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ㅤㅋㅞㄹ크에서 지원병력을 보내주겠다고 대답한지 30여분이 지났지만 서쪽하늘에선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ㅤㅋㅞㄹ크에서 이곳까지 수송선으로 30여분 이상 걸리는 것이 당연한 거리였지만 기다리고 있는 이들 입장에서는 1분이 한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다룬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올 무렵 북쪽에서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북쪽에서 정체불명의 병력입니다!"
"전사단이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메스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못했다.
"근위대......같습니다."
다룬이 아메스를 원망하듯 째려보았다. 북쪽의 나즈막한 언덕 뒤로 적어도 삼백은 넘어보이는 한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눈이 좋은 페다이가 칼을 움켜쥐며 외쳤다.
"셈과 쿠베입니다!"
"썩을!"
다룬이 백여명에 불과한 자기 부대를 돌아보며 이를 단단히 악물었다.
"모두 돌......"
막 명령을 내리려던 다룬을 아메스가 대뜸 가로막았다.
"시간을 끌어야 돼! 모두 남서쪽 언덕으로 퇴각한다! 페다이! 네가 앞장서! 다룬은 후미를 지키고!"
'퇴각'이라는 아메스의 명령에 기가막혀온 다룬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아메스의 명령을 받은 백여명의 페로가디언들은 어쨌든 남서쪽의 고지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던 셈과 쿠베의 근위대들은 상대방이 저항한번 없이 갑자기 퇴각하자 어리둥절했는지 잠시 자리에 멈춰섰다.
"카렐 누님은 정말로 안오시려나봅니다."
앞장서 달려가던 페다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아메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단 지형적으로 유리한 언덕 모퉁이에 자리잡은 페로 가디언들은 언덕을 따라 긴 장사진을 치고 싸울 태세를 잡았다.
"다룬! 순순히 항복하면 근위대에서도 잘 써줄게야! 네 부하들도 마찬가지고!"
앞장서 달려나온 쿠베가 거의 관례적이기까지 한 항복권유를 시작했다. 물론 권유를 하는 쿠베 스스로도 저 단순한 녀석이 자신의 말을 들으리라고 믿는 건 결코 아니었다. 밑의 놈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미친놈, 가서 그 변태새끼 똥구녕이나 핥아라! 씨발!"
다룬을 대신해 큰 소리로 대답한 건 아메스였다. 자신의 '고상한 유생 아가씨'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지거리---욕쟁이 아버지 페로가 꽤나 자주 써대곤 하는---에 페로 가디언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물론 그들의 웃음은 절반은 진실이었고, 절반은 스스로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한 제스쳐에 불과했다.
그사이 전열을 정비한 근위대 가디언들이 큰 함성과 함께 언덕 위로 쳐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메스도 한손에 칼을 뽑아들었다.
"이아악!"
큰 양손검을 휘두른 다룬이 선두에 달려오던 근위대 가디언의 몸을 칼과 함께 산산조각내면서 백여명의 페로 가디언과 삼백여명의 근위대들과의 격렬한 싸움이 개시되었다. 별다른 나무 한그루 없는 거친 언덕에 흙먼지가 순간 뽀얗게 일어났다.
"감히 어딜 덤벼!"
한 개밖에 남지 않은 행거를 결사적으로 휘두르며 페다이는 아메스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의 뒤에 몸을 감춘 아메스도 칼을 들고 중간중간 저항하려 했지만 상대들이 모두 가디언들인만큼 직접 싸우기보다는 겨우 칼을 쳐내기에 급급해하고 있었다. 수에서 밀리는 페로 가디언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후미의 페로가디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뿌옇고 거대한 먼지구름이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의 무리는 아닌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그 선두에서 말을 몰고있는 낯익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구름 사이로 말에 올라탄 수백명의 중무장한 기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슴을 가리는 흰색의 판갑으로 만들어진 흉갑과 견갑, 움직임에 지장없는 찰갑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건 틀림없는 동부기병식 갑주였다. 바로 슈로 기사단들이었다.
"지원군이다! 조금만 버텨!"
아메스가 근위대들에게 밀려나고 있는 가디언들에게 힘을 주려는 듯 최대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페로 가디언들 후미에 도착한 2백여 기병들은 각자 등뒤에 올라있던 가디언들을 내려놓고 적의 양익을 향해 두갈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토로 로버넬입니다! 명 받고 왔습니다!"
"아이고, 오늘은 사냥감이 널렸네,"
아메스에게 칼을 내지르던 셈의 옆에 누군가가 홱 뛰어들자 셈이 기겁을 하고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번득이는 날의 도끼를 움켜쥔 네피가 키득거리고 웃으며 지쳐 비틀거리는 페다이를 대신해 아메스의 앞을 막아섰다.
