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44화 (44/1,132)

< -- 44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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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정무회의장 앞에 서서 들어오는 관리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근위대 가디언 카렐의 앞에 다룬과 네피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근위대 정복과 망토를 차려입고 무뚝뚝하게 서 있던 카렐은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잔뜩 일그러든 표정이었다.

데뷔전 몇달 후 근위대 보안국장으로 발령받았던 카렐은 그 직무의 특성상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꺼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3년여 후 남부파견군 사령관으로 발령받아 남부제후지역으로 떠난 카렐은 지금까지 10년 가까이를 황제령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셈이었다.

"저 괴물이 여기서 뭘하고있는거지? 저녀석 파견군 사령관 아니었어?"

회의장 입구로 다가가던 다룬이 옆에 선 네피에게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카렐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의 '괴물'이라는 핀잔을 짐짓 못들은 척 카렐은 무표정하게 그들 둘의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근위대 외 개인 가디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입니다."

카렐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네피도 덩달아 얼굴을 찌푸렸다.

"참 나, 같은 파란 팔찌 찬 주제에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구만. 근위대에서 대우받으니 그리 좋냐? 내가 합성된걸로 따지면 수련장에선 네 손위란 거 몰라? 우린 여기 미리 들어가 대기하라고 명령받았다고!"

홀이 떠나가라 다룬이 언성을 높였지만 카렐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전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뿐입니다. 이곳에 개인 가디언이 출입금지라는 건 페로 자이센 부총리께서도 잘 아실겁니다."

"뭐 이런 건방진 새끼가 다있어?"

막 열을 내려는 다룬을 네피가 겨우 붙들지만 다룬은 그를 뿌리치고 대뜸 카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카렐은 많이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카렐의 망토가 들쳐지면서 그의 어깨와 가슴, 팔에 감긴 붕대가 드러나자 당황한 네피가 다혈질 다룬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뭐야, 다친사람 붙들고? 그만해."

카렐과 다룬의 말다툼으로 회의장 입구가 시끄러워지려는 찰나 날카로운 고함소리 한마디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망할녀석!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언성을 높이나!"

관복을 입은 페로가 뒤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카렐의 굳어있던 표정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침착은 잃지 않고 있었고, 카렐임을 확인한 페로 또한 자리에서 약간 멈칫 했을 따름이었다. 다룬이 머쓱한 표정으로 카렐의 목을 움켜쥔 손을 놓자 카렐은 자기에게 다가오던 페로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보였다. 페로는 카렐의 멱살을 붙들고있던 자기 가디언 다룬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참으로.....오랫만에 뵈옵니다. 부총리각하."

카렐의 한마디에 굳어있던 페로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있었다. 페로는 그답지않은 미소띤 얼굴로 카렐에게 물었다.

"그래......참 오랫만이구나......계속 근위대에 있었을텐데 왜 그동안 안보였지?"

"그간 남부제후지역 파견군 사령관으로 있었사옵니다."

"그래......그건 들었는데 황궁에서도 한번도 못보다니......그쪽 일이 꽤 바빴나보지?"

뭐라 말하려던 카렐이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키자 페로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페로의 시선은 카렐의 가슴과 왼팔에 감겨있는 붕대와 어디하나 성한곳이 없는 몸 곳곳을 훑으며 경악을 하고 있었다. 목의 칼라 사이로 가슴에 댄 프레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 것이 확실했다.

"다쳐서? 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쉬지도 않고?"

"한동안 요양하라는 지시로 2달 전 황궁에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치료받느라 본부 병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정도 일은.....다쳐도 충분히 할 수 있어서 제가 맡고 있습니다."

페로가 들릴듯말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2달동안 입원치료받아야 할 정도였다면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큰 부상이었음이 확실했다.

그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다룬을 돌아보고는 카렐에게 물었다.

"그런데 얘들이 왜?"

"허락없이 회의장에 들어가려고 해서 저지했사옵니다."

"그럴리가 있나? 베흔 근위대장한테 이미 알렸는데."

"......제겐 그런 지시가 없었사옵니다. 당장 부하들에게 확인시키겠습니다."

카렐의 명령을 받은 근위대원이 급히 베흔에게 연락을 해보고는 알렸다.

"부총리각하 일행을 모두 들여보내라는 근위대장님 지시이십니다. 잠시 착오가 있었다고 하십니다."

"사무착오로 불편을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카렐이 다시 페로에게 머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네피, 다룬과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던 페로가 문득 다시 카렐을 돌아보았다.

"부상을 입은 사람한테까지 일을 시키다니......근위대장도 너무하군."

