윈 원치않아."

카렐이 여윈 얼굴을 가볍게 가로저었다.

"건방진 것,"

모렌 박사가 카렐을 쏘아보았다. 네피가 대뜸 모렌 박사를 땅바닥에 동댕이치자 피를 토하며 바닥을 그대로 나딩굴렀다.

"이년 아직도 입만 살았네."

"거칠게 다루지 마. 네피. 시민은 약해서 그정도 충격에 죽을수도 있어."

"별일이네, 너 지금 이여자 생각해주는거냐?"

"죽일필요까진 없잖아."

카렐이 고개를 떨군 채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카렐과 모렌 박사의 눈동자가 결국 다시 마주쳤다. 카렐은 전과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모렌 박사의 오기어린 시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가지 다시 묻겠소. 억세스 코드를 내게 알려주시오."

"싫다면 싫은거야."

"코드를 알려주면 당신을 풀어주겠소."

"말을 바꾸진않겠다."

모렌 박사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카렐이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유가 뭐요?"

"넌......시아푸의 살인자니까."

"어떻게하면 당신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겠소?"

"네가 죽어주면 돼."

"이런 뻔뻔한 년!"

"그만둬, 네피."

참다못한 네피가 모렌 박사를 걷어차려 하자 카렐이 급히 손을 치켜들었다.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인 카렐이 말을 이었다.

"가디언은 언제든 적의 손에 죽을수밖엔 없는 운명이요. 당신이 그렇게 바라지 않아도 난 너무 많은 적들 때문에 언젠가는 죽게 될테고 이런 나의 업보 때문에 이미 죽음보다 더한 고통스런 일들을 겪었지."

"하지만 넌 여전히 살아있잖아,"

모렌 박사가 입언저리의 피를 닦으며 쏘아붙였다. 카렐의 입가에 다시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조금은 뻔뻔스럽기까지 해 보이는 카렐의 그 모습에 모렌 박사가 긴장하고 있었다.

카렐이 눈을 감으며 들릴듯말듯 작은 소리로 농담하듯 물었다.

"내가 죽어주면 알려줄거요?"

"내가 물었지않았소. 내가 죽어주면 알려줄거냐고."

"돌았군,"

모렌 박사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천천히 눈을 뜬 카렐이 미소띤 얼굴로 물었다.

"내가 죽어주면 된다면서?"

"허, 미쳤어?"

모렌 박사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카렐의 다시 매서워진 눈동자와 모렌 박사가 날카롭게 마주쳤다. 카렐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나즈막하게 물었다.

"내가 그러길 원하시오? 죽으라면 죽을수도 있어. 하지만 내게 죽으라는 말이 당신 입에서 나오는건 쉬운일이 아닐걸."

"교활하군......카렐."

카렐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만 모렌 박사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어리둥절해진 네피가 카렐과 모렌 박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베흔이 날 넘기지 않으면 모렌 수련장을 통째로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겠지? 500명의 수련생을 모두 잡아다 불에 태워 죽여버리겠다고? 50년 전에 부노 수련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땐 너도 한패거리였잖아."

모렌 박사가 이를 악물었다.

"난 알고있소. 내가 푸엘 숲에 갇혀서 최악의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당신이 몇번이나 몰래 찾아왔었다는 걸. 베흔 몰래 뇌물을 주고 내게 먹을것과 약을 주고갔다는 것도."

모렌 박사의 눈시울이 붉게 변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카렐은 자기를 쏘아보던 모렌 박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품에 껴안았다.

긴장한 모렌 박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건......그냥 보려고 갔던 거 뿐이야......궁금해서......"

"당신이 날 친딸처럼 각별히 대했다는 걸 모를만큼 어리진 않았으니까."

모렌 박사의 귀에 대고 나즈막히 속삭인 카렐은 그의 이마에 뺨을 가만히 부볐다. 하지만 모렌 박사는 자기를 껴안은 카렐을 거칠게 밀어내버리고 말았다.

"......회유해도 소용없어."

모렌 박사가 짐짓 냉랭하게 쏘아붙였지만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낮은 한숨을 내쉰 카렐은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네피에게 도로 데려가라며 손짓을 보냈다.

"페로의 예상밖의 저항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일단 중요한 일들은 예정대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회의 시간에 클레모 내무대신이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

수우가 의자를 바싹 당겨앉았다. 클레모 대신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약간 조심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전하의 결혼 말입니다."

'결혼'이라는 말에 수우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난 그게싫어서 유랑길에 나섰었잖나. 선대폐하가 돌아가셔서 이제 그게 필요없어진거 아냐?"

"죄송합니다. 전하. 현실입니다. 선대폐하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전하께서 혼인도 하지 않으시고 제위를 승계한다면 황실 종친들을 또다른 적대세력으로 만들게 됩니다. 종친들이 역성혁명이라고 반발할테고 저 망할 유학자놈들도 가만히있지 않을 겁니다. 어쨌든 전하의 혼인은 제위 계승권의 전제조건으로 못박혀 있습니다. 태자들도 당연히 '리쿠'의 성을 이어야 하구요."

