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7화 (27/1,132)

< -- 27 회: Part 1. 디모르포세카, 음지에 피다. -- >

페로가 입을 씰룩거리며 카렐이 직접 데려온 다섯 공주들을 바라보았다. 또한번 혼자서 당당히 페로의 집에 찾아온 카렐은 페로에게 약간의 목례만 했을 따름이었다. 우베의 차에 짐짝처럼 실려 ㅤㅋㅞㄹ크에 갔을 때에도, 카렐과 함께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내내 겁에 질려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어머니 실리페 베로 황후의 모습에 그제서야 안심한 듯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페로는 함께 서 있던 실리페 황후에게 민망한 듯 또한번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다섯 공주들을 구해내겠다고 황후에게 있는대로 큰소리를 쳤던 페로였다. 하지만 정작 전혀 엉뚱한 카렐의 손에 공주들이 구출되어왔다는 사실에 수우의 결혼식을 일단 막았다는 기쁨보다 망가져버린 그의 유별난 자존심이 기분을 더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든 표정의 페로가 도도하게 혼자 서 있는 카렐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네 힘을 보인건가?"

"우리라는 표현은 구체제 수호자로서의 총리각하와 수우 후계자입니까?"

카렐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페로가 어깨를 펴며 카렐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후훗, 수우 쪽은 네가 내편인줄로 아니 너희 무리가 내쪽으로 기운 줄로 생각할테고, 난 네가 이미 내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역시 네 집단을 두려워할테고.......교활한 것 같으니......그래서, 공주들을 이리 데려왔나?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그렇다면 하나는 실수했군. 난 수우에게 친선의 의미로 공주들을 되돌려보낼수도 있어."

"현재의 총리직에 만족하시는 모양이죠?"

카렐의 거의 악담에 가까운 한마디에 페로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카렐이 미소까지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공주분들을 실리페 황후폐하께 모셔온 것이지 각하께 모셔온 게 아닙니다. 하지만 돌려보내고 싶으시다면 뭐, 각하 원하시는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건 저와 상의하실 문제가 아니고 저기 계신 실리페 황후폐하와 상의하셔야 할 듯 하군요."

깜짝 놀랄만큼 큰 카렐의 목소리는 한쪽 구석에 딸들과 함께 서 있는 실리페 황후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기겁을 하고 놀란 페로가 잽싸게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황후의 곱지않은 눈초리가 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이씨,"

페로가 얼굴을 붉히며 턱을 꽉 악물었다. 저 종잡을 수 없는 실리페 황후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카렐을 따라나선다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할 수도 있는 알이었다. 페로는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다섯공주들을 말없이 지켜보는밖엔 없었다.

카렐의 눈동자는 소매없는 원피스차림의 라이 공주의 한쪽 어깨에 가서 멎어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검은 용이 비상하는, 황제의 적자에게만 나타나는 유전자 표식인 '황족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어깨에도 선명하지는 않게나마 드러나있는 '검은 돌기'의 정체였다.

카렐의 시선이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의 라이와 마주친건 그때였다. ㅤㅋㅞㄹ크의 마을에서 원주민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그리도 행복해하던, 그리고 그곳을 떠나고싶지 않다며 울고 떼쓰던 저 때묻지않은 성격의 배다른 동생은 ㅤㅋㅞㄹ크로 돌아가려는 카렐을 애타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었다면 수우와 원치않는 결혼을 했을. 아니, 어쩌면 야심만만하고도 무자비한 저 페로와 앞으로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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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의 그 선언이 무얼 뜻하는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드러났다. 첫날 밤 임신을 한 마리안은 열달 후, 유난히 손이 귀한 자이센 가 종장 페로에게 장녀이며 자이센 가의 새로운 후계자인 아메스 로퍼크 자이센을 선사했다.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가문의 딸을 약탈혼해간 페로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 서부 2제후 세호 가와, 중앙귀족 로퍼크 가의 문제도 그와함께 그다지 어렵지않게 해결되어 버렸다.

