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페로는 실리페 베로 황후가 저렇게까지 놀란 얼굴을 난생 처음 보았다. 전처인 세네피스 황후가 카렐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실리페 황후의 표정은 거의 시체같이 변해버리고 있었다. 실리페 황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거의 악을 쓰듯 언성을 높였다.
"그 망할 여자가 아직도 안죽고 살아있었다는 말인가?"
"그랬던 모양입니다. 폐하께선 유폐명령만 내리셨지 처형명령은 생전에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페로가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바보같은 베흔새끼......똑똑한 척은 있는대로 하더니.....이런것하나 깨끗하게 못해놨었군."
"세네피스 황후는 폐서인일 따름입니다. 잘나갔던 카파키 가문도 이미 거의 멸족했고 세네피스 황후의 지지세력이었던 북부제후들은 이제 군대도 거의 없고 믿을 건 돈밖에 없는 한심한 신세죠."
페로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황후는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방을 좌우로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수상함을 느낀 페로가 술 한잔을 내놓으며 나즈막하게 물었다.
"제게 무언가 숨기고 계시군요."
"세상엔 감춰지는편이 더 나은 일들도 꽤 많은법이지."
"어느편이 더 나은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그다운 오만방자한 대답을 내놓은 페로가 뭐라 더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들겼다.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온 사람은 새로운 수련장 책임자로 선임된 모렌 박사였다. 페로는 그가 내민 보고서를 받아 사무적으로 수결을 해 돌려주었다.
막 인사를 하고 돌아나가려는 모렌 박사의 발길을 실리페 황후의 싸늘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세네피스 전 황후가 카렐 손에 구출되었다는군. 자그룰라 모렌 박사."
"에....예? 그렇습니까?"
"그래, 알아두라고."
황후가 모렌 박사에게 소름끼칠만큼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렌 박사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쌀쌀맞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깟 퇴물 황후를 뭐하러 구했는지.....이해가 안가는군요."
"우리에겐 퇴물이어도 녀석에겐 중요하겠지......안그래?"
잠자코 있던 페로의 날카로운 시선이 창백해진 얼굴의 모렌 박사를 향했다.
"무슨 말이지?"
무어라 질문하려는 페로를 황후가 갑자기 가로막았다.
"잠깐 나가주겠나? 페로 경?"
"......알겠습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페로가 머리를 조아리며 방을 비워주었다.
페로의 넓은 집무실 안에는 살기를 내뿜는 눈을 한 실리페 황후와 평소답지않게 전전긍긍하는 표정의 모렌 박사 두 명만이 남아있었다. 실리페 황후가 한손에 술잔을 든 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베흔 녀석 눈치빠른 거 하나는 정말 대단해. 자이센 가에서 막 데려온 카렐 그 어린것을 딱 처음 보고는 곧바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으니 말이야. 눈썰미 하면 나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나도 설명듣기 전까지는 몰랐거든. 기분 탓인가? 설명 듣고 나서 뜯어보니까 그 꼬마녀석 지 어미를 꼭 빼닮았더군,"
입술을 굳게 다룬 채 황후를 따라 매서운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모렌 박사가 무심결에 자기 손가락 끝을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황후가 습관처럼 빈정거리고 있었다.
"전극을 꽂았던곳이 거기였던가? 베흔이 좀 심하게하긴 했지? 명색이 전직 황실유전자은행 책임자인 상급귀족인데......쐐기로 뼈도 네군데나 부러뜨렸지? 흠....징그럽더군, 살 밖으로 뼈가 튀어나온 게 말이야. 그때까지 잡아떼다니, 네년도 정말로 독하던걸."
"거기.....계셨군요....."
모렌 박사가 눈을 치켜뜨며 황후를 쏘아보자 황후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물론. 네가 노예들한테 강간당하는것까지 다 봤지. 후훗. 당시에 시녀장 권한이 얼마나 강했는지 몰랐나?"