"그렇다고 그 멍청이 공주들하고 지금 결혼하라고?"

"공주가 다섯이나 되니 그중 가장 나은 하나를 고르시죠."

베흔이 결국 끼어들었다.

"다 싫어."

수우가 입을 삐쭉거렸다. 수우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클레모 대신과 베흔이 잠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짓을 보았는지 아닌지 수우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친딸들이 오죽 못났으면 죄 포기하고 하나 핏줄도 없는 날 후계자로 정하셨겠냐고."

수우의 어린애같은 생떼에 보다못한 베흔이 거들었다.

"그나마 막내 라이공주가 제일 미인이니 일단 거두십시오. 이 결혼은 요식행위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공주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황제의 여자관계를 통제하는 황후 고유의 특권을 행사할 능력도 못됩니다."

베흔의 말에 다시 얼굴을 찌푸린 수우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흔이 자리에 둘러앉은 대신들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곧 방안이 다시 비고 자신과 베흔 단 둘만이 남자 수우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낮게 중얼거렸다.

"라이 공주가 순순히 나와 결혼하려하진 않을거야. 나머지 공주들은 말할것도 없고."

"황상께서 기껏 마련해주신 데이트자리를 엉망으로 만드신 건 전하이십니다."

"알아, 알아."

수우가 짜증스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때는 전하께서 좀 심하셨습니다. 상대가 공주였는데 첫 관계에서부터 변태행위를 강요하신 건 틀림없는 실수셨습니다."

"빙신같은 년, 그깟것 가지고......"

"그것도 침대에 묶어두고 그러셨죠. 시트가 피범벅이었습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상대는 공주였습니다."

베흔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수우는 무어가 불만인지 입속으로 연신 무언가를 꿍얼꿍얼거리고 있었다. 베흔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전하 말씀대로 라이 공주는 절대 전하와 순순히 결혼하려 하지 않을겁니다. 나머지 네 공주들도 마찬가지고."

"그럼 어떡하려고?"

수우가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별수없죠. 몽땅 다 잡아들이는 수밖에."

황제령 남반구 타르서스의 별궁으로 일시 피신해있던 공주들에 대한 근위대의 기습은 눈 깜짝할새 이루어졌다. 침입자가 있다는 호위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있고 채 오분도 지나지않아 공주들은 이미 십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근위대 셔틀을 타고 아무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별궁 옥상에 상륙한 20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공주들을 지키고 있던 종친 가디언 5명과 삼십여명의 호위병들을 아무 설명도 없이 기습해 한명도 남김없이 죽여버리고 말았다.

"너희들 뭐하는거야!"

동생들을 지키고 선 맏이 푸츠 공주가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제위승계권도 없고, 심지어 황제의 자매인 '대공주'도 될 수 없는 이들 퇴물 공주들의 명령이 근위대에게 먹혀들 턱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시로가 피가 뚝뚝 흐르는 호위대장의 잘린 머리를 공주들 앞에 내던졌다.

"호위대장 쿠프가 공주저하분들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던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그와 연루된 이십명의 호위병들을 즉결처단했습니다."

시로의 큰 도끼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막내 라이공주는 언니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저 불쌍한 막내공주가 오늘의 표적이었고 나머지 공주들은 그냥 들러리일 뿐이었다. 어쩌면 정신박약으로 지금 이 상황이 무언지 이해도 못하고있을 멍 한 얼굴의 세째, 네째공주가 차라리 행복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긴장된 일만 생겼다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부터 하곤 하던 맏이 푸츠 공주는 오늘은 웬일로 그럭저럭 정상적인 모습으로 동생들을 품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섯공주 모두는 제위 승계권자가 되기 위한 '적합성검사'에서 정신이상으로 탈락해버린 불운한 황족들이었다.

마음약한 시로는 이들 불쌍한 공주들을 바라보며 내심 측은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명령을 받고 온 군인의 입장에서 그로서도 별 도리가 없었다. 시로가 공주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짐짓 위협적으로 말했다.

"아직 전모가 다 밝혀진것이 아니니 아씨들의 안전을 위해 본궁으로 들어와 지내시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공주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버지인 세나우스 3세의 죽음 직후 이곳으로 도망온것도 저 무서운 근위대장의 칼날을 피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맏이 푸츠 공주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우린 그전부터 이곳에서 지내왔어. 본궁엔 들어가고 싶지 않아. 안전이 문제라면 종친들의 가디언들을 데려다가 지켜도 돼."

"종친 가디언들이 페로에게서 아가씨들을 지켜주지는 못할겁니다."

"닥쳐, 그래도 페로는 최소한의 도리는 지킬 줄 알아."

푸츠 공주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시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근위대들이 공주들을 갑자기 바싹 조여오자 놀란 공주들은 또다시 서로 껴안고 비명을 질렀다. 시로가 따라온 가디언들에게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라 눈짓을 보냈다.

"어쨌든 함께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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