"나하고 한 번 붙어보련?"
"에이 썅!"
뻗치는 기세에 네피를 향해 칼을 내리쳤던 셈은 네피가 휘두른 도끼의 참격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몇발짝을 뒤로 밀려나버렸다. 가디언들끼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새 기병들이 어느새 근위대 가디언들의 양익을 조여오고 있었다.
"제기랄! 퇴각! 퇴각!"
제아무리 가디언들이라도 기병들에게 퇴로가 막히면 자칫 붕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네피와의 기세싸움에서 밀린 셈이 부하들에게 큰 소리로 외치자 근위대들은 기병들이 사방을 에워싸기 전에 허겁지겁 언덕을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랫만이다, 다룬."
네피가 웃으며 동기생 다룬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오랫만에 이 동기생과 마주친 다룬은 이런 분위기가 꽤나 어색한지 아메스의 눈치를 얼른 살피고 있었다. 구사일생한 아메스는 긴장이 풀리면서 탈진해버렸는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말에서 뛰어내린 토로 경이 아직 불편한 걸음으로 다가와 아메스를 부축해주었다. 무릎 아래까지 늘어진 치마식의 찰갑이 그런 그에게 조금은 버거워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메스가 조금은 맥풀린 소리로 힘없이 말을 건넸다.
"전 명령대로 할 뿐입니다."
기사단을 한 번 둘러본 아메스는 약간 불만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분은......"
"본대를 이끌고 곧 오실겁니다."
토로 경의 말에 다룬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스쳤다. 카렐의 뒤를 이어 수석 가디언에 오른 입장에서 옛 상관인 카렐을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속편할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속을 모를 리 없는 네피가 여전히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왜? 너보고 옷벗으라고 할까봐?"
멀리서 방금전과 같은 흙먼지가 보이자 토로 경이 급히 의복을 정리하고 자리에 꿇어앉았다. 말에 타고있던 기병들까지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려 대장을 따르자 그 '우스꽝스런' 모습에 네피가 입을 씰룩거리며 평소처럼 사탕수수조각을 꺼내 질겅거리고 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렐을 선두로 가디언과 기사들, 많지않은 정규군들로 이루어진 천여명의 혼성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크고 검은 준마에 올라탄 카렐이 아메스에게 가벼운 목인사를 보내자 아메스가 토로 경처럼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보였다. 오랫만에 믿음직한 얼굴을 확인한 페로 가디언들의 분위기가 금새 환하게 밝아졌지만 카렐이 귀족 외에는 탑승이 금지된 '말'에 올라있다는 사실에 당혹해하는 모습도 역력했다. 말에서 뛰어내린 카렐은 자신의 등장에 불쾌감을 애써 감추고 있는 다룬을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다룬이로군. 아메스 아씨를 지키느라 수고했다."
"이 가디언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목숨을 걸고 절 지켰고 시로에게도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아메스가 페다이를 가리키자 카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이유야 어쨌든 가문 후계자에게서 찬사를 받고 으쓱 해진 페다이가 가슴을 펴 보이며 아메스의 뒤에 똑바로 섰다. 아메스와 함께 있던 다른 페로 가디언들은 주인 후계자인 아메스가 카렐에게 무릎을 꿇은것도 모자라 '경칭'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꽤나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아하, 페다이? 네가 시로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대단하군......내 기억에 네가 수치를 거의 채워가던 걸로 아는데......잘하면 이번엔 특등급달겠는걸?"
다룬의 눈치를 얼른 살핀 페다이가 옛날처럼 카렐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숨을 내쉰 아메스가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아버님이 수련장에서 근위대에 포위되어 계신 듯 합니다. 통신도 두절되었습니다. 페로 관은 이미 근위대들에게 완전히 짓밟혔고....."
"알고 있습니다. 남부에서 오던 순회군이 제후군에 막혀 동부로 우회해 돌아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적어도 9시간 이상 걸릴 듯 한데 베흔은 그 전에 수련장을 함락시키려 할 겁니다."
카렬 역시도 아메스에게 전과같은 깍듯한 예의로 대답해주고 있었다. 아메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아버님께서 위험하실텐데......"
카렐이 수심에 잠긴 이 옛 주인의 후계자를 가볍게 껴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다룬. 수련장에 남은 병력은 얼마정도로 추정되나?"
머뭇거리던 다룬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쪽에 상주하는 건 가디언 오백정도가 다일겁니다. 하지만 수련생들중에 비교적 쓸만한놈들까지 동원하면......."
