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4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15.
"레곤 대공주저하께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반대하고 계시긴 하지만,"
베흔이 옷을 갈아입는 수우에게 말했다.
"어쨌든 다수의 종친이 찬성하고 있으니 큰 이변만 없다면 이번에 세네피스 황후를 제명하고 실리페 황후와 다섯 공주들을 족보에 올릴 수 있을겁니다."
수우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베흔도 평소같은 군복차림이 아닌 화려하게 장식된 흰색의 근위대장 예복과 망토를 차려입고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은 나중에 화가 될지도 모를 세네피스 황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자네가 잘 하고 있겠지......그럼 페로는?"
"페로 입장에서는......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실리페 황후가 종친회에 공인되는 셈이니 종친회에 접근하는 기회를 얻은 셈이긴 하겠지만 사실상 큰 실익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리페 황후 그여자나 좋아하겠죠."
"그럼 어쨌든 우리한테 안좋은거 아냐?"
수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베흔을 돌아보았다. 베흔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평소같지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 나중에 혼인할 공주가 족보에 정식 등재되는 것이니 저희에게도 손해라고 할 순 없겠죠. 하지만 이 결정에서 핵심은 우리나 페로가 당장의 득을 얻자는 것이 아니고 세네피스 그년을 제명해서 황실에서 완전퇴출된 것을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베흔의 친절하기까지 한 설명에 수우가 귀찮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부터 정치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수우는 이런 문제를 두번세번 곱씹어보는것조차도 싫어했다. 어쨌든 모든 결정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기원 416년 5월 21일자의 황실 종친회는 순환개최 원칙에 따라 4번 도시의 호젓한 해안가에서 열리고 있었다.
거주지와는 멀리 떨어진 해안가 절벽 위 풍광좋은 호젓한 곳에 마련된 이곳 연회장을 빙 둘러 종친들이 데려온 삼십여명의 가디언들과 4백여명의 용병들이 사뭇 위협적인 태세로 도끼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황제령은 원칙적으로 용병들은 물론이고 제후들의 정규군조차 그 출입이 엄금되는 곳이기는 했지만 황실 종친들의 경우는 제한된 숫자 내에서 어느정도의 가병들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홀 주변을 빙 둘러 쳐진 붉은색의 띠는 종친 및 그들의 직속 무장병력 외에는 어떤 누구도 무기소지가 허용되지 않으며,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여간 시간약속들 안지키는 거 하나는,"
의장석에 앉은 비둔한 체구의 여인이 이마의 땀을 연신 닦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유난히 크고 뚱뚱한 체구에 고집스러워보이는 깐깐한 인상을 지닌 이 검은 눈동자의 여자는 선대황제인 세나우스 3세의 막내여동생 레곤 대공주였다.
어머니였던 세나우스 2세 황제의 서거 직후 제위 계승권을 놓고 5남매가 다투었던 4차 혼란기 당시, 황제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그 싸움에 말려들지 않았던 그는 친오빠인 세나우스 3세의 즉위 직후 벌어진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피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운좋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태자의 직업으로는 이상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개척지 탐험가'라는 별난 직업이 말해주듯, 화통한 성격에 음주가무라면 사족을 못쓰는, 말 그대로 호걸의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그의 제위경쟁 포기를 내심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제위라는 것에 묶여있기는 너무도 자유분망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런 성격에 종종 수반되는 '단순함' 덕택인지, 이 여인은 자신이 똑똑해서 그 혼란기를 살아남았다며 꽤나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히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항상 곁에서 현명한 조언을 해 주는 모사 푸아킨 덕분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야 어쨌거나 그 무자비한 생존경쟁에서 목숨을 건진 이 막내딸은 그 친오빠가 귀찮다며 던져준 종친회장이라는 자리를 꽤 오래 무리없이 지켜오고 있었고, 스스로의 연륜이 쌓이면서 나름대로 귀족들과 종친들의 존경도 조금씩 쌓아오고 있었다. 물론 어릴때 자신의 개인교사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가장 절친한 친구사이가 된 올케 세네피스 카파키 황후의 퇴출로 친오빠와의 사이가 서먹해진것도 사실이었지만 그의 지위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모사 푸아킨은 한때 카파키 가에 소속되어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세네피스 황후와 세나우스 3세 황제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던 당사자이기도 했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의 수명개조 당대세대인 푸아킨이 종친회에 모인 사람들의 면모를 한 번 빙 돌아보았다. 그 역시도 오늘의 종친회가 차기 제위문제에 있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오늘의 사회자이기도 한 클레모 내무대신이 경비병의 눈짓을 받고는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었다. 특별 귀빈들이 드는 것을 알리는 짧은 나팔소리가 울렸다.
