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17.
오넷 광장엔 카렐이 할복했던 그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카인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광장 중간의 무너진 분수대 앞으로 향했다.
"역시 생각대로 융통성이 있는 녀석이었군."
분수대 옆에 있던 차 문이 삐끔히 열리더니 베흔이 눈을 내밀었다. 망토 밖으로 눈동자만 내놓은 카인은 아무 대답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선 쿠베가 카인에게 손을 내밀자 카인은 허리에 차고있던 칼과 단검을 끌러 그에게 내놓았다.
"타게나."
베흔이 문을 열어주었다. 카인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망토를 벗고 차 안에 들어서자 맞은편 자리의 베흔이 씽긋 미소를 지으며 두팔을 벌려보였다. 그도 역시 비무장이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왔던 카인이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차 안을 돌아보았지만 꽤 큰 승용차 안에는 운전을 하는 쿠베와 무척이나 밝은 표정의 베흔 단 둘 뿐이었다. 베흔이 옆에 있던 상자에서 금색 팔찌를 하나 꺼내들었다.
"우리 X들에게 있어서 이 팔찌는 일종의 명예의 상징이지......결국 따지고보면 자네나 우리나 결국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먼 친척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잖나?"
베흔이 팔찌의 앞면을 카인에게 내보이자 카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가디언 X-9-43921
소속 : 황실 근위대
이름 : 롭
합성 책임자 : 자그룰라 모렌
등급 : 특급 ----- 기능정지
카인이 짐짓 무관심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베흔은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팔찌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팔찌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중에 또하나는 우리가 죽고나서 시체는 썩어없어져도 이 팔찌만은 내 일생의 주요 기록을 간직한채로 영구히 보존된다는거지......내가 어떻게 죽게되었는지까지도 말이야......특히나 목숨이 끊어지기 전 20분 동안 내가 느낀 모든 기억이 메모리칩에 고스란히 남는건 우리 가디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최후가 중요하기 때문이야. 안그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죠."
내내 침묵하던 카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베흔이 씨익 웃으며 팔찌를 도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네녀석이 메모리칩을 손상시켰지? 사실 그것만으로도 명백히 불법행위지.......하지만 말이야, 우리 근위대들도 못된짓을 한 가디언놈들이 죽이고나서 손목을 잘라가던지 메모리칩을 손상시키는 파렴치한 짓을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거든."
카인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비가 쏟아지는 차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베흔이 여전히 싱글거리며 자기의 오른쪽 손목을 내보였다.
"너희들이 잊은 건 말이야......우리 근위대 상등급가디언들은 2년 전부터 겨드랑이에도 보조칩을 달았다는거야."
카인의 표정에서 핏기가 사라졌지만 최소한 방금전같은 침착은 유지하고 있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베흔이 카인에게 얼굴을 조금 가까이 들이댔다.
"원칙대로라면......넌 체포해서 공개처형감이지......옛날에 카렐한테 아홉토막난 시아푸녀석처럼 말이야."
"하지만 제게 이러시는 건 다른 무언가를 원한다는 뜻이시겠죠?"
눈치빠른 카인이 짐짓 히죽거리며 되묻자 베흔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베흔의 뜻을 눈치챈 카인이 조금 안심했는지 조금 펴며 의자에 편하게 자리잡고 앉았다.
베흔이 그에게 술잔을 내밀며 나즈막히 물었다.
"원하는 건 두가지야. 일단.......하나는 현재 카렐과 총리의 관계에 관해 자세히 알았으면 해. 둘이 협력관계인지 아닌지."
"협력관계는 틀림없이 아닙니다."
카인이 술잔을 받아들며 딱 잘라 대답했다.
"그렇다고 적대라고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카인의 애매모호한 표현에 베흔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어정쩡한 관계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디언들 사이에서도 카렐 누님이 네피처럼 정말 달아난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총리께서 일부러 고도의 연극을 꾸미는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총리께선 그쪽에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녀석들과 교류는 하지 않되 적대도 하지 않겠다......후후, 어부지리를 챙길 속셈이군......"
베흔이 키득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번째는 뭡니까?
카인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음......이건 좀 어려운 부탁일지 몰라......하지만 어차피 한번 규율을 어긴바에야 한번쯤 더 어긴다고 새삼스러울것도 없겠지?"
카인의 겁먹은 눈동자 위로 베흔의 미소띤 얼굴이 반사되었다. 카인에게 선택의 방향은 조금씩 확실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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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의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기분이 매우 좋아진 황제는 곧바로 주요 귀족들과 고관들을 황궁으로 불러 큰 파티를 열었다.
