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37화 (37/1,132)

< -- 37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16.

종친회장에서 베흔이 건네준 베흔의 서한을 놓고 페로가 머리를 쥐어싼 채 몇시간째 고심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두문불출에 어리둥절해진 아메스가 결국 사랑채의 문을 두들겼다. 마주앉은 아메스가 흐뜨러진 모습의 페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녁도 안드시고 계속 이러고 계셔서......"

"생각할 게 좀 있어서......네가 얼마전에 ㅤㅋㅞㄹ크에 다녀왔다고 했지?"

"예."

"그곳 분위기가 어떻더냐?"

아메스가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페로가 그쪽에 대놓고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입니다. 부락별로 자치체제로 운영하고 있으나 구완 슈벨 수반이 큰 무리없는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어보였습니다. 부락장들의 지지태도 또한 확고해보였습니다. 슈벨 수반이 지나친 통제와 권위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 성공요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슈벨 대신 그양반이야 전부터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사람이니까.....네피도 만나봤나?"

아버지가 평소 그 철천지 원수같이 여기던 네피에 관해 묻자 아메스가 움찔 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영향력이 어느정도인것 같아보이던?"

"지난번의 조직개편때 아시다시피 전사단의 군 지휘권 전부가 그의 손아귀에 쥐여졌습니다. 부락별 시민병 체제가 중앙에서 통제하는 정규군 체제로 바뀌면서 그 권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막강해진 것 같습니다. 반면 네피를 보좌하고 있는 가디언 조페는 부하들을 잘 추스리는 덕장 스타일로 보였습니다."

"토로 경도 용감하지만 똑똑한 인물은 못되니.....용장과 덕장은 있지만 똑똑한 참모가 없군."

페로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페로가 목소리를 조금 죽인 채 물었다.

"카렐은?"

"공식적으로는 그쪽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아메스의 대답에 페로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야......왜 직접 중책을 안맡는걸까......"

아버지의 간만의 관심에 고무된 아메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전사단 본부가 있는 곳 부근에서 대나무로 작은 오두막을 지어두고 그곳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전사단의 중요인물들이 계속 비공식적으로 드나들며 무언가 상의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보아서?"

"실질적으로 전사단을 이끄는 듯 해 보였습니다."

페로가 양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싶었다.

"그래.......토로 경이나 슈벨 경이......일개 가디언인 카렐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말이지......."

아메스의 입에 막 다른 말이 치솟아 올라왔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수가 없었다. 카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페로도 두팔 걷어붙이고 카렐 제거에 나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아메스가 카렐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사실 아메스는 매사 쌀쌀맞은 카렐을 무척이나 싫어했었다---- 그러기 위해서 페로가 베흔과 손잡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베흔의 그동안의 행각을 잘 아는 아메스로서도 아버지가 자존심에 앞뒤 못가리고 베흔과 손잡는건 결코 원치않는 일이기도 했다.

"제 생각엔......"

페로가 잠시 뜸을 들이는 딸을 문득 돌아보았다.

"아버님께서 카렐과 다시 손잡으시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보여집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페로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피는 네 어미때문에 나하고 철천지 원수지간이고 카렐은 내가 할복명령까지 내렸던 녀석이야. 나하고 손잡을리가 없지."

"그게 아니고 아버님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까?"

딸의 일격에 기분이 상한 페로가 대뜸 이를 드러냈지만 아메스가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

"네피도 그전 일에 관해 앙심은 수그러든 상태고 카렐은 그걸 개의할 정도로 그릇이 작은 인물은 아닙니다. 도리어 아버님의 굳은 마음이 문제같습니다."

"닥쳐라. 듣기싫으니 그만 해 둬."

아버지의 호통에 결국 그쪽 이야기를 접은 아메스가 탁자에 놓여있는 편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베흔이 준 서한이 그겁니까?"

페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메스가 용기를 내 아버지 앞에 바싹 다가가 그 서한을 펼쳐보았다. 몇글자 읽어본 아메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갑자기 비밀회동을 갖자니......설마 가실건 아니시겠죠?"

"생각중이다."

"속셈은 빤합니다, 아버지 힘을 빌려서 ㅤㅋㅞㄹ크를 치려는 수작입니다. 절대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건 나도 알아."

페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약간 옆으로 삐딱하게 돌아앉았다.

"그런데말야.....문제는......나도 결국은 언젠가 ㅤㅋㅞㄹ크를 쳐야 할 입장이란 거야......."

"지금은 시기가 안좋습니다."

