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아침해가 밝자 큰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든 솔이 카렐의 움막에 들어섰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카렐이 여느때처럼 자신의 세숫물을 챙겨온 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렐의 시선을 받은 솔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세수하세요. 얼굴이 좀 안돼보이시네요. 잘 못주무셨나봐요?"
카렐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자 솔이 머리를 숙여보이며 움막 밖으로 사라졌다. 솔이 들어오는 기척에 잠에서 깬 아메스가 데데한 모습으로 방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카렐이 그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다 들으셨겠죠?"
굳어진 표정의 아메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카렐이 들릴듯말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님께는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아버님께 사실대로 알리고......전략적 제휴를 할 생각은 없는지......두 사람이 손만 잡는다면......"
카렐이 자신의 얼굴을 문득 바라보자 아메스는 고개를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당황스러운 듯 괜히 양 옆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뿐만이 아니고 지금까지 마음껏 반발을 내갈겨온 이 '가디언'에게 이제와서라도 존칭을 써 주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하는 것인지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렐은 잠시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메스가 용기를 내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자 그제서야 카렐이 나즈막하게 대답했다.
"총리는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
"지금 상황에선 제가 공주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저와 손잡고 수확물을 나누지는 않을겁니다. 하지만 베흔이 제 정체를 이미 알고있으니 일차로 절 제거하기 위해 수우쪽에선 반대로 아버님께 접근하려 들겁니다. 총리가 제 정체를 안다면 그들과 손잡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흔이 황궁에 갔던 날 환대했나보군,"
아메스가 고개를 끄덕거려보였다.
"그래서.....페로는 좀 당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협력하지 않는다면 죽을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카렐의 직설적인 표현에 아메스가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카렐과 아버지 페로와의 그 '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아메스 역시 잘 알고있었다. 그런 카렐이 저런 말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아메스 역시 충격을 받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한손에 칼을 든 채 붉은 아침햇빛이 드는 동쪽하늘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었다. 아메스가 자기도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직도.....아버지를 생각하는거야?"
아침햇살에 그 무지개빛 눈을 반짝거리는 카렐은 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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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와의 가출에 실패한 후 거친 가디언들의 손에 집으로 끌려온 어린 카렐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아버지의 손에 무지막지하게 얼굴을 얻어맞는 페로의 모습이었다. 슈막은 다리와 손에 붕대를 감은 아들의 처참한 몰골은 아랑곳없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집안에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던 주인집 외아들 페로가 맞는 모습을 생전 처음 본 카렐이 울음을 터뜨리며 주인인 슈막의 발목을 껴안았다.
"때리지 마세요, 제발요, 주인님,"
"뭐야?"
흥분한 슈막이 주먹으로 카렐까지도 내려치려다가 멈칫 하고 말았다. 저택 입구에는 베흔을 선두로 한 십여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서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슈막은 약간 당황했는지 엎드린 카렐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베흔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연락받고 왔습니다.......그런데 이애는 서류상으로는 황실 소유일텐데요."
"......그런데요?"
슈막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방금 황실 재산에 함부로 손해를 입히려 하셨습니까?"
슈막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때까지도 자신의 발목을 붙들고있던 카렐을 억지로 떼어내 그들 쪽으로 홱 떠밀었다. 베흔의 시선은 어린 카렐의 손목에 채워진 파란색의 조그만 가디언 팔찌에 가서 멎었다. 낯선 남자를 마주한 카렐이 중간에서 어찌할바를 몰라하며 아버지 옆에 서 있는 페로를 쳐다보았다.
"네가 늑대를 손으로 때려잡았다는 그 카렐이냐?"
카렐의 옆에 쪼그려앉은 베흔이 그답지않은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카렐이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베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엉?"
카렐의 얼굴을 마주한 베흔의 미간에 갑자기 주름이 잔뜩 잡혔다.
"너......눈이 원래 그색깔이냐?"
"네."
"이런 눈동자는 희귀한데......게다가 가디언중에는 저런 눈이 없을텐데......"
