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1화 (51/1,132)

< -- 51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22.

"이런 어수선한 때 추도식이라니 원."

페로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계속 투덜거리며 조복을 차려입었다.

"하지만 TSG추도행사는 타르서스 망명정부때도 중단되지 않고 매년 열렸던 겁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알아."

페로의 새 보좌관으로 발탁된 보벤 경이 달래듯 말했지만 페로는 여전히 뚱 한 표정이었다.

동부에서 관료로 있던 보벤 경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확실했다. 페로를 황제로 만들어 제국의 주도권을 쥐고싶어하는 동부측에서는 페로의 곁에 확실한 동부 사람을 하나쯤 심어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연히 페로로서는 이 신경쓰이는 재종형의 존재가 달가울 턱이 없었지만 지난번 근위대와의 싸움으로 입은 타격 때문에 사람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그로서도 별 도리가 없었다.

"베흔 그 망할새끼 얼굴보기 싫으니까 그러지. 제길."

"그래도 설마 황족에 제후들까지 모두 모이는 신성한 자리인데 무슨 딴생각이라도 하겠습니까. 그냥 신경쓰지 마시고 기분전환 겸해서 다녀오십시오."

옷을 다 챙겨입은 페로는 다룬과 킵이 기다리고 있는 대청마루에 나섰다.

평소같았으면 대여섯명의 호위가디언 정도만 거느렸을 페로였지만 근위대와의 충돌이 있은지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은 이 상황에서 그도 스스로의 안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무려 백여명의 건장한 가디언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선 페로는 전용의 화려한 고급차에 올라 옛 TSG 본부가 있는 프라임 지역 북동쪽, 7번 도시로 향했다.

제국 총리대신인 페로의 등장에 추도회장에 모인 각 지방 제후들과 중앙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켜주었다.

남부제후들을 비롯한 상당수의 제후들이 별로 곱지않은 눈길을 보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총리대신 직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페로인지라 당장은 대놓고 반감을 드러낼 상황은 아니었다.

흰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비단조복 위에 망토와 케이프, 자이센 가의 상징인 붉은 황소가 섬세하게 수놓인 화려한 금색 머플러를 목에 건 페로는 사뭇 당당한 자세로 고개숙인 귀족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고위직의 귀족으로는 흔치않게 배우자 없이 홀몸인 페로를 향해 꽤 많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딸들을 정성스럽게 단장시켜 열 맨 앞에 세워놓은 모습도 보였다. 시민으로서는 나무랄데없는 크고 아름다운 몸매에 빼어난 미남이기까지 한 매력넘치는 페로를 보며 몇 귀족집안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했지만 페로는 그런 시선들을 철저히 무시한 채 중앙의 가장 높은 단상으로 걸어올랐다.

물론 그들에게 눈앞의 이 잘난 남자가 20년 전 자신의 정실부인에게 독배를 내렸던 전력 따위는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단상 위에는 황족인 리쿠 가문 사람들이 도열해 서 있었고 그 한구석엔 예상대로 베흔이 칼을 쥔 채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레곤 대공주 저하."

페로가 종친들의 맨 앞에 서 있는 대공주에게 깍듯히 경의를 표했다.

기원전 30년, 국제연합에 대항하다가 학살당한 2만명의 TSG조직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나우스 2세 때부터 개최되어온 이 추도식은 황제와 종친들, 내각의 주요대신은 물론이고 4지역 최고제후와 각 제후가문 대표들이 모두 참석하는 황실의 큰 행사중의 하나였다.

식순은 매년 비슷해서 1차로 그들의 유골을 받드는 제사가 열리고, 2차로 당시 항쟁에 관계된 황제령 내 성지 한곳을 선정해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황제 대신 제일 높은 상석에 자리잡은 페로가 두 팔을 벌려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제위가 공석인 관계로, 오늘의 추도식은 총리대신인 본인 페로 슈트란 자이센이 맡습니다."

당하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황족대표인 레곤 대공주가 페로에게 상자를 한 개 넘기고는 뒤로 물러났다. 페로가 연 그 상자 안에는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뼛가루가 가득히 들어있었다. 페로가 상자를 높은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붙인 향을 그 위에 몇바퀴 돌리고는 자리에 꿇어앉아 힘있는 목소리로 조문을 읽기 시작하자 황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꿇어앉았다.

