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막사로 돌아온 카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여전히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네피와 아메스였다.
"후훗, 너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먹어 배고플텐데, 생각해보니까 너 딴사람앞에선 식사하기 좀 그렇잖냐. 명색이 공주가 부하들 앞에서 피칠갑된 날고기 뜯어먹고있는것도 영 품위없지, 히히히."
네피가 낄낄대며 열어보인 쟁반 위에는 아직 따뜻한 김이 솟는 동물 생간과 염통이 들어있었다.
"방금잡은 암송아지고기야. 꽤 연해. 살은 기사들 바베큐나 해먹으라고 던져줬어."
"고마워,"
카렐이 피곤한 눈을 비비며 네피가 내민 큰 쟁반을 받아들었다. 카렐의 지친 모습에 아메스가 갑자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늦었으니 좀 주무시죠."
갑자기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아메스의 모습에 순간 당황한 카렐이 얼른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조금 이따가 근위대에서 제파 녀석 온다니까 만나봐야죠."
"오호, 포로 몸값 흥정하러 오시는군. 이제 우리도 돈 좀 만져보는거야?"
네피가 손바닥을 비비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시로도 팔아버릴거야?"
"아아니."
카렐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겐 내 사람이 더 필요해. 토로 경이나 슈벨 수반같이 어머님 사람이 아니고. 나를 따를 내 사람."
카렐이 '내 사람'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강조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한 네피가 물었다.
"토로 경만큼 너한테 충성스런 사람이 또 어딨다고?"
네피의 순진한 한마디에 카렐이 웃으며 대답했다.
"토로 경은 기본적으로 황후폐하 사람이야......물론 표면적으로는 내게 충성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나중에 어떤 식으로라도 의견충돌이 생긴다면 내가 아니고 황후폐하나 그쪽을 위시한 북부 구귀족 편을 들 사람이지.....황후폐하는 너무 오랫동안 갇혀계셨고 겉으론 드러내시지 않지만 속으로는 그동안의 엄청난 피해의식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똘똘 뭉쳐계실걸. 언젠가 틀림없이 내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실테지."
카렐이 많이 피곤한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자 아메스가 자연스럽게 그 옆에 함께 자리잡고 앉았다.
"확실히할 건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어......물론 토로 경은 내게 중요한 힘이 되어줄 인물이지만 '내 사람'이 더 많아야 돼. 슈벨 수반은 중간쯤 된다고 할까? 완전히 황후폐하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내사람도 아냐. 슈벨 수반을 따르는 전사단의 귀족출신 집단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입장이고......내겐 부담스런 세력이야."
카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우베는 일반시민계급을 대표할 확실한 내사람이고, 조페도 내사람이야. 너도 내 곁을 지켜줄테지......하지만 부족해. 노예계급들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쳐도 고급가디언이나 쓸만한 유학자나 엘리트 귀족이 필요해......하지만 어머님 힘을 빌리지 않고 콧대높은 귀족들을 내사람으로 만드는건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란 말이야......그게 문제야."
"제가 그 1번이 되어드리죠."
아메스의 한마디에 카렐이 눈을 조금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페로의 딸인 아메스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카렐로서도 예상못한 일이었다.
"근위대측 사자인 가디언 제파 님께서 오셨습니다."
막사 안의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뜨리듯 우베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카렐은 입고있던 검은 망토를 벗어 아메스에게 내밀고는 상석에 단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베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제파를 오만하게 내려다본 카렐이 한 번 피식 웃어보였다.
"오랫만이군. 제파."
"베흔 대장의 명령으로 왔다."
"참, 나 시작부터 뻣뻣하게 나오기는......"
카렐은 조금 전 네피가 가져온 쟁반을 자기 앞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며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안에 들은 내용물을 힐끗 바라보았던 제파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작은 칼을 집어든 카렐은 쟁반 위의 내장들을 적당한 크기로 조각조각 잘랐다.
"같이하겠나?"
카렐의 한마디에 제파가 얼굴을 조금 더 찌푸렸다. 포크를 집어든 카렐은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간조각을 하나 찍어 집어들었다.
"포유류의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98% 이상이 동일하지.......따져보면 쇠고기를 먹는거나 사람고기를 먹는거나 화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걸 아나?"
