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53화 (53/1,132)

< -- 53 회: Part 2. 나를 잊지 말기를....... -- >

셈의 손아귀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페로는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막막한 마음에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생각하자......생각......다룬 녀석은 서쪽 TSG에 남아있었으니까......여기는 통제구역이고......근위대들이 접근하지 말라고 했겠지......그래도 북극에 와서 일단 경계까지는 왔을거야......그래, 서쪽 해안, 서쪽 해안......휴,"

페로의 머릿속에 언젠가 본 일 있던 북극의 지도가 떠올랐다. 푸엘 숲은 북극 서부의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는 엄청나게 거대한 침엽수림이었다. 생전 한 번도 와본 일 없는 페로가 지금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도대체 서쪽 해안가가 얼마나 떨어진 것인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 서쪽, 서쪽,"

해도 없이 침침한 하늘에서 무심코 하늘의 별을 찾던 페로가 절망감을 느끼는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극권에서는 별자리, 심지어 나침반으로도 정확한 방위를 잡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져버린 페로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래, 머리, 머리를 써.......찬바람 오는 방향이 북쪽일거야......전향력때문에 동쪽이던가? 아니, 국지기후엔 해당 안되던가? 썅! 왜 바람은 안부는거야!"

절망한 페로는 바닥에 떨어진 썩은 나무조각을 홧김에 홱 집어던져버렸다. 그의 머릿속이 아득해져왔다. 그에게 살을 파고드는 오후의 추위가 느껴져온 건 그의 흥분도 어느정도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계는 겨우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회색빛으로 꾸물꾸물한 하늘에선 당장이라도 밤이 찾아올 기세였다.

흐느적거리며 일어난 페로는 방금 집어던진 나무가 떨어진 방향으로 무조건 걸어가기 시작했다.

북극의 남쪽 해안가에 면한 숲에 모습을 감추고 벌이고 있는 장벽 해체 작업은 킵과 다룬의 페로가디언 백여명과 장비까지 가세하면서 한결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2중으로 쳐진 3600급의 에너지장벽은 해체에 적잖이 긴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테번 공이 익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근위대측의 소식을 접한 아메스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장벽 제거작업을 감독하던 카렐은 멍 하니 주저앉은 아메스를 꼭 껴안아주었다. 카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아메스는 아버지의 구출소식이 들어오기만 애타게 바라고 있었지만 그런 소식이 들어오기 불가능한 것임은 카렐이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카렐의 곁에서 지도를 실피던 제네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쩌죠? 푸엘 숲 내부는 어떤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통제구역이라서 근위대가 검열에서 모두 삭제한 모양입니다."

"저 안은 내가 훤해."

에너지장벽 안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카렐의 아랫입술이 보일듯말듯 떨리고 있었다. 킵으로부터 종이 한 장을 받아든 카렐은 펜을 집어들고 자신이 아는 푸엘 숲의 대강의 지도를 정신없이 그려내려가기 시작했다.

"1차 추락지점이 여기니까......지면에서 튕겼으니 버블이 아무리 멀리 날아갔어도 50스타디아를 넘어가지는 않았을거야. 숲인데다가 기사단은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일단 여길 지키고 가디언들만 들어가서 근위대들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수색하는밖에. 설사 발각된다해도 싸울수밖에 없다."

"됐습니다!"

킵의 고함소리에 카렐과 아메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큰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카렐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4백여명의 가디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들어간다!"

"맙소사.....이이가......그이가......"

하얗게 변해버린 남편의 시체를 확인한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은 아들 제롬 경과 수우의 품에 쓰러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지독히도 홀대해온 늙고 한심한 남편이었지만 무려 250여년을 함께해온 남편은 남편이었다.

시체를 싣고온 베흔과 쿠베는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 모여선 제후들과 귀족들에게 말했다.

"저희가 구조신호를 받고 갔을 때 이미 익사하신 후였습니다. 공께서는 수영을 전혀 못하시기 때문에......차가운 북극의 냇물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남부제후들의 웅성거림은 더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하필 제위경쟁중인 이 중요한 시기에 남부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를 잃은 충격은 그들 전체를 불안감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들의 흔들리는 모습에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슬픔을 곱씹던 제롬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러분은 준동하지 마시오. 델루지 가의 새 수장으로서, 새로운 남부 최고제후로서 이제 본인이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남부를 강력히 이끌 것이오!"

쩌렁쩌렁 울리는 제롬의 큰 목소리에는 그 꼬장꼬장하던 아버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박력과 힘이 넘치고 있었다. 이미 150년 가까이 아버지로부터 후계자수업을 받아온 제롬이 최고제후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들 중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산만하던 남부제후들이 제롬 경, 아니 제롬 플레렌 델루지 공의 단호한 선언에 일제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베흔을 비롯한 근위대원들도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힘있게 말했다.

