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2화 (42/1,132)

< -- 42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역시,"

자기 천막으로 돌아온 베흔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피범벅이 되어 어느새 검붉은빛을 띠고있는 흰 전포를 벗어던졌다. 천막에서 먼저 기다리던 제파가 웃으며 그에게 따뜻하게 데운 술 한잔을 내밀었다. 술 한모금을 들이킨 베흔은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남쪽의 자이센 수련장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페로는 페로였군. 간단하게 끝내려고 했더니.....너무 앝잡아봤었나?......제기랄, 피해가 너무 큰데. 이번엔 좀 보강해서 공격해야겠어. 훗, 그건 그렇고 서쪽과 남쪽에선 연락 없나? 코아 전사단 놈들 말이야."

"글쎄요, 이상합니다.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다룬 녀석도 사라진 것 같고......도무지 무슨 꿍꿍이인지......"

베흔이 남은 술을 확 들이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모를 카렐의 기습을 대비해 후방에 3명이나 되는 특급들을 남겨두고 갔음에도 그는 코빼기도 나타내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의 다룬 그 녀석이 이곳으로 죽자사자 달려오지 않은 건 더더욱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베흔의 이마에 갑자기 주름이 잡혔다.

"이게......설마?"

"근위대 정규군 7백여명과 가디언 2백여명이 외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경비가 삼엄해서 안에 얼마나 되는지 직접 확인할수는 없었지만 근위대 정규군 병사를 심문한 결과 안에는 배신자 카인이 있고 시로가 부상을 치료받고 있다 합니다. 생포된 가디언 30여명이 공개참수되기 위해 억류되어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방금 전에 차 한대가 경호를 받으며 들어왔는데 누군지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정찰병들을 만나고 온 토로 경이 카렐에게 보고를 올렸다.

"허, 오늘 여럿 줄초상보겠네."

네피가 옷소매로 도끼날과 찌그러든 버클러를 닦아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번 출정에 영 내켜하지 않던 그가 카렐을 따라나선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마리안의 시신을 매장해둔 묘지를 알려주겠다는 카렐의 말에 그는 마지못해 페로를 구하는 이 일에 나설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미 죽은 마리안에 대한 복수심보다 더 중요한, 소중한 딸 솔의 미래를 위해 카렐을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카렐은 다시 아메스와 함께 말에 올랐다.

"내가 앞장서 서문을 통해 정면돌파한다."

네피가 휘파람을 불며 말에 오른 카렐을 올려보았다. 떡갈나무 언덕 뒤, 숲에 매복해 동정을 살피던 전사단 병력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덕을 돌아 얼마간 앞으로 나아가자 10스타디아 정도 전방으로 페로 관의 서쪽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렐이 뒤를 따르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선두에는 20기씩 제대별로 15개의 쐐기꼴 예진을 이룬 3백여 기병대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선두에 선다! 아무도 날 막지 못한다! 너흰 내 뒤만 따르면 된다!"

전사단원들이 하늘이라도 무너뜨릴 듯 큰 함성을 올렸다. 말을 타고 부하들의 주위를 한바퀴 빙 돈 카렐은 긴 칼을 뽑아들고 페로 관을 향해 앞장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력질주에 약간 겁을 집어먹은 아메스는 카렐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서쪽 숲에 정체불명의 병력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접한 페로 관의 근위대들은 사실 대 기병전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흩어진 페로 가디언들 소부대의 산발적인 기습을 대비해 담 주변에 군데군데 이삼십여명 단위로 흩어져있던 이들은 '그 정체불명의 병력'이 무려 3백여기의 중장기병이라는 사실에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뒤늦게 집결해 대항하려던 근위대들은 발빠른 기병대 수백이 아직 견고하지 못한 틈새를 매섭게 파고들면서 순식간에 조각조각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쩍 갈라진 틈새로 7백여 가디언들이 쐐기를 박듯 덮쳐들어오고 있었다.

"적 정규군들은 기병이 처리하고! 가디언은 가디언과 기병이 2인 1조가 되어 공격한다!"

제일 선두에 달려온 카렐이 말 위에서 거세게 휘두른 칼에 미처 도망하지 못한 두 근위대 병사들의 목과 몸통이 따로 떨어져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 미처 밀집대형을 이루지 못하면서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버린 근위대 병사들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뒤어어 올려오는 수백의 기병들과 가디언들을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었다.

검은 망토에 검은 말, 눈에 확 띄는 차림을 한 카렐은 한손에 칼을 높이 치켜들고 기병들 눈앞을 무섭게 돌진하며 자신의 '존재'를 그들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있었다. 서문 밖을 지키던 근위대 2백여명의 붕괴는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 난리통을 헤집던 카렐의 눈에 서문 약간 북쪽에서 특이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기사단 하급장교 한 명이 들어왔다.