"읍!"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제파는 잔뜩 긴장된 얼굴로 카렐이 집어든 간조각을 흘겨보았다. 카렐이 아무렇지않은 얼굴로 피범벅의 생간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히죽거리자 제파가 양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푸엘 숲에 있던 카렐이 사람고기를 종종 먹었다는 것을 잘 아는 제파가 저런 말을 늘어놓는 카렐의 태도에서 짐작한 결론은 단 하나 뿐이었다.
카렐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쓰윽 닦으며 제파를 다시 바라보았다.
"혹시 사람고기 먹어본 적 있나?.......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솔직히 맛은 별로야. 뻣뻣한 야생동물고기보다야 낫지만 뒷맛이 영 느끼하거든. 사육한 가축들이 역시 먹기엔 제일이지."
카렐은 싱글거리며 옆에 놓인 화려한 수정잔에 담긴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지금 야만적인 짐승이란 말이 네 목구멍까지 치솟아 있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이런 별난 식사를 할수밖에 없이 만든 게 바로 너희들이니 말이야.......내가 죽지않기 위해 먹어야했던 49명의 불쌍한 제물들을 던져준것도 너희였고."
잠시 망설이던 제파가 결국 카렐을 무섭게 쏘아보며 내뱉었다.
"그래서......시로에게 이렇게 복수한건가? 그나마 널 제일 아껴주던 시로를?"
"시로? 시로는 행랑채 따뜻한 온돌방에서 근위대 돌팔이들보다 훨씬 나은 의사들한테 치료받는중인데. 복수라니? 무슨 복수?"
카렐이 간조각 한개를 입에 더 집어넣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옆에 선 아메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카렐에게 놀림을 당했음을 깨달은 제파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당황한 빛을 보이던 제파가 급히 표정을 추스리며 들고온 돈가방을 내밀었다.
"시로 몸값이다. 현금 2천만 골드다. 이정도면 하급 가디언 300명은 살 수 있는 돈이야. 충분하겠지?"
어마어마한 액수에 옆에서 보고있던 네피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2천만 골드라면 전사단 수준에서 거의 5, 6천명은 되는 병력을 1년간 먹이고 무장시킬 수 있는 막대한 거금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돈가방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1등급 가디언 공시가가.....500만 정도니 나쁘지않군......"
카렐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다시 내장 하나를 입에 넣었다. 제파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려는 찰나에 카렐이 다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근데......특등급은 공시가가 없어서 시세를 통 모르겠단 말이야......"
"이......"
제파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시로는 부상이 심해서 한동안 못움직이겠는데. 교환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보지."
"몸값 흥정을 하고 싶으면......"
제파의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마지막 간조각을 씹던 카렐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흥정에는 별 소질이 없어. 장사꾼 체질은 못되거든......어쨌든 시로는 우리가 포로로서 최대한 극진히 대우해주고 있으니 안전은 신경 안써도 될거야. 나중에 시로가 움직일 수 있게 되거든 의사를 존중해서 돌려보내주든 말든 할테니 몸값은 그때가서 생각해보세."
"네가 원하는 금액을......"
"잘먹었군."
제파의 이어지려는 말을 또다시 막아버린 카렐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렐은 몸값 협상의사 자체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난감해진 표정의 제파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해서든 시로를 되찾아오라고 엄포를 놓던 베흔의 무서운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카렐은 요지부동이었다.
카렐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맞아, 클레모 내무대신하고 또 그 부류 식충들 몇마리 데리고있네. 도망치다가 지 혼자 자빠져서 이마 깨진것 빼고는 멀쩡해. 그 밥만축내는 뚱돼지녀석들은 데려가도 좋아. 몸값 지불하는거 잊지 말고. 시로가 2천만이라니까.....하나하나 협상하기도 귀찮으니 다 합쳐서 떨이로 딱 천만만 받지."
제파를 돌려보낸 카렐은 경비상태도 확인할 겸, 바람도 쐴 겸 페로 관 곳곳을 혼자 둘러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로 제너레이터까지 거의 고장나면서 일부 보안시설물을 제외하면 모두 동력이 끊겨 암흑천지가 되어 있었다. 가디언 숙소로 쓰이던 서쪽 행랑 부근을 걷던 카렐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흠......"
카렐은 한 별채 앞에 멍 하니 서 있었다. 다섯 개 정도의 방이 달린 자그만 독립행랑채였고 그 옆에는 '지도가디언 전용숙소'라는 표시가 선명히 붙어있었다. 카렐의 발은 어느새 그 중간의 한 방문 앞에 멈춰서 있었다. 창호지로 덧대어진 문 중간에는 누군가가 붉은 글씨로 또렷히 써놓은 '출입엄금' 표시가 선명했고 문 옆의 자그만 콘트롤박스에는 잠긴 상태라는 붉은 등이 선명히 켜져있었다.
