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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43화 (43/1,132)

< -- 43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대장! 북쪽에 카렐이 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급보입니다!"

"벌써?"

그때까지도 수련장을 맹렬히 공격하던 베흔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갑자기 날아들었다. 4천여의 병력을 모두 몰아 수련장을 지키는 페로와 6백여 가디언들을 향해 2차 공세를 개시했던 베흔은 2시간여가 지난 지금까지 저들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페로 가디언의 절반 이상이 저항불능상태였고 귀찮게 굴던 킵과 판도 이제 거의 싸울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후였다.

"게다가 서쪽에서 다룬이 기습해왔습니다! 가디언 천여명입니다! 수에보로서는 당하기 버겁습니다!"

시계를 바라본 베흔은 적들이 '벌써' 나타난 것이 아닌, 자신들이 '아직도'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흔으로서도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상황이었다. 이미 2차 방어선까지 뚫리고 마지막 목책과 철조망을 사이에 둔 육박전에 접어들어 있었지만 이것마저 뚫으려면 적어도 한두시간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온몸에 부상을 입은 주인 페로가 물러나지 않고 맞서고 있는 모습에 가디언들 역시 보잘것없는 목책과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성한 놈이건 다친 놈이건 할것없이 거의 결사적인 항전를 해오는 것이었다.

"전하는?"

"동문으로 탈출하신 모양입니다. 안전하게 모시고있다는 연락입니다."

베흔이 머리를 싸쥐었다. 무려 2천여의 병력이 후방을 기습한다면 당연히 싸움은 길어질테고, 페로의 영향권인 3번 도시권역 깊숙히 종심타격을 가한 근위대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이었다

"제기랄!"

베흔은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며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말았다.

일단은 페로 녀석에게 이정도 타격을 입힌 것으로 만족하는수밖에 없었다. 두 명이나 되는 특등급 가디언을 잃은 건 접어두고라도---그리고 근위대는 한 명을 새로 얻게 되었고---, 이번 일로 페로를 지지하는 대신들도 흔들릴 터였다. 물론 종가까지 빼앗기고 내뺐다는 건 지금껏 무패를 자랑해온 페로의 전적에도 큰 오점으로 남을 건 뻔한 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베흔은 수련장 쪽을 한 번 쏘아보고는 부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후퇴한다! 전군 황궁으로 후퇴한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까지 몰렸던 페로 가디언들은 근위대들이 갑자기 후퇴하자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기뻐하는것도 잊은 채 잠시동안 서로 마주보기만 할 뿐이었다. 몸 곳곳에 부상을 입은 채 치료도 마다하고 선봉을 지키던 페로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멀리 서쪽 사막으로부터 힘차게 진격해오는 한 부대에 집중되었다.

"다룬 형님입니다! 천 명 쯤 되는 것 같습니다!"

망원경으로 확인한 킵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치자 페로 가디언들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남은 가디언들은 옆에있던 동료와 부상자들을 무조건 끌어안으며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가디언들과 함께 싸우느라 기진맥진해버린 페로가 다리가 풀리는 듯 흐느적거리자 킵이 얼른 주인을 뒤에서 껴안아주었다.

"지켜냈습니다, 각하. 하례드리옵니다."

"모두 수고들 했다."

페로가 가슴을 붙든 킵의 손등을 툭툭 두들기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천 명이 넘는 기운이 넘치는 새 가디언을 이끌고 나타난 다룬이 페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늦게 도착한 죄 실로 크옵니다!"

페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 우직한 부하를 일으켜세우고는 힘있게 품에 끌어안았다.

"잘했다. 단위부대들이구나......그냥 놔뒀으면 무조건 이리로 몰려들다가 근위대들한테 차례차례 다 죽었을텐데......이렇게 모으면 큰 힘이 될 걸. 역시 수석가디언답구나."

너무 단순해서 항상 걱정거리였던 다룬이 이정도의 상황대처를 했다는 것에 탄복한 페로가 평소 잘 하지 않던 칭찬의 말을 던지자 으쓱 해진 다룬은 모든것이 카렐의 명령이었다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북쪽에서 웬 중장기병들입니다!"

크게 소리치던 헨지가 흠칫 놀라 말을 멈추었다. 제후군이라면 모를까 근위대는 물론이고 페로의 부대에도 중장기병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페로가 되물었다.

"기병? 황제령에?"

"카렐......님의 슈로 기사단입니다."

다룬이 페로의 눈치를 힐끗 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방금 카렐 님이 페로 관을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북쪽과 서쪽에서 협공한 것입니다. 근위대가 퇴각한건 그때문입니다.......아메스 아씨께서 저쪽에 연락을 취하셔서......"

