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2화 (32/1,132)

< -- 32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14.

근 한달동안 제국의 판도에 사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황제가 죽은지도 5달이나 지났지만 수우 파와 페로 파의 대신들은 만날때마다 했던 말을 또 반복해가며 말싸움 중이었다. 근위대에서는 3천여명의 경보병 '토벌군'을 조직해 ㅤㅋㅞㄹ크에 풀어놓고 수색중이었지만 이 넓은 ㅤㅋㅞㄹ크 정글에 점조직으로 흩어져있는 전사단 병사들 오십여명을 잡아죽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2등국민 취급받는 북부에서 옛 영광을 그리는 전역병이나 아직 철모르는 젊은이들이 '황후'를 찾아 이곳에 제발로 찾아오거나, 호기심 혹은 생활고 때문에 전사단에 지원한 숫자는 그 몇십배였으니 카렐로서는 손해본건 없는 한달이었다. 물론 기껏해야 광물이나 목재 밀거래, 차와 향신료 장사 정도로는 그들을 제대로 무장시키는 건 고사하고 먹고입혀줄 돈도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어쨌든 '사람'은 있지만 '돈'이 없는 것이 전사단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황후에게 등떠밀린 카렐이 모렌 박사에게 비밀리에 알아본 '복원수술' 역시 워낙에 사람과 파충류가 누더기로 짜집기되고 군데군데 땜질된 카렐의 유전자 때문에 극히 위험하다는, 그다지 좋지않은 소식을 받은 정도가 한 달 동안 카렐의 신변에 일어난 큰 일의 전부였다. 다른 대부분의 이종간 잡종과 마찬가지로, 카렐은 원래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다.

"카파키 가에서 보내온 선물입니다."

마을회관에 들어온 우베가 앞 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토로 경, 구완 경을 비롯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카렐은 '선물'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밖에 나섰다.

"말?"

눈이 휘둥그레진 카렐은 마당에 세워져있는 큰 키의 검은빛 말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먼저 나와있던 세네피스 황후가 무척이나 흐뭇한 표정으로 그 건장한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한 달여가 지나면서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는 황후였지만 아직은 앙상하게 뼈가 드러나 있는, 걷기에도 버거워보이는 모습이었다.

"절영입니까?"

카렐을 따라나온 토로 경이 조금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잘려나간 팔다리의 재생작업을 얼마 전 시작한 그는 이제 겨우 모양만 잡혀가는 다리를 대신해 의족에 기대 불편한 걸음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거의 막무가내의 과격충성파 무장으로 잘 알려졌던 그답게 그런 몸으로 '전하께 충성할 기사단을 재건'하겠다며 혼자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돈 한푼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이라고 제대로 될 리가 없겠지만.

"아니, 그 자마라는군. 절영에 못지않는다는구나."

세네피스 황후가 미소띤 얼굴로 대답했다.

"절영이면......오르마즈 카파키 경이 타던 말 말씀입니까?"

카렐이 이 흑마의 윤기흐르는 털을 매만지며 묻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 언니의 상징같은 말이었지. 내 가문에 남아있는 친척들한테 연락해서 이녀석을 보내달라고 했어. 이 말은 네가 타도록 해라. 아참, 귀족으로 자라지를 못했으니 말 탈 줄을 모르겠구나."

"배우긴 배웠죠. 썩 잘 타지는 못하지만 보통은 될 겁니다."

카렐은 아직 안장도 얹지 않은 그 검은 말의 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워낙 키가 큰 말에 6척 반이 넘는 장신의 카렐이 앉자 그 높이는 엔간한 기병들을 한참 내려다볼 정도의 까마득한 수준이 되어 있었다. 황후가 그런 카렐의 모습을 사뭇 밝은 얼굴로 올려보고 있었다.

"아참, 카파키 가에서 이녀석을 보낸 건 비밀로 해달라더구나."