"부총리가 오늘 안색이 별로 좋지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요?"
황제가 자기 바로 옆자리에 앉은 채 내내 시무룩하게 있던 페로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요즘 과로를 좀 한것같아서 그런 것 뿐이옵니다."
페로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황제의 바로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베흔이 둘 사이에 냉큼 끼어들었다.
"페로 경께서 원래 사람욕심이 많으셔서 방금 전 카렐을 보고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시는 것 같사옵니다."
베흔의 말을 들은 황제가 탁자를 두들기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사, 페로 경이 가디언 키워낸 솜씨를 보면 황실에서 위협을 느낄 지경이니 카렐을 보고 경이 호기심을 품을만도 하구려, 근위대장, 카렐이 지금 뭐하나?"
"몸단장을 시켰사옵니다. 그동안 워낙 험하게 살던 녀석이라 아직 황실의 이런 고상한 자리에 내놓을 정도의 품격은 갖추지 못한 것 같사옵니다."
"그래도......대신들 호기심이라도 풀어줄 겸 잠깐 보이는 건 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아레나에서의 대전 이후 겁에 질려있는 대신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가디언을 자랑하고 싶어 몸이 잔뜩 달아있던 황제가 갑자기 베흔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런 속을 모를 리 없는 베흔은 짐짓 못이기는 척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십여분 후 연회장 한구석의 큰 문이 열리더니 여전히 검은 망토를 두른 카렐이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주변에 있던 대신들이 순간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듯 양쪽으로 쫙 갈라서고 말았다. 사람 한 명을 순식간에 9토막내 죽여버리던 낮의 그 끔찍한 광경을 두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대신들은 저런 무시무시한 녀석을 손아귀에 쥔 황제가 앞으로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짓을 하려 들 지 설왕설래하고있던 중이었다.
카렐의 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페로가 호흡도 멎은 채 카렐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앙에 선 카렐은 한손에 칼을 쥔 채 황제 앞에 꿇어앉아보였다.
"X-11-1 카렐이옵니다."
연회장에 울린 그 특이한 목소리에 참석자들이 흠칫 놀라며 서로 마주보았다. 페로는 심하게 놀란 듯 잔을 든 채 그대로 자리에 굳어있었다. 황제가 득이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에 둘러선 문무백관들을 둘러보았다.
"망토를 벗어봐라."
황제의 지시에 약간 멈칫 했던 카렐은 머리의 후드를 벗고 어깨에 걸려있던 망토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이센 수련장 출신임을 나타내는 파란색 팔찌가 사방을 에워싼 조명아래 유난히 반짝거렸다. 긴 갈색머리와 또렷한 이목구비, 크고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와 얇고 곧은 붉은 입술, 흠잡을데없는 외모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런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황제 옆에서 말없이 술잔을 들고있던 페로와 카렐의 회색 눈동자가 그제서야 마주쳤다. 14년 전, ㅤㅋㅞㄹ크에서의 전투 당시, 그가 복면을 벗겨내고라도 보고싶어했던 그 카렐의 얼굴이었다. 평소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한 페로의 얼굴이 그답지않게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마저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페로의 태도에 더 득이양양해진 황제가 꿇어앉아있는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카렐의 모습을 앞뒤로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경들 믿을 수 있겠소? 이런 가디언이 강력한 1등급 가디언을 단 몇초만에 산산조각내놓았다는게 정말 신기하지 않소? 다 이자리에 있는 근위대장 덕분이라오. 내 최대한 혹독하게 훈련시키라고 했었는데 신통하게 100년이나 그런 훈련을 이겨냈다는게 정말 대단한 노릇이지,"
아부인지 찬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대신들의 말홍수 사이에서 페로는 줄곧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자기가 쥔 술잔과 카렐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신하들의 감언들에 잔뜩 들뜬 황제는 카렐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런데......정말 가디언으론 얼굴이 너무 아깝단 말이야.....도대체 모렌 박사 그것은 뭘 어떻게 섞었길래 이런 가디언을 만들어냈지?"
황제의 손이 갑자기 카렐의 뺨을 더듬기 시작하자 카렐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정말......아까워. 가디언으로만 쓰긴 말이야."