긴 테이블이 놓인 내각 회의장에 들어선 부총리 페로의 자리는 하필이면 근위대장인 베흔 바로 옆이었다. 약간 굳어있는 페로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 베흔은 앞에 놓인 음료수를 들이키며 뜬금없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페로가 그를 돌아보며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베흔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말했다.

"카렐이 좀 안됐죠?"

"근위대원 운용은 근위대장 소관인데 뭐 안되고말고 내가 참견할게 뭐있겠소."

페로가 짐짓 쌀쌀맞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철저하게 외면하며 묘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 망할녀석 폭도진압 나갔다가 혼자 500명한테 포위됐다지 뭡니까. 한심한 놈......바보같이......"

"......근위대장이 붙여준 부하는 몇명이었소?"

페로의 날카로운 질문에 히죽거리던 베흔이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눈살을 조금 찌푸렸던 베흔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15명."

"오호......15명 데리고 500이나 되는 폭도진압을 시키셨다? 대단하시구려, 근위대장."

페로의 빈정거림에 베흔이 얼굴을 더더욱 찡그렸다. 페로가 자기 음료수를 벌컥 들이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싼 가디언 목숨갖고 장난치는거 아니요."

"감격해서 눈물이 나겠습니다. 언제부터 부총리께서 그런 휴머니스트셨죠?"

페로 뒤에 서 있던 네피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대화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베흔이 눈을 치켜뜨며 단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가 그런 일 당해도 싼 짓을 했지......지 주제도 모르고......감히......"

페로가 다시 베흔을 쏘아보았다. 카렐이 했다는 '당해도 싼 짓'이 무언지 따위는 페로의 관심사 밖이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건 이 못된 작자가 아직까지도 카렐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는, 그리고 근위대에 있는 카렐이 위험한 처지에 처해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걱정 뿐이었다.

둘의 신경전은 세나우스 3세 황제의 회의장 입장과 함께 일단 마침표를 찍었다. 잠시 후 호명과 함께 페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밝은 표정의 황제가 손으로 페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참으로 감격스럽게도 여기 있는 페로 자이센 부총리가 오늘 저녁 악명높은 타르서스의 제베스 도적집단을 토벌하러 개인 가디언부대를 이끌고 직접 떠난다 하오."

황제의 눈짓과 함께 회의장에 모인 대신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의 페로는 대신들에게 힘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감사하옵니다. 제 뒤에 선 이 두 특급 가디언들이 선봉에 서서 그 무도한 도적들을 씨알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킬 것이옵니다. 5일 내로 끝내고 돌아올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때맞춰 잔치나 준비해주면 되겠습니다."

'5일'이라는 시한에 대신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우스개소리로 흔히 '5일 부대'로 불리는 페로의 가디언부대는 여지껏 원정에서 도적떼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 채 5일 이상을 소비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저 자신만만한 젊은 부총리는 5일이라는 시한을 스스로 걸어놓고 원정을 떠나고 있었다.

옥좌에서 일어나 페로에게 손수 다가온 황제가 그의 어깨를 힘있게 두들겨주었다.

"역시, 매사 당당한 페로 경 답소이다. 그러면 구차하게 이런저런 당부같은 건 필요도 없을 것 같소. 모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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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는?"

단신으로 황궁에 돌아온 카인을 보고 베흔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카인이 약간 우물쭈물하다가 나머지 가디언들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시로 님께 빨리 북문으로 후퇴하시라고 연락했는데......저도 계속 시로 님 기다리다가 카렐 손에 죽을뻔한걸 겨우 도망챘습니다."

"이, 이런 망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베흔이 카인을 그대로 벽에 집어던져버렸다. 다른 가디언들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베흔의 앞에서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시로가, 시로가......딴사람도 아니고......"

베흔이 거의 넋나간 사람처럼 좌우를 서성거리며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결국 제파가 급히 달려들어 베흔의 팔을 붙들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아직 시로 형님이 죽었다는 보고는 없으니 어쩌면 카렐에게 억류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시로형님은 카렐과는 그런대로 각별한 사이니까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게 좋겠습니다."

"각별한 사이니까 문제지!"

베흔이 답답하다는 듯 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베흔이 시로의 이반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디언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베흔이 잠시 제파의 눈을 쏘아보더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카렐에게 다녀와라. 시로가 살아있으면 무슨수를 써서라도 되받아와야한다. 아니더라도......시체나 팔찌만이라도 찾아라. 알았나?"