조금 망설이던 카렐이 자기 왼쪽 팔찌의 코드를 조심스럽게 들이대자 작은 신호음과 함께 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는 문자가 나타났다.
"후우......"
카렐은 방 안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를 들이키며 잠시 눈을 감았다.
제법 널찍한 방 안에는 이러저런 책들이 가득히 꽂힌 책장, 작은 책상과 옷장, 꽤 많은 무기가 걸려있는 보조장이 있었고, 책장 위에는 여러 종류의 마른 꽃들이 들어있는 병들 열 개 정도가 소담스럽게 정리되어 아직까지도 은은한 향기를 뿜고있었다.
카렐은 꽃잎이 놓인 책장 선반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만져보았지만 먼지하나 없이 깨끗했다. 무기장에 걸린 무기들에도 '수석가디언 카렐'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채 예전과 다름없는 번쩍이는 광택을 뿜고있었다. 이미 주인이 떠난지 오래된 이 방을 누군가가 따로 관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방 한구석에는 꽤 오래된 말린 꽃들과 이젠 완전히 변색되어버린 작은 여자아이 옷가지들, 장난감, 이런저런 옛날 신변잡기들이 가득한 작은 상자가 잘 정돈된 채 놓여있었다. 어릴적 자신이 베흔에게 끌려가기 전, 페로에게 '맡기고 갔던'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카렐은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운 듯 제자리에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상하군."
카렐이 바닥에 펼쳐져있는 침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이곳을 마지막으로 떠날 때 틀림없이 이것들을 잘 개어져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자신이 잠자리에 들 때와 마찬가지로 당장이라도 누워 잘 수 있게 요와 이불, 베개까지 모두 펼쳐있었고 누군가 자고 나간 일이라도 있는 듯 약간 흐뜨러져 있기까지 했다. 카렐은 바닥에 펼쳐진 자신의 옛 침구류 앞에 꿇어앉아 그곳에 코를 들이대고 그곳에 배어있는 자신의 체취를 조금 들이켰다.
"응?"
베게에서 풍겨오는 또다른 체취에 기겁을 하며 놀란 카렐이 자신의 베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베개 한구석에는 짤막한, 굵고 검은 머리카락 몇가닥이 붙어있었다. 베개를 도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카렐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출입금지라는 표시도 못봤나?"
등뒤에서 들린 다분히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카렐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어둠 속에서 돌아선 카렐은 수하 하나 없이 방 입구쪽에 혼자 서있는 페로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페로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카렐을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응시했다. 페로에게 천천히 다가간 카렐은 그의 턱과 목, 어깨와 왼팔에 감긴 붕대를 잠시 번갈아 바라보았다.
"많이 다치셨군요."
"......네가 신경쓸바 아냐."
페로가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옆목에 자상을 입었을때는......붕대를 하는것보다 젤을 발라주는편이 통증이 덜합니다. 의사들은 아니라고 하지만......경험상 그렇더군요."
카렐이 손을 뻗어 페로의 목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페로가 움찔 했지만 카렐을 한 번 쏘아보았을 뿐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붕대가 다 벗겨진 페로의 옆목에는 꽤 긴 봉합흔적이 귀 밑부터 목젖 부근까지 나 있었다.
장 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든 카렐은 페로의 상처 위에 젤을 조심스럽게 바르고 있었다. 페로가 나즈막한 한숨을 내쉬며 이를 조금 악물었다. 키가 큰 카렐이 페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그에게 바싹 다가서 상처 부근을 꼼꼼하게 모두 마무리했다. 귀 옆으로 카렐의 숨소리를 느낀 페로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됐습니다."
카렐이 젤 병의 뚜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을 장 안에 다시 집어넣고 방을 나서는 카렐의 등뒤로 페로가 어딘지 맥빠진듯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물건들이니......가져가도 좋아."
방을 나서려던 카렐이 문득 자리에 멈춰서 페로를 돌아보았다. 잠시 아무 말 없던 카렐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놔두겠습니다."
카렐의 대답에 페로는 좋다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카렐은 전처럼 페로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어두컴컴한 밤공기 속으로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다. 바닥에 펼쳐져있는 이불 위에 힘없이 주저앉은 페로는 카렐이 매만지고 간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혼자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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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와 추천은 아마추어 작가의 유일한 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