모렌 박사가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황후는 페로의 집무실 책상에 있던 술병의 뚜껑을 열고 태연하게 그 냄새를 한 번 들이켰다.
"내가 궁금한건 네가 그렇게까지 밝히지 않고 저항한 게 황실의 세포를 무단으로 훔쳐낸 대역죄로 처벌받는게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그 어린 핏덩이에 대한 '키운정' 때문이었는지였어......그 사실을 말하면 베흔 녀석이 그 꼬마를 바로 죽여버릴 줄 알았지? 그런데 문제는 베흔 녀석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악질이었다는거야."
"그래서요?"
모렌 박사가 퉁명스럽게 되묻자 실리페 황후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나중에 베흔이 그러더군. 네가 풀려난 후에도 카렐을 가둬둔 숲에 몰래 드나드는 것 같더라고. 그렇게 당하고도 말이야. 결국 결론은 후자에 가깝다는거지. 훗.....네가 카렐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주는 조건이 어린 카렐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거였다지? 베흔새끼 못돼먹긴 했어도 약속하나는 철저한 놈이니까."
황후는 들고있던 술을 잔에 담아 손에 들고는 모렌 박사 주위를 한바퀴 빙 돌았다.
"쯧쯧......그 불쌍한 어린것......베흔한테 얼마나 모질게 당했는지......베흔 그새끼 카렐을 죽이는 대신 철저하게 들볶더군......한번은 멀쩡한 팔을 잘라놓고 팔이 다시 붙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구경하고 있던걸. 밥통같은 황제는 지 딸인지도 모르고 잔혹하게 훈련시키라고 핏대를 높이던데 난 그 옆에 서있다가 웃겨서 죽을뻔했어."
"그러신 황후폐하께선 정작 카렐을 참 '특별한 방법'으로 대하셨더군요."
모렌 박사가 결국 반격을 개시하자 황후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듣자하니 카렐이 황궁을 떠나고 거의 일주일을 식음을 전폐하셨다던데, 전 그 속을 잘 알죠. 후훗, 아마 카렐 뒤로 그만한 상대 못찾으셨겠죠? 그녀석 술만 들어가면 굶주린 괴물이 따로없었을 겁니다. 아주 매력적인 괴물이요."
황후가 모렌 박사의 일갈에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뭐 아주 틀린얘기는 아니군. 하지만 순수하게 그것만은 아니었지. 어찌보면 시한폭탄일 수 있는 그녀석을 통제하에 두기위한 수단이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일석이조였지."
"그래서, 이젠 어떡하시려구요?"
모렌 박사가 계속 방을 빙빙 도는 황후의 앞을 딱 막아서며 눈을 부릅떴다.
"어떡하냐구? 흠, 지금 카렐이 자기 혈통을 밝히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지. 그래봤자 당장 베흔이 카렐을 반역혐의로 총공격할 명분만 줄테니 말이야. 감히 황족을 사칭하다니......그정도면 제후군을 불러들여 싹쓸이하기에도 충분한 명분이지. 녀석은 한동안은 정글 게릴라떼로 숨죽이고 힘을 비축하려 들거야."
"정확하시군요."
모렌 박사가 빈정거렸다.
황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페로 이녀석이야. 카렐이 지가 공주라고 주장해도 남부의 지지세력이 굳건하고, 선대황제한테 장태자위까지 정식으로 수여받은 수우 놈은 당장은 별 타격을 입지 않겠지만 '특례조항'을 이유로 들어서 제위를 차지하려는 페로 이놈은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신세 되고 말거든. 현실적으로 베흔하고 손잡고 총리자리라도 보전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거야."
황후가 모렌 박사를 바라보며 씽긋 웃어보였다. 그의 음흉한 미소에 모렌 박사가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나로서도 페로 녀석을 택했던 내 결정을 도로아미타불로 만들수는 없겠는걸. 페로놈을 황제로 만들려면.......일차로 제거해야 할 사람이 있지. 카렐 놈의 혈통을 증명해줄 유일한 증인 말이야."