페로에게 그 수모를 당하고 서부로 쫓기듯 돌아갔던 마리안의 어머니 뤼렌 부인의 가문인 서부 제2제후 세호 가에서는---세칭 '돈벌레가문'으로 더 유명한--- 부마감으로까지 거론되던 황제령 최대의 세력가 페로가 자신들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많은 선물을 보내는 호의까지 발휘했다.

그리고 몇달후 카를 로퍼크 경의 형---인지 동생인지 법정공방중이던---인 로퍼크 재무대신까지 의문의 암살을 당하면서 부유하기로 유명한 로퍼크 가의 유산과 종권은 페로의 갓난 딸 아메스에게로 그대로 예약이 되고 말았다. 두 쌍둥이 아들을 모두 잃은 로퍼크 가로서는 통탄을 해도 부족할 노릇이었지만 자이센 가 만큼이나 손이 귀한 그들로서도 페로의 이 절묘한 '자식농사'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자이센 가와 로퍼크 가, 이 막강한 두 가문의 '이중종손'으로 태어난 아메스는 젖을 떼자마자 어머니인 마리안 부인과는 격리되어 수련장에서 따로 떨어져서 지내야만 했다. 페로의 이 가혹한 처사에 같은 자이센 가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도 어려서부터 어머니 없이 지내 자이센 가 종손다운 강인함을 배울 수 있었다'며 페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에도 무슨 이유엔지 여자와의 잠자리는 유난히 꺼리던 페로가 부인 마리안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리안 부인은 페로에게는 당당한 세력가인 자신의 옆에서 빛을 내어줄 이쁘장한 인형 혹은 애완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인은 페로 관의 깊숙한 북쪽 안채에 완전히 감금된 채 남편과 가까운 친척들을 제외한 그 누구와의 만남도 허용되지 않는 끔찍한 삶을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친척들과의 만남 때도 페로의 심복들의 보이지않는 감시가 그의 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의 십년여의 기간을 그렇게 마리안과 '부부아닌 부부'로 지내던 페로는 네피에게 집과 가족들을 지킬 임무를 맡기고는 카렐을 비롯한 오백여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도적떼들을 소탕하기 위한 몇달간의 제후지역 원정에 나섰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돌아온 후에 벌어졌다.

네피가 마리안이 있는 북쪽 안채 부근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을 제일 먼저 이상하게 생각한 건 다름아닌 카렐이었다.

네피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햇빛좋은 안채 정원을 나란히 걷던 마리안은 앞에 불쑥 나타난 카렐의 모습에 자기도모르게 기겁을 하고 말았다.

"네가.......안채에 무슨일이지? 카렐?"

급히 표정을 가다듬은 마리안이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가디언 수련생 한명이 이리로 도망친 것 같아서 왔습니다."

부인에게 사무적으로 고개를 숙여보인 그는 함께있던 네피 쪽도 한 번 힐끔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렐의 시선이 네피의 아랫도리에 가 멎었다.

"요즘 갑자기 하의를 크게 입더군. 통이 큰 바지는 싸우는데 별로 좋지 않아."

"......체중이 좀 불었을 뿐이야."

네피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숨길 수 있어도 순간 붉게 달아올랐던 그 얼굴색은 눈치빠른 카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카렐이 네피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들릴듯말듯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주인님은 눈치가 빠른 분이야."

묘한 한마디를 남긴 카렐은 그대로 휙 돌아 사라졌다. 네피와 마리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한 번 마주보았다.

하녀들을 통해 마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오던 페로 또한 이런 조짐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고 마리안도 남편의 의혹이 점점 짙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어차피 벌어지고 말 사건이었다.

호위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카렐은 여느때처럼 떡갈나무 언덕에 올라 멀리 내려다보이는 페로 관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에 킵을 선두로 언덕위로 몰려올라오는 수십의 페로가디언들이 들어왔다.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킵을 붙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카렐의 질문에 킵이 정신없는 얼굴로 최대한 빨리 대답을 내놓았다.