흥분한 아메스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페로가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ㅤㅋㅞㄹ크와의 관계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아버님께서 써먹을 카드가 많아집니다. 어쨌든 3자 구도가 되어가는 이상 나중에 아버님이 어디와 손을 잡는것이 더 유리할지에 대한 확신이 서실때까지는 말씀입니다."

"넌 아직도 내가 카렐과 손잡기를 바라는거냐?"

페로가 얼굴을 찌푸린 채 딸을 쏘아보았다. 결국 이야기는 또다시 카렐과 손잡느냐의 문제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수단이라면 수단일 수 있겠죠. 어쨌든 지금상황에서 아버님 단독으로 제위를 차지하기는 힘들어진 것 아닙니까?"

아메스가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의 말을 넌즈시 무시해버린 페로가 대답했다.

"어쨌든......그쪽 분위기도 알아볼 겸 녀석들과 만나보는것도 나쁠건 없겠지."

"아버지! 절대 안됩니다!"

아메스의 호소도 아랑곳없이 페로는 친서를 잘 접어 서류철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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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너에게는 좀 특별한 날이 될거다."

사뭇 밝은 표정으로 푸엘 숲을 찾은 베흔은 카렐에게 검은 가죽수트 한벌과 같은 색깔의 망토를 내놓았다.

"너도 이제 98살이나 되었으니......바깥상황에 적응도 하고 하려면......오늘은 나를 따라 숲 밖으로 나가게 될거다."

카렐의 맹수같이 번득이는 눈이 갑자기 빛을 뿜었다. 카렐의 훈련은 베흔이 애시당초 계획했던 과정까지 모두 끝낸 상태였지만 무슨 생각인지 베흔은 '100년을 다 채워야 한다'며 그를 숲에서 내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90년에 가까운 기간동안을 이 야생에서 지내온 카렐은 이제 다시 바깥세상에 나간다는 사실에 긴장과 아울러 묘한 두려움에 떨고있었다.

"ㅤㅋㅞㄹ크에서 큰 전투가 있다. 너도 비공식적으로 참가한다. 무기는 네가 골라라."

병사들이 낑낑대며 들고 온 큰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무기들이 차례대로 정돈된 채 들어 있었다.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한 후에는 보통 1가지 무기를 전문적으로 익히는 다른 가디언들과는 달리 칼은 물론이고 둔기와 도끼 등의 단병기는 물론이고 창같은 장병기까지 모두 사용법을 습득한 카렐이었지만 최소한 잘 쓰는 무기를 정할 필요는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은 날이 뒤로 굽은 날렵한 모양의 긴 카타나, 아니 거의 노타치라고 해도 됨직한 긴 칼을 집어들었다. 카렐의 선택을 말없이 지켜보던 베흔이 무슨 이유엔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제길할, 피는 못속이는군."

"예?"

"아니다. 속도를 위주로 하는 네겐 그게 맞겠군. 오늘은 그걸 쓰도록 해."

"가벼워서 무게감이 너무 없군요."

몇 가지 자세를 잡아본 카렐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네손엔 뭘 들어도 가볍기는 매한가지야. 나중에 네가 정식배치될때는 네게 맞는 무기를 따로 제작해줄거다. 그럼 양손검을 쓰지 그러나?"

"아닙니다. 이게 낫습니다."

칼을 다시 집에 꽂아넣으며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카렐에게 조심조심 다가와 입고있던 털옷을 벗기고 베흔이 던져준 가죽수트를 입혔다. 다른 병사는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빗기고 로션을 발라주었다.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흔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래.....똑같군......기분나쁘게 똑같아......망할 칼까지."

베흔의 뜬금없는 불평에 카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새에 야생의 괴물같던 그는 큰 키의 단정한 무사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베흔은 마지막으로 카렐에게 복면과 마우스피스를 내밀었다.

"넌 아직 공식적으로 실무배치된 것이 아니니 얼굴이 공개되면 안된다. 이걸 쓰고 클록을 항상 얼굴에 덮고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마디도 해서는 안된다."

베흔의 뒤를 따라 도착한 ㅤㅋㅞㄹ크 외곽에는 이미 만여명의 정규 근위대와 각 제후가문에서 파견된 지원군들이 거대한 캠프를 세워두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부에서 발발된 노예폭동이 이곳 황제령 ㅤㅋㅞㄹ크까지 번지면서 노발대발한 황제는 그 진압작전에 실패한 남부 델루지 가를 징계하고 직접 근위대들을 출동시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후 '5차 혼란기'로 불릴 기원 354년의 이 진압작전에는 만여명의 근위대는 물론이고 제후군들까지 동원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제후군들이 이곳 황제령에 감히 진입한 건 지금 황제인 세나우스 3세의 즉위를 위해 북부제후군 10만여가 1번 도시를 점거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랄 것 없어."