"새 최고제후의 탄생을 경하드리옵니다. 제롬 델루지 각하. 근위대 역시 각하의 든든한 힘이 되어드릴 것입니다."

제후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새 최고제후 제롬 공의 믿음직한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고개를 치켜든 베흔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씩 번져나갔다.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흐느끼는 네페티 부인의 울먹임은 새 지도자인 제롬 공의 이름을 연호하는 남부제후들의 함성소리에 조금씩 파묻혀가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 정신없이 걷던 페로는 심한 갈증에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버블에서 튕기면서부터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던 페로는 이미 세 번이나 토하고 난 후였다.

"망할......"

갈라진 입술 사이로 단내가 풍길 지경이었지만 주변엔 마실 물은 고사하고 더러운 웅덩이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지고있던 단검을 뽑아 옆의 작은 관목 가지를 베어 흔들었지만 잘린 단면에 고인 한두방울의 수액이 고작이었다.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이런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페로는 옆의 풀섶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풀숲에 숨어있던 토끼 한마리가 페로를 보고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토끼를 쫓는 헛고생을 잠시 하던 페로는 다시 탈진해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타들어가는 목 때문에 더이상 꼼짝할 기운조차 잃어버린 그의 머릿속이 조금씩 아득해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귀에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든 페로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단검을 움켜쥔 페로는 사람들의 목소리 반대편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절대.....베흔 네놈 손에는 안죽는다......"

핏발선 눈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페로의 무릎이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페로의 등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안쪽이야!"

탁월한 감각을 지닌 가디언들이 이정도 거리에서 시민인 페로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들은 토끼몰이를 하듯 페로를 숲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여기! 여기!"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페로가 우뚝 멈춰섰다. 그의 앞에 기이한 표정으로 칼을 쥔 채 서 있는 건 다름아닌 카인이었다. 페로의 가망없는 도주극은 채 1분도 가지 못한 셈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 배신자와 마주한 페로가 갑자기 미친사람처럼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왜? 날 구하러 왔느냐?"

"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카인이 비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이 옛 주인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저도 언제 카렐 누님처럼 할복명령을 받을 지 모르니까요."

"바보같은 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할복?"

페로의 경멸에 찬 시선이 카인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페로의 그 이해못할 태도에 카인의 표정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페로의 등뒤에서 셈이 모습을 나타냈다. 페로를 발견한 셈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휴우,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야 끝났군."

"바보새끼들, 끝나? 날 죽인다고?"

페로가 자신을 둘러싼 수십의 근위대원들을 바라보며 킬킬대며 웃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끝이 아니겠죠."

귀에 익은 쌀쌀맞은 목소리에 페로의 웃음소리가 딱 멈추었다. 셈의 뒤에서 나타난 베흔이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되는 양 페로의 어깨를 붙들었다.

"어허......저희는 구조대입니다. 같이 돌아가시죠?"

"어디로?"

베흔의 손을 거칠게 쳐낸 페로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베흔은 어깨를 으쓱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짓을 받은 카인이 대뜸 페로의 손을 칼집으로 내리쳤다.

"이익!"

저항 한 번 못해 본 페로가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리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베흔이 페로가 떨어뜨린 단검을 냉큼 주워들었다.

"어허......이런 위험한 장난감을 쓰시다니.....잠시 압수하죠."

두 명의 건장한 근위대 가디언이 페로의 양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페로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헛일이었다.

"준비는 다 해놓았습니다."

셈이 베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보인 베흔은 페로를 향해 한 번 더 웃음을 지어보였다.

"가시죠. 총리각하."

"저기 같습니다. 저 너머가 각하 좌석이 떨어졌다는 곳 같습니다."

좌표를 읽은 킵이 카렐에게 알렸다. 푸엘 숲의 높은 언덕배기에 숲에 올라온 일행은 사방으로 숲과 드문드문 보이는 강, 절벽이 고작인 이 밋밋한 숲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경 100스타디아 범위 내의 대형 생물체를 포착해내는 스캐너 장치 역시 무성한 숲 때문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후였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카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근위대들이 다 어딨는거지? 사고였건, 일부러 저지른 자작극이건간에 주변을 수색하고 있어야 정상인데 왜 아무도 없는거지?"

카렐의 언급에 함께있던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다룬과 킵의 얼굴도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조페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우릴 일부러 끌어들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무표정하게 대답한 카렐은 주변을 다시한번 둘러보았다.

"어?"

킵이 어깨에 걸고있던 스캐너를 갑자기 툭툭 두들기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뭐냐?"

"95스타디아정도 떨어진 곳에서......인기척이 포착되었습니다. 100여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숲에서?"

