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0화 (30/1,132)

< -- 30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카렐이 입에 튀어들어간 피를 퉤 하고 뱉어냈다. 온몸에 시뻘건 피를 온통 뒤집어쓴 그의 앞에는 황금팔찌의 가디언 시체가 몇구 딩굴고 있었다. 이곳 탑을 빙 둘러싸고 끝까지 저항하던 이십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은 카렐과 그를 따라온 삼십여명의 가디언들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제압되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은 차가운 밤공기에 순식간에 얼굴에 엉겨붙은 핏덩어리와 살점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버렸다.

"여깁니다!"

한 가디언이 고함을 질렀다. 단단히 닫힌 무거운 철문을 힘껏 비틀어 열자 축축한 공기와 함께 악취가 풍겨나오는 좁고 시커먼 동굴이 큰 입을 드러냈다.

"내가 앞장서겠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따라와."

카렐이 짤막한 와카자시를 뽑아들며 그 안에 서슴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보통의 시민병들이라면 조명이나 눈에 끼는 전투용 스코프 없이는 들어갈 엄두를 내지못할 암흑의 구덩이였지만 시민보다 훨씬 넓은 파장대의 빛을 볼 수 있는 가디언들에게는 그다지 문제될것이 없었다.

축축한 지하계단을 한참 달려내려가자 양쪽으로 긴 복도가 뚫린 침침한 원형의 홀이 나타났다. 카렐이 조페에게 아래로 내려가는 어두운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페, 아랫층에 슈로 기사단원들과 토로 경이 있다고 하니까 한명도 남김없이 구해나오도록. 난 여기서 황후폐하와 각료들을 찾겠다."

큰 도끼와 해머를 든 가디언들이 지하감옥을 헤집고 다니며 문을 때려부수고 갇혀있는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냈다. 뼈만 남은 여위고 처참해진 몰골의 그들 중 몇몇은 심지어 걷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황후폐하는, 황후폐하는 어디계시오?"

갓 감방에서 풀려난 한 사람이 자신을 업고있는 가디언의 어깨를 두들기며 가래섞인 목소리로 쥐어짜듯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이쪽에서 해야 할 질문이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다 때려부쉈지만 갈색머리에 카렐과 같은 무지개톤 회색눈을 하고 있다는 그런 비슷한 여자는 도저히 찾을수가 없었다.

"빨리, 다시 뒤져보란 말이야!"

시간이 촉박해오자 복도 중앙에 서서 모든것을 지켜보던 카렐의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장교 한 명이 달려와 카렐에게 큰 소리로 보고했다.

"다 확인했지만 황후폐하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 안계신 것 아닐까요?"

어쩔 수 없이 뒤로 돌아서려던 카렐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 카렐은 감방들과는 반대편, 옛 고문실인 듯 한 텅 비어있는 더러운 방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벽 한쪽에 뚫려있는, 어린아이 머리 한 개 들어갈 정도의 구멍에 가서 멎었다.

"해머 내놔!"

뒤따라온 가디언의 손에서 해머를 빼앗듯 나꿔챈 카렐은 꽤 옛날에 세워진듯한 벽돌벽을 힘껏 후려쳤다. 그 무서운 기세에 오래된 벽돌벽은 사방에 파편을 날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얼핏 벽으로 보이던 그 안에서 침침한 공간이 드러나자 따라온 가디언들이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살아있는 사람을 가두어두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그런 지옥같은 공간이었다.

벽에 사람 들어갈만한 구멍이 생기자 카렐이 직접 그 안에 들어갔다. 악취가 진동하는 구멍 안의 벽은 유학자들이나 쓰는 고대어로 적힌 복잡한 내용의 온갖 낙서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오물을 담았음직한 작은 단지 하나와 몇개의 돌부스러기가 전부였다.

"드디어 처형인가....."

한구석에서 나즈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렐이 자기도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제대로된 불빛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는지 부서진 벽을 뚫고 들어오는 그다지 밝지않은 빛에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다. 당황한 카렐이 손수건을 꺼내 얼른 그 사람의 눈을 가렸다.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황후폐하십니까?"

