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지금부터 중요한 발표를 하겠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병상째로 마을회관에 실려온 네피가 자리에 모인 백여명의 각 부락 대표들에게 말했다. 크게는 수백명의, 작게는 수십명의 부락민들의 대표자로 선발되어 온 이들은 각 부락에서 자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간 네피의 손에 조금은 방만하게 이끌어져온 조직에 있어 제일 먼저 손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네피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아다시피 중상을 입었고 한달정도는 예전의 기운을 찾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난 싸움은 잘할지 모르지만 리더쉽이나 정치력, 폭넓은 지식과 결단력에 있어서는 그동안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난 오늘부로 이곳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덕망있고 정치경험도 많은 원로 슈벨을 새 수반으로 옹립하고자 한다."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성성한 백발의 노 대신 구완 슈벨은 스스로의 귀를 위심하는 듯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북부 출신으로 한때 내무대신까지 지냈던 그는 북부의 몰락 이후 실각해 제국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지금은 네피에게 의탁해 이곳의 운영을 돕고 있던 몰락귀족의 한사람이었다.
네피의 뒤에는 카렐이 조용히 앉아 이 부락회의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결정에 그가 어떤 식으로건 관련이 있음을 눈치챈 부락장들의 시선이 카렐에게 모아졌다.
백여명의 부락장들과 카렐과의 잠시동안의 눈싸움이 끝나갈 무렵 네피가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며 나즈막하게 말했다.
"반대하는 자는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락을 이끌고 떠나셔도 좋습니다."
자리는 쥐죽은듯 조용했다. '굴러온 돌'인 카렐이 조직을 장악하겠다고 대놓고 덤빈 것도 아니었고, 파벌과도 관계없는 비교적 온건한 인물로, 이 조직의 내부인사이기도 한 구완 경을 새 지도자로 삼겠다고 하는데 그들로서도 딱히 뭐라 할 명분 자체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네피가 카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일 수 없는 네피를---물론 표면적으로는--- 대신해 카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더니 방 구석에 앉아있던 슈벨 원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쭈삣거리며 일어난 슈벨은 방금전까지 네피가 앉아있던 중앙의 상석으로 움직이더니 조금은 부담스러운 눈치로 좌우를 재빨리 살폈다. 그로서도 뜬금없이 벌어진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네피가 그에게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읽어보시고 이대로 발표해주십시오."
신임 슈벨 수반은 네피가 내민 종이를 살펴보더니 순간 움찔 하고 있었다. 몇장 되지 않는 종이를 찬찬히 읽어본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날 지지해준 여러 부락장님들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저 제위 계승권 싸움에 당당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위해서 나는 우리의 집단을 코아 전사단으로 명명할 것이며 준군사조직으로의 변모를 위해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하겠습니다."
'준 군사조직'이라는 표현에 부락장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3만여명의 구성원 가운데 무려 만여명이 '서류상 병사'로 분류되고 있었으니 지금도 준 군사조직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렇게 새삼스럽게 들고나왔다면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조페가 그 뒤를 받아 큰 소리로 말했다.
"코아 전사단의 수반은 원로 구완 슈벨이 맡는다. 그리고 수반을 도와 방위와 치안을 담당할 최고전사장은 가디언 네피가 맡는다. 현 부락장은 지금까지처럼 부락의 자치권을 그대로 보유한다."
네피가 부락장들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들 부락장들에게서 별다른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전 구성원은 가디언 출신의 4백명의 특수군과, 현 시민병 조직을 강화한 5천여명의 정규군, 그리고 성인남녀 전부를 포함하는 2만여 예비군,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와 수유중인 여성을 포함한 5천여명의 보호민조직으로 크게 넷으로 나눈다. 상비군인 정규군은 근위대, 제후군과 같은 군제로 재편하여 최고전사장 네피가 총괄지휘한다. 예비군은 1달에 3일씩, 정규군에 동원되어 주기적인 훈련을 받으며, 유사시 징집되거나 각각의 부락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동원된다."
일부 부락장들이 대뜸 얼굴을 찡그렸다. 서류상 1만명이던 시민병이 실제 불러모아보면 3, 4천명에 불과했던 것이 바로 이들 부락장들이 그들을 마치 사병처럼 부려먹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용인하고, 정규군을 실제 동원가능한 5천명으로 완전 재편하는 동시에, 병사로 활용할 수 있는 성인남녀 모두---그들이 부려먹어온 이름뿐인 시민병들까지 포함해---를 '예비군'이라는 틀 속에 뭉뚱그려버리겠다는, 고도의 계산된 수작이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거지?"