꽤 긴 낭독이 끝나고 페로는 조문이 쓰여졌던 종이에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귀족들이 때맞추어 일제히 낮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장렬히 산화하신 2만의 영혼들이여, 부디 안면하소서."

페로가 그들의 뼛가루가 담긴 상자를 향해 바닥에 이마를 대며 절을 올리자 당하의 귀족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머리를 바닥에 가져갔다.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일어선 페로는 당하의 귀족들을 향해 팔을 벌려 1차 공식행사의 종료를 알렸다.

"그 위엄이 새 황제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으시군요."

보벤 경이 황족들과 함께 당하로 내려온 페로에게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뒤이어 몰려든 귀족들은 이 '황제 후보'에게 얼굴을 알리고 딸들을 소개시키느라 잠시 수선을 떨고 있었다.

물론 그 광경을 사뭇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부나 서부 제후들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귀족들의 분위기는 이번의 제위다툼은 조만간 '적당한 수준의 정치적 협상'에서 끝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페로가 제위에 오르건말건 그와 혼약을 맺어 손해볼 건 없었다.

"정실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페로 주변에 도열한 황족들을 의식한 듯 귀족들은 약간은 조심스런 태도로 페로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페로가 황제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굳이 황후가 아니더라도 총리대신과 동격의 1품 황비나 부총리와 동격인 2품 황빈에 자신의 가문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는 셈이었으니 충분히 걸어볼 가치가 있는 도박이었다.

"얼마만인가, 근위대장?"

페로가 황족들 사이에 섞여있던 베흔에게 먼저 아는척을 해보이자 베흔 또한 천연덕스럽게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정확히 22일만이지요."

"그렇게 오래되었던가? 난 한 어제정도 벌어졌던 일 같은데?"

둘의 시선이 부딪히며 잠시 눈싸움이 오갔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꽤 좋으시군요."

베흔이 다분히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뱉자 페로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내심 차기 황후라도 생각하고계신 모양인데......김칫국이 심하시군요.......후훗, 설마 카렐은 아니겠죠?"

"너무 어처구니없는 농담은 하나도 웃기지 않은 법이라네. 근위대장."

페로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베흔의 공격에 그대로 응수했다.

"그만두게, 근위대장. 농이 좀 심한 것 같군."

레곤 대공주가 베흔의 지나친 농담을 중간에서 얼른 가로막았다. 베흔은 기꺼이 허리를 굽혀보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페로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공주에게 물었다.

"올해의 참배성지가 변경되었다구요?"

"음.....미리 연락 안했던가? 올해는 북극에 푸엘 숲이라지? 황가의 세번째 시조이신 S-3-1이 잔혹하게 피살당하신 곳 말이야. 나중에 거기 GOE부대가 들어서서 좀 망가졌지만......지금까지는 통제구역이었는데 이번엔 참배단을 위해 근위대가 특별히 통제를 푼 모양이야."

'푸엘 숲'이라는 말에 페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들었다. 100년간 카렐을 훈련시켰다는 그 잔혹한 숲은 아직 페로도 단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약간 떨어져있던 베흔을 한 번 째려보았지만 베흔은 짐짓 딴곳을 보는 척 신경을 두지 않았다.

"한시간 후에 출발한다니까 총리도 준비하게나."

여러 귀족, 황족들과 함께 백여명의 참배단을 이끌고 나온 페로 앞에는 다섯 대의 승용셔틀이 대기중이었다. 이번 행사의 진행을 맡은 클레모 내무대신이 큰 소리로 외쳤다.

"황족분들은 1번 셔틀에 탑승해주시고, 중앙귀족분들은 2번 셔틀에, 북부와 남부제후분들은 3번 셔틀에. 서부와 동부제후분들은 4번 셔틀에 올라주시면 되겠습니다. 5번 셔틀에는 중앙귀족 대표이신 총리대신각하와 각 지방 최고제후가문 분들이 탑승하십니다."

셔틀 배정에 별다르게 '꺼림찍한' 구석이 없자 저으기 안심한 페로는 뒤따라온 다룬과 킵에게 자리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5번 셔틀에 몸을 실었다. 제일 상석에 속하는 셔틀 꽁무니의 두 자리 중 한 자리에는 이미 낯익은 얼굴이 앉아있었다.