"총리는 수련생을 싸움에 동원할 사람이 아니다."
다룬의 말을 그대로 가로막아버린 카렐은 시선을 다시 지도로 옮겼다. 다룬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메스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아메스의 시선은 중무장한 채 지도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에 잠긴 카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은 카렐이 수석가디언으로 있던 그 시절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이끄는 병력도 가디언 7백에 기병 3백, 정규군 5백이 다인데......다룬. 황제령곳곳에 흩어진 너희 단위부대들을 모두 모으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2시간정도......"
"좋아. 괜히 그녀석들 수련장으로 보내서 각개격파당하게 놔두지 말고 모두 네게 집결시켜라. 그러면 족히 천명은 될테니 그녀석들을 데리고 내 명령이 있을때까지 수련장 서쪽 고개의 요새에 대기하고 있도록 한다. 페다이 네가 부지휘관을 맡는다."
"하지만 전......"
다룬이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아메스를 바라보았지만 아메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지금부터 카렐 님 명령을 따르도록 해. 내 지시다."
"......알겠습니다."
카렐이 지도를 접어 망토 안에 집어넣고는 도로 말에 훌쩍 뛰어오르자 기사단과 전사단 가디언들도 일제히 무기를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메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카렐을 올려보았다. 카렐이 토로 경과 네피, 다룬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부대 존재가 드러난 이상 베흔은 우리가 포위망 후방을 기습할것이라고 예상할거다. 어느정도 손실은 감수하고라도 아마 특급 한두명을 예비대로 삼아 우리 길목을 막고 수련장에 대한 공격에 계속 힘을 쏟겠지. 적들 병력이 압도적인 이상 후방을 무조건 공격하는 건 바보짓일거다."
아메스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난 페로 관을 되찾으러 떠나겠다. 아마 자이센 총리는 두세시간 내에 수련장을 쉽게 내주지는 않을거야. 내가 페로 관을 탈환하면 자기 와이어를 풀고 에너지장벽 해체장비도 다시 구할 수 있을거다. 그러면 근위대의 서쪽과 북쪽 부대가 우리 사이에 끼게 되니 너흰 그때 서쪽을 기습해."
아메스의 명령대로 카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 다룬은 알았다는 짧은 대답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카렐은 그제서야 아메스를 내려보았다.
"아메스 아씨는 기병 3명과 가디언을 붙여드릴테니 제가 타고 온 수송선에 가서 쉬고 계십시오. 앞으로의 싸움은 무척 위험할겁니다."
"아닙니다, 자이센 가 사람으로서 아버님을 제손으로 구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구해드릴테니 걱정마십시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메스가 카렐의 말굽 앞에 완전히 꿇어앉으며 이마를 땅바닥에 가져가자 당사자인 카렐은 물론이고 다룬과 페다이를 비롯한 페로 가디언들까지 경악을 하고 말았다. 이 똑똑한 이 아가씨는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 따위를 따지기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당황한 카렐은 급히 말에서 다시 뛰어내려 아메스를 일으켜세워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대신 저나 네피의 곁을 떠나시면 안됩니다."
"아메스 아씨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엘러 대장과 약속했습니다."
불쑥 나선 건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페다이였다. 그의 위아래를 살펴본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지금까지 지킨걸로 그 약속은 지켜진 것 같군. 내가 지키는게 나을 듯 하니 자넨 지금부터는 근위대와 싸우는데 집중하도록 해."
페다이가 입을 씰룩거리며 마지못해 물러섰다. 먼저 말에 올라탄 카렐은 아메스를 번쩍 들어올려 앞에 앉히고는 자기의 검은 망토자락 안에 몸을 숨기게 했다. 아메스는 카렐의 가슴에 몸을 바싹 밀착시키고는 그의 허리띠를 꽉 붙들었다.
"출발!"
카렐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천5백여명의 전사단원들이 카렐의 뒤를 따라 일제히 북쪽의 페로 관으로 향했다.
수련장의 북쪽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한 몇명의 근위대원들은 몇분 지나지 않아 수천을 헤아리며 수련장을 새카맣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6백여명의 페로 가디언들은 수련장의 사방으로 바리케이드와 목책를 친 채 압도적인 수의 근위대들을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장변이 2스타디아 정도의 장방형으로 지어진 이 수련장은 원래 4천급의 든든한 에너지장벽과 기습을 저지하기 위한 각종 방어시설들이 총집결된 곳이었지만 배신자 카인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에너지장벽과 자동식 부비트랩장치들은 모두 작동을 멈춰버린 황당한 상황이었다. 이젠 곳곳에 깔린 함정들과 원시적인 목책에 기대 적들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해보는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것 없다."