몇몇 부락장들이 저희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따지고보면 네피가 지도자에서 물러났다는 것도 겉으로만 '그럴싸한 퇴진' 이었다. 상비군으로 편성될 정규군 5천에 대한 지휘권과 2만의 예비군에 대한 징집권까지 가지니 그로서는 골아픈 행정일만을 새 수반 슈벨에게 떠넘기고도 여전히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번 결정이 '단순우직'한 네피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모를 리 없는 부락장들의 시선이 슈벨 총리 뒤에 얼굴을 가린 채 말없이 앉아있던 카렐에게 모아졌다. 이곳을 떠난다고 변변히 발붙일곳도 없는 부락장들로서는 일단은 울며 겨자먹기로 따를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근위대와 페로 경이 지금 팽팽한 세력대결을 벌이고 있는 중이니,"
네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위대에는 이곳 ㅤㅋㅞㄹ크에 대병력을 상주시키며 우리를 잡기 위한 토벌전을 전개할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기회에 우리 코아 전사단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제 더이상의 은둔생활을 접을 생각입니다. 우린 중앙정부에 의해 사실상 버려져있는 이곳 ㅤㅋㅞㄹ크를 영향권에 두고 실질적으로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황실에 충성하나, 아직 모두가 인정하는 새 황제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자체적으로 활동할 뿐입니다."
네피가 마치 누군가가 대필해 준 원고를 읽듯 조금씩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그 뜻만은 확실했다. 그들 조직, 아니 코아 전사단은 아직까지 별다른 주도세력이 없는 이곳 ㅤㅋㅞㄹ크를 지배할 것이며, '유랑민 무리'가 아닌, '자치조직'으로 억지스러우나마 명분을 갖겠다는 뜻이었다.
"체이호놈이 실패한 게 문제가 아니라 말이야......"
병상에 누워있던 베흔이 모여든 휘하 가디언들에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거기에 카렐 놈이 가 있다는 게 문제라는거야."
"페로 녀석이 제일 믿을만한 카렐을 일부러 내보내 네피의 조직을 장악하게 만든 것일까요? 자신의 2중대 노릇을 시키려고? 녀석에겐 정규군이 없으니 그 대신 칼받이가 되어줄......"
쿠베가 제법 그럴싸한 의견을 내놓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베흔만은 최악의 불길한 예감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하필 슈벨 그녀석이었을까?.......기왕 모습을 드러내고 ㅤㅋㅞㄹ크의 자치조직을 자처할 양이었다면 역모건에 연루되었던 놈을 내세워서 매를 불러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을텐데....."
선대황제 초기, 슈벨 내무대신이 몰락한 세네피스 황후의 충복 중 한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베흔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차마 저 부하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모두 저 카렐 놈을 아직까지 살려둔, 아니 적당한 때 제거해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페로 녀석이 덥석 데려가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을.......
ㅤㅋㅞㄹ크에서 들려온 뜻밖의 소식에 페로는 팔짱을 낀 채 방 안에서 한참을 서성거릴 따름이었다. 3만이나 되는 네피의 무리가 ㅤㅋㅞㄹ크의 자치조직을 자처했다는 건 가뜩이나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황제령의 상황을 더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큰 사건이겠지만, 근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력이 밀리는 페로 입장에서는 근위대의 주의를 분산시킨다는 의미에서 어찌보면 득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좀더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어."
옆에 앉아있던 실리페 황후가 술잔을 빙빙 돌리며 오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십니까?"
페로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물었다.
"어쨌든 놈들 정서상 베흔과 손잡을 가능성이 제로라는 걸 확신한다면 네쪽에서 크게 손해볼건 없는 일 아니겠어? 차라리 너하고 원수지간이던 네피가 명목상으로라도 권좌에서 밀려난걸 축하해야 할 일이겠지?"
"후훗,"
페로가 갑자기 쓴웃음을 짓자 실리페 황후가 순간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 역시도 저 똑똑한 페로 녀석의 속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네피의 기존 무장조직을 인수해 제3의 세력을 형상하라며 '일부러 내보낸' 것인지, 아니면 페로에게서 달아난 카렐이 자기만의 야심을 키워가는 것인지.
어쨌든 확실한 건, 카렐 그 무서운 잠재력을 지닌 존재가 작으나마 자기의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실리페 황후는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로서는 선택의 폭이 하나 더 늘어난, 나쁘지않은 사건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우리의 이상과 목표를 용인해줄 의사가 있다면 그에게 협조한다는 말씀이시라면 만에하나 우리의 이 조직이 적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단결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셨읍니까?"
한 젊은 청년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야무져보이는 눈매를 지닌 가무잡잡한 타르서스인 젊은이였다. 상석에 앉은 슈벨 수반이 답변하기 약간 당혹스러운 듯 한구석에앉은 네피를 바라보았지만 그에게서 이런 대담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후훗,"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본 카렐이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저기 있는 가디언 카렐은 도대체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조직을 페로 경을 위해 대신 피흘려줄 칼받이로 쓰려는 수작이 혹시 아닙니까?"