"네피 형님이 주인님을 배신하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검은 숲 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카렐은 킵의 팔을 여전히 붙든 채 잠시 멍 한 표정을 지었다. 갈길바쁜 킵은 카렐이 자신을 놔주지 않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잘 알고있었다. 네피에게 있어 도망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도 언제든 임무중에 조용히 사라져버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남들의 눈에 다 띄게, '달아난' 것이었다. 그것도 페로가 모교인 남극성당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오늘 이시간에.

"혼자 도망쳤나?"

카렐이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라뇨? 그럼 누구하고 함께 도망칩니까?"

"아니다."

이런저런 장광설로 킵을 붙들고 시간을 질질 끌고있던 카렐이 고개를 집 쪽으로 다시 돌렸을 때 눈에 띈 건 허겁지겁 킵의 뒤를 따라 올라오는 다룬의 모습이었다.

"킵! 새 명령이다! 마리안 부인을 찾아! 그새 부인도 없어졌어!"

카렐은 자신에게 아직 아무런 명령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망토를 뒤집어쓰고 재빨리 그자리를 빠져나왔다. 킵과 다룬은 서로 갈라져 반대편으로 부하들 몇과 함께 내달리고 있었다.

페로 관 주변을 거의 기는듯한 걸음걸이로 괜히 빙빙 돌며 시간을 끈 카렐은 평소 거의 쓰이지 않는 동문을 통해 페로 관에 돌아왔다. 하지만 동문 바로 앞에는 그새 남극성당에서 돌아온 페로가 무서운 얼굴로 카렐을 노려보고 있었다. 흠칫 놀란 카렐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재빨리 지나치려 했지만 그를 놓칠 페로가 아니었다.

"눈치채고 있었나?"

"무얼말씀이십니까?"

"모르는척하는걸보니 알고있긴 했나보군."

"......"

카렐은 아무 대답없이 페로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네 속을 알수가 없어."

카렐의 팔을 거칠게 붙든 페로가 따지듯 입을 열었다.

"네피를 잡으러 왜 ㅤㅉㅗㅈ아가지 않았나?"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카렐의 어처구니없이까지 한 대답에 페로가 피익 웃었다.

"난 잘 알아."

"네가 얼마나 여린 가슴을 가지고있는지......"

자리에 멈춰선 카렐은 입술만 부들부들 떨고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카렐에게 바싹 다가선 페로가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똑바로 쏘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마리안을 질투하길 바랬어."

순간 턱에 힘줄이 불끈 드러나며 이를 드러낸 카렐은 그답지않게 페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질투하길 원하셨다면 좀 잘해주지 그러셨습니까?"

카렐의 독설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버린 페로는 그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비서가 달려와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자 카렐을 쏘아보던 페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휙 돌아 정원 중앙의 작은 정자에 걸터앉았다.

"이리로 끌고 와."

잠시후, 다룬의 부하들에게 양손이 꽁꽁 묶인 마리안이 바닥에 강제로 꿇어앉혀졌다. 정자 옆에 서 있던 카렐은 차마 그쪽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더니, 먼저 눈치를 채고 내빼려했군. 네피는 어디로 도망갔나?"

"난 몰라요."

마리안 부인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이 흩어져 도주하기로 결정했으면 다시 만나기로 한 곳도 있을 것 아냐? 말해봐. 앙? 내 종장으로서 네 생사여탈권까지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텐데?"

"정말 몰라요,"

부인은 머리를 깊이 숙인 채 남편의 추궁에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내가 마누라라고 고문 못할 것 같나?"

부인 앞에 다가간 페로는 그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채며 흥분한 듯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따져들었다.

"나한테는 네깟년보다 특등급 가디언 한 명이 더 소중해. 그러니까 빨리 말해. 그놈을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네년 목숨도 살려줄테니까."