"페로 슈트란 자이센 총리각하십니다."
아메스와 모렌 박사를 옆에 대동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회의장에 들어선 페로가 상석에 앉아있던 레곤 대공주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오늘의 주최자인 레곤 대공주가 미소띤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회의장 한켠의 '손님'자리를 가리켰다.
"실리페 베로 황후폐하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호명한 클레모 대신이 잽싸게 대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대뜸 뭣 씹은듯한 표정이 되어버린 대공주가 애써 출입문에서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다섯 공주들과 함께 안에 든 실리페 황후가 곱지않은 시선으로 그런 시누이를 슬쩍 흘겨보았다.
"쳇,"
뚱 하게 앉아있던 대공주는 옆에 선 푸아킨의 눈짓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그에게 고개를 까딱 해보였을 뿐이었다. 입을 삐죽거린 실리페 황후는 공주와 같은 테이블의, 조금 떨어진 곳에 냉큼 자리잡고 앉았다.
"수우 플레렌 델루지 경과 근위대장 베흔입니다."
'양대세력'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자 종친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수우와 페로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는 놀랍게도 약간 눈살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베흔이 무서운 눈길로 종친들을 한바퀴 돌아보자 종친들이 그제서야 마지못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수우의 인사를 받아주며 대공주가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요, 수우 델루지 군. 공주들과의 결혼이 지체되고 있는 건 참 유감이요. 하지만 원래 일이라는게 항상 원하는대로 풀리는 건 아니니 좀 시간을 두고 여유있게 기다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좋게 흘러갈거요."
"환대 감사하옵니다."
수우가 허리를 깊이 숙여보이며 최대의 예를 표하자 대공주가 미소를 보이며 수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쨌든 수우 군은 조만간 종친의 일원이 될 사람이니......여기 앉으시구려."
대공주가 자기 바로 옆의 자리를 권하자 수우가 공손한 태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바로 뒤를 칼을 쥔 베흔이 지키고섰다.
"근위대장."
"예?"
대공주의 부름에 깜짝 놀란 베흔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자리는 전통적으로 종친의 가디언들이 지키는 자리요. 종친회장은 심지어 공권력도 못미치는 것이 전통입니다. 물론 그대가 근위대장 자격으로 온 건 알고있으나 그렇더라도 다른 손님들처럼 무장은 해제해주시면 고맙겠소."
"......알겠습니다."
베흔이 마지못해 칼을 끌러 종친 가디언에게 넘겨주었다.
"그럼 초대받은 분들이 다 모이신 것 같으니 시작을......"
레곤 대공주가 손을 뻗어 행사 시작을 알리려는 사회자를 가로막았다.
"잠깐, 한사람이 안왔네."
"예?"
사회를 맡은 클레모 대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손에 들고있던 초청자 명단을 죽 훑어보았지만 그곳에 나와있는 공식적인 초청자는 이미 다 모인 상태였다. 레곤 대공주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음지었다.
"내 개인적으로 한사람 초대했어."
"아, 그러셨군요......누구죠?"
하지만 대공주가 미처 그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곳 종친회장의 출입문이 먼저 열리고 있었다. 그와함께 일동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향했다. 입가에 환한 웃음을 지은 레곤 대공주가 문가로 다가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열린 문으로 나타난 뜻밖의 모습에 베흔과 수우의 표정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실리페 황후 역시 입을 벌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페로의 표정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전 황후폐하 드십니다."
경비병의 보고에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레곤 대공주는 앙상하게 마른 모습의 옛 스승이며 친구에게 다가가 품에 꽉 껴안았다. 거의 뼈만 남은 모습의 세네피스 황후와, 그 폭에서 족히 3배는 됨직한 대공주의 체구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푸아킨도 옛 소속가문의 유일한 혈통인 세네피스 황후의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 망할 년이 간이 부어터졌군......"