부락장들의 궁금증을 단번에 파고들어간 젊은이의 당돌하기까지 한 질문에 마을회관 안은 순간 정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내게 질문해줘서 고맙네."
카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네피와 슈벨 수반이 우물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발언기회가 온 것을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해두겠네. 난 떠돌이 가디언으로 지금은 최고전사장 네피의 식객일 뿐이고, 이번 일 역시 페로 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네. 하지만 내 맹세컨대, 자네들은 근위대건, 페로 경이건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을거야. 그러니 칼받이가 될 걱정은 접어두는 것이 좋을걸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로서는 이 혼란기가 오래갈수록 더 유리해질걸세."
"무, 무슨 뜻이십니까?"
카렐의 말에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한 듯 젊은이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카렐은 아무 대답없이 한손에 든 단검을 빙빙 돌리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매서운 눈길에도 거의 흔들리지 않은 채 질문을 하고 있는 그 젊은이를 바라보며 카렐이 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카렐이 조용히 물었다.
"39 부락장 대리 우베 마르코스입니다. 타르서스의 평민출신입니다."
야무진 그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카렐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내 자네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끝나거든 좀 와주겠나?"
"전하의 결혼식은 15일로 예정되었습니다."
황궁 150층의 수우 처소를 찾아온 클레모 내무대신이 웃는 낯으로 들어와 알렸다.
그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힐끔 바라본 수우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80여년간의 떠돌이생활을 접고 황궁으로 돌아온 수우는 그 금단현상 때문인지 요즘 부쩍 맥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밤새 여자들과 벌이는 농탕질 외에는 그다지 할일도 없는 그로서는 베흔과 몇몇 제한된 대신들 외에는 만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매일밤 베흔이 붙여주는 서너명씩의 미녀들은 그의 이런 자멸을 보이지않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실리페 황후도 부를건가?"
수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초청은 해야겠죠. 올 리야 없겠지만."
수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잡혀온 다섯 공주들이 근위대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북쪽 별관 옥상의 정원에 모여앉아 따스한 햇빛을 쐬고 있었다. 엷은 한숨을 내쉰 수우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페로는 이미 자식이 있댔지?"
"외동딸이 남극성당에 박사과정 생도로 있다고 합니다."
"부인은 어떡하고?"
"이십년전에 죽었습니다."
"왜?"
수우의 눈동자가 순간 잠시나마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클레모 대신이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가디언과 눈이 맞았습니다."
12.
다섯 공주 중에서 최소한 정상 수준의 지능을 가진 건 그나마 맏이인 푸츠 베로 리쿠 공주와 막내 라이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푸츠 공주는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는 극도로 심한 발작으로 황궁의 기물을 몽땅 부숴놓기가 일쑤였고 라이 공주는 심각한 대인공포로 다른사람 앞에서는 거의 입도 열지 못했고 걸핏하면 거품을 물고 까무라쳐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든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며칠 후 있을 자신과 수우와의 결혼이 스스로에게는 최악의 비극이 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 강제로 끌려온 후 그들은 외부인과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었지만 틈틈이 바람쐬러나오는 황궁 북쪽별관의 79층 옥상정원 산책이 그들에게는 주어진 여가의 전부였다.
옥상정원은 워낙 넓고 가릴 것 없이 확 트인 곳이기에 근위대 가디언들도 멀찍이 떨어진 채 공주들의 길지않은 여가시간을 조심스럽게 바라만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곳은 비교적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는 했지만 입구는 가디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고, 황궁 부근에서 항시 작동되고 있는 자기 와이어 덕택에 몇몇 제한된 주기장들 외에는 비행체의 접근 또한 불가능했다. 그렇다보니 79층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달아날 길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170층의 황궁 본관을 중심으로 그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서 있는 4개의 별관들 중 그나마 가장 낮은 것이 이 북쪽 별관이었다. 이 5개의 매머드급 건물들과 근위대 정규군 막사, 북쪽의 황실 묘지까지 모두 합쳐져서 이 거대한 황궁 컴플렉스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황궁이나 별관들의 출입자 감시는 매우 삼엄했지만 컴플렉스 그 자체는 인근 도시민들이 여가를 보내는 도시 공원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고, 경비 또한 형식적인 것이 불과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옥상정원에 산책을 나온 공주들은 이곳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이나 방문객들과는 격리된 한구석에 모여앉아 따스한 봄 햇빛과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랫층에서 5명의 정원관리 노예들이 올라온 건 그때였다. 공주를 지키던 근위대 가디언들이 그들의 출현에 낯을 찡그렸다.
"흉기가 될 수 있는 건 안돼."