베흔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제파가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카렐은 시로를 끌고들어온 자기 부하들에게 나가라며 눈짓을 보냈다. 크지않은 임시막사 안에는 희미한 조명빛 아래 두 가디언의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만이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쏘아보는 시로의 매서운 눈길을 웃음띤 얼굴로 넘겨버린 카렐이 바닥에 꿇어앉혀진 시로의 뒤로 천천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단검을 뽑아 그의 손을 묶은 밧줄을 끌러내버렸다. 자기의 뒷목에 카렐의 호흡이 와닿자 시로의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냐?"

"근위대 의사놈들 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형편없군."

시로의 어깨상처를 슬쩍 들쳐본 카렐이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 카렐은 꿇어앉혀져있는 시로의 앞에 놓여진 상석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시로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날 어떻게 죽이려고 이러지?"

"시로, 당신같은 사람이 베흔 밑에 있다는 건 정말로 안어울리는 일이야."

카렐은 시로의 도끼를 집어들고 가만히 어루만지며 그의 눈을 힐끗 쏘아보았다.

"세나우스 2세 암살사건때는 황제를 지키기위해 목숨까지 버리려 했었고 4차 혼란기 때는 로노 장태자의 친위군을 지위하다가 베흔에게 생포되어 참수될뻔하기도 했었지. 다행히 세네피스 황후가 당신의 능력을 아깝게여긴 덕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 후로도 베흔의 그늘에서 ㅤㄱㅜㅊ은일만 도맡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못했으니 정말 아까운 일이지."

시로가 굳은 얼굴로 카렐을 똑바로 올려보았다.

"......지금 날 회유하려는건가? 그렇다면 잘못생각했어. 난 황실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베흔이 아니고 황실을 수호하는 임무를 타고 태어났을 뿐이야. 베흔이 성인군자는 못된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후계가 끊긴걸 기회삼아 제위를 노리는 페로나 한낱 칼솜씨 하나 믿고 반란을 획책하는 너따위 녀석보다는 황실을 위한 길이라는 정도는 안다."

카렐은 여전히 미소띤 얼굴로 옆에 놓은 술을 잔에 조금 담아 시로에게 내밀었지만 시로는 거칠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카렐은 잔을 시로의 무릎 앞에 내려놓고는 방금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푸엘에 있을 때 그나마 내게 가장 행복했던 날은 무자비한 베흔 대신 당신이 오는 날이었소."

"지금은 너같은 놈을 사람같이 대한 걸 후회하고 있어."

시로가 이를 악물었다. 씁쓸한 웃음을 한 번 지어보였던 카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시로의 앞에 바싹 다가갔다.

"베흔이 날 왜그리 미워했는지 얼마 전까지도 정말로 의문이었지. 정말로......"

갑자기 입고있던 수트의 어깨 버클을 끌러낸 카렐은 그곳에 희미하게 나타난 황족문을 더듬으며 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눈동자가 왜 세네피스 전 황후와 그리도 닮았는지, 내 짐 속에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펜던트가 왜 들어있었는지, 날 푸엘 숲에 쳐넣은 직후에 베흔이 모렌 박사를 잡아다가 왜 그렇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는지도 말이야."

베흔이 어린 카렐을 데려갔던 그 때, 베흔과 함께하고 있던 시로는 지금 이순간 회색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카렐이 속삭이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현명한 사람이었다.

따닥거리며 턱을 떨고 있는 시로에게 카렐이 다시 술잔을 내밀며 속삭였다.

"'황실'에 충성한다는 자네 말을 믿겠네."

시로가 더듬거리며 자기도모르게 술잔을 받아들었다. 근위대 2인자였고 베흔 다음으로 연장자이기도 한 시로는 GOE부대를 전멸시킨 가디언 부대의 일원이었고, 세나우스3세의 즉위는 물론이고 카렐의 훈련과 세네피스 황후의 몰락도 모두 지켜보아온 백전노장이었다. 그리고 매사 쌀쌀맞고 엄격한 베흔보다 도리어 근위대원들의 더 큰 존경을 받던 아버지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카렐은 막사 밖에 있던 우베를 큰 소리로 불렀다. 카렐의 막사로 뛰쳐들어온 우베는 거의 코끝이 맞닿을 듯 가까이 마주서있는 카렐과 시로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한 손님이다. 부상을 입은 손님을 막사에서 재우는것은 예의가 아니니 페로 관 행랑에서 제일 좋은 방에 들게 하고 최고의 식사를 넣어주도록 해. 도망가진 않을테니 포박이나 별도의 경비는 필요없을거야."

"하지만......"