"저녀석이었군,"

말을 잠시 멈춰세운 카렐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깨에 세로줄 한 개를 두른---20여명을 이끄는 기병 소대장인 마궁수의 표식이기도 한--- 그 장교는 몇 안되는 부하들에게 침착하게 하나하나 손짓으로 명령을 내리며 부하들을 마치 장기 말을 다루듯 움직이고 있었다. 책에는 다 나와있는 아주 원칙적인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사실 중장기병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지독한 공명심에 잘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러다보니 무모한 돌격으로 작전 전체를 뒤집어엎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일단 1차 충격만 끝나고 난전상황에만 접어들면 말단 기병부터 하급지휘관들까지 가릴것없이 대형이건 뭐건 제멋대로 흩어져 미친 듯 적을 뒤쫓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좋게말하자면 용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상급지휘관들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법인걸."

기껏해야 스무 명 남짓해보이는 그 장교의 부하기병들은 마치 미리 각본에라도 짜놓은 듯 서로 위치를 바꾸어가며 밀려나는 근위대 보병 사십여명을 순식간에 포위망 안에 끌어넣고는 사방에서 몰아붙이고 있었다. 장교의 머리를 감싼 청동색 투구 안쪽으로 유난히 옅은 금발머리와 파란색으로 번득이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고 약간 갈라진 음성의 뭉개진듯한 발음은 그 투구 안의 인물이 동부 출신 여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장교를 잠시 지켜보던 카렐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토로 경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토로 경! 기사단과 가디언 2중대를 이끌고 외부를 포위해주시오! 내가 안에 들어갈테니!"

"예! 맡겨주십시오!"

토로 경의 자신만만한 대답을 뒤로하고 카렐과 네피는 가디언 삼백여명과 함께 그대로 서문을 돌파해 들어갔다. 거대한 칼을 움켜쥐고 마상에 앉은 카렐과 네피, 그리고 3백여명의 가디언을 본 근위대들이 차마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사방팔방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들이 페로 관을 빼앗았을때와 똑같은 상황이, 이번엔 주인공만 바뀌어 정반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카렐 누님! 누님!"

말에서 뛰어내린 카렐의 눈에 들어온 건 가디언 숙소인 서쪽 행랑채 마당에 처참한 몰골로 줄줄이 묶여있는 30여명의 파란 팔찌의 가디언들이었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옛 수석가디언의 모습에 그들이 희색이 만연한 모습으로 저마다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메스가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그들 생포된 가디언들의 포박을 칼로 잘라내버리고는 하나하나의 손을 꼭 붙들어주었다.

"제가 이녀석들을 이끌고 공훈을 세워보이겠습니다!"

기세가 오른 아메스가 칼을 번쩍 들어보이며 카렐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네피와 함께 행동하십시오. 전 가디언 삼십명만 데리고 북쪽 안채로 가겠습니다."

말에서 내린 카렐은 잽싼 가디언 삼십명만을 이끌고 안채 정원쪽으로 급히 내달았다. 그곳에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이런......"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십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안채에서 서둘러 도망쳐나오던 시로는 눈앞을 가로막는 낯익은 얼굴에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어깨와 가슴에 붕대를 감은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 채 부하들에게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한때 푸엘 숲에서 자신이 그리 이뻐해주었던 그 '계집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긴 카타나에는 근위대들을 죽이고 남은 덩어리피가 성글성글 맺혀있었다.

시로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설마 네 손에 죽게될줄이야......그 조그만 계집애의 손에......."

카렐은 피가 흐르는 칼을 갑자기 거두고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앞으로 그 '계집애'를 존경하고 모시게 될 거요."

카렐은 비틀거리는 시로의 얼굴을 그대로 주먹으로 후려쳤다. 정신을 잃은 시로가 도끼를 떨어뜨리며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자 가디언들이 즉시 달려들어 그를 밧줄로 꽁꽁 동여맸다. 베흔에 이은 근위대 2인자인 시로와 그 부하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카렐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이 그들을 뒤따라온 정규군 병사들에게 넘기며 함께온 가디언들에게 외쳤다.

"북측 사랑채로 간다!"

"대장님!"

얼굴이 거의 새파랗게 질린 근위대원 하나가 한참 재공격준비를 갖추던 베흔의 막사에 뛰어들어왔다.

"뭐가?"

한참 정신없던 베흔이 짜증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카렐이, 카렐이 지금 페로 관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병력이 족히 천명은 넘는다고 합니다."

베흔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올 때를 대비해 이곳에 미리 대기시켜 둔 예비병력들을 철저히 농락하며 카렐은 전혀 엉뚱한 페로 관을 쳐버린 것이었다.