베흔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자신이 아는 저런 눈동자를 지닌 사람들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베흔은 그들의 공통점을 바로 머릿속에서 꺼낼 수 있었다.
베흔이 자기의 빛나는 초록색 눈가에 웃음을 띠며 카렐의 앞에 바싹 쭈그리고앉아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쓰다듬었다. 베흔의 다정한 태도에 적이 마음을 놓은 카렐이 평소같은 말투로 명랑하게 대답했다.
"페로하고 수우가 눈이 웃기다고 맨날 놀려요."
"그래?......근데, 너 정말 예쁘구나. 그런데, 넌 네가 누군지 아냐?"
"예?"
카렐이 해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카렐의 시선은 그제서야 자기와 같은 모양의 팔찌가 끼워져있는 베흔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렐은 베흔의 번쩍이는 황금색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한 번 웃어보였다.
"내가 묻지 않았니? 네가 누군지 얘기들은 적 있냐고."
베흔이 대답을 재촉하자 카렐은 마지못해 서문 너머의 떡갈나무 언덕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페로가 그러는데 전 저 위에 큰 떡갈나무 밑에서 줏어왔대요."
꼬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베흔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카렐의 얼굴을 한 번 매만져준 베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긴장하고 있던 슈막 자이센이 베흔에게 말했다.
"당초 계약대로 5천만 골드 지급하는 거 잊지 마시오. 우리도 프로젝트 실패선언 덕택에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단 말이요."
"물론. 한달 내로 입금될거요."
베흔이 냉큼 대답하며 카렐의 뒷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넌 나하고 가야겠다."
베흔은 버둥거리는 카렐을 질질 끌고 저택 앞에 세워져있던 차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있는 카렐을 무섭게 내려보던 베흔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로. 이년 숙소로 가면 소지품들이 있을테니 몽땅 다 가져와봐라. 뭔가 좀 수상해. 그리고 제파 넌 이년 옷 다 벗겨. 몸 좀 확인해야겠다."
"옛!"
제파가 카렐의 머리채를 붙들고 입고있던 옷을 다 찢어내버렸다. 아직 여자로서의 상징도 하나 드러나지 않은 카렐의 뽀얀 알몸이 드러났다. 본능적으로 수치심을 느낀 카렐이 몸을 움츠리려 하자 베흔의 손이 그의 목을 꽉 움켜쥐고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악!"
흙바닥에 턱을 긁힌 카렐이 소리를 질렀다. 베흔의 시선은 카렐의 어깨에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흔적에 가서 멎었다.
베흔의 얇은 입술이 순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자그룰라 모렌......그 망할 년......"
부하들과 함께 달려갔던 시로는 잠시 후 허름한 옷보따리 한개와 말린 꽃 몇다발, 화분 몇개와 작은 상자에 담긴 신변잡기들을 가져왔다. 짐들을 구석구석 뒤진 베흔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차 뒤에는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노예처럼 발목에 쇠고랑이 채워진 카렐이 울며 쭈그려앉아 있었다.
베흔의 손에는 상자에서 나온 작은 황실문양의 목걸이가 쥐여 있었다.
"이걸 누가 줬지?"
베흔이 이 작은 여자아이를 무지막지한 신발굽으로 사정없이 걷어차자 카렐이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뒤에 서 있던 시로와 제파도 어린아이를 이리 무자비하게 다르는 베흔의 모습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대장, 아직 어린앤데......"
말리려는 시로를 한 번 째려본 베흔은 땅바닥에 딩굴며 피를 흘리는 카렐의 머리채를 다시 움켜잡았다.
