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0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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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며칠간 페로 관에서는 괴이한 일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었다. 잘 잠궈두었던 주방의 냉장고가 몇번이나 털린 채 발견되었는가 하면 남쪽 안채 하렘의 여자들이 키우던 개가 어느날 내장이 드러난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집안에서 들리는 뒤숭숭한 소식들에 당황한 페로는 주방마다 경비와 당직을 배치하고 집안의 개들이나 애완동물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두고 집안 경비를 맡은 카렐에게 '손버릇 나쁜 아랫사람'을 반드시 잡아내라며 신신당부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페로의 '특별지시사항' 때문에 며칠간 철야근무를 할 수밖에 없던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눈에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5, 6일 정도의 숙직으로 강인한 가디언이 저정도로 수척해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페로가 카렐에게 그 큰 실수를 한 것도 바로 이맘때의 일이었다.
페로도 당황한김에 마구 내뱉었던 말과 행동들을 뒤늦게나마 후회하고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말수가 눈에띄게 줄어든 카렐은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페로와의 접촉도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카렐이 여위어가는 것이 지난번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 멋대로 단정지어버린 페로는 내심 사과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안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 자존심강한 남자의 일생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라는 것을 해 본 일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결국 '시간이 다 해결해주겠지'하는 무책임한 결론을 내려버린 페로는 식사도 거의 않은 채 나날이 여위어가는 카렐의 모습을 생긴 데 안어울리게 꽁한 성격 탓이려니 하고 그다지 신경써주지도 않았다.
카렐이 페로 관에 온 보름 후, 갑자기 쓰러지기 직전까지는.
의무실에서 들려온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란 페로는 즉시 도시로 사람을 보내 가장 유명한 의사를 불러오게 하고는 종일 진료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몇시간을 자리를 지킨 페로가 의사에게서 들은 대답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뜻밖의 것이었다.
"별것 아닙니다. 특별히 위험한 병은 없습니다. 다만......심각한 영양실조상태인 것 같습니다."
"뭐, 뭐라구?"
페로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리가 있나......식사를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
"글쎄요......혈액조성이 다른 가디언이나 보통사람들하고는 많이 달라서 분석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만......평균적인 파충류 혈액과 비교해본 결과 틀림없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다음번에는 보통 의사하고 파충류전문 동물학자나 수의사를 함께 부르시는 편이......"
"뭐, 뭐? 파충류?"
페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파충류라니.......카렐은 사람이야! 어디서 망발이야!"
페로가 언성을 높이자 의사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렇습니다만.......신경계나 근육조직은......파충류에 가깝습니다.....저도 자료조사를 한참 해서 겨우 찾아냈습니다. 내장기관도 보통의 사람과는 완전히 딴판이고.....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식도에 궤양이 생긴 것으로 보아서 그동안 매일 구토를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페로는 그제서야 매일같이 식사후에 구토를 하던 카렐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페로의 머릿속이 순간 멍멍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매일 냉장고를 뒤지며 고기를 훔쳐가던 그 사건도, 간과 창자가 없어진 채 죽어있던 개의 시체들도, 모두 한곳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페로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파충류는......뭘먹고살지......"
의사가 거의 넋이 나간 페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대개 육식을......"
페로가 두 눈을 꼭 감았다.
"날로?"
"익혀서 변성된 단백질은 좋지 않습니다."
페로는 자리에 멍 하니 선 채 조금 비틀거렸다. 의사는 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서운 부총리의 앞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병실 문을 홱 열고 들어간 페로는 침대 위에 수척한 얼굴로 누워있는 카렐의 얼굴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상황을 어느정도 눈치챈 카렐은 차마 무어라 변명도 못한 채 페로의 성난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날 속이다니......"
"그건......."
극도로 흥분한 페로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카렐의 변명 따위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페로는 그대로 휙 돌아 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는 가 버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카렐은 덮고있던 담요를 꽉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당신 뿐이군요....."