"됐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눈치챈 페로가 굳은 얼굴로 다룬의 다음 말을 막아버렸다. 어쨌든 자신의 수석 가디언이 '구세주' 역할을 했으니 그것으로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최소한의 체면은 살린 셈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던 카렐이 수련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기사단을 일단 정지시키고는 말에서 내려 혼자 걸어 올라왔다.

"다시뵙는군요. 총리각하."

카렐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페로에게 공손한 목례를 해보였다. 카렐 앞에서 자존심이 많이 상해버린 페로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잔뜩 뒤틀어져버린 그의 심사를 모를 턱이 없던 카렐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메스 아가씨는 지금 페로 관에서 네피와 함께 뒷정리중입니다. 훌륭한 딸을 두셨더군요."

네피의 이름을 들은 페로의 얼굴이 그나마 더 일그러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 지금껏 수련장을 지켜준 휘하 가디언들을 둘러보았다. 베흔을 번갈아 상대하느라 피를 많이 흘린 킵과 판은 상처투성이가 된 채 거의 탈진상태로 가까스로 서 있었고, 헨지도 왼쪽 팔꿈치가 절반 잘린 채 목책 위에 맥없이 앉아있는 꼴이었다. 수련장을 둘러싸고있는 자신의 노련한 친위가디언들의 절반 이상은 이미 전투력은 상실한 모양이었다.

페로가 입술을 깨물며 저물어가는 오후의 하늘을 올려보았다.

"제파와 쿠베의 부대가 아직 부근에 있습니다. 셔틀을 이용하시는 것도 아직 위험할 듯 하니 페로관까지 저와 동행하시죠."

카렐이 이번엔 약간의 미소를 띠며 페로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페로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다룬 쪽을 돌아보았다.

"다룬, 네 지금 병력에 원래 수련장에 있던 녀석들을 데리고 수련장을 맡아 지켜라. 킵과 판, 헨지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치료하도록 해야겠다. 집에서 후퇴해온 녀석들은 일단 페다이 네가 지휘하고 나와함께 돌아간다. 모렌 박사. 집 안사무를 정리하고 부상자를 돌볼 책임자가 필요하니 나와 동행하시오."

"예!"

주인의 건재한 모습에 힘을 얻은 다룬과 페다이가 페로에게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자존심 센 페로는 어쨌든 카렐에게 '도움을 받겠다'는 말은 절대 입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갈 차비를 꾸리던 페다이가 차량에 싣고갈 부상자들과 비전투원들을 빼고 난 페로의 '성한' 호위가디언들이 채 이십명이 안된다는 것을 눈치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간접적으로 카렐에게 집까지의 호위를 요구한 셈이었다.

카렐 입장에서도 페로의 이미 망가져버린 자존심을 더 건드려 좋을건 하나도 없었다. 카렐은 자신의 부대를 최대한 멀리 떼어놓은 채 이십여명의 페로가디언들과 함께 이전, 자신이 수석가디언이었을때와 마찬가지로 페로의 바로 옆을 지키고 섰다. 둘간의 암묵적인 동의는 카렐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페로의 얼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몇 안되는 자신의 가디언들을 초라하게 동반한 페로는 천여명이나 되는 카렐 휘하 혼성군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이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여기가 어머니 무덤입니다."

볕이 잘 드는 떡갈나무 언덕 한귀퉁이에 비석 하나 없이 조그맣게 만들어진 나즈막한 봉분 하나를 가리키며 아메스가 네피의 표정을 힐끗 살폈다. 그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봉분이 있는건지 없는건지도 잘 구별되지 않았지만 그 주변에는 특이하게 흰 야생화 여러송이가 군데군데 덩어리져 피어있었다.

초라한 무덤을 확인한 네피가 아연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피가 무덤 앞에 주저앉으며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아무리......외도때문에 죽였다지만......그래도......명색이......총리의 정실이었던 사람인데......공동묘지도 아니고......이게......"

한숨을 한 번 내쉰 아메스가 허리에서 아직 피가 묻어있는 칼을 뽑아 무성한 풀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원래 아버님은 시신을 검은 숲에 버려서 야생동물 밥이 되게 하라고 명하셨었죠. 그런데......카렐 님이 아버님 명령을 어기고 시신을 훔쳐내서 이렇게 몰래 무덤을 만드셨어요. 아버님이 대노하셔서 카렐 님에게 시신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지만 카렐 님은 꿈쩍도 안했다고 그러더군요. 가디언들이 그러는데 카렐 님이 주인 명령을 대놓고 거부한 건 그때 처음 봤었다고 그래요. 그 벌로 채찍을 이백대나 맞고 기절해 실려갔었죠. 그러면서도 여기 위치는 끝내 얘기 안하셨어요."