파랗게 질린 모렌 박사 앞에서 실리페 황후가 큰 소리로 깔깔대며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가 집무실 문을 확 열어제꼈다. 밖에 서 있던 페로는 대조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두 여자의 얼굴을 어리둥절한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페로 경."
"예."
"자네가 가장 손쉽게 황제가 될 방법을 알려주지."
"예?"
"당장 저년의 목을 쳐."
황후의 손끝이 모렌 박사를 똑바로 가리켰다. 얼음장같던 페로의 표정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뭐라하셨습니까?"
"당장 이유는 묻지말고 저년 목을 쳐. 그리고......경이 내 다섯 공주중에 한명과 결혼했으면 좋겠어. 아니, 원한다면 다섯 모두라도 좋아. 내가 먼저 청한 결혼이니 아무도 이의를 못달거야. 허울뿐인 전 황후로서 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이지. 어때?"
굳어진 얼굴로 멍 하니 서 있던 모렌 박사를 힐끗 바라본 페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꽤 한참 아무 말 없던 페로가 다시 황후를 돌아보았다.
"공주와 결혼해서 제가 얻는 이득이 뭡니까?"
"종친들을 네 편으로 할 수 있겠지. 물론, 종친들이 대체로 날 싫어하긴 하지만......그래도 최소한 엉뚱한놈이 제위에 오르는것보다는 그네들 입장에서도 나을테니까."
페로가 갑자기 씨익 웃어보였다. 그 돌변하는 묘한 미소에 황후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폐하께선 한가지를 잊어버리셨군요. 7세대 S유전자는 공주들만이 가진 건 아니죠."
"뭐라구?"
황후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페로는 일그러들기 시작한 황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대폐하의 여동생이신 레곤 대공주저하도 있고 그분의 딸들 역시 S-7이죠. 제가 일단 황제에 오르면 제가 원치않아도 절 사위로 삼고싶어 안달하실겁니다. 게다가 그분이 지금 종친회장이시죠? 저로서는 그쪽을 택하는 편이 이득이 더 크죠."
"이, 이......"
페로의 철저하게 계산적인 선택에 경악한 실리페 황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다섯 공주들까지 카렐의 손에 구출되어 온 이상, 자신과 공주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결국 '수우의 혼인을 막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자신이 페로를 지지하면 딸들 중 한명을 당연히 페로의 황후로 삼을 수 있을줄로 생각했던 황후는 페로의 이 느닷없는 선언, 아니 협박에 현기증까지도 느끼고 있었다.
흥분한 황후가 손에 들고있던 술잔을 페로의 얼굴을 향해 거칠게 내던졌지만 그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페로를 만만하게 보았던 자신의 생각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렌 박사를 어쩌라고 하셨죠?"
페로가 싱글거리며 묻자 황후가 사뭇 매서운 눈길로 그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흥분해서 내가 헛소리를 했군."
잠깐새 표정을 가다듬은 실리페 황후가 모렌 박사에게 대뜸 거북살스러울 정도의 눈웃음을 보냈다.
그 둘을 놔둔 채 페로의 집무실을 걸어나오며 황후의 가슴 속에는 농락당했다는 울분과 동시에 앞으로의 새로운 계획이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선택은 둘이었지만 이제 선택은 세가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모렌 박사를 죽여 그중 한 패를 쓸데없이 줄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시간여유가 있으니.
"황후폐하의 뒤를 이어서 남부의 하급귀족 베로 가문에서 실리페 베로 황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황후에게 맏이 푸츠공주부터 막내 라이공주까지 다섯명의 태자가 났습니다. 아직 모두 미혼이며 황상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 중 누구에게도 제위계승의사를 밝히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남부제후인 델루지 가문의 아들 수우에게 다섯 공주 중 한명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후계지명을 고시하신 바 있습니다."