눈을 꽉 감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렐의 눈꼬리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끔찍한 모습마저도 웃으며 받아들여주었던 일생 단 한사람의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야,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네피가 비틀거리는 카렐을 부축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페로 관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주인님도 참, 나......그래도 환자인데......오늘 아침까지도 너 끔찍히도 아껴주시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웬일이래. 이 몸을 하고 사랑채까지 오라니......"
네피에 기대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카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사랑채는 평소와는 달리 가디언 하나 없는 썰렁한 분위기였다.
네피가 안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네피입니다. 카렐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랑채 문이 삐끔히 열리더니 페로의 손이 드러났다.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인 페로는 문 밖으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뒤이어 페로의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피 넌 나가있어."
"......알겠습니다."
카렐이 비틀거리며 사랑채에 들어가는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힐끔 살피며 네피가 밖으로 비켜주었다.
탁자 앞에 책 한권을 펼친 채 앉아있던 페로는 들어오는 카렐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했다. 카렐은 페로의 멀찍이 앞에 힘없이 꿇어앉아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카렐을 한 번 매섭게 째려보았던 페로가 결국 입을 열었다.
"49명, 강제도 아니고 그냥, 배고프다고 잡아먹었더군?"
페로의 한마디에 카렐의 호흡이 멎었다. 페로가 보고있던 책 표지를 카렐에게 내보였다. 바로 카렐이 황궁을 떠나올 때 베흔이 함께 보냈던 카렐에 관한 '특별보고서'였다. 극도의 흥분을 가까스로 죽이고 있는 페로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살인범, 강간범같은 천하의 잡놈들만 있는 건 아니군. 멀쩡한 놈들도 있었어......일단 피를 빨아마시고......영양이 제일 풍부한 간부터 먹었다지? 그 뒤엔 창자, 허파,"
카렐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쥘 뿐이었다.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긴 페로는 다시 카렐을 쏘아보았다.
"하긴, 안채에서 죽은 개도 딱 그꼴이더군. 그 버릇을 여전히 못버렸나보지? 정말 다행이야. 안채 미녀들을 잡아먹지 않아서. 그것들은 좀 비싸거든. 다음부터는 먹고 싶으면 미리 얘기해. 도적놈이라도 하나 잡아서 식탁에 올려줄테니."
"그게 아닙니다. 그때는....."
무어라 변명하려는 카렐의 입을 페로가 다시 가로막았다.
"뼈까지 부숴먹었다지? 기가막히게 맛났겠어."
머릿속이 아찔 해진 카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 턱 밑으로 떨어졌다.
"32살때, 베흔 옷자락에 매달리면서 부탁했다고? 사람이든 뭐든 제발 먹을것 좀 달라고? 그래서 베흔이 17살짜리 몰락한 귀족집안 딸아이를 던져줬지? 그자리에서 목을 부숴 죽이고.....뼈까지 다 먹어치우는데 겨우 5일 걸렸다고? 어때? 어린 데다가 암컷이니 맛이 기가막혔겠지?"
꿇어앉은 카렐이 결국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페로는 들고있던 책을 대뜸 카렐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책 귀퉁이에 얻어맞은 카렐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릴 땐 쥐, 뱀, 벌레까지 껍질째 다 쳐먹었다지? 정말로 양호했군. 나중에 한 짓에 비하면 말이야. 한 번은 완전히 미쳐서 너한테 물을 주러 왔던 경비병 목까지 비틀었다고? 뭐? 동물이나 사람이나 먹는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그랬다지? 사람피는 비린내가 없고 맛이 특이하다고 그랬나? 놀라우셔, 피맛까지 감별하고? 왜? 내 피는 먹고싶지 않던?"
카렐이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끔찍한 과거사를 이해못하는 페로를 야속해할 일이 아님은 카렐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무슨 일인지 계속 아찔 해오고 있었다.