"녀석......페로가 버티어줄 걸 예상한건가?"

옆에 있던 제파와 셈이 애타는 표정으로 베흔을 바라보았다.

"대장, 페로 관엔 시로하고......."

"......안다."

베흔이 눈을 내리감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파가 칼을 움켜쥐며 힘차게 말했지만 베흔은 눈을 감은 채 잠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눈을 뜬 베흔은 엉뚱한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페로 딸년을 아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대장! 급합니다!"

베흔이 생각에 잠겼다. 페로 관을 역습해 카렐을 그곳에 묶어둘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페로를 몰아쳐 여기서 빨리 끝장을 보아야할지, 모든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우린 여기서 페로를 계속 공격한다."

"네에?"

제파와 셈이 멍 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가도 녀석들이 거길 차지한 후일 테니까 별 의미없어. 일단 페로 관은 버리고 최대한 빨리 퇴각하라고 해. 여기서 페로만 죽이면 페로 관이건 뭐건 아무 상관 없어. 우린 여기서 일단 페로를 처치해 싹을 잘라버린 다음에......나중을 대비하는 편이 낫다."

베흔이 조금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이제 문제는 페로 관을 차지한 카렐이 방향을 돌려 이곳까지 오기 전에, 페로를 무너뜨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었다.

북측 사랑채로 쳐들어간 카렐은 멀리 달아나는 카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쪽을 쫓으려던 카렐은 사랑채 안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외부를 정리하던 토로 경의 기사단들이 눈 깜짝할새 북문과 동문까지 진출하면서 순식간에 퇴로가 막혀버린 근위대파 대신들은 전사단 가디언과 마주치자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 도망치고 있었다. 유난히 뚱뚱한 클레모 내무대신도 그 체구에 안어울리게 빠른 동작으로 놀랄만큼 좁은 창으로 그 몸을 빼내고 있었다.

카렐을 뒤따라온 가디언들이 급히 그들의 뒤를 쫓으려 하자 막판에 몰린 그들은 하는수없이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북문과 동문 쪽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오랫만이군."

카렐은 사랑채 마루에 우뚝 선 채 자기 앞에 멍 하니 주저앉아있는 한 남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덩어리피가 엉겨붙은 카렐의 칼을 바라본 그 남자는 차마 카렐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다시볼줄은 몰랐어. 수우."

"그, 그래......카렐......지난번엔......인사도 제대로 못했었지......"

"날 봐. 당장."

카렐의 거의 협박조의 지시에 수우의 겁먹은 눈동자가 천천히 카렐쪽으로 돌았다. 카렐의 옅은 회색 눈동자를 확인한 수우의 눈가에 약간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카렐의 칼에서 떨어진 피가 수우의 호사스런 금색 비단포에 붉은 얼룩을 그렸다. 카렐의 칼날이 천천히 수우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아, 안아프게 죽여줄거지?"

수우의 떨리는 목소리에 카렐은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손목에 힘을 주던 카렐의 시선은 그의 허리에 달려있던 마른꽃잎이 들어있는 작은 파란색 병에 멈춰섰다. 수우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눈을 꼭 감았다.

"베흔은 내가 여길 공격할 20분동안 네게 단 한명의 원군도 보내지 않았어......주군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퍽이나 싸가지가 없군."

수우를 어찌할까 고심하던 카렐은 결국 그의 목에서 칼을 치웠다. 지금 수우를 없애봤자 카렐에게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베흔은 어차피 무슨 명분이든 만들어서 새 꼭둑각시를 내세울테고, 조금 더 제대로된 명분을 얻는 페로는 그 콧대가 더더욱 높아질것이 뻔했다.

카렐은 대뜸 수우의 멱살을 붙들고 한손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놀란 수우가 버둥거렸지만 카렐은 아랑곳없이 한팔에 수우를 든 채 사랑채 밖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사랑채를 뒤지던 가디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갈라섰다. 카렐은 수우를 북문 앞에 내려놓았다.

"선택은 네 몫이다. 수우. 내게 굴복하던지, 아니면 제위를 놓고 나와 싸우던지."

수우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 네가 제위를......"

"선택해라. 수우."

카렐이 번득이는 눈으로 수우를 노려보았다. 북문 밖에는 이미 그곳을 점거한 기병들과 가디언들이 얼마 남지 않은 근위대들을 쫓는 중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던 수우가 카렐에게 물었다.

"......날 살려주는거야? 응?"

반 쯤 제정신이 아닌 듯 안팎을 번갈아 바라보던 수우는 카렐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듯한 모습을 보이자 얼른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한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렐은 꺼질 듯 한숨을 내쉴수밖에 없었다.