90여년만에 푸엘 숲에서 벗어난데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어나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카렐이 전에없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베흔이 낮게 중얼거렸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카렐은 자신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보통의 제후군 병사의 모습에도 움찔움찔 하며 자기도모르게 칼에 손을 가져가기가 일쑤였다.

"오늘밤엔 너 원하는만큼 실컷 죽이게 해 주마."

칼을 쥔 카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베흔의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자신이 오늘밤 투입될 전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카렐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베흔이 캠프 중간의 제일 큰 막사문을 열고 당당하게 들어서자 자리를 지키고있던 많은 상급제후가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가디언과 상급귀족이라는 신분을 보아서는 꽤나 우스꽝스런 노릇이었지만 그 누구도 일개 가디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 현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형식적인 눈인사만으로 인사를 대신한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아직 앳티가 가시지 않은 형형한 검은 눈빛을 지닌 그 미남 청년은 베흔과 그 뒤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무사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천천히 눈을 치켜뜬 카렐과 그 청년의 눈빛이 마주쳤다. 엷은 회색에 무지개빛을 뿜는 그 희한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청년의 표정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페로 자이센 경."

"예."

진압군의 총 사령관이며 총리대신인 슈엘러 경의 부름에 청년이 건성 대답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얼굴을 가린 카렐을 향하고 있었다.

"아다시피 이곳의 폭도들은 노예 오합지졸이 아니고 옛날 북부의 역모의 도당들 잔여세력이요. 한때 정규군으로 있던 놈들이니만큼 절대 방심은 금물이요."

일단 주의를 준 슈엘러 경이 페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위대에서 건의한대로......오늘 밤 11시에 강 중심에 있는 녀석들의 본영을 기습하도록 하시오. 경의 가디언부대가 불을 올리는대로 근위대와 제후군들이 놈들을 외부에서 압박할 것이오, 베흔 근위대장, 근위대쪽 준비도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가디언 천 오백과 정규군 만이천 대기중입니다. 그런데....페로 경의 기습부대는 구성이 어떨게 됩니까?"

베흔이 묻자 젊은 페로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순수하게 가디언 오백입니다. 50등급에서 20등급이 사백이고 19등급에서 5등급이 구십명, 5등급 이상이 9명이고 특등급이 한명 있습니다."

"훗, 자이센 가도 그동안 많이 발전했군. 이번에 처음으로 특등급이 나왔다더니 그친구인가?"

슈엘러 경이 놀라운 듯 휘파람을 불어보였다.

그 때, 반대편의 문이 열리더니 어깨에 큰 도끼를 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들어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페로의 뒤에 똑바로 섰다.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페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피라고 저희 수련장 초기작 중 하나인데 이번에 새로 특등급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용맹합니다. 이번 공격에도 선봉에 설 겁니다. 아마......앞에계신 베흔 근위대장님을 빼고는 근위대 가디언들 중에서도 감히 대적할 자가 없을겁니다."

"허허, 자신만만하군,"

얼핏 허풍같이 들리는 페로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작 가장 불쾌해해야할 당사자 베흔은 카렐을 힐끗 돌아보며 쓴웃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페로가 짐짓 밝은 표정으로 처음 호기심을 터뜨렸다.

"그런데.....근위대장님 위에 선 그 무사는 누굽니까? 처음 보는 녀석같은데 천하의 근위대장님이 뒤에 데리고다닐 정도면....."

"이녀석은 견습가디언입니다."

베흔이 아무렇지않게 대답하자 좌중에 일제히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의 기가막힌 대답에 총사령관 슈엘러 경이 배꼽을 잡으며 물었다.

"아아니, 황실 가디언부대에 그리 인물이 없습니까? 견습을 호위로 데리고다니시게....."

"이친구 가르치는 의미에서......"

베흔이 페로 경을 문득 돌아보았다.

"이친구를 페로 경의 기습부대와 함께 움직이게 했으면 싶은데......"

"저희는 견습따위는 취급 안합니다."

순간 낯빛이 달라진 페로가 딱 잘라 대답했다.

"취급 안하는게 아니고......걱정이 되어서겠죠......"

베흔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자 페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얼굴이 일그러들었던 페로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적을 세명이상 죽이지 못한다면 저녀석을 제게 주십시오. 저희 수련장 뒷간청소나 시키겠습니다."

"푸하하!"