무덤 앞에 잠시 꿇어앉아있던 네피는 마리안의 딸 아메스가 풀을 베어내는 모습을 멍 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메스는 이마에 송송히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계속 말했다.

"원래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카렐 님이 떠나시고 나서 이지경이 됐어요. 제가 스무살때 카렐 님이 아버지한테는 절대 비밀이라며 여길 알려주셨는데......후......워낙에 불효녀가 되어나서 그동안 정작 저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어요. 도리어 카렐 님이 가끔씩 여기 몰래 오셔서 풀도 베어내고 봄마다 흰 꽃도 심고 하셨는데......제가 한심해보이더라구요. 유학 공부하면 뭐하냐구요. 충효 나부랭이 배우면서 이런것 하나 귀찮아서 안했으니......"

잡초가 제법 깨끗해지자 네피가 가져간 술을 꺼내 봉분 위에 뿌리며 들릴듯말듯 중얼거렸다.

"미안해요......이제와서......"

봉분을 껴안은 네피는 이를 악문 채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메스는 그 광경을 짐짓 못본 척 집이 내려다보이는 쪽을 향해 바닥에 털석 주저앉았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그 둘의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마리안의 무덤에 한참동안 머리를 기대고 있던 네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아메스 옆에 털석 주저앉았다. 아메스가 남은 술을 디밀자 네피는 사양도 않고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솔직히......어머니에 대해선 잘 몰라요. 어떻게 생기셨었는지도 잘 기억 안나요. 아버지는 아기때 유모하고 같이 절 수련장에 보내버리셨죠. 특별한날에 가끔 집에 와서 본 어머니는 내게 낯설었다는것밖에는 생각안나요. 어머니가 왜 그렇게 매일같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당시엔 몰랐구요. 어느날 엘러가 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는데......솔직히 별 느낌 없었어요. 울긴 했는데......왜울었는지도 모르겠고......"

술병을 다 비운 네피는 한숨을 내쉬며 비어버린 병을 멀리 던져버렸다. 아메스는 크고 굳은살이 가득히 배인 네피의 손을 꼭 붙들어주었다. 20여년 전, 꼬마 아메스를 그리도 아껴주었던 네피는 마리안이 남긴 이 또다른 딸의 어깨를 한팔로 꼭 안아주었다.

"돌아오십니다!"

부하의 큰 고함소리에 네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멀리 남쪽 언덕을 넘어 카렐이 이끌고갔던 부대가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필요하시다면,"

차에서 내리는 페로에게 카렐이 여전히 말 위에 앉은 채 물었다.

"동부에서 돌아올 순회순 2천이 위치를 잡을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입술을 한 번 깨문 페로는 보일듯말듯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저, 저런 무엄한......"

카렐을 대하는 페로의 방자한 태도를 지금까지 겨우겨우 참아온 토로 경이 결국 홧김에 고함을 버럭 지르려는 것을 카렐이 급히 가로막았다.

"이번 전투는 페로 경을 위한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으니 경은 괘념할 필요 없소."

"알겠사옵니다. 하지만 저런 불경한 작자를......"

토로 경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입에는 아직까지 불만이 잔뜩 서려있었다.

"저희 병력들도 많이 지쳤습니다. 급하게 떠나오느라 보급품도 거의 갖추지 못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예산부족때문에 아직 야전막사도 변변한게 없고......페로 경의 부대가 자리를 잡을때까지는 적어도 하루이틀은 걸릴것이온데 그동안 천 5백이나 되는 저희 전사들과 부상자들은......"

카렐이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지금같아서는 전군이 꼼짝없이 밤이슬을 맞으며 이곳에서 비박을 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돈도 부족한 주제에 무리하며 기병대까지 조직한 댓가였기에 뭐랄수도 없었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던 카렐과 토로 경 앞에 커다란 짐을 진 수십의 노예들을 이끌고 나타난 건 다름아닌 아메스였다.

"아버님이 제게 카렐 님 부대의 지원을 맡기셨습니다. 야전막사 100채와 지휘소건물을 서문 앞에 세우라 명하셨습니다. 다행히 창고가 약탈되지 않아서 물자는 충분합니다. 제게 노예 2백명하고 하인 백명이 있으니 필요하신 건 다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서쪽 행랑채부분과 의무실을 써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방금 전까지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있던 토로 경이 약간 기가막힌지 눈을 쫑긋거려보였다. 그 지독한 자존심 한 겹을 벗겨낸 페로는 그렇게 생각없이 꽉꽉 막힌 먹통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페로가 사라진 집 안을 바라보며 카렐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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