노예들의 연장가방을 뒤진 가디언들은 정원손질용 가위와 톱, 도끼, 손칼까지 위험해보이는 물건들은 모조리 빼앗은 뒤에야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저분들께 접근하면 여기서 떨어뜨려 죽여버릴 줄 알어."
"물론입죠,"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인 노예들의 몸에 남은 건 잎을 닦는 데 쓸 면수건과 물통, 손바닥만한 삽과 나무에 오르내릴 때 쓰기 위에 몸에 착용한 하네스벨트와 그에 연결된 도르래 뿐이었다. 5명의 노예들은 가디언들의 잔뜩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옥상정원 곳곳에 흩어져 화초와 나무들을 손보기 시작했다.
10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노예들에 대한 가디언들의 신경질적인 관심도 조금씩 분산되기 시작했다. 5명의 공주들은 79층 난간에 옹기종기 매달려 너무도 자유로와보이는 도시 평민들의 모습을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개시!"
그다지 예민하지 못한 그들이었지만 갑자기 등뒤에서 울려온 큰 고함소리는 그들에게 뒤를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방금전까지 화단에서 조용히 먼지를 닦고있던 5명의 노예들이 대뜸 무서운 기세로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자 공주들이 자기도모르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저놈들 뭐야!"
공주들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며 그들 노예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곳 공중정원의 출입구는 2개, 모두 정예 가디언들이 그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으니 저 멍청이 노예들은 죽을 길을 찾아들어온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표 1명씩을 지정해 각각 달려든 노예들은 버둥거리는 공주들의 입과 코를 주머니에서 꺼내든 면수건으로 꽉 틀어막아버렸다. 기껏해야 1, 2초 정도의, 눈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놈들!"
더 황당한 일은 그 순간 벌어졌다. 공주를 하나씩 팔에 껴안은 그들 5명은 공주의 몸을 벨트로 감으며 계속 돌진해 까마득하게 높은 79층 옥상에서 북서쪽 난간 위 공중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가디언들조차도 손쓸 틈도 없었다.
"저 미친놈들 뭐야! 다 죽자는거야?"
하지만 그들을 쫓아 난간으로 달려간 근위대들은 난간 파이프에 고정되어 있는 가는 금속 와이어와 후크를 그제서야 발견했다. 다섯 공주를 껴안은 5명의 노예들---정확히 말하면 코아 전사단의 선발된 특수부대 병사들---은 가는 와이어 하나에 의지한 채 까마득한 땅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근위대 가디언 지휘관이 그제서야 새파래진 얼굴로 부하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입구에 연락해! 빨리!"
가스를 들이마시고 의식을 잃은 공주들을 하네스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품에 꽉 껴안은 그들은 대장의 명령에 일제히 도르래에 붙은 제동장치를 작동시켰다. 요란스런 소음과 함께 그들 병사들과 함께묶인 공주들의 몸이 어마어마한 중력에 일제히 앞으로 쏠렸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공주들은 그냥 '조용한 짐'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욱!"
1.5스타디아에 가까운 높이인 79층을 원시적인 와이어와 제동장치에 기대 자유낙하시간에 가까운 단 몇십초 정도만에 내려온 병사들이 바닥에 나딩굴며 비명을 질렀다. 나름대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방호복과 안전모는 내려오면서 부딪힌 상처와 마찰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공주들만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정신만 잃은 상태였다.
"빨리!"
미리 대기중이던 차의 문을 확 열어젖힌 건 다름아닌 우베였다. 서쪽 별관 인근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이곳 나무 밑에 서 있던 이 크지않은 차에는 타르서스에 주소를 둔 큼직한 청과류 도매상 상호까지 붙어있었다.
5명의 병사들은 기절한 공주들를 마치 짐짝처럼 화물칸 안에 던져넣고는 잽싸게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는 방호복과 안전모를 벗어 동댕이치고 이곳 서쪽 별관---1번 도시 행정청사가 있는---의 평범한 민원인 차림으로 사방으로 잽싸게 흩어져 버렸다.
"병신들, 비행은 불가능하지만 낙하는 가능하다는 건 몰랐나보지?"
운전석에 앉아 비웃음섞인 투로 중얼거리고 있는 건 카렐에게서 직접 이번 작전을 명받은 우베였다. '다른 꿍꿍이가 있음에 틀림없는' 그 보통아닌 가디언이 자신을 시험하려 든다는 것을 깨달은 우베는 얼핏 황당해보이는 그의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것으로 그의 능력을 증명한 셈이었다.
자선학교 중퇴 학력에 제국을 떠돌며 보따리장사꾼으로 살아온 우베에게 있어 한건 이루어봄직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저 가디언이란 작자가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인지는 아직 조금 더 두고보아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