우베가 얼떨떨해져있는 시로와 카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일 이자리에서 자네 아침문안을 기다리겠네, 시로 대장. 나가보게나."

"물어볼 게 있어."

뜬금없이 모렌 박사를 찾아온 아메스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페로 관을 정리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쁜 모렌 박사였지만 아메스의 묘하게 굳어진 표정에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물어볼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서.......카렐 말인데.......아니, 카렐 장태자라는 편이 정확하겠군."

아메스가 그 호기심어린 눈을 치켜뜨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황제가 될 수 있을까?"

"......아버님 하시기에 따라 달라지겠죠."

이 야심만만한 아가씨의 질문에 모렌 박사가 내심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은 무성의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나도 알아."

아메스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카렐이 야심을 이루려면 어떤 식으로건 아버지와 손잡는수밖에 없어. 지금 그 형편없는 세력으로는 도저히 제위를 노릴 상황이 못되지. 하지만 아버지 역시도 제위를 노리고 있다는 게 문제지. 둘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방식이 뭐가있을까?"

"그런 건 없죠."

모렌 박사의 또다시 무책임한 대답에 아메스가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

"그래, 표현이 조금 잘못되었군, 내게 가장 유리한 방식은 뭐가 될까? 아버지 말고......내가."

조금은 음험하기까지 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젊은 유생의 눈동자에서 모렌 박사는 그가 이미 반 쯤 결론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제서야 진지한 표정을 지은 모렌 박사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속삭였다.

"생각하고 계신 걸 먼저 말씀하시죠."

"난 결혼한적도 없어. 남극성당 십경과정을 조기졸업한 재원이지. 뭐니뭐니해도 제국 제일의 세력가인 페로 자이센 총리의 외동딸이고......이정도면 조건은 완벽하지 않아?"

"푸훗,"

미리 조사를 한 듯 자연스럽게 내뱉는 아메스의 눈동자가 유난히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야심에 모렌 박사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런 방식으로라도 페로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내심 카렐을 지지하는 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이순간, 그것에 있어서는 아메스와 모렌 박사의 목적은 맞아떨어지는 셈이었다. 눈가에 웃음을 띤 모렌 박사가 목소리를 더 낮추며 물었다.

"어릴때부터 카렐을 싫어하셨다면서요?"

"그까짓게 무슨상관이야. 그 핏줄을 알았으니......이유는 충분하지."

밀실 안에 나란히 선 채 히죽거리고 있는 이 두 여자의 야심어린 눈빛은 앞으로의 판도에 또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막사 주변에 불을 피운 서너명의 기병들이 떠들며 웃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렐이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시 후 막사 안에서 걸어나온 큰 키의 여자의 모습에 그들 기병들이 급히 옆자리를 비워주었다.

낮에 쓰고있던 청동빛 투구를 벗은 그 하급장교의 얼굴이 모닥불빛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옅은 금발머리를 한 그 마궁수의 길고 단단한 골격의 얼굴은 상당한 전투경력을 나타내듯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지만 유난히 반짝이는 푸른빛 눈동자는 마주선 사람을 압도할듯한 강한 광채를 뿜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있던 카렐이 천천히 그들 앞에 나섰다. 자기들끼리 떠드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기병들은 카렐이 등뒤에서 다가오는줄도 모르고 수다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까 봤어? 입구에서 근위대놈들 손도 못써보고 목 달아나는 거 말이야, 어휴, 아무리봐도 카렐 그양반 사람이 아닌것같아. 머리 날라가는 건 말할것도 없고 몸통이 한참 날라가서 떨어지는데 소름이 오싹 끼치더라니까, 우리 편이길 망정이지 그 칼에 한방 맞으면 어떨까 하니까......으이구,"

"그런데 황후폐하는 무슨 생각이신거야? 총리를 새 황제로 밀어주시겠다는거야?"

"그분도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소대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북부출신들인듯한 부하 기병들의 질문에 그 금발머리의 여자는 엷은 웃음만 지을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붉은 모닥불에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글쎄, 자네들도 이상이 있어 지원한 게 아니었겠는가."

기병들 중간에 불쑥 끼어든 카렐이 나즈막히 중얼거리자 그들이 기겁을 하고 놀라며 카렐의 주변에서 조금씩 떨어져 섰다. 그 금발의 소대장이 침착한 태도로 카렐에게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다. 카렐은 불을 쬐며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거는 용사들에겐 '이상'이라는 수사적인 단어보다는 좀 더 손에 잡힐만한 현실적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겁에 질려 입을 다물어버린 기병들 대신 그 소대장이 대담하게 불쑥 대답을 내놓았다.