저 ㅤㅈㅓㄼ은 상급귀족의 당돌하기까지 한 내기제안에 베흔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페로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천하의 배포 크기로 유명한 페로 경께서 속좁게 3명이 뭡니까. 30명 이상 죽이지 못하면 뒷간청소를 시키든 잠자리수발을 시키든 맘대로 하게 해 드리지요. 대신......조건은 전투가 끝날때까지 저 녀석과 절대 대화를 하셔선 안됩니다. 그리고 얼굴에 씌운것도 벗기시면 안되구요."

"이거 재미있는 내기구먼."

슈엘러 경과 자리에 모은 귀족들이 모두 싱글거리며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베흔이 카렐에게 페로의 뒷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물론이고 모든 수단의 의사소통을 금지한다. 그렇지않으면.....지난번같이 팔을 잘라놓을테니까 알아서 해."

베흔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카렐은 베흔의 '협박'에 놀라하고 있는 페로의 뒤에 가서 섰다. 페로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보다도 키가 훨씬 큰 그 '가디언'을 힐끗 올려보았다.

"아참.....그녀석한테는 날고기를 주셔야 됩니다......특히 사람고기를 아주 좋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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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검술연습을 하던 카렐이 흐르는 냇물에 얼굴을 대고 가볍게 세수를 했다. 빽빽한 밀림 저편에서 야생동물 소리와 풀벌레소리가 들려왔다. 땅바닥을 짚고있던 왼손의 묘한 감촉에 손을 뗀 카렐은 바닥에서 빛나던 하얀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한쪽이 심하게 썩어들어가 있었지만 틀림없는 사람 어금니조각이었다. 카렐은 한숨을 내쉬며 이를 도로 땅속에 파묻었다.

"뭐하는거야?"

카렐의 숙소를 찾아온 네피가 냇가 앞에 쭈그려앉아있는 카렐에게 다가왔다.

"그냥......"

카렐이 고개를 들고 별이 총총이 빛나는 하늘을 멍 하니 올려보았다.

"전에 여기왔을 때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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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딴데 갈 생각 말고 내곁에서 구경이나 해."

페로가 짐짓 무표정하게 자신의 뒤에 선 카렐에게 말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ㅤㅋㅞㄹ크의 밀림 속으로 페로의 가디언부대 5백명이 냇물을 타고 반란군 본부에 소리없이 접근해갔다. 선봉을 맡은 네피가 제일먼저 상륙해 적의 초소 경비병들을 순식간에 거꾸러뜨리고 손짓을 해보이자 후속부대가 속속들이 상륙하고 중간에 위치했던 페로도 땅을 밟았다.

각각 백여명에서 2백여명까지의 지휘를 맡은 3명의 가디언들이 페로의 주변에 모여들자 냇물에서 막 빠져나온 그가 숨을 헐떡이며 그들에게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미리 지시한대로, 네피의 1제대는 중앙을 돌파할테니 다룬의 2제대는 북쪽으로 가서 적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놀라서 쏟아져나오는 놈들을 쓸어버려. 킵의 3제대는 남쪽으로 해서 본대가 공격해올 방향의 문을 열어둬. 알았나?"

"예!"

페로의 지시에 네피, 다룬, 킵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예비대로 이곳에 남아 페로를 호위할 이십여명의 가디언들만이 남고 3개 제대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자 한손에 칼을 꽉 움켜쥔 페로가 경계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상황을 지켜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가디언치고도 극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카렐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카렐이 처음으로 페로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난히 떨리는 카렐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애타게 말하려 하고 있었지만 페로는 그런 카렐의 이상한 태도에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마우스피스가 단단히 채워진 카렐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카렐이 갑자기 페로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자 움찔 하며 놀란 페로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띠며 뚱딴지같은 말을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걱정 마, 내가 꼭 구해줄테니까."

순간 북쪽에서 갑자기 큰 불길이 일더니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뭐지.....우리 애들 소리인가......"

당황한 페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청난 수의 반란군들이 사방에서 우루루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수가 한번에 몰려나오는 것을 보아서 미리 매복해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함정이다....."

크게 당황한 페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카렐이 '말'하려 했던 그것이었다. 냇가 반대편에서 움직이고 있는 누런 무언가도 틀림없이 반란군들이었다. 페로는 칼을 뽑아들려는 카렐의 손을 움켜잡으며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넌 싸우지 마! 명령이다!"

20여명에 불과한 페로의 호위가디언들이 페로를 에워싼 채 사방에서 몰려드는 반란군들과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5분만 지켜! 네피가 곧 돌아올거다!"