페로는 정실부인에게 차마 할 수 있을까 싶은 막말들을 마구 쏟아내놓고 있었다. 이 말도안되는 광경을 보다못한 카렐이 정원을 빠져나가려 하자 페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등뒤를 쩌렁 울렸다.

"여기 있어! 네가 고문해야 할 테니까!"

마리안 부인이 턱을 따닥거리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카렐이 흥분에 사로잡혀있는 페로에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찮은 가디언의 손에 각하의 정실부인을 고문케 하심은 각하의 체면에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페로는 카렐의 말에 기분이 많이 상한 듯 휙 돌아 집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는 뒤에 짤막한 한마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방에 가둬. 카렐이 지켜라."

마리안은 침대에 엎드려 계속 울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온 카인이 카렐에게 쪽지 한장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쪽지를 살펴본 카렐은 눈을 감으며 그것을 곧 북북 찢어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린 마리안이 카렐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지?"

"아직은 아실필요 없습니다."

"말해줘. 제발......"

마리안의 그 맑고 선한 눈동자가 카렐을 처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카렐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부인께 독배가 내려질 겁니다."

충격을 받은 마리안은 입을 멍 하니 벌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카렐이 그런 마리안에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저녁까지 네피와 만날 장소를 털어놓는다면 목숨을 살려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리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은 마리안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담담하군......죽어야 한다는 게 말이야......"

카렐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은 마리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담담하다는 그의 말과는 정 반대로 마리안의 온몸은 심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피는 내게서 다른 사람들 시선을 떼어놓으려고 북문을 가로질러 도망갔어......북문 밖에서 가디언들을 모아들이면서......계속 시간을 끌었지. 너무 많이 다쳐서 죽을 것 같았어...... 난 그새 남문으로 빠져나왔고......네피는 내가 무사히 나간 걸 확인한 후에야 멀리 도망쳤지......그리고 내 반대편으로 도망갔어......짐승들이 우굴거리는 검은 숲으로......그게 얼마나 날 슬프게했는줄 알아? 날 사랑하고 날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사람이 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란 게......"

잠시 조용하던 카렐이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께서 살면 아기 역시 살 수 있습니다."

"뭐, 뭐라구?"

마리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카렐이 여전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임신중이란 걸 알고있습니다. 네피가 몰래 복원수술을 했다는 것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리안이 겁에 질린 듯 조금 뒷걸음질쳤다.

"너, 너......"

"포식동물에겐 임신한 사냥감이 발산하는 호르몬을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죠. 저같이."

카렐은 방 구석에서 떨고있는 마리안을 바라보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네피를 기쁘게 해 주고 싶으셨던 겁니까?"

고개를 떨군 마리안은 눈물을 애써 삼키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렐은 수명개조 이후의 여성이라면 정상상태에서는---페로가 첫날밤 직전 부인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했던---배란유도제를 먹지 않으면 임신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있었다.

"네피한테는 탈출 성공 후에 말해줄 참이었어."

허탈한 표정의 마리안이 침대머리에 털석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그의 작은 두 손은 소중한 새 생명이 자라고있을 아랫배를 꼭 감싸쥐고 있었다. 카렐이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당신이 죽으면 그 아기도 죽습니다."

"날 협박하는거야?"

"그렇습니다."

마리안의 대꾸에 카렐이 눈하나 깜짝않고 대답했다.

"아이는 최소한 로퍼크 가와 세호 가의 피는 받았습니다. 총리각하는 어차피 부인을 내치실테니.....친정으로 돌아가시면 방계 하급귀족으로 키울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고 네피를 배신할수는 없어. 아이가 나와함께 죽는다해도......"

단호하게 대답한 마리안이 휙 돌아앉았다. 그의 고집스런 태도에 카렐이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시간이 흐르자 바깥이 어둑어둑해졌다. 기운을 잃은 마리안은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일생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 서쪽의 붉고 아름다운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볼일이 있다며 바깥에 나갔다 돌아온 카렐은 여전한 모습으로 넋나간 듯 앉아있는 마리안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카렐의 끊임없는 설득과 협박에도 이미 몇시간째 들은척도 않고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죽음따위는 두렵지 않아......다시 이전같은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이 더 두려울 뿐이야......"