옛날같은 황후의 심복 지위로 되돌아간 구완 경이 카렐과 세네피스 황후의 앞에 꿇어앉아 보고를 올렸다.
상석에 앉은 황후는 비록 여위었지만 황후로서의 풍모를 그대로 가진 당당한 모습으로 옛 충신의 보고를 신중하게 듣고 있었다. 구완 경과 토로 경, 네피와 조페, 우베까지, 카렐의 혈통에 관한 극비사항을 알게 된 다섯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자그만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황후가 한손으로 턱을 고인 채 나즈막히 물었다.
"왜 공주들에게 직접 물려주지 않고?"
"다섯공주 모두......황제로서의 자질은 심히 부족합니다. 첫째 푸츠는 비교적 명민하나 약간의 흥분에도 발작하는 불안정한 성격이며 둘째는 사치와 낭비벽이 극히 심하고 약간의 정신박약으로 공부에는 도통 무관심하며 세째와 네째는 심각한 정신박약이 있고 막내 라이는 매우 심약합니다."
통쾌한 듯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린 황후가 옆에 당당하게 선 자신을 닮은 카렐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럼 수우라는 청년은?"
"카렐 태자전하와 동갑으로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두뇌가 명석한 청년입니다만 심약한 성격에다가 들리는바로는 가학음란증까지 있다고 합니다. 델루지 가문에서 폐하께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여 후계지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베흔이 그 배후에 있으며 최근 라이 공주와 강제혼인하여 계승권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카렐 공주전하의 지시로 라이공주가 구출되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당연하지, 1순위인 장태자가 있는데 제깟것이 감히 제위를 넘보다니."
조금 흥분한 듯 한 톤 높아진 황후의 목소리가 대나무로 지어진 이 누추한 방 안을 울렸다.
황후는 다시 카렐을 돌아보고는 한껏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큰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폐하께서 다섯 공주에게는 제위계승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수우가 제위계승권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현 총리인 페로 슈트란 자이센이 새 황제에 오르게 됩니다. 성품이 강하고 명석하며 강력한 리더쉽을 가졌습니다. 50년간 계속된 개척지의 소요사태와 4차례의 내전을 진압한 대단한 인물입니다만 무자비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자이센? 설마 그 흉칙스런 '블러드' 자이센 후손은 아니겠지?"
"맞사옵니다. 그 투모카프 자이센의 장손자이옵니다.."
슈벨 수반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얼굴을 찌푸렸던 황후가 자리에 모여선 많지않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토로 로버넬 경, 구완 슈벨 경."
두 사람이 황후 앞에 머리를 급히 조아려보였다.
"난 이제 전 황후에 불과할 뿐이요. 나 스스로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소. 이제 내게 바치던 충성을 내 유일한 혈육인 카렐 카파키 리쿠 공주이며 장태자에게 바치도록 하시오. 태자는 명백하게 제위 1순위자인 것을 잊지 마시오."
카렐이 조금 놀란 얼굴로 '너무나 앞서가는' 황후를 힐끗 돌아보았다. 얼마간은 거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카렐의 걱정스런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황후는 시작부터 야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황후가 충격에서 금방 벗어난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조금은 놀랍기까지 한 황후의 이런 태도에 카렐은 이것이 정말 좋아만 해야 할 일인지 의아해할 지경이었다.
"반드시 내 딸이 제위를 이어야 하니......"
황후의 그 후덕해보이는 얼굴 뒤로 분노와 복수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카렐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옛 주군을 되찾은 감격에 빠져있는 구완 경과 토로 경은 황후의 '고대하던' 명령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저희만 믿어주십시오."
"저, 전하, 웬 젊은 여자 하나가 전하를 뵙길 청하옵니다."
황궁의 공동목욕탕에서 여러 미녀들의 마사지를 받고 있던 수우가 '여자'라는 소리에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어떤 여자?"