페로가 자신에게 덤벼오는 적 장교의 어깨를 두토막내며 휘하 가디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족히 2백은 넘어보이는 반란군 창병들이 원진을 이루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페로 가디언들에게 빽빽한 창을 무자비하게 내지르고 있었다.

냇가쪽을 지키던 2명의 가디언이 결국 집중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가디언들의 원진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카렐이 결국 페로의 손을 힘으로 뿌리치고는 칼을 뽑아들었다.

"안된다니까!"

페로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카렐의 칼날이 페로의 머리를 향해 뻗어오던 반란군의 창과 목을 동시에 두동강내 버렸다. 창을 밟고 뛰어오른 카렐은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빽빽하게 붙어있던 반란군 셋의 몸통을 한번에 갈랐다.

"제발, 제발......"

절망에 빠진 페로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진영이 무너진 페로의 호위가디언들은 잠깐새 뿔뿔히 흩어지거나 시체가 되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고 페로의 곁에는 이제 카렐 혼자 뿐이었다. 페로를 붙들고 냇물로 달아나려던 카렐은 수많은 창병들에 앞을 또다시 가로막히자 급한대로 나무를 등지고 서는수밖에 없었다.

"아악!"

함께 칼을 뽑아들고 창병들 몇을 베어 쓰러뜨린 페로는 2열에서 들이닥쳐온 창에 어깨를 찔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 무자비한 창끝은 쓰러진 페로를 몸으로 가린 카렐 한명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카렐의 다리 사이로 페로를 향해 교묘하게 내질러오던 창을 발로 힘껏 차내버린 카렐은 기회를 잡아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오던 다른 창마저도 힘껏 쳐냈지만 제아무리 카렐이어도 그 많은 창병들의 공격을 다 막아낼수는 없었다.

"아윽......"

결국 옆구리를 찔린 카렐이 피묻은 손으로 페로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번쩍 들어올려 냇물을 향해 힘껏 내던쳤다. 페로는 적 창병들의 머리 위를 넘어 깊은 냇물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빠져버리고 말았다.

"카렐! 카렐!"

냇물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던 페로는 끝까지 홀로 저항하던 카렐이 창에 온몸을 찔리며 결국 비틀거리는 절망적인 모습을 두 눈으로 무력하게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남쪽에서 또다른 종류의 큰 함성이 울려왔다.

"네피?"

물 속에서 버둥거리던 페로가 눈에 쓰고있던 스코프를 조절하며 남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카렐을 집중공격하던 창병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인님! 주인님!"

멀리 앞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육중한 실루엣은 네피의 것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페로가 비틀거리며 냇물에서 빠져나왔다.

"여기! 여기!"

페로가 숨이 턱에까지 닿아 고함을 질렀다. 페로를 확인한 네피가 급히 옷을 벗어 등을 덮어주었다.

"남문으로 근위대 본대가 진입했습니다! 기습성공입니다! 이쪽에서 매복을 잘 막아줘서......다들 어디갔습니까?"

"몰라, 다 죽었나봐......헉, 헉......저, 저기......"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은 페로가 손가락으로 이미 바닥에 쓰러진 카렐을 가리켰다. 탈진한 페로는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 다가갔다. 부러진 창이 옆구리에 박힌 채 가쁜 호흡을 몰아쉬던 카렐의 흐릿한 눈동자가 페로를 바라보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이런......"

절대 복면을 벗기지 말라는 베흔의 신신당부도 어느새 잊어버린 페로는 그의 얼굴에 손을 뻗고 있었다.

"이친구 쓸만했습니까?"

누군가의 큰 손이 페로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근위대 선봉과 함께 들어온 베흔이 히죽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억지웃음 뒤에 억지로 감추고 있는 실망감은 페로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살아계셨군요? 적어도 사오십명은 되는것같은데......구차하게 셀 건 없겠죠?"

베흔의 속을 깨달은 눈치빠른 페로가 이를 악물었다. 베흔은 전투중에 페로의 생사부터 확인하러 달려올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야심이 지나치게 큰 이 젊은 귀족을 미리 제거해버리기 위한 베흔의 치밀한 계략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황실의 소중한 재산'인 카렐을 왜 사지로 일부러 들이밀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짜증스런 표정의 베흔이 부하에게 고함을 질렀다.

"셈. 이녀석을 데려가라.......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 같다.......채찍맛 좀 더 보여줘야겠다. 죽도록 맞아야겠어."

근위대 가디언들이 부상을 입은 카렐을 들것에 싣더니 매정하게 멀어져가고 있었다. 90년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을 확인조차 못한 채 그대로 보내줄수밖에 없는 페로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있을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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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 꼭 참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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