부인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렐이 마리안의 팔을 확 움켜잡자 놀란 마리안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일어나십시오."

"무슨짓을 하려는거지?"

카렐은 마리안을 거칠게 끌어다가 침대에 눕혔다. 마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렐은 그의 두팔을 한손에 움켜잡았다.

"이곳은 방음장치가 완벽합니다. 비명을 질러도 소용없습니다."

"남편이 날 강간하라고 명령한거야?"

"물론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니 제발 가만히 계십시오."

침대에 누운 마리안을 거칠게 내리누른 카렐은 방금 가져온 큰 가방을 침대 한쪽에 올려놓고 그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몇 개의 간단한 수술도구들과, 미숙아나 수정란을 키울 때 사용하는 캡슐, 모니터가 붙은 술병모양의 작은 기계가 들어있었다.

"아이를 꺼내겠습니다."

흐뜨러진 모습으로 침대위에 누워있던 마리안이 옆에 앉아있는 카렐을 문득 돌아보았다. 채취기에서 뽑아낸 셀에서는 태아가 정상적으로 성장중이라는 푸른 등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쌍둥이였다니.....네피가 알면 많이 좋아하겠군요."

침대맡에 걸터앉아있던 카렐이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네피는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알아."

지친 표정의 마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당신을 죽이고 혼자 살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 가책을 이겨내기 어려울 겁니다. 부인께서 말하신다고 해서 네피가 잡힌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 운이 무척 좋으면 네피가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난 어쨌든 그이를 배신한 게 돼."

누워있는 마리안의 눈꼬리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하자 마리안이 그의 손을 붙들었다.

"제발, 곁에 있어줘......가지 마."

카렐은 파르르 떨리고있는 마리안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카렐이 마리안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아메스가 보고싶어......1년이나 못봤어......많이 컸을텐데.....그 어린것이 엄마도 없이 얼마나 외로울까......"

카렐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마리안은 방 구석에 놓여있는 반 쯤 뜨다만 빨간색 머플러를 바라보며 눈물을 곱삼키고 있었다. 이곳에 갇힌 채 죄수아닌 죄수로 살고있던 마리안에게 유일한 소일거리는 얼굴도 거의 볼 수 없는 친딸 아메스에게 모자나 장갑을 직접 떠서 선물해주는 정도였다.

"아메스는......나보다 아빠를 더 좋아해......생긴거나 하는거나 아빠를 꼭 닮았어. 차라리 다행이지......네피가 친딸처럼 많이 이뻐해줬는데......나중에 기억이나 할까? 커서 친엄마가 불륜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수치스러워할지......"

마리안은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으며 카렐의 체취를 죽 들이켰다.

"누군가의 살냄새 맡는것도 이게 끝이겠지.......사람의 품 안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거 지금까지 몰랐어.......꼭 네피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아........"

카렐은 심하게 떨고있는 마리안을 더 깊이 안아주었다.

"저 아기들......저 아기들을 아빠한테 꼭 데려다주고.....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알겠습니다."

"그리고.....내가 고통없이 죽을 수 있게 해 줘......제발, 약속해줘."

마리안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계속 카렐의 가슴에 부볐다. 카렐은 그런 마리안을 꼭 안아주는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떡갈나무 언덕에는 여느 날과 별반 다름없이 따스한 아침햇살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두 명의 가디언들과 함께 마리안을 데리고 언덕에 올라온 카렐은 이미 준비되어있는 큰 나무우리와 킵이 들고있는 쟁반을 바라보며 자기도모르게 턱을 꽉 악물었다.

"총리께선 어디가셨나?"

카렐이 킵에게 물었다.