그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파티장에 감돌던 팽팽하던 긴장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죄송합니다, 이런,"
페로가 당황하며 바닥에 쭈그려앉아 떨어뜨린 술잔 조각들을 허겁지겁 주워모았다. 망가진 분위기에 저으기 기분이 상한 황제는 카렐에게 들어가라 눈짓을 보내고는 도로 자리로 돌아와버렸다.
"이, 이,"
황제를 잠시 올려본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술잔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흐르는 피도, 저 망할 황제를 순간 때려죽이고 싶었던 그의 격렬한 분노를 가로막지는 못하고 있었다.
"네가 푸엘에서 나왔다고 이제 네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숙소에서 곤히 자던 카렐을 갑자기 불러낸 베흔은 그를 찬바람이 몰아치는 170층 황궁 꼭대기에 세워놓고는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렸다.
"왜냐하면......난 네가 무지하게 싫거든."
속옷바람으로 끌려나온 카렐은 찬바람에 이를 악물며 계속 자기 주변을 맴도는 베흔을 노려보았다.
"병영 자료실에서 책은 왜 읽었나?"
"......"
베흔이 카렐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카렐은 욱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빨리 대답해."
"......인간으로서의 호기심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베흔의 발길질이 카렐의 옆구리에 명중했다. 카렐은 옆구리를 움켜쥔 채 바닥에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인간으로서의 호기심? 넌 네가 인간이라 생각하나? 이년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그건 가디언에겐 용납되지 않는거야. 알아? 넌 시키는대로만 하고 적당한 때 죽으면 되는 소모품이다. "
"......"
"셀룬의 시체를 묻어줬더군. 눈물겹기도 해라. 얼마나 힘드신가? 그 무표정함속에 모든걸 숨기느라 말이야. 본능적인 공포, 페로에 대한 그리움, 솜털처럼 여린 가슴까지 말이야.....응?"
베흔이 카렐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베흔의 신발에 돋아있던 스파이크에 카렐의 뺨이 찢겨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말이야......네가 아무리 그렇게 애썼어도 넌 100년동안 틀림없이 변했단 말이야......아까 페로녀석 보니까 감동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더군. 하지만 넌 옛날 그 이쁘장하던 계집애가 아냐."
베흔이 쓰러져있던 카렐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카렐은 얼굴에 범벅이 된 피를 겨우 닦아내며 베흔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넌 보통의 여자에 비해서 키는 20%나 크고, 빌어먹을 체형은 남자에 더 가깝지. 네 혈관엔 순수한 사람이 아닌 짐승의 피가 섞여 흘러. 페로가 그리워? 왜? 잠자리라도 하고 싶어? 어쩌지? 넌 이제 더이상 여자가 아니야. 넌 이제 테스토스테론이 듬뿍 흐르는 남자에 더 가까운 존재란 말이야. 목소리도 변성기를 지나면서 괴상망측해졌어. 아까 페로녀석 네 목소리에 놀라는 표정이 가관이더군. 그런 페로가 네 다른 모습들까지 보면 어떻게될까?"
베흔은 카렐의 머리채를 잡고 다시 한 번 바닥에 패댕이쳐버리고는 카렐이 입고있던 속옷을 확 잡아당겨 찢어내버렸다. 카렐의 하얀 알몸이 어둠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봐, 옷이라도 벗겨놓으면 피하지방이 너무 얇아서 흉칙해. 머리털은 어쩌다가 났지만 몸 나머지 부분에 체모는 하나도 없어. 아니, 비늘이 안생긴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게다가 이제 보통사람들 먹는 음식은 소화도 못시켜. 짐승처럼 날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지. 페로가 이런 네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라면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도망갈거야. 그런 주제에 네가 감히 인간이라고? 웃기군."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카렐의 입에서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씩씩거리던 베흔은 카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걷어차고는 혼자 내려가버렸다.
옥상에 혼자 남은 카렐은 하늘을 향해 마치 짐승같은 아무 뜻없는 큰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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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른새벽에 울린 비상벨소리에 다룬과 킵이 자다말고 허둥지둥 사랑채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뭐야? 뭐?"
"근위대가 검은 숲 뒷편에 출현했습니다! 경비초소 가디언 7명이 당했습니다!"
창백해진 얼굴로 사랑채에 달려들어온 카인이 숨을 헐떡이며 보고하자 자다 만 퀭 한 얼굴로 침소에서 갓 나온 페로가 뜻밖의 내용에 그답지않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숲이라면 들키지 않고 이 페로 관에 접근해올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근위대가? 설마......화해하자고 제의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카인이 페로 앞에 꿇어앉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근위대 숫자는 확인했나?"