베흔이 주먹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짓을 받은 시로와 셈이 세네피스 황후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마주한 앙숙, 세네피스 황후와 베흔의 살기어린 눈동자가 서로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흥분한 양측 모두의 얼굴이 어느새 발그스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베흔이 레곤 대공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세네피스 황후는 감옥을 탈출한 현행범입니다."
"알아."
레곤 대공주가 말을 꺼낸 베흔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내 방금 말했듯이 종친회장은 공권력이 들어올 수 없는곳인 걸 모르나?"
"그러실지 모르지만 이곳만 나가시면 저희가 체포하겠습니다."
"내가 종친회장 자격으로 내 셔틀을 직접 보내 안전을 보장하고 오라고 했거늘, 네놈이 감히 황가의 수장인 날 모욕하려 하는건가!"
레곤 대공주가 핏대를 올리며 소리치자 베흔이 이를 악물며 시로와 셈에게 일단 물러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회의장 내에 일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근위대 소속의 가디언을 당해내기에 등급도 낮은 종친가디언들은 너무도 무력한 존재임은 확실했다. 당사자인 세네피스 황후도 적대적인 분위기에 적잖이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회의장의 이런 묘한 분위기를 깨고 누군가가 문을 천천히 열고 나타났다.
"참으로 오랫만에 문안드리옵니다. 대공주저하."
대공주의 얼굴에 순간 희색이 감돌았다. 새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카렐이 대공주의 앞에 공손히 꿇어앉아보이고 있었다. 황당한 표정의 베흔이 카렐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카렐은 궁에 있었을 때에도 단 한번도 예복을 입었던 일이 없던 터였다. 그런 카렐이 지금은 정식 예복 위에 화려한 금색 자수가 새겨진 황실 스타일의 케이프가 덧붙은 호사스런 망토까지 걸치고 서 있었다.
"저, 저....옷은....."
베흔이 중얼거렸다. 카렐의 복장은 심지어 어머니인 세네피스 황후나 대공주보다도 훨씬 호사스러워서 일개 가디언이 입기는 과해보이는 정도였다. 게다가 카렐이 두른 황룡 자수의 케이프는 황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복장이기도 했다.
그런 베흔의 시선을 의식한 듯 카렐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세네피스 황후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덮어주었다.
카렐의 존재에 힘을 얻은 대공주가 베흔을 매섭게 쏘아보자 그는 하는수없이 부하들에게 나가라 눈짓을 보냈다. 시로와 셈이 자리를 비우자 그제사 안심한 대공주는 세네피스 황후의 손을 꼭 붙들고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얼떨결에 카렐과 나란히 서게 된 베흔이 노기띤 얼굴로 노려보았지만 카렐은 그의 시선 따위는 관심없다는 듯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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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관에서 끌려와 황궁을 거쳐 북극의 낯선 숲에 도착한 어린 카렐은 셔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연 제파가 벌거벗은 카렐을 거칠게 끌어내 바닥에 동댕이쳤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붉은 저녁놀 사이로 이미 옛날에 폐허가 된 듯한 음산한 건물 몇채가 보였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덩쿨을 뒤집어쓴 오래된 건물들 외엔 사방에 빽빽한 침엽수림이 전부였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자 카렐이 무심결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이 어린아이의 공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여기가 지금부터 네가 있을 곳이다."
카렐의 앞에 똑바로 선 베흔이 이 어린 소녀를 내려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이......어딨는데요......"
잔뜩 기가 죽은 카렐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집? 네가 알아서 찾아. 나무 위에서 살든 저 건물 안에서 해골들하고 살든 네 맘이다. 다만, 아침에 해가 뜨기 전까지는 반드시 지금 이자리에서 널 가르칠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나일수도 있고 다른사람일수도 있다."
"추워요......"
여전히 벌거벗고있던 카렐이 몸을 움츠리며 울먹였지만 돌아온 건 베흔의 무성의한 대답 뿐이었다.
"추우면 아무거로나 몸 가려."
"옷은......"
"이년이!"