"역시 똑똑하기 짝이 없으신 클레모 내무대신의 자리배정이시구려."

먼저 앉아있던 남부 최고제후이며 수우와 제롬의 아버지이기도 한 테번 델루지 공을 보고는 페로가 다 들으라는 듯 빈정거렸다. 페로의 한참 앞쪽에 앉아있던 보벤 경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얼떨결에 원하지않은 '동거'를 하게 된 페로와 테번 공은 서로의 얼굴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란히 앉아있는 페로와 테번 공은 여러 면에서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수명개조된 젊고 강건한 페로와 대조적으로 70살 상태에서 수명개조되었던 테번 공의 늙은 몸은 무려 600살이 가까와오고 있었다.

다만 이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거의 버려두다시피 한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는, 혹은 있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이 늙은 최고제후의 두번째 정실로 들어온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은 세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두명이나 되는 믿음직한 아들들을 낳아주었지만 그 삶 자체는 참으로 보기 딱하다고 주변사람들이 수군대오던 터였다.

야심으로 똘똘 뭉친 테번 공은 소문난 일벌레였고, 이 젊고 외로운 부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떨어지는 체력 때문인지, 아니면 페로처럼 원래 꺼리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부인과의 잠자리 또한 몇달에 한번이 고작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늙은 남편의 젊은 부인에 대한 의심 또한 대단해서 요즘들어서는 가디언을 제외하면 누군가 부인과 함께있는것조차 차마 눈뜨고 보아주지 못하는 추태를 보여 주변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셔틀이 출발하고 몇십분 후 황량한 북극에 도착할때까지 페로와 테번 공 두사람은 대화 한마디는 고사하고 얼굴 한 번 마주보지 않았다.

"이 아래가 옛 GOE병영입니다. 200년이 넘게 통제구역이었습니다만 이번에 최초로 여러분들의 성지참배를 위해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지금 착륙합니다."

셔틀에 함께 탄 근위대 정훈장교가 입을 열었다. 북극에 난생처음 와 본 페로의 눈에 들어온 푸엘 숲은 지평선 너머까지 까마득하게 펼쳐진 빽빽한 침엽수림이었다. 기분이 착찹해진 페로는 한숨을 내쉬며 창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문이 열리자 답답해하던 귀족들이 있는대로 투덜거리며 셔틀에서 내려섰다.

"어휴, 추워, 이게 뭐야,"

옷을 얇게 입고 온 몇몇 제후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적도 트라이앵글의 옛 전적지를 찾아가도록 되어있던 오늘의 참배 계획이 갑자기 북극으로 바뀌면서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상당수의 제후들은 여름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6월 말의, 다른 곳이라면 한참 더워지기 시작할 시기였지만 이곳 북극은 대낮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쌀쌀한 기온이었다.

인솔하는 근위대 정훈장교의 옛 역사 설명 따위는 별 관심 없는 듯 페로는 자리에 우뚝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로 가끔 몰아치는 살을 에는 찬바람이 이미 폐허가 된 병영을 더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살피던 그의 시선은 연병장 한구석의 녹슨 쇠기둥과 굵은 쇠사슬, 누군가의 발목을 잡아맸었을---사람에게 채우기는 지나칠이만큼 두껍고 튼튼해보이는---차꼬에 가서 멎었다. 그곳에 천천히 다가간 페로는 그 묵직한 차꼬를 한 번 뒤집어보았다. 그 불쌍한 희생물의 발악의 흔적은 선명했다. 곳곳의 손톱자국, 이빨로 물어뜯은 자국에 힘으로 잡아늘리려 했던 흠집까지 이제 녹슬어버린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녹슨 쇠에서 오는 묘한 섬칫함에 페로가 치를 떨고 있었다.

"그년 악취가 어찌나 나던지......다가가기도 싫을 지경이었읍죠."

베흔이 웃음띤 얼굴로 페로 뒤에 서 있었다.

"얼굴엔 때국물이 꾸질꾸질해가지고......날고기를 얼마나 처먹어댔는지 몸에선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몸엔 딱정이 투성이에......그년이 사람이 아니란 게 다행이었죠."