페로가 평소같은 침착을 유지한 채 카인에게 낮게 물었다.
"메모리칩 분석결과 10여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시로의 모습도 파악되었습니다."
카인이 페로에게 죽은 가디언의 파란색 팔찌 두 개를 내밀었다. 팔찌를 확인한 페로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은녀석은 겨우 19등급인데......시로 같은 놈이 직접 나서 죽였다고?"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의 페로는 아직 어두컴컴한 집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근위대가 정말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 오려 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팽팽히 전개되어 온 양측의 신경전이 이제 드디어 그 끝을 맺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킵. 10명만 데리고 검은 숲 주변을 정찰해. 적을 보거든 싸울생각 말고 즉시 연락하고 이리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수작같다."
"알겠습니다."
침착한 얼굴의 킵이 칼을 이끌고 즉시 달려나갔다. 적만 보면 무조건 싸우려 드는 단순한 다룬 녀석보다는 저녀석을 내보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번에 당한 초소는 카인 네 구역이지?"
"예!"
"넌 삼십 정도만 데리고가서 초소 주변에서 일단 대기하고 있도록. 다룬, 판, 헨지는 집 주변을 지키도록 한다. 제길, 엘러 녀석은 이럴때 다쳤을게 뭐야......"
지난번 비밀회견장에서 제파의 손에 중상을 입은 엘러를 떠올리며 페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킵이 정찰대를 이끌고 떠나고 카인도 지원병을 실은 큰 병력수송차를 타고 검은 숲이 있는 북쪽으로 사라졌다.
눈을 비비며 애써 정신을 차린 페로는 간단한 세수를 마치고 자신의 방에 들어섰다. 근위대와의 첫 직접충돌에 페로도 불안감을 느꼈는지 한동안 입지않던 전포와 갑주, 실전용 검을 꺼내 몸에 둘렀다.
양손검인 크래모어와 한손검인 레이피어의 극단적이고도 기묘한 혼합형인 페로의 검은 제국의 대부분의 실전용 도검류와 마찬가지로 양손으로도 쓸 수 있도록 개조된 자루가 달려있었고 보통의 레이피어보다 강화된 큰 날과 뱀 무늬의 화려한 가드가 붙어있었다. 기껏해야 장식용으로 단검을 차고다니거나 최대한 예쁘게만 만들어놓은 레이피어를 역시 멋내기용으로나 차고 다니는 다른 귀족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넌 안채에 가 있어라. 문은 잠그고 밖에 나오지 마라."
바깥의 소란에 놀라 사랑채로 달려나왔던 아메스를 보고 옷을 갈아입던 페로가 단호하게 일렀다.
"저도 돕겠습니다. 저도 싸울 줄 압니다."
딸의 얼굴을 바라보던 페로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이 번졌다.
"역시 내자식답구나."
페로는 딸의 겁없는 태도가 꽤 마음에 드는지 아메스의 어깨를 한 번 어루만져 주었다. 자이센 가문의 호전적인 성격은 노예폭동 지도자였던 시조 제수스 자이센부터 잘 알려져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노예폭동을 사실상 완전진압하고 제국의 기틀을 잡아 '블러드' 자이센으로 더 유명해진 그 아들 투모카프의 잔혹하기 짝이없던 행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투모카프의 암살로 잠시 가라앉는 듯 했던 가문의 호전성은 그 손녀이며 페로의 누나이기도 했던 크낙스 슈트란 자이센이 16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5명이 넘는 폭도들을 베고 어머니 네베드 슈트란과 함께 참혹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또한번 알려지게 되었었다. 그 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누나를 동시에 잃은 페로가 폭도와 도적들에 대한 거의 병적인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장을 뒤적거리던 페로는 꽤 고이 간직되어있던 칼 한 자루를 꺼내 아메스에게 내밀었다. 단단한 가죽칼집에 싸인 중간크기의 시미터는 이미 실전에서 꽤 많이 쓰인 티가 역력했다. 아메스 또한 이 칼이 누구의 소유였는지 잘 알고있었다.
"이제부터 이 칼은 네꺼다. 네 증조할아버지인 투모카프 경이 쓰시던 칼이다. 싸우라는 게 아니고 네 몸을 지키는 데 쓰라는 뜻이다. 네 뜻은 알겠다. 전투가 벌어지면 알릴테니 일단 안채로 돌아가라."