페로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래, 베흔이 맞았군, 내가 바보짓한 거야! 네가 옛날 그 카렐이 아니란 걸 일찌감치 알았어야 되는데! 망할! 내가 모두 버리고 데려온 게 사람도 아닌 괴물이었다니! 썩을!"
카렐은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 갑자기 의식이 멀어져가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믿었던' 페로가 베흔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향해 괴물이라 부르고 있었다.
한참 욕을 더 퍼붓던 페로는 카렐에게 째지는 목소리로 대뜸 소리쳤다.
"꺼져! 이 괴물같으니! 꼴도 보기 싫으니까 눈앞에서 꺼져버려!"
거의 시체같이 변해버린 표정의 카렐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숨을 헐떡이던 카렐은 자리에 앉아 혼자 씩씩거리는 페로를 문득 돌아보았다.
"뭘봐! 꺼지라니까!"
그를 바라보는 카렐의 눈동자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다시 무어라 욕을 퍼부으려던 페로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 카렐의 다리가 이미 휘청거리기 시작할 때였다. 그제서야 사태를 깨달은 페로가 당황해 막 일어나려는 순간, 카렐은 그대로 문설주에 머리를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내고 쓰러져버렸다. 카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페로의 방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네피! 네피! 빨리 들어와!"
깜짝 놀란 페로가 네피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느끼며 카렐의 긴 눈썹이 핏발선 회색빛 눈동자를 천천히 내리덮었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저렇게 강한 분이 아무 원인도 없이 갑자기 쇼크라니......"
멍한 표정으로 진료실 앞에 웅크려앉은 페로 앞에서 의사가 쭈삣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의식은 돌아왔지만.....지금 상태가 전반적으로 매우 안좋습니다. 게다가 영양실조상태고......완전히 회복하시려면 열흘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페로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페로도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제력을 잃고 앞뒤없이 마구 퍼부어댄 자신의 혀를 차라리 잘라내버리고 싶은 생각에 두 손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 망할 성격, 한 번 화가 뻗치면 스스로도 자제 못하는 그 거친 성격이 문제였다.
"식사.......는?"
"지시하신대로......소 생간을 드렸는데.......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어쩔수없이 주사로 대체하는 중입니다."
페로가 이를 악물며 벽에 스스로의 머리를 거칠게 받았다. 그 보고서인지 휴지조각인지를 건네준 베흔의 속셈에 고스란히 말려든 셈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손에 쥐고있던 베흔의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저거 내 눈에 안보이게 태워버려! 여기서! 당장!"
반 쯤 미친 듯한 페로의 모습에 깜짝 놀란 하인들이 달려와 그 조각들을 깡통에 주워담아 불을 붙여버렸다. 지글거리며 타들어가는 보고서를 바라보며 페로의 눈시울이 떨려오고 있었다.
보고서를 다 태운것을 확인한 페로는 만류하는 의사도 뿌리치고 카렐이 있는 병실로 무조건 들어갔다. 창백한 표정의 카렐은 병실에 들어온 페로를 실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페로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카렐에게 말했다.
"보고서.......태워없앴어."
페로의 말에 카렐은 아무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앞으로 다시는......"
"푸엘 숲의 여름은 무척 짧아......"
카렐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내자 뭐라 말하려던 페로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난......"
"짧은만큼 아름답기도 하지......색색의 꽃이 필 때면 정말 예뻐......신기하지......바로 며칠 전까지 황무지같던 곳에서 말이야....."
페로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카렐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지려 하자 카렐은 고개를 더 돌리며 페로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쳤다. 페로가 보기에 지금의 카렐은 틀림없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맘때 북극에 놀러오곤 해.......가족끼리, 연인끼리......난 보통 사람들은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에너지장벽 너머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카렐......."
"그런데 난 그 여름이 죽도록, 아니 죽기보다 싫었어......"