"현실은 지금 내가 자네들을 통솔한다는 것이네."

"하지만......"

그 소대장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카렐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지도자급에 속하는 개혁파 유학자가 정글의 이 가난한 무장집단에 지원한것도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교수?"

씨익 웃으며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말하는 카렐의 모습에 그 소대장이 저으기 당황한 표정으로 좌우의 기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모여있던 세 명의 기병들에게 막사로 들어가라 얼른 눈짓을 보냈다. 그들 세 기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막사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카렐이 다시 물었다.

"남극성당 직제학으로 있는 것으로 알고있었는데,"

"6달 전 쫓겨났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네르 하크로딘 교수가 힘없이 대답했다.

"이번 대제학이 좀 꼴통이긴 하지. 개혁파들을 다 쫓아내고 있다지?"

카렐의 막말에 제네르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싸움실력이 아주 뛰어난것 같지는 않지만......통솔력과 기마술은 대단하더군. 원래 전공이 경세학*이었지? 박사과정에서는 군사학을 전공했고, 장자 연구에 있어서는 제국 최고로 손꼽히고."

"미리 다 조사하셨군요."

제네르가 조금 긴장한 듯 모닥불을 쬐는 카렐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249세, 동부 탈라스 출신. 동부 3제후 하크로딘 가 아버지와 북부 5제후 딜라코프 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 본가와는 거리가 먼 서출 혈통이라서 하급귀족이지?"

"이름뿐인 가난뱅이 귀족이죠. 말몰이꾼 출신. 학비가 없어서 남극성당도 30년걸려 졸업했죠. 절반은 휴학기간이었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전력에 관해 꽤나 냉소적으로 대꾸한 제네르가 땔감 한 개를 모닥불에 던져넣자 붉은 불꽃이 공중으로 확 치솟아올랐다.

카렐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자넨 보안국 요감찰자명단중에 하나였어. 보안국장이었던 내가 잘 알고있는 게 당연하지."

"저서라고 9개중에 7개가 근위대지정 금서니 이상할것도 없죠."

제네르가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4차 혼란기 때 근위기병으로 로노 장태자군에 가담했다가 10년간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도 있었고."

"보안국장으로 계셨을 때면 꽤 옛날 일인데 놀랍게 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자랑은 아니지만 기억력은 나쁘지 않아."

카렐이 모닥불 속을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조직에 왜 들어왔나?"

카렐의 직접적인 질문에 제네르가 조금 당황한 듯 카렐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카렐은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만으로도 최소한 보통 이상의 배짱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당신 조직의 정체가 도대체 무언지 궁금해서 들어왔습니다. 세네피스 황후를 구해내 떠받드는 이 이상한 조직이 황후를 황제로 만들려는 옛 북부 떨거지들을 집결시킨 세력인지, 아니면 페로 경을 지원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결정된 조직인지."

'북부 떨거지'라는 그다지 곱지않은 표현에 카렐은 화도 내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래, 한때 로노 장태자를 지지했던 자네가 장태자의 목을 베고 황후에 올랐던 세네피스 황후와 북부세력을 지지해서 이곳에 왔을 리가 없겠지. 그래서 자네에게 물어본게야. 그럼 자넨 누굴 지지하는가?"

"진심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

사로 마주보고 있는 이 두 사람의 눈빛에서 무언의 대화가 흐르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 됨됨이와 크기를 조심스레 어림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개혁파는 강력한 황권을 통한 중앙집권 강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에 적합인 인물은 페로 경이겠죠. 하지만 저희는 동시에 강력한 황권을 뒷받침할 실질적 정통성도 중요시합니다. 그런 면에서 페로 경은 절반 정도밖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셈입니다."

"듣던중 반가운 말이군."

카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정말로 맘에 드네. 내 곁에 있어주게."

"예에?"

카렐의 황당한 요구에 제네르가 눈앞의 이 덩치큰 가디언을 살짝 째려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유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카렐은 이 사람을 손에서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껏 우베를 시켜 이 사람을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하게 해 온 것도 그때문이었다. 음흉할 정도의 미소를 지은 카렐이 들릴듯말듯 작게 속삭였다.

"내 자네의 두가지 목적을 다 만족시켜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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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학 : 사장지학(문학), 고거지학(문서학, 금석학), 의리지학(도덕, 철학)과 함께 유학의 4개 큰 뿌리 중 하나를 이룹니다. 정치, 군사, 경제 등 실질적 면을 중시하며, 도덕을 중시하는 송대의 주자학 등에서는 개혁적 성향의 경세학을 이단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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