가디언들의 근심어린 표정 위로 페로의 힘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동부제후지역에서 이천명의 동료들이 오고있다. 그리고 저들 뒤에는 녀석들의 후방을 교란할 다룬이 대기하고 있다. 잠시만 버티어준다면 저녀석들은 방금전의 잠깐의 승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곧 깨닫게될거다."
말을 마친 페로는 은빛 투구를 눌러쓰며 스스로 가디언들의 선두에 킵과 함께 나란히 섰다.
"각하, 제발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킵의 마지막 설득에 페로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으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들어가면 누가 내 말을 믿겠나?"
부하들과 함께 전방을 정찰하고 돌아온 헨지가 페로 앞에 꿇어앉으며 보고를 올렸다.
"북쪽 평야지역엔 근위대장 베흔이 가디언 천여명을 이끌고 일자대형으로 포진하고 있고, 서쪽 사막지역엔 수에보가 역시 가디언 오백여명을 이끌고 집결중입니다. 동쪽 숲엔 제파가 가디언 팔백여명과 정규군 천여명으로 진을 치고 있으며, 남쪽엔 방금 도착한 셈과 쿠베가 삼백여명을 이끌고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남쪽과 동쪽엔 정규군 병력이 조금씩 보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페로가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킵이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베흔이 직접 쳐내려올 모양이다......동쪽에서 제파가 셈이나 쿠베 중 한명과 합쳐 연합공격을 펼칠테고 서쪽과 남쪽은 조공이겠군......베흔을 상대할만한 녀석이 없다......"
페로가 멍 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바로 옆에 선 킵은 주인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다.
분주히 공격준비를 서두르던 베흔의 뒷켠에서 갑자기 자그만 소란이 일었다. 무심코 돌아본 베흔의 눈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전포를 차려입고 몇명의 대신들을 동반한 자그만 수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베흔이 그 앞에 성큼 다가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경례를 올렸다.
"이 위험한 곳까지 웬 행차이십니까."
"그냥......이 중요한 전투에 내가 완전히 뒷짐지고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지. 페로는 저기 있나?"
수우가 눈을 찡그리며 약간 가파른 바위언덕 뒤로 올려보이는 원형의 거대한 자이센 수련장 건물을 가리키자 베흔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 앞쪽에 은색 갑주를 입고 선 자가 페로입니다."
"난 멀어서 잘 안보이는데."
수우가 약간 멋적은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베흔은 그런 수우의 쓸데없는 넉살을 그대로 무시해버리고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곧 총 공격을 개시할겁니다. 오후늦게 놈들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ㅤㅋㅞㄹ크 녀석들이 페로를 도우러 왔다고 하니 특히 위험합니다. 아마도 저희가 페로를 공격할때 포위망에 기습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가 치열할테니 전하께선 일단 후방의 페로 관으로 가 계십시오. 페로의 목을 베는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약간 끄덕거린 수우는 가디언 이십여명의 호위를 받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일선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수우를 돌려보낸 베흔은 공격준비를 마치고 일렬로 서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근위대들을 한 번 빙 돌아보았다.
"진격!"
백전노장 베흔의 큰 고함과 나팔소리에 십여개의 방진을 이룬 천여명의 근위대원들이 자이센 수련장을 향해 언덕 위로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동쪽에서 제파가 이끄는 팔백여명도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준비한다!"
북쪽과 동쪽에서 일렬로 진격해오는 근위대들을 확인한 페로가 자신의 가디언들을 한 번 돌아보고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스스로가 불리한 상황임을 잘 아는 페로 가디언들은 자신들에게 최면이라도 걸려는 듯 페로를 따라 큰 함성을 올렸다. 한낮의 햇살아래 일제히 치켜든 그들의 무기가 번쩍거리며 빛을 뿜었다.
정연한 방진을 이루어 공격해오는 근위대의 선두에는 큰 탐지장치와 막대기를 지닌 노예들이 사방에 흩어져있는 수동식 부비트랩과 함정을 수색하며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 노예들의 뒤에 선 지휘관들이 노예들에게 빨리 움직이라 질러대는 고함은 '네 몸 하나 바쳐라'는 엄포나 별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는 나아가다가 운없이 죽으나, 뒤로 물러나다가 후열의 근위대들에게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아간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니 물러나는 건 어쨌든 더 바보같은 짓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군데군데 부비트랩에 걸려 발목이 잘리거나 함정에 걸린 노예들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길을 되짚어가며 근위대 가디언들이 언덕 위의 수련장을 향해 접근해들어갔다. 그리고 거의 적진 앞에 다다르자 그들 노예들은 일제히 가디언들 뒤로 물러났다.