하고싶은 말을 하도록 놔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은 페로는 계속 중얼거리는 카렐 옆에 말없이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베흔은 여름마다......내 몸에서 군살을 뺀다는 명목으로 뙤약볕 밑의 바위 위에 쇠사슬로 묶어놓고는 6, 7일동안 물도 거의 안주고 굶기곤 했지. 어떤 파충류는 아무것도 안 먹고 반년을 버틴다지? 하지만 난 완전한 파충류도 아냐......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이틀을 넘기기가 버거워. 생식능력도 없으니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한 실패작이지."
페로의 숨이 꽉 막혀왔다. 페로는 주사바늘이 박힌 카렐의 손에 이마를 기댄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흘을 넘기면 판단력이 흐려지고......나흘을 넘기면 사지에 경련이 생기고.......닷새를 넘기면 호흡이 곤란해지면서 온몸이 마비되기 시작하지......그러다가 6일이 되면 자포자기하게 돼......실신했다 깼다를 반복하면서......제발 다음번에 정신을 잃을때는 아예 영영 깨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옛날 일을 묻는 페로의 집요한 질문에도 카렐은 그저 의미없는 웃음이나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말 정도로 때웠을 뿐이었다. 근위대의 '특별한 수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지를 궁금해하던 페로였지만 지금 카렐이 하는 말은 그런 페로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베흔은 항상 그맘때 나타났지. 그리고는 내게 말했어......이러고 사느니 죽어버리라고. 그래.......죽고싶었어......100년은 날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기억만으로 고상하게 버티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어......."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페로는 카렐의 손을 꼭 잡았지만 그 차가운 손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내가 매달리며 제발 살려달라고 하면 그제서야 내게 산 사람을 던져줬지. 어느때는 사형수이기도 했고......어느때는 아닌 것도 같았지만......알 게 뭐야......네 말이 맞아. 내겐 소나 돼지나 사람이나 다를 게 없었어......그래......괴물같이 먹었어......뼈까지 모두 파먹는데 5일 정도 걸리더군......5일이라도 잘 먹어주지 않으면 난 기운이 없어 사냥을 나가지 못해. 그 넓은 푸엘 숲에서 살기위해 사냥을 하려면......"
울먹이는 카렐의 목소리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페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 하니 카렐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어릴적이라고 변변한 추억거리 하나 없는 내 기억속에서 그나마 남아있는건......믿음직한 청년으로 자라서 그런 한심한 나까지도 두팔벌려 맞아줄 그런 너였지......바보같이......나도 네가 옛날 그 명랑한 소년에 머물러있기만 바라고 있었으니.....울보 계집아이였던 내가 100년동안 살인마로 변한것처럼 너 역시 변했으리라는 걸 몰랐으니......"
문득 고개를 치켜든 페로는 카렐의 감긴 두 눈에서 흐르고있는 눈물을 보고 말았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던 페로의 손을 카렐이 거칠게 쳐냈다.
"그래.......베흔이 옳았어.......너도 역시 그냥 남자였다는 거......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거.......그리고......더이상 네게 특별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는 없으리라는것도......"
망연자실한 표정의 페로가 눈물로 범벅이 된 카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옛 친구로서 너에게 해 줄 마지막 말이야......페로. 그래, 이젠 지나가버린 옛 친구."
카렐이 옆으로 천천히 돌아누웠다.
카렐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그제서야 그 끔찍한 과거가 카렐 자신에게는 더 큰 괴로움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의 무책임함이 그보다도 더 큰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100년간의 기다림이 처절하게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끼며 페로는 넋나간 표정으로 카렐의 병실을 나서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아침 7시에 열린 아침조회석상에 나온 페로는 가디언들 맨 앞에 네피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고 서 있는 카렐의 모습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카렐이 페로 앞에 꿇어앉으며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수석가디언 카렐 보고올리옵니다. 당일 조회인원 309명, 결석 없이 전원 출석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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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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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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