페로는 기분나쁘게 참견하는 베흔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페로의 눈에 묘한 돌무더기가 띄자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한곳을 뚫어지게 살폈다. '42'라고 서툴게 새겨진 밑단의 약간 큰 돌 위로 수십개의 자갈돌과 이제는 돌 표면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들꽃이 고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들쳐낸 돌무더기 밑에는 이미 썩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해골이 약병 비슷한 것에 가득 들은 마른 꽃잎과 함께 묻혀있었다.

페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저분한 땅바닥에 꿇어앉아버렸다. 그의 화려한 조복과 비단망토에 흙이 엉겨붙고 있었다.

"각하, 왜그러십니까?"

보벤 경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페로에게 달려와 물었다. 페로는 아무 대답없이 자신을 둘러싼 49개의 돌무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각하, 각하,"

보벤 경이 어깨를 두들기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페로는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섰다.

"그냥......좀 둘러보는 중이야......자넨 다른 사람들하고 다니게나......"

비틀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페로는 돌무덤 건너편의 작은 토굴에 들어서고 있었다. 페로가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토굴 입구는 이미 죽은 가지들로 거의 막혀있다시피 했다. 페로는 칼을 휘둘러 가지들을 거둬내고는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흐음......"

페로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입구 반대편의 자그만 구멍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먼지투성이 토굴 안의 유일한 빛줄기였다. 조잡한 침대와 탁자, 이미 완전히 썩어 악취도 나지 않는 털가죽 담요, 몇 권의 낡은 책이 방 안의 몇 안되는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그리고 토굴 벽에는 달력같아보이는 이상한 표시, 100개가 넘는 벽을 꽉 채운 X자와 그 끝에 쓰여있는 희미한 글자가 그의 눈을 끌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끔찍한 곳은 앞으로는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페로가 눈을 감으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카렐이 기대에 찬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며 흙벽에 마지막으로 새겼을 저 글은 무너져버린 카렐의 희망과 마찬가지로 이젠 거의 뭉개져 알아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 있었다.

토굴 밖에서 사람들이 페로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벽에 새겨진 그 처절한 글씨를 한 번 손으로 더듬어본 페로는 망연한 표정으로 토굴을 나섰다. 몇십분동안 정훈장교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본 참배단들이 페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입니다. 셔틀에 오르시지요......이런, 그 좋던 옷 다 옷 버리셨군요."

베흔이 페로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그답지않게 친절하게 말했다. 베흔을 한 번 째려본 페로는 셔틀에 올라 이곳에 올 때처럼 꽁무니쪽, 테번 공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셔틀이 다시 이륙하는 것을 느끼며 페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셔틀이 갑자기 조금 흔들린 건 출발하고 채 2, 3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페로가 눈을 번쩍 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뭔가?"

밑을 내려다본 페로는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셔틀은 무서운 속력으로 바로 밑의 침엽수림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셔틀 안은 일시에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페로와 테번 공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망할!"

어마어마한 충격이 페로가 앉은 자리를 덮쳤다. 페로와 테번 공 좌석에서 수십개의 버블이 터지며 두 사람을 감쌌다. 셔틀의 꽁무니가 떨어져나가며 기체와 분리된 두 개의 큰 버블뭉치는 폭발하는 셔틀 꽁무니에서 어디론가로 멀리 튕겨나가버렸다. 나머지 제후들이 타고 있는 셔틀 앞부분은 한참을 더 날아가 겨우 멈추어섰다.

"쌍! 이게 뭐야!"

보벤 경이 비틀거리며 셔틀 뒷쪽으로 거의 기다시피 하며 빠져나왔다. 곳곳에서 느닷없는 셔틀사고에 놀란 제후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어보였다.

"맙소사, 총리각하!"

보벤 경이 허겁지겁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떨어져나간 셔틀 뒷꽁무니부분은 산 몇개는 너머에 떨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연기와 불꽃이 어딘지도 모를 군데군데에서 희미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튕겨나간 페로와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은 이 깊고 어두운 푸엘 숲 그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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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맥 출판본은 SK텔레콤 네이트의 모바일 서점에서 모바일 북으로 서비스가 개시되었습니다. 현재 1권이 시범서비스 중이고 곧 2권이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모바일 북에는 기술적 문제로 인해 개인지 출판본에 포함된 그림이 빠졌습니다만 내용은 같습니다.

05년 7월 현재 오픈기념 이벤트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화면 오른쪽 혹은 메인화면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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