"어제 다 끝내지 못한 동창회모임을 끝내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바로 그 옆에 서 있던 마리안 뿐이었다. 남편 페로는 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최소한도의 관심마저도 거절한 채 휘하 가디언들의 손에 이 모든 것을 맡겨둔 것이었다.

"쳅 꽂즙입니다."

킵이 자그만 유리잔을 미리 준비된 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붉은빛이 감도는 고운 색깔의 얼핏 쥬스같아보이기도 하는 액체가 안에 가득 담겨있었다. 양지바른 떡갈나무 언덕위로 시원한 아침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킵이 마리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총리각하께서 마님께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걸 마신 후 저 우리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도 총리께서 직접 명령하셨나?"

카렐이 핏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나무우리를 힐끗 보며 묻자 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낡은, 육중한 나무우리는 그동안 죽여온 숱한 목숨에서 남은 역한 피비린내를 지독하게 풍기며 또하나의 목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는 지독한 고통에 스스로 뽑아던진 머리카락과 그 썩어가는 살점들, 나뭇결 사이에 박혀있는 생손톱들과 그 자국들, 피얼룩이 어질러진 채 그 흉칙스런 모습을 내놓고 있었다. 음독 후 고통에 미쳐 발광할 희생자를 가둬두기 위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몇시간짜리인가?"

카렐이 나즈막히 묻자 킵이 약간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5시간."

순간 충격을 받았는지 약간 창백해진 카렐이 킵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혹시.....해독제를 준비했나?"

"농도 80짜리입니다. 최고강도고 해독제는 의미없습니다."

킵의 절망스런 대답에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소녀같이 순수한 자태로 자신의 끔찍한 운명을 맞을 준비를 하고있는 마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이 5시간이지 대부분의 음독자들은 채 한두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동맥을 물어뜯어 목숨을 끊거나 너무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나 탈진으로 죽는 것이 도리어 보통이었다.

부인에게 배신당한 자존심강한 페로다운 선택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이정도까지일줄은 카렐도 상상하지 못한 터였다. 내심 페로가 협박을 위해 '쇼'를 부리고 있는 것이기를 바랐던 카렐은 그제서야 '페로의 본심'을 깨달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하늘을 향해 또한번 큰 한숨을 내쉬었다.

킵은 자해를 못하도록 마리안의 팔에 가죽띠를 단단히 채우고 나서 잔을 내밀었다. 마리안은 잔을 받아들고 잠시 카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렐이 그답지않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훌쩍 마셔도 됩니다. 달착지근한 맛입니다.......아무고통 없을겁니다."

카렐의 말에 마리안이 그에게 조금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카렐의 마지막 대답에 마리안은 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단 한번에 약을 모두 훌쩍 들이켰다.

"정말이군......달아."

마리안이 잔을 도로 킵에게 내놓았다. 나무우리의 문을 연 킵이 다른 가디언에게 부인을 데려오라 눈짓을 보냈다. 그쪽으로 자진해 걸어가려던 마리안은 다리에서 힘이 빠졌는지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움직이지 마라."

카렐의 지시에 다른 가디언들이 일제히 자리에 멈춰섰다.

"후훗......"

갑자기 실없이 웃기 시작한 마리안이 카렐을 돌아보았다. 앉아있는 마리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는 카렐을 바라보며 자리에 모인 십여명의 가디언들은 부인을 부축해주려는 것이려니 하며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카렐의 파란색 큰 단검이 망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까지는.

킵과 카인이 깜짝 놀라 팔을 내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그들이 채 카렐을 붙들 여유는 없었다. 단검을 빼든 카렐은 눈물젖은 얼굴로 자신을 멍 하니 올려보고 있는 마리안의 가는 목을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리찔러버렸다.

"맙소사......"

충격을 받은 카인과 킵이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급소를 찔린 마리안은 카렐의 품에 안긴 채 그 푸르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천천히 내리감았다. 죽어가는 마리안의 입가에 남은 마지막 미소를 바라본 카렐은 그의 식어가는 뺨에 얼굴을 부비며 처절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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