"몰라요, 정말이예요,"
얼굴 한쪽이 돌바닥에 긁혀 피투성이가 된 카렐이 입에서 침과 피를 흘리며 겨우 대답을 토해냈다. 흥분한 베흔이 카렐을 다시 바닥에 패댕이치자 보다못한 시로가 재빨리 카렐에게 달려들어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착하지, 얘야, 저 아저씨가 화가 많이 나서 그래, 너 그럼 저 목걸이를 언제부터 갖고있었니? 말 좀 해봐, 그럼 저아저씨도 안때릴거야. 저아저씨 못된사람 아니거든, 그냥 화가나서 어쩌다 한것 뿐이야,"
"노예 아저씨가 그러는데......여기 올 때부터 있었대요, 누가줬는지는 정말 몰라요,"
눈물콧물과 피로 범벅이 된 카렐이 훌쩍이며 대답하자 시로가 베흔에게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그럼 가자."
"페로! 페로!"
그때까지 바닥에서 피를 흘리던 카렐이 페로를 찾았다. 대문 뒤에서 노예의 손에 붙들려 이 광경을 버둥대며 보고있던 페로가 손을 뿌리치고 빠져나와 카렐에게 절룩거리며 달려왔다. 상자에 담아왔던 카렐의 많지않은 소지품들이 바닥에 흉한 몰골로 딩굴고 있었다. 시로의 손에 끌려가던 카렐이 쫓아오는 페로에게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내 물건 다 너 가지고있어........저 파란 병은 수우한테 줘......나 돌아올께, 페로, 응? 나 잊으면 안돼, 날 잊으면 안돼."
페로를 향해 버둥거리는 카렐을 시로가 번쩍 안아들고 차에 올랐다. 페로는 사방에 흩어진 카렐의 옛 소지품들 중간에 서서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수밖에는 없었다. 페로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바닥에 부서져 흩어진 마른 꽃잎을 하나둘씩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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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 차에 실려온 많은 보물들을 보며 페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검과 금화, 귀한 서부산 헤리케* 카펫이 들어있는 큰 상자를 열어보이며 근위대 가디언이 페로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디언이 열어보인 상자 안에는 봉투에 싸인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뭐지?"
실리페 황후가 페로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아메스의 귀환기념이라는군요......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편지를 넘겨준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편지와 동봉된 작은 봉투에는 며칠 후에 있을 황실의 종친회모임에 페로를 정식으로 초청한다는 수우와 레곤 대공주 명의의 초청장이 들어있었다.
"발신자 명의가 그냥 수우 델루지로 되어있군......전에 붙였던 '제위후계자'라는 사족이 없는걸......훗,"
실리페 황후가 피식 웃어보였다. 일단 선물을 안에 들인 페로는 수고한 근위대 가디언에게 답례로 약간의 금을 쥐여 돌려보냈다.
초청장 내용을 살펴보던 황후가 갑자기 움찔 하며 놀라고 있었다. 페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초청장을 앞뒤로 뒤집어보고 있던 황후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이번 안건에 나하고 내 딸들의 족보 기재문제가 추가되었군."
"황후폐하 아직 족보에 못올라있습니까?"
페로가 뜻밖이라는 듯 묻자 황후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세네피스 그년이 아직 족보에서 삭제가 되어있지를 않아서 나나 내 딸들이 아직 직계명단에 못올라있어. 레곤 대공주 그것이 날 징그럽게 싫어하거든. 게다가 세네피스년하고 친구사이였고. 그 망할 뚱보년은 내 부모님이 지 시가의 집사출신이라고 날 황후라고 부르지도 않아. 제기랄, 그것이 종친회 우두머리자리에 앉아있으니 내가 아직 족보에 못오르고 있지않겠나."
실리페 황후가 잔뜩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청장을 탁자 위에 던져버렸다. 초청장을 주워든 페로가 그 내용을 직접 훑어보았다.
"그 안건 발의자가 놀랍게도 근위대장이군요? 녀석이 황후폐하께 웬 추파죠? 아니, 제게 추파인가요?"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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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리케 : 터어키, 이란 등지에서 수공으로 제조하는 최고급 실크카펫.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무늬와 색깔이 변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두께가 얇고 제조에 극한의 수공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카펫 중 가히 최고급품으로 꼽힙니다. 대개 바닥에 깔지 않고 벽에 거는, 공예품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깝습니다.
<설문에 꼭 참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