"......황후폐하? 그래.......참이나 오랫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얼굴을 가린 여자가 쉰 목소리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이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해진 누더기만 걸친, 거의 벌거벗은 몸에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몇개 남아있지 않은 끔찍한 상태였다. 푸석푸석한 갈색의 머리카락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고 긴 다리는 오물로 더러워져있는 바닥에 힘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카렐이 아무 말 없이 그 여자를 껴안았다. 그 여자, 아니 세네피스 황후는 이 느닷없는 침입자의 희한한 행동에 놀랐는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카렐이 그의 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당장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전 당신의 딸입니다......"

순간, 황후의 가죽만 남은 가는 손가락이 카렐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카렐?"

지금 이 순간, 세네피스 황후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건 카렐 스스로였다. 황후는 놀랍게도 자신의 이름을, 아니,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황후가 이곳에 감금되었을 그 때, 북극에 갇혀 가혹한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고있던 카렐의 존재를, 그리고 그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놀랍게도 알고있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들릴듯말듯 입을 열었다.

"얼굴을......얼굴을 보고싶은데......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곧 보시게 될 겁니다."

입고있던 망토를 벗어 벌거벗은 황후의 몸에 감싸준 카렐은 그를 팔에 안고나오며 부하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다 구출했나?"

"예! 다 찾았습니다."

"토로 경은?"

"여기. 이양반 꺼내다가 질식사하는 줄 알았어."

조페가 담요에 싼 큰 무언가를 가리키며 냉큼 대답했다. 카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일 앞장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 퇴각한다!"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클레모 내무대신이 비둔한 몸을 뒤뚱거리며 황궁 150층에 위치한 수우의 숙소에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댓명의 여자들과 한참 농탕질을 벌이고있던 수우는 허락도 없이 거의 '쳐들어온' 그의 모습에 신경질을 부리며 베개를 힘껏 집어던졌다.

"제길! 뭐하는 짓이야! 누가 150층에 마구 올라오랬나!"

수우의 반응에 움찔 한 클레모 대신이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침소 한구석에 말없이 서 있던 베흔이 클레모 대신을 쏘아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콜의 정치범수용소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뭐? 코, 콜 뭐?"

수우가 여전히 짜증을 부리며 속옷을 챙겨입었다.

"옛날 북부 몰락귀족들을 잡아두었던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원래부터 북부 떨거지 게릴라들이 퇴물 황후를 구한다고 종종 습격하곤 했던 곳이죠."

베흔이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방 중앙에 나섰다. 보고서류를 들고있던 클레모 대신이 약간 쭈삣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나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게 아닙니다! 이번엔 북부 패잔병무리들이 아니고 카렐과 조페를 선봉으로 한 가디언 백여명들입니다!"

순간 태연하던 베흔이 그자리에 목석처럼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베흔과 꽤 오랜기간 함께해온 클레모 대신조차도 이 대담한 근위대장이 이토록 놀라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거의 충격과도 같은 파장이 그의 창백해진 얼굴 위로 흐르고 있었다.

"가디언 카렐 그년이......콜 수용소를요?"

"예."

꽉 악쥔 베흔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악몽같은 상상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음을 깨달은 베흔은 저 망할 년을 페로가 데려가기 전에 없애버리지 못한 것을 또한번 처절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 큰 침실 안이 쩌렁 울릴 정도로 큰 함성을 내지른 베흔은 바로 옆에 있던 탁자를 한주먹에 순식간에 산산조각내버리고 말았다.

"하례드리옵니다, 사령관님. 이렇게 건강히 살아계셨을줄은....."

카렐을 처음 본 토로 경이 옛날에 유행했다는 북부식의 느릿느릿하고 딱딱한 발음으로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이 뚱딴지같은 말에 어리둥절해진 카렐이 옆에 선 조페를 돌아보았다.

ㅤㅋㅞㄹ크로 돌아오자마자 의무실부터 실려온 전직 슈로 기사단장 토로 로버넬 경은 저런 상태로 그곳에서 그 오랜기간 살아남았다는것이 신기할 정도로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상태였다. 양 무릎 아래는 모두 잘려나가있었고 양팔도 팔꿈치 아래는 없었다. 그렇게 여위고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유난히 고집스럽게 보이는 검은빛 두 눈만은 흑인종 특유의 곱슬진 머리칼 밑에서 매섭게 불을 뿜고 있었다.