30명의 부하들을 얻은 아메스는 네피와 함께 남문 부근에 남은 근위대 패잔병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크지않은 문 너머로 달아나는 근위대 정규군 병사를 본 아메스는 그 즉시 칼을 뽑아들고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네 이놈! 거기 서!"

문을 정신없이 넘어들어가던 아메스의 눈앞으로 순간 끔찍하게 생긴 프레일의  내리꽂혀왔다.

"악!"

문 뒤에 매복하고 있던 다른 근위대 병사가 갑주도 입지 않은 아메스의 머리를 향해 그 흉칙한 둔기를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프레일을 피하려던 아메스는 발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뒤로 자빠져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문 반대편에 매복해있던 몇명의 근위대원이 우루루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1격이 빗나가자 쓰러진 아메스를 향해 다시 프레일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메스는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옷자락이 문틈에 끼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살려줘요!"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맞은 철퇴가 아메스의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공중을 돌며 날아와 프레일을 쳐낸 네피의 큰 도끼는 철퇴에 맞아 멀리 떨어져버린 모양이었다.

"으익!"

아메스의 비명소리에 급히 달려온 네피는 단검조차 뽑을 여유도 없었다. 아메스를 공격하려던 다른 병사에게 맨손으로 달려든 네피는 급한대로 녀석의 팔을 붙들고 아드득 소리가 나게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방금전의 프레일을 든 병사가 다시 무기를 치켜들었다.

"에이, 썅놈의 새끼!"

옷을 찢고 허둥지둥 일어난 아메스가 그 근위대원의 옆구리를 머리와 어깨로 있는힘껏 들이받아버렸다. 수십발짝을 밀려나 바닥에 껴안고 나딩군 둘은 거칠게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망할놈, 내가 네깟놈한테 당할 것 같았냐? 내가 누군지 알아? 알아? 쌍!"

아버지 페로에게 물려받은 다부진 체구의 아메스는 어느새 그 병사의 팔을 비틀며 밑에 깔아뭉개고 있었다. 무기를 쥔 오른팔을 있는 힘껏 내리누르며 제압한 그는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고는 그 목을 힘껏 내리찍었다.

"제길, 이게 뭐야,"

기진맥진해진 얼굴로 일어난 아메스는 문가에 떨어져있던 자기 칼을 주워들었다. 아메스는 그때까지도 바닥에 '누워있는' 네피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옆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이 적병을 들이받기 직전에 프레일에 머리가 스친 모양이었다.

"네피 님! 네피 님!"

당황한 아메스가 어깨를 마구 흔들자 네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실눈을 뜨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네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씨, 망할, 개망신이네......천하에 네피가 저딴 허접새끼한테 이게 뭐야......"

"맙소사, 얼굴에 피 많이나요. 움직이지 말아요."

"내 도끼, 내 도끼?"

페로 가디언 한명이 멀찌감치 날아갔던 자기 도끼를 집어와 도로 쥐여주자 네피가 자리에서 끙끙대고 일어나며 계속 투덜거렸다.

"이게 다 못먹어서그래, 씨, 아침도 못먹고나왔는데 지금 점심때도 지나가잖아."

"이것만 끝나면 거하게 대접할께요. 저때문에......"

"그럼 이렇게 부려먹고 굶겨보낼 참이었어?"

네피의 넉살좋은 대답에 아메스는 그럴 상황이 아닌 줄 알면서도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네피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평소처럼 주머니에 들은 사탕수수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정리된 듯 하니까 앉아서 좀 쉬세요. 제가 제 가디언들로 여기 수색할께요."

아메스가 페로 가디언들과 함께 동문쪽으로 사라지자 그 뒷모습을 잠시 멍 하니 바라보던 네피는 옛 생각이 나는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제 정말 다 컸네."

네피의 입가에 조금은 허전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참으로 오랫만에 돌아온 정든 페로 관의 모습을 주욱 둘러보았다.

"어디 다쳤어?"

북쪽에서 돌아온 카렐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네피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심해보이는데? 둔기에 스쳤나본데."

카렐이 망토 속에 숨기고 온 커다란 훈제 돼지뒷다리 덩어리를 대뜸 네피에게 내밀었다.

"여ㅤㄱㅣㅆ어. 너 배고플때 지난것같아서 주방에 걸려있던 거 훔쳐왔어. 이거 먹고 나 수련장쪽에 다녀올때까지 여기 잘 지키고 있어."

"헤헤헤, 고마워, 역시 내 맘 아는건 너뿐이라니까."

네피가 고깃덩어리를 대뜸 입에 물며 카렐의 어깨를 탁 쳤다. 그때 조금 동쪽에서 큰 함성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어리둥절해져있는 카렐과 네피의 앞에 밧줄로 꽁꽁 묶은 클레모 내무대신을 질질 끌며 아메스가 자랑스럽게 모습을 나타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