"돌격!"
큰 함성을 지른 베흔이 직접 칼을 치켜들며 선두에 나섰다. 그의 목표는 킵, 판과 함께 중앙을 지키며 당당히 서 있는 페로였다. 페로의 눈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베흔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킵이 페로의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저 가소로운 놈!"
베흔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킵을 향해 칼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베흔의 칼날을 겨우 막아낸 킵은 그 기세에 눌려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튕겨나는 킵에게 밀려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든 페로는 근위대 선두에 달려오던 한 겁없는 어린 하급 가디언과 맞닥뜨렸다.
"날 얕보지 말란 말이다! 썅!"
페로가 큰 고함과 함께 자신의 검을 반사적으로 힘껏 휘둘렀다. 그 엄청난 기세에 당황한 풋나기 가디언의 가슴이 그대로 피를 뿜으며 갈라져버렸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페로가 그 어린 소년의 목에 사정없이 칼을 내리꽂았다.
"주인님이 적 가디언을 죽였다!"
판이 부하들 들으라는 듯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등급이야 어쨌든 시민계급이 타고난 전사인 가디언을 1대1로 대결해 죽였다는 것은 좀처럼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말을 탄 잘 훈련된 기병들의 경우가 고작이었고 보전에서는 거의 불가능처럼 여겨지던 터였다. 뜻밖의 놀라운 소식에 힘을 얻은 페로 가디언들이 근위대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판! 판!"
베흔을 상대로 힘겹게 시간을 끌던 킵이 피가 흐르는 가슴을 움켜쥐고 페로의 옆에 쓰러졌다. 판이 동료를 대신해 재빨리 베흔의 앞에 달려들었다. 페로의 노예들이 쓰러진 킵을 뒤로 옮기자 뒤에 기다리던 모렌 박사가 얼른 그의 웃옷을 벗겨내렸다.
"가, 가슴이요! 오른쪽!"
"망할! 한뼘은 베었잖아!"
"1분내 봉합해요!"
킵이 베흔을 상대로 계속 밀려나고 있는 판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모렌 박사가 그의 얼굴을 꽉 붙들며 대답했다.
"이대론 못싸워!"
"제길! 안싸워도 죽긴 매한가지라구요!"
눈깜짝할새 모렌 박사의 엉터리 응급처치를 받은 킵은 다시 칼을 움켜쥐고 페로 쪽으로 내달았다. 옆에서 자기 가디언을 밀어붙이던 근위대의 등을 힘껏 내려찍은 페로는 그 근위대의 머리를 그대로 잘라내더니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사방으로 피를 흩뿌린 머리는 공격해들어오던 근위대들 한중간에 툭 하고 떨어져버렸다.
"다 죽여줄테니 오란말이야!"
페로가 피로 범벅이 된 검을 움켜쥐고 미친 듯 소리쳤다. 손쉽게 수련장을 집어삼킬 듯 싶던 근위대들이 생각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었다.
"제기랄, 일단 물러나야겠다,"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번갈아 쳐오는 킵과 판의 기세에 계속 짜증을 내던 베흔은 공격부대에 일단 후퇴명령을 내렸다. 근위대들은 부상자들을 먼저 뒤로 보내고 쳐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대오를 맞춰 일사불란하게 뒤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싸움이 벌어졌던 바리케이트 주변에는 거의 백여구가 넘는 근위대와 페로 가디언들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다.
"판!"
멀어져가는 근위대들을 바라보며 탈진해 주저앉은 판을 헨지가 급히 부축해 일으켜세웠다. 팔과 귀에서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귀가 거의 잘려나갔는걸.....금방 붙여줄테니까 걱정 마."
판은 대답도 못한 채 나무문을 뜯어 급조한 바리케이트에 쭈그려앉아 넋나간 사람처럼 가쁜 숨만 겨우 몰아쉴 뿐이었다. 노예들이 그의 몸에 뒤집어쓴 피를 급히 닦아주었다.
역시 지친 페로였지만 판을 비롯한 용감히 싸워준 부하들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주며 짧게 한마디씩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두들 수고했다."
은빛 갑주 위에 피를 뒤집어쓴 페로가 투구 사이트에 엉겨붙은 살점과 피를 닦아내고는 부하들의 노고를 위로하듯 손을 치켜들며 힘있게 박수를 쳤다. 킵이 페로의 피묻은 오른손을 붙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페로 자이센 각하 만세!"
근위대의 첫번째 공격을 막아내며 사기가 최고조로 치솟은 페로 가디언들은 일단 후퇴하는 근위대의 등뒤로 기세등등한 함성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