카렐의 멍 한 얼굴에 토로 경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르마즈 카파키 사령관님이 아니십니까?"

순간 카렐과 조페, 네피는 그럴 상황이 아닌 줄 알면서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네피스 황후의 맏언니였던 오르마즈 카파키 장군은 지금까지도 제국 역사상 제일의 명장 하면 백이면 백 그의 이름을 댈 정도로 전설적인 영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그는 카렐의 이모뻘이 되는 사람이었고, 친동생이며 카렐의 어머니인 세네피스 황후와는 쌍둥이가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빼닮았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었다.

"황후폐하는 저기계십니다."

카렐이 허름한 마을회관 한구석의 침상에 누워있는 세네피스 황후를 가리켰다. 잘려진 다리를 이끌고 황후의 침상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토로 경은 뼈만 남은 몰골로 얼굴을 가린 채 병상에 누워있는 황후를 확인하고는 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죄송하옵니다....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황후폐하를 이지경이 되도록 만든 건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제가 그런 경솔한 짓만 안했어도."

귀에 익은 충복의 목소리에 황후는 침상에서 힘겹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더듬거렸다.

"이런, 토로 경이구려......그럴 것 없소. 그때까지 날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오."

옛 심복을 달래주는 세네피스 황후의 크지않은 목소리에는 묘한 힘과 위엄이 그대로 배어나고 있었다. 토로 경은 황후의 앙상한 손등에 얼굴을 비비며 쏟아지는 눈물을 곱삼켰다.

황후가 카렐에게 손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눈, 이것 좀 벗겨다오......이제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카렐은 황후의 얼굴에 묶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풀어내자 잔뜩 찡그린 얼굴 사이로 가늘게 뜬 회색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과 똑같은 무지개톤의 회색빛 눈동자를 확인한 카렐의 입가에 순간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카렐과 꽤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이목구비를 갖춘 인자해보이는 표정이 바싹 여윈 얼굴 뒤로 드러나보이고 있었다.

아직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여전히 눈가를 찡그린 황후는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카렐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황후는 카렐의 얼굴을 두 손으로 연신 매만지며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구나. 네 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았어......"

"제가요?"

카렐은 이 감격적이어야 할 순간에 나온 황후의 말도안되는 소리에 하마터면 또 웃음을 터뜨릴 뻔 하고 말았다. 카렐의 대답에 황후가 빙긋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카렐의 이목구비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난 귀가 이렇게 크지는 않아. 네 아버지가 그랬지. 눈도 크고, 눈썹도 길고......그런데.......목소리가 정말 특이하구나......"

둘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있던 토로 경이 기겁을 한 얼굴로 카렐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상황을 깨달은 구완 경 역시 카렐의 앞에 급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함께있던 네피와 조페, 우베는 방 구석에 멍 하니 선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서로 눈짓만 주고받고 있었다. 충격을 받아 술렁이는 그들 아랫사람들의 분위기에는 전혀 상관없이 이 모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제 존재를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카렐이 황후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만히 쓸어올려주며 지금껏 묻어온 질문을 결국 던졌다.

"베흔이 날 그 구덩이에 쳐넣으면서 말해줬지. 내게 처참한 패배감을 맛보라고 말이야......바보녀석, 내가 그것 때문의 삶의 끈을 놓지 않으리라는 건 모르고....."

갑자기 이를 악물며 거친 숨을 씩씩대기 시작한 황후는 양쪽 다 합쳐야 겨우 4개의 손가락이 남아있는 두 손을 펼쳐 카렐에게 내보였다. 황후의 그 온화하던 표정에 순간 스쳐지나간 매서운 살기에 카렐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모두 내가 직접 끊어냈다. 4개는 동상이었고 2개는 작은 상처가 썩어들어간 거였지. 손목까지 모두 잃어도.....언젠간 다시 밝은 빛을, 아니 내 자식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때까지 살아있기만 바랐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세네피스 황후가 카렐의 목을 다시한번 거칠게 껴안으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리 자식이 없던 것에 한이 맺혔던 황후라지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딸이라고 소개하는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서슴없는 친밀감을 보이리라고는 정작 카렐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저 야윈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카렐을 단단히 품어안은 황후는 이를 악문 채 계속 속삭였다.

"이젠 됐어, 널 되찾았으니 다 됐어.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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