아버지의 단호한 태도에 아메스는 하는 수 없이 칼을 받아들고 안채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한시간 정도가 흘러 동쪽하늘부터 조금씩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사랑채 마루를 서성이던 페로에게 한 가디언이 달려와 알렸다.
"킵 대장님 보고이십니다. 검은 숲 주변엔 적이 없는 듯 하다고 합니다."
"뭐야......"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멀리 동쪽 언덕쪽에서도 카인이 타고갔던 큰 병력수송차가 돌아오고 있었다. 30여명을 데리고 초소 주변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은 카인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이곳에 돌아오고 있었다.
"저녀석은 왜 돌아와?"
"급히 보고드릴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새 카인이 탄 병력수송차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동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페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룬과 판은 어디있나?"
"판 대장님은 카인 대장님 요청으로 동쪽으로 약간 멀리나가 동쪽길을 지키고 계시고 다룬 형님은 북쪽으로 약간 올라가 계십니다."
순간 페로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곳 종가를 지키던 가디언들은 근위대들의 기습을 대비해 10분정도 거리의 먼 곳에 사방팔방 흩어져있는 상태였다. 페로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칼로 향했다. 카인의 병력수송차가 어느새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차를 막아!"
그러나 페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력수송차의 문이 홱 하고 열리더니 황금색 팔찌를 한 오십여명의 근위대 상등급 가디언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왔다.
"망할!"
페로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쳤다. 근위대의 선두에 있던 시로가 마루에 서 있던 페로를 향해 큰 도끼를 치켜들며 거세게 밀고들어오자 페로가디언들 몇이 달려들어 그의 앞을 겨우 가로막았다.
"각하! 피하십시오!"
가디언 하나가 페로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마당에서는 근위대의 2인자 시로가 이끄는 오십여명의 근위대 최정예 가디언들과 특급들은 다 빠져버린 몇 안되는 페로가디언들과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각하! 적들의 총 공세입니다! 며, 몇백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채에서 허겁지겁 물러나오던 페로의 귀로 킵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미처 예상도 못한 이순간, 적들이 총 공세를 개시했음을 깨달은 페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페로는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중요한 상황대처를 잊지 않았다.
"1급 보안경보를 발령해! 자료들부터 챙겨! 빨리!"
"알겠습니다!"
"다룬! 다룬은!"
십여명의 가디언들에게 둘러싸인 채 뒷마당쪽으로 퇴각하며 페로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지금 오고계십니다! 판 대장님은 오시는길에 셈에게서 기습을 당했다고 합니다! 소식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습니다. 헨지 형님도 쿠베에게 기습을 당하신 모양입니다! 저희 부대들의 위치가 모두 노출되어있던 모양입니다!"
페로의 머릿속은 아직 어두컴컴한 하늘만큼이나 막막해지고 말았다. 그의 일생을 들여 정성들여 쌓아온 이 페로 관과 자신의 영광이 근위대의 손에 일순간에 넘어갈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일단 수련장으로 퇴각해야겠다."
안팎에서 동시에 적의 공격에 처한 이상 이곳은 거의 막기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서둘러 주기장이 있는 남문쪽으로 향하던 페로 일행의 앞에 숨이 턱에까지 찬 가디언 하나가 달려왔다.
"북쪽 사랑채의 통제실이 적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셔틀을 이용하시면 위험합니다! 언제 자기 와이어가 작동될지 모릅니다!"
또다시 페로의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셔틀 출입을 막는 방어장치인 자기 와이어 시설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면 페로 역시 이곳에서 셔틀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수하에 6명이나 되는 특등급가디언들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그의 곁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다룬은?"
"검은 숲에서 오고계시니까 적어도 십 분 이상 걸릴 듯 합니다."
"서문쪽으로 가자. 차로 빠져나가야겠다."
페로가 숨을 헐떡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서문을 향해 방향을 돌린 페로의 눈앞에 옆구리를 붕대로 감싼 엘러가 이십여명의 휘하 가디언들과 함께 급히 뛰어들었다. 의무살에 누워있어야 할 그가 바깥의 소란에 놀라 무조건 달려나온 모양이었다. 당황하던 페로의 표정이 천군이라도 얻은 듯 환해해고 있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아픈 몸도 마다않고 달려온 이 충성스러운 가디언의 모습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페로가 도로 집 안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넌 10명만 데리고 동쪽 안채로 돌아가서 황후폐하와 공주들을 모시고 동문으로 빠져나가라. 난 이대로 일단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맙소사, 아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