"알고있습니다."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500여명의 직계들이 모두 참살당한 후, 속칭 '방계'라고 불리는 서출들과 그 후손들이 가문을 근근히 꾸려나가고 있는 것이 한때 제국 최고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 가문의 지금 모습이었다. 명목상 '종장'인 세네피스 황후의 구출 소식에 가장 기뻐하고 있을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카렐에게 이런 선물을 보냈다는 것이 알려지면 큰 낭패에 직면할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카렐 역시 말이 마음에 드는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마을 한쪽으로 내달려가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말을 타고 멀어져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본 네피가 주머니에 있던 사탕수수 줄기를 꺼내들고 잘근잘근 씹으며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 무시무시한 녀석이 공주였다니......저 친구가 다섯 또라이 공주들하고 같은 씨에서 나왔다니 누가 믿기나 하겠어? 하이고, 근데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가니까 정말 그럴 듯 하긴 하네. 허허,"

구완 경과 조페는 이미 익숙해진 네피의 막말에 피익 웃음을 터뜨렸지만 토로 경은 대뜸 무서운 눈길로 네피를 쏘아보았다. 갑자기 무안해진 네피는 입에 있던 사탕수수를 도로 뱉으며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알았다구요, 알았어요......이런얘기 안할테니까.......최소한 댁들 앞에선,"

마을 외곽 초라한 오두막에 돌아온 카렐의 앞에는 낯익은 젊은 여자가 양손이 묶인 채 두 병사의 감시를 받으며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를 지키고있던 병사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인근에서 서성거리던 걸 초소에서 발견했습니다. 상급귀족 같은데 카렐 님을 뵙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써서 일단 데려왔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

그 '젊은 여자'의 얼굴을 다시한번 확인한 카렐이 갑자기 얼굴가득 미소를 지었다.

"내 아는 분이니 놔두고 나가도록 해."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아메스 아씨."

수갑에 묶였던 얼얼해진 손목을 주무르는 아메스에게 카렐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카렐이 한구석에 있던 대나무로 엮은 초라한 응접테이블을 가리키자 아메스는 그 앞에 단정히 자리잡고 앉았다. 카렐의 공손한 사과에 아메스도 기분이 조금 풀린 듯 카렐에게 가벼운 눈웃음을 지었다. 카렐은 구석의 작은 화로에서 데워지던 차주전자를 들고와 탁자에 내려놓고 아메스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마주앉았다.

카렐이 먼저 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남극성당에서 하시던 공부는 잘 되어가시는지."

"아버님께서 집안에 돌아와 있으라고 하셔서 학교는 잠시 휴학했고.....넌? 할복했었다며 몸은 괜찮은거냐?"

아메스가 여전히 오만한 태도로 물었다.

"벌써 5달 전 일이군요."

엷게 웃음지은 카렐이 화로 옆에 놓아두었던 초라하지만 따뜻한 진흙 찻잔에 차 두 잔을 담았다.

"극지에서 나는 차보다는 맛이 좀 덜합니다. 맛이 너무 강해서 뒷맛이 좀 떫은편이죠......부드러운 차가 도리어 향이 오래가고 뒷맛이 좋은 법인데 말씀입니다."

여전히 공손한 카렐의 태도에 아메스의 입에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카렐이 내민 따뜻한 차 한모금을 조심스럽게 들이킨 아메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엔 황궁에 갔었어."

"수우와 베흔을 만나셨겠군요."

이 젊은 유생의 겁없는 호기에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메스를 어릴 때부터 보아온 카렐은 그가 별다른 이유없이 황궁을 가서 객기를 부릴 철없는 인물은 아님을 잘 알고있었다. 자이센 가의 이 똑똑한 후계자는 자신을 시험해보려 온 것임이 확실했다.

"두사람을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수우는......총기는 엿보이지만 그릇이 작고 심약해보이더군. 황제감으론 턱도 없고. 차라리 베흔 녀석이 황제를 하는 게 더 어울리겠던걸. 그런 녀석이 역성혁명을 안하는 게 신기할 뿐이야......하기야, 그러니 지금까지 3번이나 황제를 만들어왔겠지."

그다지 새로울것도 없는 말들에 카렐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스가 갑자기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차라리 네가 하던가."

카렐과 아메스의 시선이 순간 똑바로 마주쳤다. 카렐의 굳은 표정을 마주한 아메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너도 야심이 있을 거 아냐?"

"......"

고개를 조금 숙인 카렐은 아무 대답없이 차 한모금을 들이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오만방자하고 뻔뻔스럽고 계산적이며 똑똑한 아가씨를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먹을까를 고심하는 중이었다. 조금 더 큰 기회를 찾아 이러저리 기웃거리고 있는 여자는 페로가 자기 아버지라는 이유로 무조건 편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설마 지금의 세력으로 근위대나 아버지하고 대적하겠다는 미친수작은 아닐테고."