베흔이 다시 카렐을 걷어차자 낮에 베흔에게 짓밟혔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않은 카렐의 한쪽 얼굴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베흔은 움츠린 카렐의 야윈 몸에 시커먼 피멍이 남을때까지 계속 사정없이 발길질과 주먹질을 가했다.
"자꾸 말대꾸하면, 호랑이밥으로 던져줘버릴 줄 알아! 썅!"
옆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시로와 제파가 보다못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계속된 구타에 꼬마가 까무라치자 그제가 발길질을 멈춘 베흔은 부하에게 찬 시냇물을 퍼다가 끼얹게 했다. 정신을 차린 카렐이 이를 따닥거리며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네년이 아직 정신을 못차린 모양인데,"
베흔이 씩씩거리며 카렐의 발에 채워진 쇠고랑을 끌르고 추적장치가 달린 감지기를 단단히 채웠다.
"넌 여기서 너 혼자 살아야 돼. 아무도 널 지켜주지 않고 먹여주지도, 입혀주지도 않는다. 알았냐?"
카렐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엉망이 된 얼굴를 겨우 끄덕여보였다. 지난 하루동안 카렐이 베흔에게서 배운 첫번째 가르침은 '말대꾸하면 맞는다'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가자!"
그런 카렐을 내버려둔 채 베흔을 비롯한 근위대 사람들은 모두 셔틀를 타고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리번거리며 추위를 피할 곳을 찾던 카렐은 엉금엉금 기어 잡풀로 무성한 옛 병영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발에 걸리자 카렐이 밑을 문득 내려다보았다.
"으악!"
기절할 듯 놀란 카렐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몇개의 오래된 유골들이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생전 시체나 해골 같은 것은 본 적도 없던 이 어린 소녀는 이미 옛날에 죽어 없어진 사람들의 흔적에 귀신이라도 들린 듯 거의 이성을 잃은 채 병영에서 허둥지둥 도망쳐갔다.
큰 나무 둥치에서 몸을 움츠린 채 거의 한시간째 떨고있던 카렐은 언덕 너머로 사라져가는 해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점점 더 차가와오고 있었지만 피할 곳은 저 어둠속에 을씨년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해골로 그득한 병영 뿐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선 카렐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한시간 전 그리도 정신없이 도망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고 있었다. 차가와지는 공기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살을 에는 바람은 이 어린아이의 생존본능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병영 입구에 딩굴던 유골 옆에는 녹슬어버린 단검 한 개가 떨어져 있었다. 죽은 군인에게는 단검이었겠지만 지금의 자그만 카렐에게는 거의 팔뚝만한 크기의 큰 칼이었다. 급한대로 그것이라도 움켜쥔 카렐은 최소한 맨손이었을 때보다 한결 안심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카렐은 유골에 감겨있던 천조각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아마도 유골의 주인이 죽었을 때 입고있던 전포의 썩고 남은 찌꺼기인 듯 싶었다. 몇구의 유골들에서 천조각들을 모은 카렐은 그것들을 대강 모아 벌거벗은 작은 몸에 두르고 병영 입구 바로 옆에 쭈그려앉았다.
천조각에서 썩은내가 났지만 최소한 얼어죽는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아직 시커멓게 입을 벌린 건물 안쪽까지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밤추위는 엉성한 천조각을 뚫고 어린 소녀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주변을 딩구는 유골들의 모습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카렐은 다시 일어나 건물 조금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
구석에 비교적 성한 담요 하나가 둘둘 말려 있는 모습에 순간 기쁨을 감추지못한 카렐은 얼른 달려가 담요를 홱 집어들었다.
"허, 허어억......"
두 손에 담요 끄트머리를 단단히 움켜쥔 어린 카렐이 양 어깨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말려있던 담요 안에는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져 먼지만 남은 냄새나는 시체 한구가 들어있었다. 그런 시체를 싸고있던 담요라고 악취가 풍기지 않을 턱이 없었다.
"페로....."
카렐의 눈에서 또 한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코를 막으며 그 냄새나는 담요를 자신의 벌거벗은 몸에 두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그는 사방에 해골들이 널부러진 차가운 바닥에 아직 작은 몸을 뉘였다. 녹슨 단검을 꼭 쥔 그의 고운 손은 잠이 들고 난 후에도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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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 꼭 참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