수우의 질문에 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사옵니다. 전하 앞이 아니면 신분을 밝히지 않겠다고 하고 있습니다만......검문결과 귀 뒤에 상급 귀족문이 새겨져있는것으로 보아서 귀한 가문의 처자 같사옵니다."
수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제국에 얼마 되지도 않는 상급귀족 사람이라면 무언가 중요한 볼일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시중을 들던 시녀들을 급히 ㅤㅉㅗㅈ아내버리고는 옷을 단정히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성장을 차려입은 아메스가 천천히 들어와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메스의 위아래를 훑어본 수우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년 참 도도하게 생겼군요. 색다른 맛이 있겠는걸요."
수우 옆의 클레모 대신이 킬킬대며 귀엣말로 속삭였다. 수우도 아메스의 성깔있어보이는 인상에 나름대로 구미가 당기는지 연신 히죽거리고 있었다.
순간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베흔과 아메스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러한 베흔의 표정에 경악하는 빛이 역력히 번지자 아메스가 갑자기 씨익 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수우가 오만한 태도로 물었다.
"네가 누군지부터 밝혀라."
"소녀는 30세의 아메스 로퍼크 자이센이라 하옵고 아버지는 총리대신이신 페로 슈트란 자이센, 어머니는 로퍼크 가문의 마리안 세호 로퍼크이오나 21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자리에 앉아있던 수우는 하마터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는 허겁지겁 옆에 놓인 쥬스를 한모금 들이켰다. 수우 옆에 있던 클레모 대신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경비병들! 저년을 당장......"
"잠깐!"
베흔이 뭐라 더 소리치려는 클레모 대신 앞을 재빨리 가로막았다. 병사들에게 제위치로 돌아가라 손짓한 베흔은 허리를 90도로 꺾어보이며 아메스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결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몸은 황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근위대장 가디언 베흔이라 하옵니다. 자이센 가의 다음번 후계자분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입으로는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베흔의 매서운 눈은 아메스를 향해 당장이라도 칼을 내려칠듯한 기세로 불을 뿜고 있었다.
여전히 도도한 태도의 아메스는 베흔에게 형식적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환대 감사합니다. 근위대장님."
"혹시 아버님께 어떤 지시를 받고 오신 것이신지."
베흔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닙니다. 자이센 가의 장녀로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음을 황실 여러분들께 알려드리는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어서 혼자 찾아왔습니다."
베흔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들었지만 아메스는 전혀 개의치않고 시선을 수우 쪽으로 돌렸다. 아메스의 이 기행에 가까운 수작은 아버지 페로에게 허락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이 호기어린 행동은 앞으로 적, 혹은 동지가 될 수도 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평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메스의 시선이 자기를 똑바로 향하자 약간 겁을 집어먹은 수우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쭉 펴보였다.
"아버님은 안녕하신가?"
"물론, 아주 건강하십니다."
"그래......다행이군, 아버님께 내 안부도 전해주게나."
"코아 전사단에 있는 카렐에게도 전해드릴까요?"
아메스가 느닷없이 '카렐'을 거론하자 홀 안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ㅤㅋㅞㄹ크는 현재 위험지역입니다. 아씨께서 가실만한 곳이......"
베흔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지만 아메스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돌발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만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럼 문안인사를 마치었으니, 소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아메스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가자 잔뜩 긴장했던 수우가 큰 숨을 한 번 탁 하고 내쉬었다. 조금 안정을 되찾은 수우가 베흔을 부르자 그는 그제서야 수우를 향해 돌아섰다.
"저년이 왜 온거지?"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한숨을 내쉰 베흔이 대답했다.
"지금은 일단 페로와의 대결은 접어야 할 듯 합니다. 페로가 어떤 뜻이 있어서 딸을 이리 보낸건지 아니면 정말로 혼자 온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전하께서도 아메스 자이센에게 귀환기념으로 선물을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수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베흔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페로와 손잡아야 합니다. 아니면......전하의 즉위가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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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정하다가 실수로 글을 지웠다는...... 다시 올립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