카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인체에서 발산되는 적외선과 움직임으로 사람을 잡아내는 전투용 스캐너장치는 이렇게 빽빽한 숲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물건인 것이 정상이었다.

"아뇨, 위치로 봐서......남서쪽입니다. 나무가 없는 언덕 꼭대기인 것 같습니다."

킵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은 군데군데 바위절벽이 솟아오른, 제법 험한 지형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카렐이 자기도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함께있던 제네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왜그러십니까?"

제네르의 물음에 대답도 않은 채 말없이 서 있는 카렐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위대들은 자신에게 빤히 포착될 것을 알면서, 산꼭대기에 그 많은 사람이 다 보라는 듯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올테면 와 보라는, 카렐에 대한 무언의 손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곳이 카렐의 머릿속에 어느새 그려지고 있었다.

갑자기 뒤를 돌아본 카렐이 다룬에게 말했다.

"다룬, 아메스 아씨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라."

"예?"

"그리고 킵, 정남쪽으로 100스타디아정도 내려가면 큰 언덕 2개가 마주보고 있는 쌍봉바위가 하나 있을거다. 20명만 데리고 그 밑 냇가에 대기하도록 해."

"무슨 말씀이시냐니까요!"

답답해진 아메스가 카렐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언성을 높였다. 카렐이 그런 아메스의 팔을 거칠게 나꿔채 다룬에게 넘겼다.

"혹......안좋은 일이 있으면 자이센 가를 책임지셔야 할 몸입니다."

"설마......."

벌벌 떨고있는 아메스에게 조금은 억지스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카렐은 조페를 비롯한 4백여명의 가디언을 이끌고 남서쪽, 산악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백여명 정도의 근위대원들이 바위산 절벽 위에 서서 베흔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산 꼭대기는 마치 칼로 잘라낸 양 평평하게 다듬어진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 절벽 한귀퉁이에는 마치 혀를 내민 듯 한 형상의 넓적한 바위 한개가 아슬아슬한 형상으로 절벽에 걸려있었다.

버둥거리며 이곳까지 끌려온 페로는 발밑에 펼쳐진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군데군데 바위와 거친 나무들이 돋아나있는 그 절벽은 뒤로 약간 기울어있기는 했지만 장비가 없다면 걸어서 내려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험한 지형을 그리고 있었다.

"목이 마르신 모양인데......저 밑에 물 많습니다."

베흔이 까마득한 절벽 밑을 흐르는 강물을 가리키며 비웃듯 말을 건넸다.

"날......떨어뜨려 죽일건가?"

"글쎄요,"

베흔은 여전히 미소띤 얼굴로 절벽 귀퉁이의 마치 평상처럼 널찍한 바위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바위엔 꽤 오래된듯한 녹슨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었다.

"이 돌이 뭔지 아십니까?.......카렐 녀석 밥상이었죠......여기 엿새정도 묶어놓고 나서 던져주면 줘든지 게걸스럽게 처먹어댔는데......그 식성이 정말 혐오스럽기가 짝이없었죠. 물론, 때로는 그걸 구경하는것도 나름대로의 재미였지만......쯧쯧......지금 굶주린 카렐이 있었다면 아마 총리각하도 먹어치웠을겁니다."

"그래.......굶주린 카렐이 없어서 퍽이나 아쉽겠군."

페로가 이를 악물며 쏘아붙이자 베흔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굶주린 카렐은 없지만 딴놈은 있죠."

베흔이 가리킨 곳에는 한참 전부터 정신없이 철창을 공격하던 사나운 호랑이가 잔뜩 흥분한 듯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놈이 오고있습니다."

정찰병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쿠베가 고개를 숙여보이며 알리자 베흔이 기분이 꽤 좋은지 손뼉을 짝짝 치며 말했다.

"좋아좋아, 준비는 다 끝났군. 셈, 준비해. 큰 손님이 오시니 쇼를 시작해야겠다."

도열한 근위대원들이 모두 멀찍이로 물러났다. 페로는 베흔이 지금 상황에서 '큰 손님'이라 표현할 사람이 세상에 단 한사람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카인이 페로를 끌어다가 정상 중앙에 세워놓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에 바닥과 연결된 쇠사슬을 단단히 채웠다.

"냄새 좀 날겁니다."

카인이 들고온 큰 대야에는 비린내를 잔뜩 풍기는 선지피가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는 페로의 머리 위에 그 진득한 피를 홱 끼얹고는 자신도 멀찍이 떨어져서 섰다.

페로의 가슴 속에서는 카렐이 또다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 끔찍한 곳에 돌아왔다는 사실과, 그를 죽음으로 끌어들일 미끼가 바로 자신이라는 모순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큰 소리로 한 번 포효했다. 피를 뒤집어쓴 채 근위대들 중간에 호랑이밥으로 던져진 페로는 떨려오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보았다.

0