아메스가 대나무와 짚으로 엮은 초라한 움막을 둘러보며 중얼거리자 찻잔을 입에 댄 카렐의 입가에 다시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지금 몸둘곳을 평가하고 계십니까?"

"평가라......틀린말은 아니군."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뭇잎으로 엮은 지붕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인 듯 싶더니 잠시 후 지붕에 구멍이 날 정도로 세차게 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흔한 일이지요."

바나나잎으로 만들어진 허름한 지붕을 걱정스럽게 올려보는 아메스에게 카렐이 웃음띤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험한곳에 귀하게 자라신 아가씨같은 분이 계시긴 힘들겁니다."

카렐의 말은 틀림없이 '너같은 백면서생은 내게 필요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순간 발끈 한 이 다혈질 아가씨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끈 돋아나고 있었다.

"나와서 저녁식사하세요."

한참 서먹하던 분위기의 움막 한에 솔이 머리를 디밀었다. 솔의 시선은 카렐의 앞에 단정히 앉아있던 아메스에게 가서 딱 멎었다. 아메스도 약간 낯익은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아메스 아씨,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아메스를 알아본 솔이 허둥지둥 그 앞에 꿇어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메스가 당당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 보였다.

"전에 집에서 본 일이 있는것 같은데......아마 장난감이었지? 내 노예 따위의 이름은 잘 모른다만.....어쨌든 여전히 미인이구나."

"이곳에선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카렐이 아메스의 지나친 오만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솔은 이곳에선 2인자인 최고전사장 네피의 딸입니다. 아참, 아메스 아씨와 아버지만 다른 자매 사이로군요."

"뭐?"

아메스는 잠시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딸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있는 네피의 모습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물론 아메스의 존재에 당혹스러워하기는 네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메스가 비꼬는 말투로 내뱉었다.

"어머니를 죽게 한 장본인이시군."

"마리안에게 독배를 내린건 그 잘난 네 아버지일텐데."

흥분한 네피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자 아메스가 즉시 맞받아쳤다.

"순진한 어머니를 유혹해 아버지를 배신하게 만든 건 네놈 아니었나!"

"그만!"

카렐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제서야 얼굴이 벌개진 채 노려보던 둘이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네피, 피해자이긴 둘 다 마찬가지고 아메스 아씨에게는 그 일에 아무 책임도 없으니 그냥 네가 조용히 있어."

"하지만....."

"네피!"

카렐의 목소리가 움막 안에 쩌렁 하고 울렸다. 움찔 한 네피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내가 애 앞에서 어른답지못하게 굴었군......나가자. 카렐. 저녁먹자."

네피의 사과에 아메스도 그 화통한 성격답게 즉시 반응을 내놓았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소리를 했군."

카렐을 따라 움막을 나서며 아메스는 카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보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곳의 2인자여야 할 네피가 무슨 이유엔지 식객에 불과한 카렐 앞에서 '맥도 못 추고' 있었다. 이런저런 의문 속에서 아메스는 아직까지 카렐 저 무서운 가디언을 '평가'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밀림은 위험합니다. 내일 가십시오. 제가 바깥에서 잘테니 아가씨는 방의 제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페로 관 같은곳에 비하면 잠자리가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카렐이 발을 걷고 방 안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누추한 움막에서 방이래야 응접실---이라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과의 사이에 알량한 대나무 발 하나만 겨우 걸쳐져있는 작은 쪽방이 고작이었다.

카렐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있는 털가죽 담요 위에 몸을 뉘인 아메스는 자꾸 얼굴 주변을 날아다니는 신경쓰이는 모기와 날벌레들에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덥고 짜증나는 곳에서 저 괴상한 가디언은 북슬북슬한 털가죽까지 덮고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이런 데 도대체 어떻게 살어?'

귀족집안 딸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의문을 품은 아메스는 평가건 뭐건 다 접어두고 한시라도 빨리 이 짜증나는 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사실 아메스 스스로도 인정하는 자신의 가장 큰 단점---한번 짜증나거나 화가 나면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이 지금 상황에 또한번 발동되고 있었다.

"응?"

특이한 향기에 위쪽을 쳐다본 아메스의 눈에 침대맡 자그만 화분에 핀 몇송이의 들꽃과 물망초 꽃송이가 들어왔다.

'별꼴이야.'

아메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사실 페로 관에서도 수석 가디언이었던 카렐이 비번인 때 정원에서 혼자 화단을 손질하고 있다던가 큰 가위를 들고 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광경---휘하 가디언들이 그 모습을 못본 척 애써 외면하려 들 정도로---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었다.

여우털을 푹 뒤집어쓴 아메스는 틈새로 눈을 삐끔히 내밀고 응접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단정히 앉아 책을 읽는 카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후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토로 경이 집 안에 빠끔히 머리를 디밀고는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이불 속에서 막 잠이 들어가던 아메스가 순간 정신을 퍼뜩 차렸다.

"지금 시간에? 자정이 넘었는데?"

시계를 바라본 카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늘 슈벨 수반으로부터 솔에 관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심기가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카렐이 그답지않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말씀드리지 말라고 일렀건만......"

"추궁이 하도 심하셔서 슈벨 수반도 많이 난감해하는 것 같았사옵니다."

카렐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나가려던 카렐이 갑자기 뒷걸음치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메스는 호흡까지 멈춘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움막 입구의 발을 확 걷으며 무서운 눈길로 들어온 건 다름아닌 세네피스 황후였다. 카렐이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누구한곳까지......"

움막을 둘러본 세네피스 황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네 명색이 태자이거늘, 숙소 몰골이 이게 도대체 뭐냐."

황후의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에 카렐이 아메스가 누워있는 방 쪽을 급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 톤을 더 낮춘 목소리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하지만 전 어쨌든 이곳의 식객 신분이므로......"

"슈벨 수반이 너에게 바친 집도 마다했다며!"

"지금의 제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론이옵니다."

카렐의 대답에 혀를 끌끌 차던 황후가 결국 담고 온 말을 내놓았다.

"그래, 그리고 기껏 가까이 둔다는 것이 자이센 가에서 몸이나 팔던 천하디 천한 노예란 말이냐? 내 처음엔 그냥 네 하녀인줄 알았다만......그게 아니라며?"

"어머님, 그건......"

당혹스런 표정의 카렐이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황후는 도리어 목소리를 더 높이며 쏘아붙였다.

"내 네 몸을 생각해 곁에 여자를 두는 것 정도는 용납하려고 했다. 아니, 인공수정으로라도 네 아이를 낳아줄 수 있으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귀한 신분인 네가 그따위 천박한것과 어울리다니!"

"어머님, 솔은 그곳에서 다른 사람과 몸을 섞은적도 없고.......어머님도 잘 아시는 상급귀족인 로퍼크 가와 세호 가의 피가 절반 섞인 사실상 시민이옵니다.......다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닥쳐라."

황후가 언성을 높이자 카렐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조아렸다.

세네피스 황후는 많이 흥분한 듯 이마에 맺힌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카렐이 그런 황후를 설득하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님께선 부제학으로 계셨을 때에도 신분제를 반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어머님께서......"

"그래, 내 신분제는 반대했다만 최소한의 격과 품위와 교육은 받은 사람이야 할 것 아니냐!"

"그건 지금부터라도......"

"시끄럽다!"

황후의 단호한 태도에 카렐이 들릴듯말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그리 그여자를 원한다면 네 소실로 용인해주는 정도는 고려할 수 있다만 그러려면 너에겐 제대로된 짝이 있어야 해. 네 격에 맞는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은 네가 그 여자아이와 놀아나는 걸 도저히 용납할수가 없다. 알겠냐?"

자기 할 말만 다 해버린 황후는 그대로 휙 돌아 카렐의 움막을 빠져나가버렸다.

혼자 남아 대나무벽에 기대 선 카렐은 다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 황후의 이런 반응은 어느정도는 예상된 것이기는 했다. 게다가 네피에게도 털어놓았듯 카렐 스스로도 자신과 솔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히 구분짓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혹시라도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 솔을 정말로 사랑해준다면 기꺼이 옆에서 축하해주겠다는, 스스로도 자신없는 생각을 또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카렐은 아메스가 자는 척 하고있는 방 안을 또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아메스가 담요 밑에서 황후와의 대화를 다 듣고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듣게 내버려둔 것이었다. 저 아가씨는 그것을 알려줄만큼,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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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 꼭 참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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